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답사 기타

일본 국보 기행 - 3. 일본 근대화의 상징 군마현 토미오카제사장(富岡製糸場)

同黎 2019. 6. 4. 17:56

이번에 만나 볼 국보는 근대건축물이자 산업시설입니다. 한국은 일제강점기라는 어두운 시기에 주로 근대건축이 지어졌기 때문에 모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 문제 때문에 주로 종교시설이나 교육시설, 공공기관, 교통시설 등 한정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지정이 어렵기도 합니다. 반면 일본은 내부적으로 걸릴 것이 별로 없는지 근대건축물이나 미술품을 과감하게 지정하고 있습니다. 1954~55년 준공된 히로시마 세계평화기념성당이나 히로시마 평화기념자료관 같은 전후 건축을 비롯하여 댐, 공장, 학교, 개인 주택과 철도 차량과 선박까지 지정을 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한국도 근대유산 사적이라는 애매한 지정항목이나 등록문화재라는 불완전한 형태가 아니라 일본처럼 과감하게 국보나 보물로 지정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메이지 시대 토미오카 제사장을 소개하는 판화


각설하고 토미오카제사장(富岡製糸場)1872(메이지 5) 개업한 일본의 견직물 생산 공장입니다. 일본에서도 손꼽히는 근대 공장 중의 한곳으로 현재 메이지시대의 건축이 공장부터 사무실과 여공들의 기숙사까지 거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메이지시대 일본의 근대화와 경제성장을 이끌었던 견직물산업의 유산으로 인정받아 2014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이중 가장 핵심적인 건물인 실을 뽑아내던 조사소(繰糸所)와 누에를 기르며 보관하던 동·서치견소(置繭所)는 국보로 지정되었고 프랑스에서 근대 기술을 전수하기 위해 온 기술자들이 머물던 건물 3곳과 누에를 찌는 솥이 있는 증기부소(蒸気釜所), 여기에 물을 공급하던 철수조, 물을 흘려보내던 하수조는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그 외의 건물들과 기숙사들은 사적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습니다.


*조슈토미오카역의 시계. 누에고치 모양입니다.


*주변에도 이렇게 근대 건축물이 많습니다.


토미오카제사장은 군마현 토미오카시에 있습니다. 신칸센과 JR선이 연결되는 타카사키역에 가서 여기서 분기하는 소형 사철인 조신전철로 환승합니다. 이후 조슈토미오카역에 내리면 토미오카제사장이 근처입니다. 역에서 토미오카제사장까지는 약 1km 정도로 근처에 근대건물들이 산재해 있어 천천히 구경하며 걸어가도 되고, 시간이 맞다면 시에서 1시간에 1대 씩 무료로 운영하는 버스를 타고 가도 됩니다. 제사장 내부는 꽤 큰 편으로 현재 조사소와 동치견소의 내부가 공개중이며 나머지 건물은 외관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들기 때문에 넉넉하게 시간을 잡는 것이 좋습니다.


*대표적인 관영모범공장인 고베조선소. 카와사키 재벌의 소유였으나 폭격으로 파괴되고 전후 복구됩니다.


일본이 개항 한 이래 유럽과 수출한 것 중 중요한 원료는 실크의 재료가 되는 생사였습니다. 막 개항해 근대 산업을 받아들이던 일본 정부에서는 에도시대 여러 번들이 각자 운영하던 사업시설이나 조선소, 광산 등을 인수받아서 정부 주도의 공장으로 탈바꿈하고 서양의 기술자들을 받아들여 근대적 공장을 세웁니다. 이러한 공장을 관영모범공장이라고 하며 유신 직후의 혼란스러운 내전을 정리한 메이지 신정부는 군수·통신·조폐를 제외한 다수의 관영공장을 정리하여 민간에 불하하게 됩니다. 이렇게 불하한 공장들은 이후 일본 재벌의 기원이 되었고 미쓰이, 미쓰비시, 오쿠라 등이 바로 여기서 성장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토미오카 제사장은 미쓰이 재벌이 인수했으며 설립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제사공장으로 세워졌습니다.


