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제

신공황후를 찾아서

同黎 2020. 2. 8. 16:21

규슈국립박물관 

후쿠오카지역의 전통 행사 마츠리에 쓰이는 거대한 장식 수레

오랫동안 일본을 다니면서 꼭 찾아다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일본 임나일본부의 주인공인 신공황후입니다.
일본서기에 보면 신공황후는 백제를 침범한 신라와 가야를 바다를 건너 격퇴하고 그곳에 일종의 식민지를 건설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지금이야 한일 양국 역사학계에서 모두 일본서기의 조작으로 치부하는 사실이지만 일본에는 의외로 신공황후를 신으로 모시는 곳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신공황후에 대한 일본인들의 신앙은 적어도 제국주의시대 이전까지는 삼한 정벌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임나일본부 같은 것도 오래도록 잊혀져 있었던 것이고 단지 아주 옛날 우리를 지켜줬던 여신, 여걸 정도로 인식했던 것이죠. 무엇보다도 신공황후는 바다를 지켜주는 신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시모노세키에 있는 조선통신사 상륙기념비

당시 한일의원연맹 회장인 김종필씨의 휘호입니다.

신공황후에 대한 신앙을 따라가보면 그것이 정확히 바닷길과 일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를 신으로 모시는 주요한 신사는 후쿠오카-시모노세키-야마구치-히로시마-고베-오사카를 따라 있으며 바로 한반도에서 일본의 교토로 통하는 바닷길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즉 규슈를 통해 입항한 이들이 일본 본섬과 규슈, 시코쿠가 이루는 내해인 세토내해를 따라 오사카로 배틀 타고 이동하는 경로죠. 이 무역로를 따라 신공황후가 바다와 항해의 신으로 섬겨졌다는 것은 신공황후를 찾아가면 바로 고대 한반도인들의 일본 활동을 그대로 찾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시모노세키시의 스미요시신사(住吉神社) 국보 본전


신공황후에 대해서 한국에는 대부분 임나일본부에 대한 이야기만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신공황후에 대한 첫 기록인 고사기와 일본서기를 살펴보면 매우 기이한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자세한 내막까지 알려진 경우는 별로 없기에 여기서 간단하게 풀어보려 합니다.

신공황후는 기록상 14대 천황인 주아이천황의 부인이며 9대 카이카천황의 후손입니다. 모계로 따지면 아메노히보코라는 신의 후손이 되는데 이 아메노히보코라는 인물부터가 매우 흥미롭습니다. 기록에 따르는 아메노히보코는 한국어로 천일창이라고 하는 사로국(신라)의 후손입니다. 기록에 따르며 11대 스이진천황 당시 일본으로 귀화했으며 본래 사로국의 왕위 후계자였지만 일본 천황에게 감회되어 왕위를 동생에게 넘기고 귀화했다고 합니다. 이후 천황에게 교토 북쪽의 지방인 지금의 시가현, 후쿠이현 츠루가시, 효고현 북부, 즉 지금 우리의 동해와 면하는 지역을 영지로 받아 정착했다고 합니다. 실제 신라의 왕족인지는 불분명하지만 현재 고고학적 성과로 볼때 실제 신라인들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살았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신공황후는 주아이천황의 2번째 부인입니다. 주아이천황은 12대 케이코천황의 태자이자 일본의 전설적 무장인 야마토 타케루(일본무존日本武尊)의 아들로 지금의 동일본 지역을 점령했다는 인물입니다. 이름에서도 드러나지만 일본 제일의 무사로 유명합니다.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주아이천황을 일본의 서남부 즉 규슈지방과 지금의 야마구치현을 정벌합니다. 흔히 일본인은 단일민족이라고 하지만 기록상 확인되는 민족은 여러민족 입니다. 이들 중 아마 오키나와 및 대만 원주민과 비슷한 민족이라 생각되는 하야토(準人)라는 민족집단이 있는데, 주아이천황은 지금의 시모노세키 지역에 자리잡고 이들을 정벌합니다.

 하야토 정벌이 일단락되자 지금의 후쿠오카에 자리잡은 주아이천황은 계속하여 규슈 남부로 진격해 하야토와 비슷한 민족집단인 쿠마소를 정벌하려고 합니다. 이때 신공황후는 이미 천황에 준하는 격을 지닌 인물로, 무녀 겸 무장으로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신기한 것은 황후가 천황과 같은 장소에 머무른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주아이천황은 규슈 남쪽으로 더 전진하길 원하지만 신공황후는 이에 반대하며 바다를 건너 신라와 가야 등을 쳐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두 사람의 이야기가 엇갈리자 신공황후는 신탁을 받자고 합니다.

