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제

명나라의 멸망과 일본 차문화의 변화

同黎 2020. 2. 8. 16:22

*일본 나가사키의 중국 사찰. 숭복사(崇福寺) 산문


나가시키는 에도시대 3백년 간 일본의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본래 일본의 항구는 하카타항 즉 지금의 후쿠오카시입니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이 일으킨 반란 등을 겪은 에도막부는 하카타에 조선통신사의 상륙만 허가하고 모든 외국인은 나가사키에만 출입하게 합니다. 덕분에 후쿠오카는 한동안 무역창구로서의 명성을 잃어버리고 대신 나가사키가 그 역할을 대신합니다.
후쿠오카의 하카타항은 시모노세키를 통해 오사카로 향하는 세토 내해의 출입구였기 때문에 대신 규슈 서부에 치우쳐져 있고 나가사키만과 반도로 복잡하게 얽혀있어 수비에 유리한 나가사키가 무역항이 된 것입니다. 대만과 류큐(오키나와)를 거쳐 규슈로 오는 남중국인과 서양인 중 유일하게 일본과 교역이 허락된 네덜란드인들이 나가사키에 모여 살게 되면서 짬봉, 카스테라 등 나가사키만의 독특한 문화가 생기게 됩니다.
 

교토부 우지시의 만복사(萬福寺) 총문. 누가 봐도 중국식 문입니다.


나가사키에 모여 살던 중국인들은 자신들이 신앙하던 불교와 도교의 승려들을 초대해 나가사키에 절을 세웠습니다. 중국인들이 세운 절 이름에는 복(福)자가 들어가기 때문에 나가사키에 대표적인 중국인 사찰 즉 당사(唐寺) 중 숭복사, 흥복사, 복제사를 일러 나가사키 삼복사라 하고 여기에 성복사를 붙여 사복사라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들 중국 승려들은 남중국에 있던 선종을 들여와 일본에 있던 기존의 선종의 개혁을 일으켰기 때문에 전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교토 남쪽의 우지시에는 에도막부의 후원으로 세워진 거대한 만복사라는 사찰이 세워져 지금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외국인이라면 이를 갈며 강력한 쇄국정책을 추구했던 에도막부가 중국의 선종을 후원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나가사키 공자묘: 청나라 말기, 청나라 조정에서 직접 세운 공자의 사당입니다.


일본 최초의 차이나타운인 나가사키에는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이래 수백~수천명의 중국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에도막부에서는 쇄국정책을 정비하며 아예 중국인들이 정착해 살 수 있는 2000명 규모의 마을을 만듭니다. 경비소와 해자 및 출입구까지 갖춘 마을이었는데 나중에는 나가사키의 중국인이 1만명을 넘게 되어 결국 막부가 정해준 정착지를 넘어 여기저기 흩어져 살게됩니다. 당시 나가사키 전체 인구가 7만명이고, 거주가 허용된 네덜란드인이 15명에 불과한 것을 보면 나가사키에 중국인이 얼마나 많았는지 알게 해줍니다.

나가사키 공자묘 내부에 있는 중국역대박물관: 지금도 중국 정부에서 직접 북경고궁박물원(자금성)의 유물을 대여해줄 정도로 신경쓰는 중입니다.


1만명이 넘는 중국인들이 유입된 이유는 바로 명나라의 멸망 때문입니다. 임진왜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끝난 이후 명나라와 조선, 일본의 외교관계가 복원되자 나가사키에도 중국인들이 모여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국인들이 폭증하게 된 것은 바로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본래 강소, 절강, 복건, 광동 등 중국 남부 해안가에 살던 중국인들은 북경과는 달리 오랫동안 비(非)한족의 침략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살았습니다. 요, 금, 원에 대항한 남송이 그랬고 명나라의 첫 수도도 남경이었습니다. 명이 멸망하고도 꽤나 오랫동안 청에 대항한 잔존세력이 남명이라는 국가를 세워 대항하였고, 남명마저 멸망하고 난 후에도 복건성과 대만을 중심으로 정성공이라는 해상 세력이 거의 100년 동안 자치적 정권을 유지하기도 했습니다.
청나라가 북경을 점령했어도 만주족에 대항하는 한족들의 저항은 꽤나 오랫동안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화교가 대규모로 발생하면서 특히 복건, 절강, 광동에 살인 중국인들이 나가사키로 이주했던 것입니다. 

