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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기행 - 7. 나라현 고조시의 에이잔지(栄山寺) 팔각당

同黎 2019. 6. 11. 00:21

나라현에서 우리가 주로 찾는 곳은 북부의 나라시와 거기어 조금 내려간 중부의 사쿠라이·카시하라·아스카 정도입니다. 이곳에 아스카~나라시대부터 이어진 유물·유적이 많고 일본 고대사의 흔적이 강하게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라현 남부, 즉 기이반도에 내려가 미에현과 와카야마현 가운데 낀 거대한 산간지역은 좀처럼 갈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산속에는 벚꽃의 명소로 유명한 요시노를 비롯하여 많은 명소가 있습니다. 다만 오사카 기준으로 3~4시간이 걸리거나 그나마 열차시각표를 제대로 챙겨야 하는 나쁜 교통편이 발목을 잡을 뿐입니다. 오늘 가볼 것은 와카야마에서 요시노를 지나 나라로 향하는 좁은 협곡 사이에 있는 고조시입니다. 이곳은 산속이긴 하지만 흐르는 강이 와카야마, 나라, 오사카 남부를 이어주는 중요한 수로 역할을 하였고, 천황이 병립한 남북조시대에는 남조의 거점이 되기도 한 곳입니다.


*JR 고조역


고조시의 역은 JR 하나입니다. 오사카 텐노지역에서 출발하면 오지역에서 환승하거나 운이 좋으면 직결 열차를 타고 1시간 30분 정도 가면 고조역에 도착합니다. 또는 요시노를 보고 요시노구치역에서 킨테츠선에서 JR선으로 환승한 후 접근해도 괜찮습니다. 역에서 내리면 목적지인 에이잔지까지는 약 2.5km 정도되는데 버스는 하루에 1~2번으로 거의 기대하기 어렵고 절에서도 택시를 권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조금 가면 굽이치는 강 옆에 자라집은 에이잔지(栄山寺)에 도달합니다.

이 작은 절은 그러나 국보를 2개나 품고 있고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이곳은 일본 정계를 천년 가까이 지배했던 후지와라씨의 영지였습니다. 과거 나라현은 야마토(大和)라고 불렀습니다. 즉 나라현 지역은 일본 고대 야마토정권이 탄생한 곳으로 이곳의 지명은 곳 일본 자체를 뜻할 정도로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리고 야마토 지역은 고대~중세 후지와라씨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기도 합니다. 일본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성장한 후지와라씨는 나라시대까지 수도도 자신들의 영향력이 있는 곳에 삼았습니다.


*에이잔지의 개창자인 후지와라노 무치마루 초상


후지와라씨(藤原氏)는 본래 나카토미씨(中臣氏) 불교에 맞서 일본 전통 신앙을 지키려했던 신관 집안이라고 전해옵니다. 일본의 불교 전래는 신라와 마찬가지로 토착 신앙 세력과의 격렬한 대립을 불러왔는데 일본에서는 아예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쇼토쿠태자(聖德太子) 소가씨(蘇我氏)는 불교를 적극 수입하려 한 반면, 모노노베씨(物部氏) 등은 신관 집안으로 이에 반대했는데 쇼토쿠태자는 소가씨와 함께 모노노베씨를 전쟁에서 이기게 됩니다. 모노노베의 편이었던 나카토미씨는 한참 미관말직을 하다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皇子)의 스승이 되면서 신세가 바뀝니다.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는 후일 텐지천황(天智天皇)과 함께 소가씨를 멸명시키고 실권을 지며(을사의 변乙巳) 다이카개신(大化改新)이라는 개혁 작업을 주도합니다. 그 공으로 카마타리는 후지와라라는 성씨를 하사받아 후지와라씨의 조상이 됩니다. 간혹 후지와라씨를 백제의 후손으로 주장하는 분도 계신데 정황상 이들이 한반도 도래인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신관집안에서 시작한 후지와라씨였지만 이후 불교 신앙에는 열심이었습니다. 후지와라노 카마타리의 장남은 출가해 승려가 되었고 차남인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는 우대신에 올라 국정을 총괄하고 일본서기집필을 주도해 일본이라는 나라의 기틀을 닦으면서 딸 둘을 각각 몬무천황(文武天皇)과 그 아들 쇼무천황(聖武天皇)에게 시집보내며 대대로 황후 가문이 되게 됩니다. 에이잔지는 그러한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장남인 후지와라노 무치마루(藤原武智麻呂)가 지은 사찰입니다.