신공황후는 신들리 상태에서 쿠마소 따위를 공격하도 의미가 없으니 바다를 건너 금은보화가 있는 신라를 공격하면 싸이지 않고도 대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탁을 받습니다. 그러나 주아이천황은 이를 빋지 않고 오히려 이것이 신공황후가 가짜로 연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합니다. 그러나 신공황후에게 2번째 신탁이 내려지는데, 만약 천황이 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요절하고 현재 신공황후가 임신한 아이가 새로운 천황이 될것이라는 요지의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주아이천황은 신벌을 받아 갑작스러운 병으로 죽어버리고 결국 신공황후가 섭정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주도로 신라 정벌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아이천황의 죽음은 비밀이 되며 염습 후 시모노세키로 옮겨져 임시로 안치됩니다.

신공황후 등 다섯 신을 모신 스미요시신사의 본전

바다를 지키는 스미요시신과 그 신을 모셔 바다를 건넌 신공황후, 신공황후의 아들 오진천황, 신공황후의 심복 타케노우치 스쿠네, 신라정벌 당시 뱃머리를 지켰다는 타케미나카타의 다섯신입니다.

정권을 잡은 신공황후는 다시 신탁을 받아 온갖 신을 불러냅니다. 스미요시신은 본래 3명의 신으로 바다의 3곳(깊은 곳, 얕은 곳, 중간 곳)을 지키는 신인데 하나의 신으로 섬겨집니다. 그리고 힘의 신인 타케미나카타라는 신은 신공황후가 탄 뱃머리를 지키며 풍랑으로부터 배를 지켰습니다. 그 밖에도 온갖 신들이 나타나 신공황후의 일행을 보호했다고 합니다.

특히 신공황후는 이때 임신 중이었습니다. 주아이천황의 막내 아들이자 뒤에 15대 오진천황으로 즉의하는 아이였으나 신공황후는 안정적 신라정벌을 위해 돌로 산도를 막고 출산을 1년 이상 지연시킵니다. 이것도 매우 이상한데, 사실이라면 오진천황은 주아이천황의 친아들이 아니라는 설이 많으며 신공황후의 총신으로 그녀와 함께 신라 정벌을 강하게 추진하던 타케노우치 스쿠네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실제로 각종 전승에는 신공황후의 아들을 타케노우치 스쿠네가 받아드는 모습의 그림도 많습니다.

하여튼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을 성공적으로 끝나 그에 겁먹은 고구려와 백제도 항복했다고 전해집니다. 물론 근거는 없습니다. 그리고 신공황후는 돌아오는 길에 후쿠오카에서 아들 오진천황을 출산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하나 더 일어납니다. 뒤늦게 아버지의 죽음과 신공황후의 신탁을 알게 된 주아이천황의 두 아들이 아버지의 장례를 치룬다는 명목으로 신공황후의 배가 일본 본토에 상륙하는 곳 지금의 효고현 아카시시에 가짜 무덤을 만들어놓고 신공황후와 아기 오진천황을 제거하기로 한것입니다. 그러나 이 반역 음모는 사전에 들통나서 두 황자는 제거되고 신공황후-오진천황으로 이어지는 후계구도가 완성됩니다.

스미요시 삼신과 신공황후를 모시는 오사카 스미요시대사의 본전 국보


오진천황은 이후 일본 무가의 신으로 추앙받습니다. 어머니 신공황후는 오진천황과 함께 하치만신으로 섬겨지고 특히 전쟁의 신으로 온갖 무사들의 신앙을 받습니다. 현재 일본에서 가장 많은 신사인 하치만신사의 주신이 바로 이 두 사람입니다.

물론 이 오진천황과 신공황후가 실존인물일리는 없습니다. 현재 일본서기의 기록은 대부분 백제의 기록을 많이 참고했으며 신공황후의 신라 정벌 이야기는 오히려 신라에 대한 공포심에서 만들어졌을 공산이 큽니다.

