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제

공허했던 사나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同黎 2020. 2. 8. 16:26

히데요시의 정실 부인이 모시던 그의 초상화. 중요문화재


올해 마지막 밤입니다. 관례에 따라 화로를 봉하고 하루 차를 쉬어가려고 합니다. 제석에는 화로를 닫고 새해 원단에 처음 물을 끓이는 初釜를 기다리며 오늘은 쓰던 원고의 거의 마지막을 다뤄보려고 합니다.
일본의 다인들은 대부분 이상하리마치 불행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다성 센노 리큐는 히데요시의 명을 거역하여 강제로 할복을 당했으며 그의 제자들 역시 대부분 불행한 생을 살았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동생으로 승려가 되어 히데요시의 의심을 피했던 오다 우라쿠사이,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숨어 살다가 그의 사후 자신의 이름을 똥을 뜻하는 도훈으로 바꾸고 히데요시 밑에 살아남은 아라키 도훈, 스승 리큐의 뒤를 잇지만 도요토미가를 도왔다는 의심을 사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처형된 후루타 오리베 등등...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나왔으나 한두명을 빼고는 불행한 삶을 살다 갔고 에도막부가 안정된 이후에나 다인들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에도막부 이전 일본을 통일했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말 소설같은 인생을 살다 갔습니다. 바늘을 팔던 떠돌이 장사꾼에서 오다 노부나가의 심복을 거쳐 일본을 통일하고 조선을 침략하며 중국과 인도까지 진출하겠다는 꿈을 꾸었지만 결국 부인들의 다툼과 자식에 대한 의문 때문에 걱정 속에 죽어간 허약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한편 그의 유산은 일본에 자리잡아 절대 적지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모신 교토 도요쿠니 신사의 정문. 국보. 본래 히데요시가 살던 후시미성의 정문이었다가 해체되어 이에야스를 모신 신사의 문이 되는 등 많은 사연을 담고 있습니다.


히데요시는 본래 성이 없습니다. 심지어 친모는 알지만 친부를 누군지 모릅니다. 단순한 기록의 미비가 아니라 정말 몰랐다고 합니다. 바늘장사를 하던 히데요시는 일솜씨가 뛰어나서 18세에 오다 노부나가의 하인이 되어 건축 등 실무를 담당하다가 무사로써의 재주를 인정받아 무사로 승격되어 오다가문의 가신이 됩니다. 이후 각종 전투에서 승리하며 오다 노부나가 아래에서의 세력을 키우다가 갑작스럽게 일어난 배신인 혼노지의 변으로 노부나가가 죽자 잽싸게 정권을 탈취하여 마침내 일본의 최고지도자가 됩니다. 그의 관직은 전통적으로 5개 성씨의 귀족만 할 수 있던 일종의 섭정인 관백에까지 이르렀고 일본의 모든 무사가 그에게 복종했습니다.

교토 서본원사의 당문(唐門). 국보. 본래 히데요시가 거주하던 후시미성 저택의 문이라고 전합니다.


그는 성을 만들어 스스로 키노시타(木下)씨를 칭하다가 이후 하시바(羽柴)를 거쳐 도요토미(豊臣)씨를 칭합니다. 백성 출신이었던 그는 출생에 열등감을 느껴 스스로 귀족의 풍류를 즐기려고 하고 극히 화려한 건축과 예술을 후원합니다. 덕분에 오랜 내전으로 인해 후원자를 얻지 못한 예술가들이 히데요시에게 쏠렸고 그 결과 전국의 예술가가 그의 밑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이 시기의 예술을 특별히 모모야마문화(桃山文化)라고 부릅니다. 모모야마는 교토 남쪽 히데요시가 자신의 성으로 지은 후시미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으로 후시미성이 모모야마성으로도 불린 것에서 따온 겁니다. 오랜 전국시대 내전이 끝나고 마침내 일본의 귀족문화와 멀리 스페인, 포르투갈에서 건너온 유럽문화, 다도와 같은 선(禪)문화 까지 어우러진 독특한 문화가 꽃피게 되는 것입니다.
 