*메이지시대 당시 주요 건조물 모형


생사를 비롯한 견직물 산업을 중의성을 깨달은 메이지 정부는 프랑스인 기술자를 고용하여 생사 건립이 용이한 여러 곳은 찾아보았습니다. 이후 1872년 누에가 살기 좋안 기후를 지닌 토미오카에 공장을 짓고 여공들을 모집합니다. 이때 여공이 되면 서양인들이 생피를 마신다는 소문이 돌아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공장 내에 여성교육을 위한 학교를 세우고 주 6, 8시간의 노동조간에 숙식비·의료비를 공장이 제공하고 서양 기술과 외국어 교육도 제시하면서 구 무사(士族) 출신의 여성들이 주로 지원하게 됩니다. 이후 여기서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나가노 등지로 이동해 지역에 제사공장을 세우는 역할도 하는 등 활약을 펼칩니다. 물론 지나치게 강한 규율이나 노동과 소음으로 인한 스트레스 등으로 계약기만만 채우고 그만두는 여성도 많았다고 합니다. 하여튼 초기의 관영 제사장은 프랑스에서 수입한 기계들을 개조하면서 기술을 도입하고 생산된 생사를 빈 만국박람회에 출품에 수상하며 리옹과 밀라노에 수출하는 등 소기의 성과를 거둡니다.


*토미오카 제사장에서는 이렇게 메이지시대 방식으로 실을 뽑는 모습을 재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관영공장으로 운영되면서 과거 봉건제의 잔재가 남아있어 효율적 생산이 되지 않거나 투입되는 재정의 규모를 정부에서 투입하기 어려운 문제 등이 생기자 공장을 민영화하자는 논의가 생기게 되었고 1890년대 다른 관영모범공장과 마찬가지고 민간에 매각되어 미쓰이 재벌이 운영하게 됩니다. 이후 토미오카 제사장은 하라 재벌, 타카쿠라 재벌에게 차례로 매각되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생사산업이 점차 사향산업이 되고 중국과 일본의 외교정상화로 중국산 생사가 수입되면서 1987년 타카쿠라 재벌은 토미오카 제사장을 폐업합니다. 그 동안 기계의 교체는 있었지만 메이지시대부터 세워진 초기 건물은 신기할 정도로 유지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공장을 운영한 기업의 원칙이 있었습니다.


*토미오카제사장 전경


타카쿠라 공업은 폐업 후에도 회사의 성장에 기여한 생사산업의 중요성과, 공장의 역사성에 주목해 팔지 않고, 빌려주지 않고, 철거하지 않는다라는 삼원칙을 세우고 연간 1억엔이 드는 관리비와 2천만엔의 재산세를 내며 유지했습니다. 그리고 건물은 메이지시대 이래 건축된 모습 그대로 내부는 폐업 당시를 기준으로 보존하면서 유지했습니다. 지자체와 시민단체도 제사장의 역사성에 주목해서 보존 모임과 학습 모임을 만들었고 문화재 지정을 추진했습니다. 결국 1995년부터 토미오카시와 타카쿠라 공업의 협상을 시작하였고 2003년에는 군마현지사의 후원까지 얻어 세계유산 등록을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타카쿠라 공업은 토지는 유상의 실비, 건물은 무상으로 시에 양도하게 됩니다. 일본 정부는 지자체와 기업의 이러한 노력해 부응하여 건물과 부지를 문화재로 지정하고 마이니치 신문은 기획기사를 통해 제사장의 가치를 대중에게 알렸습니다.