일본서기가 서술되는 시기는 백제가 멸망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이후입니다. 백제가 멸망하게 되자 당시 여성 천황이었던 사이메이천황은 68세의 노구를 이끌고 후일 텐지천황이 되는 자신의 아들을 데리고 직접 규슈까지 이동해 거기에 행궁을 짓고 백제부흥운동을 지원합니다. 무려 4만 2천명이 넘는 일본군이 백제에 왔다고 하니 일본으로서는 국력을 총동원한 작전이었습니다. 그리고 백제의 잔군과 일본군이 나당연합군과 합전을 벌이는 백강 전투에서 백제-일본 연합군은 1만명 이상이 전사하는 패배를 겪고 한반도에서 철수합니다.

이때 일본은 신라가 당과 함께 일본 본토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입니다. 백제 멸망 이후 일본으로 건너온 유민들의 힘을 빌어 대마노와 규슈 일대에 이른바 조선식 산성이라고 불리는 한반도식 산성을 마구 지었습니다. 대마도의 금전성, 후쿠오카의 수성과 대야성 등이 그 대표적인 곳입니다. 이러한 공포는 이후 신라 및 당과 정상적인 국교를 재개하면서 사라지지만 그 영향이 가시지 않은 일본서기 서술 당시에는 사이메이천황의 백제 원조와 패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그녀를 모델로 신공황후를 창조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오진천황과 신공황후를 모신 우사신궁


그러나 일본서기가 만든 강력한 이미지는 의외로 일본사의 큰 일(?)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48대 천황은 쇼토쿠천황은 여성 천황으로 불교에 심취했습니다. 오랫동안 정치적 격변을 겪으로면서 그녀는 도쿄(道鏡)라는 승려에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후 2번이나 큰 반란을 겪게 되자 더욱 그 믿음은 강력해졌고 이후 도쿄에게 천황직을 넘기려는 시도까지 하게됩니다.

도쿄는 천황의 작위를 받기 위해 신탁을 꾸미려고 했고, 이에 호응하여 당시 규슈를 책임지던 기관인 다자이후는 오진천황과 신공황후를 모시는 우사신궁에서 도쿄에서 양위하라는 신탁을 무녀가 받았다고 거짓으로 보고합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신탁의 사실 여부를 알기 위해 와케노 키요마로라는 귀족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우사신궁의 신관들을 오히려 그 신탁을 거짓이며 오히려 천황의 자리는 반드시 황족에게만 이어져야 한다라는 계시가 내려왔다고 합니다. 기록에 따르면 이때 오진천황의 모습이 무려 9미터가 넘는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결국 이 사건으로 도쿄의 음모는 무위로 돌아가고 여성 천황에 대한 금기가 생겨 무려 천년 동안 여성 천황이 탄생하지 않게됩니다.


당나라에서 유행하던 석당을 따라한 후쿠오카 천복사의 다라니 석당

규슈국립박물관 소장

이후 신공황후 신앙이 다시 부흥하는 시대는 외부의 적이 침입햇을 때입니다. 원나라와 고려 연합군의 일본 공격, 조선 세종의 대마도 정벌 등의 일이 일어날 때 신공황후가 재소환되고 이후 제국주의 시대 임나일본부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활용됩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신공황후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습니다.

한때 서일본과 규슈를 호령하던 오우치씨 세력이 세운 무로코지 오층목탑


한반도와 관계를 맺고 있는 세력이 모두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14~15세기 히로시마부터 후쿠오카까지 넓은 영역을 다스렸던 오우치씨는 자신들이 백제 의자왕의 후손이라고 하며 조선에 사신을 보여 적극적으로 무역을 했습니다. 조선 역시 이들의 족보를 찾아주는 등 이들과 협력하며 오우치씨에게 왜구의 단속을 부탁했고 100년 간 이러한 공생관계가 지속되기도 했습니다. 


아베 신조의 역대 최장수 총리 재임을 기념하는 야마구치현청의 현수막


취재를 위해 찾았던 야마구치현의 구청사에는 이곳을 지역구로 두고 있는 아베 신조의 역대 최장 총리 재임을 기념하는 현수막이 달려있고 무려 이토 히로부미부터 아베 신조까지 야마구치가 배출한 역대 총리들의 특별전까지 열리고 있어 씁쓸함을 더했습니다. 한일관계가 늘 이렇던 것이 아닐텐데 일본의 내부적 정세를 위해 이웃국가를 이용하며 과거의 오지 않을 영광으로 국민들의 현혹하는 모습이 참 안타깝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