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제

나가사키에 다녀와서

同黎 2020. 2. 8. 16:20

나가사키에 다녀왔습니다.

일본 천주교사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천주교 나가사키 대교구를 취재다녀왔습니다.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습니다. 
한국인 여행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만석이었던 인천발 후쿠오카행 비행기는 만석이 아니고
그나마 절반은 한국을 오가는 일본인 관광객이 차지했습니다.
한국인 관광객은 찾아보기 힘들고 중국인이 대부분입니다. 한국인이 있어도 서로 외면하기 바쁩니다.

나가사키는 부산이나 여수처럼 산과 언덕 사이에 지어진 도시입니다.

도시 중앙에는 니시자카라고 하는 언덕이 있습니다.
이 언덕은 일본 최초의 천주교 순교자 26명인 순교한 장소입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주교 확산을 막기 위해 시범조로 26명을 이곳에서 십자가형에 처합니다.
이후 도쿠가와 정권은 천주교를 정면 금지하고 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선교사가 끊긴 250년 동안
자신의 신앙을 지켜가며 숨어 살다가 일본의 개항 이후 다시 천주교로 원복합니다.
이후 니시자카 언덕에는 26명의 최초의 순교자를 위한 일본 26성인 기념관이 지어집니다.

일본인으로 최초로 순교한 성 바오로 미키의 상입니다.

일본의 기독교는 천주교와 개신교를 막론하고 제국주의시대 신사참배를 거부하였고, 2차 대전 당시 대부분의 외국의 사제가 추방되어 지금도 인구의 1%만을 차지할 정도로 소수입니다.
그중 절반인 약 50만명이 천주교 신자이고, 그 절반 정도교 나가사키 주변에 살고 있습니다.
일본에서 우익 성향이 가장 강한 규슈지방이지만 나가사키는 유독 반전, 호헌 성향이 강한 도시입니다.
일본 천주교는 강력한 반전, 평화의 보루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26성인 기념관에는 최근 다른 188명과 함께 성인 직전인 복자의 반열에 오른 조선인의 초상도 있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포로로 끌려갔다가 천주교 신도가 되고 이후 순교한 사람들입니다.
역사란 이렇게 아이러니합니다.

숙소인 나가사키 가톨릭 센터에서 찍은 우라카미 천주교회입니다.

나가사키 원폭 당시 폭심지 바로 옆이었던 까닭에 당시 미사를 준비하던 사제와 신도들 수십명이 말 그대로 증발했습니다.
이후 나가사키와 일본의 천주교 신자들은 원폭을 일본의 전쟁에 대한 징벌로, 우라카미 천주교회의 피해를 징벌에 대한 희생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같은 원폭지라도 히로시마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입니다.

새벽에 우라카미 성당에서 미사를 봅니다.

성당 내부에는 원폭 당시 모두 타버리고 두상만 남은 성모상이 모셔져 있습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의 평화기념관에는 원폭 당시 외벽만 남았던 교회의 모습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발걸음을 나가사키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시마바라 반도의 최남단 하라성으로 향합니다.

이곳은 에도막부의 탄압에 맞서 최후의 결전을 버린 천주교도들이 일으킨 시마바라의 난이 일어난 곳입니다.
전국에서 모신 천주교도와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1차 진압군을 전멸시키자 이에 놀란 막부는 12만명의 진압군을 보냅니다.
이들은 시마바라 반도의 남쪽으로 폐기된 성이었던 하라성에 모여 수개월간 농성을 합니다.
그리고 3만 7천명의 농성군은 마지막 순간 내통자 1명을 제외하고 전원 순교합니다
지금 성터에는 바다를 바라보는 십자가만이 이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죽음 이후에도 수천명의 신자가 잠복 크리스천으로 남아 신앙을 지켰습니다.

일본의 개항 이후 나가사키에 다시 세워진 천주당을 보고 4천명에 가까운 잠복 크리스천들이 다시 나타나 신앙을 되찾았지만 아직 외국인의 신앙만 허용되었던 시점에서 이들은 모두 필리핀으로 추방당했다가 30년후 1/4의 인원이 죽은 후에 돌아옵니다. 이들이 집중적으로 살던 우라카미 마을의 촌장의 집터에 세워진 것이 원폭으로 파괴된 우라카미 천주교회입니다.
지금은 하라성 터에 누가 가져다 놓았는지 모른 선교사와 시마바라 난의 대장인 아마쿠사 시로, 그리고 그 어머니의 석상이 바다를 바라보고 서 있습니다.

나가사키 시민단체가 운영하는 자료관입니다.

아소, 미쓰이, 미츠비시, 스미토모 등 일제시대 조선인 강제징용자들을 기억하자는 의미에서 당시의 탄광을 재현했습니다.
한 구석에는 조선국독립 이라는 당시 조선인들이 새겨놓았던 낙서가 재현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양심있는 이들도 이러는 마당에 한국에서 오히려 일본의 강제징용과 '위안부'를 자발적이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있으니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