교토 서본원사의 대서원 내부. 국보. 히데요시가 살던 후시미성의 저택 일부를 이축한 것


후시미성은 우리와도 인연이 깊습니다. 히데요시는 임진왜란의 전황을 제대로 보고받지 못하고 있었고 어느 정도의 성과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새로 지어진 후시미성은 히데요시가 요구한 명나라 공주와의 혼인 및 조선의 항복사신 맞이를 염두에 두어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히데요시가 후시미성에서 맞이한 것은 그가 문맹이라는 것을 이용한 일본측의 고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및 명나라 심유경 등의 작당모의로 만든 가짜 명나라 국서였습니다. 진노한 히데요시가 재차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바로 정유재란입니다. 

교토 서본원사 대서원의 내부. 가장 고귀한 인물(황제)을 뜻하는 봉황이 그려진 모습이 보입니다.


일설에 따르면 과연 히데요시가 국서 조작 사건을 몰랐겠느냐는 추측도 있습니다. 마무리 문맹이라도 그는 노련한 정치가였고, 그의 수족이 되어 정보를 수집하는 인물도 많았습니다. <황금태합>이라는 히데요시의 심리를 추적한 역사서에는 정유재란의 원인 중 하나로 전쟁 중 있었던 일본의 교토 대지진을 꼽습니다. 이 초대형 지진으로 후시미성의 상당부분이 파괴되었는데 그중에는 다다미 천장 규모(약 500평)의 거대한 마루가 있는 건물이 있었습니다. 히데요시는 이곳에서 조선의 항복을 목표로 했는데 지진으로 인해 성이 무너지고 이 성에서 사신들을 대접하게 되자 참지 못하고 재차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후시미성에 있던 히데요시의 다실로 교토 서본원사 정원에 이축한 비운각. 국보


어떤 것이 과연 맞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임진왜란 후반 정도에 가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쳤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본래 아이를 낳지 못하던 가가 환갑이 넘어 갑작스레 아들을 나으며 비정상적인 일들을 반복합니다. 본래 후계자로 생각한 조카이자 양자 히데츠구를 악마로 몰아 죽이고 그가 살던 집까지 완전히 헐어버립니다. 급기야 당시 많은 영주들이 형식적으로 바쳤던 히데츠쿠의 처첩과 간난 아이들까지 몰상시키고 무덤을 금지하고 시체를 모아 놓고 축색총이라고 이름붙입니다. 이런 잔혹한 행위가 많은 무사들을 그에게서 등돌리게 합니다.

죽기직전 불과 5살이었던 아들 히데요리가 걱정되어 도쿠가와 이에야스 등 주요 무사들을 불러 놓고 죽기 직전 맹세서를 받아내지만 그의 사후 이에야스가 권력을 쥐고 결국 히데요시의 정실인 네네의 암묵적 지지 하에 이에야스의 시대가 열립니다. 참고로 히데요시가 늘그막에 아들을 나은 것을 보고 그 아들이 히데요시의 친자가 아니라는 소문이 당시에는 매우 횡횡했습니다. 함부로 말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이야기는 일본 전국에 널리 퍼져있었고, 히데요시의 정실로 무사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네네가 의붓아들 히데요리가 아닌 이에야스를 선택한 이유로 거론되기도 합니다. 
히데요리가 오사카성에서 자살한 후 도요토미씨는 한사람도 남지 않고 도륙되었으며 히데요시의 이름도 금기시 되었습니다. 그의 무덤을 파헤쳐져 산 아래로 끌어내려져 작은 비석아래 모셔지고 마총(馬塚)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그를 모신 신사는 모두 불태워지고 그가 살던 후시미성은 돌담 하나 없이 해체되어 주요 건물은 전국에 분할, 이축되었습니다. 그래서 현재 히데요시가 생활하던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자수성가의 대명사임과 동시에 제행무상의 대표적 사례로 봅니다.

교토시의 의뢰로 복원된 히데요시의 황금의 다실

히데요시의 다실로 유명한 것은 바로 조립식 다실인 황금의 다실입니다. 나무판을 이용해 전체를 분할, 이동 가능하게 만들고 전체에 금을 씌운 이 화려한 다실은 히데요시가 천황을 모시고 다회를 열 때 사용했다고 합니다. 내부의 다도구는 모두 순금으로 만들어졌는데, 현재는 소실되고 그림만 남아 있는 것을 2000년 교토시에서 복원했습니다. 
물을 끓이는 솥이나 다완 등이 모두 순금이었으며 바닥과 창문에는 당시 스페인 등에서 수입된 천인 비로도를 깔알습니다. 이 화려한 다실은 당시에도 충격이었으며 다회 이후 잠시 공개되었을 때 엄청난 구경꾼이 몰렸다고 합니다. 보여주고 뽐내길 좋아했던 히데요시가 좋아할만한 이벤트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현편으로 황금의 다실을 보면 이것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 하는 생각이 됩니다.

