中/북경 답사 2차

뼈속까지 북경여행기 - 2일 자금성紫禁城10 (후삼궁後三宮·어화원御花园·신무문神武門)

同黎 2020. 8. 24. 19:43



이제 건청문을 통과한다


건청문 부터는 청나라 멸망 이후에는 한동안 청나라 소조정 소속이었기 때문에 현판이 한문과 만문이 병기되어 있다


건청문을 통과하면 보이는 후조의 모습


후조의 정전이라고 할 수 있는 건청궁이 나온다,



건청궁(乾清宫)은 명나라 때 처음 지어져 이름이 바뀌지 않은 몇 안되는 건물이다. 영락제부터 숭정제까지 명 14황제의 침전으로 사용되었고 이자성의 난 당시 불탔다가 재건되며 순치제와 강희제도 사용하였으나, 옹정제부터는 양심전이 황제의 거소가 되고 이곳은 일종의 편전으로 운영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가경제 때 불탄 것을 재건한 것이다


어로석


내부의 옥좌


정대광명이라는 편액은 순치제의 글씨로 강희제 때 황태자를 정했다가 난리가 나서 태자 제도가 사라진 후 옹정제 이후 황제는 저 편액 뒤에 후계자를 밀봉한 봉투에 써서 두었다가 승하 후 공개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밀건법이다


그러니 역사적 가치가 참으로 큰 건물이다


건물 앞의 사직강산금전


일종의 상징물


바로 뒤 교태전이 보인다


교태전(交泰殿) 명나라 때는 중원전이라고 했다가 청 때 바꾸었다. 본래 황후의 예전으로 탄신일 등에 내외명부의 하례를 받던 곳이다. 청나라 이후 이곳에 흠천감에서 올린 시계와 어보 25과를 보관하는 상징적 공간이 되었다


중화전과 똑같이 생겼다


현판


내부


천정


좌우로 동서양식 시계가 있고 25개의 어보가 배치되어 있다


무위라는 현판

건륭제 어필


물시계


태엽시계


전경


반대편


뒤편 마지막 건물인 곤녕궁


곤녕궁(坤寧宫) 역시 똑같은 이름이다. 다만 명 때는 황후의 침소로 중궁의 위상을 갖추었으나 청나라 때는 대체로 황후의 입김이 약해지기 때문에 그러한 위상이 없다. 특히 옹정제 이후로는 황제가 양심전으로 가기 때문에 황후 등도 동서육궁 중 한곳을 골라 처소로 삼았다.

내부를 절반으로 나누어 절반은 만주족 고유의 천신제사를 지내고 절반은 황제의 가례 당시 첫날밤을 치루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증서문


양상문


보화전의 어로석


이제 보화전을 지나 어화원으로 간다


어화원의 입구인 천일문


어화원(御花园)은 황실의 화원이지만 규모가 그렇게 크지는 않다. 여기에 20여동의 정자와 전각들이 흩어져있다. 또한 흠천상제 혹은 현무상제를 모시는 흠안전까지 있어 종교적 역할도 한다


정자


퇴수산


괴석을 모아 만든 가산이다


곳곳의 괴석들


좀 이런 걸 좋아한다


관통석도 많다


천추정인가 만춘정인가

쌍둥이 정자


가산 위의 정자


석문


양성재


2층 누각


흠안전

북방을 지키는 현무대제, 현천상제를 모시는 곳

북방에 대한 근심이 도교의 신으로 발한 곳이다


정자들


옆에서 본 흠안전


마침내 나가는 곳이다


신무문으로 통하는 문

연화문


고궁의 북쪽 끝 신무문이다


신무문

오문보다 작지만 그래도 명나라 때부터 이곳을 지켜온 문이다


체성에는 괄막양의 글씨인 고궁박물원 현판이 걸려 있다


여기서 경산이 보인다


신무문 현판


고궁박물원 현판

이곳으로도 입장은 된다


길고 긴 자금성 탐방은 끝났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경산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