2013년 경제산업성·문화청과 지자체, 시민단체, 언론의 후원을 통해 일본 근대 유산으로는 처음으로 유네스코에게 그 가치를 인정받아 토미오카제사장과 그 관련 유적들이 세계유산에 등재되었습니다. 물론 이 등재 과정과 영향에 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토미오카제사장은 식민지배와는 별 관계가 없지만 이후 일본 근대 산업활동 전반을 동양의 산업혁명으로 신화화하는데 동원되기도 했습니다. 군함도 등 강제 징용 유적이 포함되며 한국에서 논란을 일으킨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유산의 세계유산 등재는 토미오카제사장의 등재에 힘입은 바가 큽니다. 근대 일본의 산업화가 세계사적 역사성을 인정받으면서 나머지 제철·제강·조선·석탄 산업을 묶어 세계유산 등재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근대 유산들의 파괴가 일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에서 기업과 지자체, 정부와 시민단체 및 언론까지 함께한 토미오카제사장의 세계유산 등재는 부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일본에서도 도시화와 난개발 과정에서 근대 유산이 파괴된 경우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미군정(GHQ) 본부로 사용된 다이이치 생명 본관이 대폭 개조된 것이 그 예입니다. 다행히 1960년대부터 정부와 지자체를 중심으로 주요 근대 유산을 지정하기 시작했고 1996년에는 우리보다 10년 정도 먼저 등록유형문화재 제도가 도입되며 더 적극적 보존이 진행됩니다. 일본의 주요 재벌들은 자신들의 본사, 공장, 주요 건조물을 보존해 기념관이나 미술관으로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 나아가 재벌이 주도하여 미술관을 설립하거나 기업의 도산이나 총수의 사망 등의 사건이 일어나면 수집품 전체를 기증하는 일도 많습니다.


*정문에서 보이는 동치견소


*동치견소 전경


*조사소 입구


*조사소 내부의 모습. 기계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다시 토미오카제사장 건물로 돌아오겠습니다. 현재 공개되는 건물은 국보로 지정된 3동의 건물 중 조사소와 동치견소 2동입니다. 나머지 건물들은 2015년부터 30년 계획으로 100억엔을 들여 복원 수리중입니다. 하지만 외관으로는 대부분의 건물이 관람 가능합니다. 정문을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건물은 동치견소로 누에를 기르고 보관하던 곳입니다. 현재는 제사장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각종 실크제품을 판매하고 또 메이지시대 방식으로 구에고치에서 실을 뽑는 모습을 당시 기계를 사용해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곳을 지나면 실을 뽑던 조사소가 나옵니다. 내부에는 폐업 당시에 사용하던 기계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습니다. 멈춰있는 거대한 기계장치들은 마치 신전에 들어온 것 같은 장엄한 기분마저 들게 합니다. 이 건물들은 모두 목조 골조에 벽돌로 지어진 건물로 건설 당시에는 얼마나 오래 갈지 프랑스인 설계자로 걱정했다지만 현재는 놀라울 정도로 그대로 남아 잇습니다.


*프랑스 기술자들이 살던 여공관. 이후 임원 숙소, 여공들의 식당 등으로 사용. 중요문화재


*여공들의 기숙사


*복원현장을 공개중인 서치견소


*공장의 굴뚝

*구에를 삶는 물을 보관하던 철수조 (중요문화재)


조사소 뒤편으로는 여공들이 사용하던 학교, 진료소와 기숙사 등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은 것은 십 수 동에 달하는 기숙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것입니다. 출입금 금지되고 있지만 1920~30년대에 세워진 목조 기숙사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토미오카 제사장의 옛 모습을 그대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500명의 여공들이 이곳에서 일하면서 생사를 생산했다고 합니다. 복원공사 중인 서치견소는 별도의 약간의 입장료를 받고 복원 현장을 공개하고 있습니다. 복원 현장을 공개하는 것은 일본에서는 흔한 일로 이를 하나의 관광상품화 시킨 일이 있습니다. 과거 히메지성 대천수각 공사가 대표적이죠. 그러나 이곳을 보아야 할 이유는 단순히 그뿐만이 아니라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굴뚝과 하수조, 그리고 증기부소와 철수조 등이 이곳에 몰려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공장의 中庭에 속하는 곳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토미오카역으로 이어지는 조신전철 연변에는 소위 코즈게 삼비(上野三碑)라고 불리는 7~8세기의 오래된 비석들이 서 있습니다. 이 지역은 당시 일본 정부의 지배가 안정적으로 통하는 동북쪽 끝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이 비석들은 성격을 달리하는 곳이기에 구체적으로 소개하지는 않지만 모두 특별사적으로 지정된 비석으로 비석의 갓 부분이 신라 비석과의 연관성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토미오카제사장과 함께 둘러보면 괜찮을 곳입니다. 하여튼 근대유산은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해야 하는가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곳이었습니다. 한번 우리도 가볼만 한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