*에이잔지 입구의 돌담길


*칠층석탑. 중요문화재


에이잔지가 위치한 땅은 과거 후지와라노 무치마루가 운영하던 장원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집니다. 불교 신앙이 깊었던 무치마루는 이곳이 절을 지었고, 이후 그가 죽자 무치마루의 장남인 후지와라노 나카마루(藤原仲麻呂)가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해 지금의 팔각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나카마루라는 인물은 귀족의 영화와 몰락을 모두 겪었고 또 발해와 친하게 지내면서 신라 침공 계획을 짜기도 했던 재미있는 인물입니댜. 그러나 이 인물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너무 이야기가 길어지니 생략하겠습니다. 하여튼 에이잔지는 가마쿠라시대까지는 대귀족 후지와라씨의 후원을 받으며 매우 번성했던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후 남북조의 항쟁을 겪으며 남조의 행궁이 되기도 하였다가 전국시대 말기에 팔간당을 남기고 거의 다 소실되었습니다. 이후 재건되어 지금에 이르지만 에도시대 초기에는 일시 거주승이 없는 폐사가 되기도 하였다가 지금의 작은 사찰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에이잔지 팔각당. 국보


*에이잔지 팔각당 내부


에이잔지의 국보 팔각당은 760~764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건물로, 나라시대 건축물로는 나라시내와 호류지를 제외하고 현존하는 몇 안되는 건물입니다. 건물이 지어졌다는 기록과 정창원 문서에서 나온 기록을 종합하여 8세기 중엽에 지어진 건물이 확실하며 호류지(法隆寺)의 몽전(夢殿)과 함께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팔각원당 건축물입니다. 몽전이 더 유명하기는 하지만 가마쿠라시대의 지붕 개조가 있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건축학적으로 더 의미있는 건물은 에이잔지 팔각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팔각당의 처마


팔각원당은 한국에서도 제사의 용도로 추정되는 곳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역시 팔각원당은 제사나 추모의 용도로 세워진 것 같습니다. 호류지 몽전은 쇼토쿠태자의 추모 공간이었고, 교토 고류지(広隆寺)의 계궁원 본당(桂宮院本堂) 역시 이를 본딴 건물입니다. 지금은 불상을 모시고 있는 나라 고후쿠지(興福寺)의 북원당과 남원당 역시 본래는 조상에 대한 추모의 의미로 세웠다가 나중에 불당으로 전용된 사례입니다. 에이잔지 팔각당 역시 조상의 추모의 의미가 들어있습니다. 팔각당 안에는 많이 훼손되긴 했지만 8세기의 벽화까지 남아 있어 그 가치를 더하고 있습니다. 다만 내부 불상들은 원래 배치가 아니고 이곳저곳 흩어져 있던 것을 모아 놓은 것이라서 아쉽습니다.



*국보 범종


사찰 입구의 콘크리트 종루에는 국보로 지정된 범종이 모셔져 있습니다. 917년이라는 명문이 선명한 전형적인 일본의 종으로 보통 일본종보다는 크기가 큽니다. 아직도 종도리를 제대로 내고 있으며 명문을 아예 틀에서 새겨 조주한 당대 최고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종입니다. 헤이안시대 일본종의 완성품으로 평가받으며 교토 진고지(神護寺), 우지 뵤도인(平等院) 종과 함께 헤이안 3대 종으로 이름이 높습니다. 다만 사찰이 가난해서 그런지 국보 치고는 제대로 관리를 못 받고 있는 것 같아 아쉽기는 합니다.


*에이산지 본당. 중요문화재


*본존 약사여래상. 중요문화재



*십이신장상. 중요문화재


에이잔지의 본당은 16세기에 재건된 건물로 안에는 약사여래와 일광·월광보살과 십이신장을 모시고 있습니다. 불상들은 모두 15세기의 작품으로 건물과 불상이 공히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무로마치시대는 불상조각의 하향기로 평가하지만 그래도 나라지역에는 이처럼 부드러운 인상의 아름다운 불상들이 만들어지곤 했습니다. 다만 본존상은 춘추 특별공개가 아니면 공개하지 않는 비불이기 때문에 시기를 잘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석등. 중요문화재


본당 밖에는 석등과 석탑이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석등롱(石灯籠)이라고 부르는 석등은 대접이 그리 좋지 않습니다. 본래 불전 앞 하나만 세우던 불교식 석등 배치가 있었으나 신사의 상야등(常夜燈)은 신사의 입구에서부터 양 옆으로 쭉 세워놓는데 이러한 신사식 배치가 이미 10세기 이후부터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지정도 별로 되어 있지 않은데 이 석등은 1284년이라는 명문이 있어 중요문화재가 되었습니다. 일본에서 흔치 않은 칠층석탑도 있습니다. 응회암으로 만든 석탑으로 일본은 대부분 석탑을 무른 재질로 만들기 때문에 헤이안시대 이전으로 올라가는 탑이 거의 없습니다. 이 탑은 헤이안시대 후기 즉 11~12세기로 작품으로 추정되는 탑으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었습니다. 다만 풍화가 많이 진행되어 보존 상태가 좋지는 않습니다.


*에이잔지 앞의 요시노가와


사찰 바로 앞에는 요시노에서 흘러나오는 요시노가와가 흘러가면서 절경을 그립니다. 다만 택시를 다시 부르기는 매우 어려워 우리도 지나가던 라이딩족의 전화를 빌려 택시를 불렀습니다. 이곳은 그나마 요시노와 묶어서 가기에 괜찮습니다. 다만 요시노가 매우 크고 사찰과 신사가 산재되어 있으므로 하루를 온전히 써야 하기에 초행부터 요시노와 묶기는 어렵습니다. 일본에서도 8세기 이전 건물은 손에 꼽으니 꼭 가볼만한 곳이기는 합니다만 여러모로 어려운 곳입니다. 요시노에 두 번째 정도 간다면 함께 돌아본만한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