히데요시의 삶은 공허와 결여를 매우기 위한 노력의 연속이었고 그것이 결국 임진왜란이라는 헛된 꿈으로 분출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리고 그 예술적 대립은 보여준 것은 리큐의 할복이었습니다.

황금 다실의 내부

보기만 해도 눈이 아프고 일견 싸구려스럽게 까지 느껴지는 이 다실의 작가는 놀랍게도 센노 리큐입니다. 와비사비를 강조하면 소박한 와비차의 완성자라고 칭송받는 센노 리큐가 이렇게 화려한 다실을 설계했다는 것이 믿겨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리큐는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 히데요시의 오사카성 등 거대한 성은 물론이고 각종 저택을 설계한 건축가이기도 했습니다. 또한 스페인, 포르투갈 등과 무역에 종사하던 상인이기도 했죠. 또한 이후 극도로 장식적 미술을 중시하는 린하(琳派) 일파의 시조가 되는 하세가와 도하쿠 같은 화가를 발굴하기도 합니다.
 

센노 리큐가 지은 다실 대암. 국보


정작 자신이 사용하는 다실 대암은 온통 검은 흙벽에 다다미 4칸(약 2평)에 불과합니다. 물론 다실에 들어가보면 그 어둠 속의 밝음 이라는 극적 효과에 놀라지만 그냥 보기엔 쓰러져가는 초가집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보면 리큐는 평생 검소함만 신봉했을 것 같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리큐는 그 때와 장소와 상황에 맞는 찻자리를 추구하고 그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던 극한의 미학을 추구하던 탐미주의자입니다. 그의 검소함은 추구의 대상이지 결여로 인한 보상심리나, 인위적으로 걸어야했던 목표는 아니었고 오로지 미학의 대상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대로 일본을 정복한 천하인(天下人)에게는 그에 걸맞는 미학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그걸 도와주기까지 했던 것이죠.

그러나 리큐와 히데요시의 갈등은 히데요시의 허영이 선을 넘으며 끝나게 됩니다. 먼저 조선출병(임진왜란)이라는 쓸모없는 낭비와 괴상한 취미벽이 넘치면서 리큐와 히데요시는 대립합니다. 결정적으로 히데요시가 자신이 풍류를 정복했음을 과시하기 위해 연 대규모 다회인 키타노(北野) 대다회 이후 다도란 남에게 뽐내는 것 즉 위인(爲人)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 즉 위기(爲己)의 예술이라는 것을 설파하여 히데요시에게 불만을 표출하고 그것이 더욱 확대되어 리큐의 할복까지 이르게 된 것이죠. 논어에 나오는 위기지학의 자세가 다도에도 들어오면 진정한 다도는 남의 눈을 의식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미학을 완성하기 위한 것임을 리큐는 완성했고, 평생을 남에게 보여지기 위해 살았던 히데요시가 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며 결국 둘의 관계에 파탄이 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리큐가 발탁한 화가 하세가와 도하쿠(長谷川等伯)가 그린 단풍도 벽화

교토 지적원 소장. 국보


하세가와 도하쿠의 유작. 송림도 병풍.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국보

저는 오랫동안 황금의 다실에서 들었던 리큐에 대한 의문을 풀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리큐가 직접 발탁했던 화가인 하세가와 도하쿠의 두 작품을 비교하면서 역시 대가는 극과 극을 통일시킨다는 깨달암을 없었습니다. 위 첫번째 그림은 하세가와 도하쿠가 전성기 아들과 함께 그린 화려한 병풍입니다. 이것을 보면 기법에서 이미 도하쿠는 전성기를 달리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래 두번째 소나무 병풍은 쓸쓸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소중한 아들이 요절해버리고 나이가 60이 넘었을 무렵 자신의 마음을 담아 그린 소나무숲 그림은 비롯 미완성작이나 밑그림 아니냐라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그의 전성기와 다르지만 그 그림이 뿜어내는 아우라만큼은 누구나 인정합니다. 박물관에서 이 작품을 접했을 때 어쩌면 와비차의 진수는 이 병풍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글이 길어졌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