국보로 지정된 나가사키 숭복사의 제일봉문(第一峰門)


나가사키에 자리잡은 중국인들은 아예 자신들의 고향에서 승려를 초빙해 사찰을 지었습니다. 위의 사진에 나온 사찰인 숭복사는 건축 자재를 모두 중국에서 준비해 옮겨와 일본에서 조립만 했다고 합니다. 사람이 오가면서 자연스럽게 음식문화도 전해집니다. 중국의 음식들이 전해지고 차문화도 새롭게 전해졌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나가사키 숭복사의 대웅보전


중국에서 건나간 승려들은 임제종이라는 종파의 승려였습니다. 임제종은 한국의 조계종 및 태고종과 아예 유래를 같이하는 선종으로 달마대사를 시조로 하여 육조 혜능까지를 모시는 선종의 한 계통입니다. 임제종은 이미 11세기에 일본에 전해져서 무사계급의 후원을 받아 엄청난 규모를 자랑했지만 중국 승려들은 자신들이 임제종의 적통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 임제종과 섞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자신들의 고유 문화를 지키고 독자적 종파를 만들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교토부 우지시 만복사의 대웅보전


중국 임제종 승려들은 그중 가장 대표적인 고승인 은원 융기 스님이 머물던 황벽산 만복사의 산 이름을 본따 황벽종이라고 일컬었습니다. 당시 일본 임제종은 오랫동안 일본에 융화되면서 승려의 결혼, 육식 등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일본 사찰에서 먹는 음식을 보면 고기를 마구 먹지는 않지만 보통 생선 등 해산물 및 닭, 오리 등 새를 이용한 요리에는 관대합니다. 승려의 결혼은 대규모 사찰이 정치, 군사세력화 되면서 사실상 세습을 통해 거대한 사찰을 유지하려는 관습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육식의 허용은 생선과 조류를 빼고는 사실상 담백질을 섭취하기 어려운 일본의 환경 때문입니다. 특히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콩이 자라기 어려웠기 때문에 콩이 대규모로 투입되는 두부는 엄청난 고급음식이었고, 간장과 된장도 굉장히 구하기 어려운 조미료였습니다. 오랫동안 일본에서는 간장이나 된장 대신 액젓이 조미료를 대신했습니다.

만복사에서 판매하는 사찰요리인 보차요리. 순수한 채식이 특징이며 식사 중 엽차와 말차를 자유롭게 마시는 것도 특징입니다.


그러나 황벽종은 이를 일체 금지하였고 당시 남중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불교 연구의 성과를 대거 도입했습니다. 특히 당시 해이해져있던 일본 선종의 계율 문제를 강력히 제기하여 철저한 청정도량을 추구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전까지 대부분의 황벽종 사찰 주지는 대대로 중국인이 건너와 맡아왔으며, 불상과 경전도 계속 중국에서 공급해왔습니다. 에도막부는 당시 불교와 신도 등 종교집단들의 기를 죽이고 통제하느라 고민이었는데, 이렇게 강력한 계율을 내세우며 기존 일본 불교를 성토하는 황복종이 나타나자 쇼군이 직접 나서서 절을 세워줄 정도로 후원했습니다. 현재 황벽종의 총본산인 우지의 만복사는 수십동의 번듯한 건물이 즐비한데 이는 에도막부에서 직접 나서서 세워준 것이며 쇼군이 직접 현판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우지 만복사 천왕전에서 모셔는 포대화상


운명인지 의도된 것인지 황벽종 총본산 만복사가 위치한 곳은 일본 차문화의 중심지인 우지(宇治)입니다. 우지는 천년 가까이 교토에 차를 공급하는 가장 유명한 차 산지로, 이 주변에서 현재도 일본 차의 절반 이상이 생산됩니다. 일본의 유명한 차가게 본점이나 공장은 대부분 이 우지시에 위치합니다. 때문에 중국 승려들이 일본차를 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일본의 차문화를 접한 중국 승려들은 꽤나 반발했던 것 같습니다. 아시다시피 복건, 절강, 광동이라고 하면 중국 차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중국에서는 송나라때까지 유행한 말차문화가 거의 사라지고 엽차 즉 차잎을 직접 우려마시는 문화가 발전합니다. 뭐 이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할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반면 일본은 말차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특히 에도시대 초기까지는 말차가 90%라고 보아도 될 정도였죠. 일본에도 엽차문화가 없던 것은 아닙니다. 일본어로 센차(煎茶)라고 하는 엽차 문화가 있습니다. 센차에는 차나무에 차광막을 쳐서 길러 만든 최고급 엽차인 교쿠로(玉露)와 차광박을 치지 않고 직접 기른 차잎을 비벼 살짝 덖은 일반 센차 등 녹차가 90%로 차지한다고 봐도 됩니다. 그 밖에 기타차인 호지차와 일본의 발효차로 흑차로 분류되는 이와반차, 고이시차가 있지만 소수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에도시대 초기까지 대부분의 고급 차문화는 말차에 한정되어있습니다. 이때까지는 차 재배의 대중화, 대량화가 이루어지지도 않아 차문화가 격식을 갖춰야 하는 고급 문화였기 때문에 차가 대중화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가사키 성복사에 모셔진 마조상. 바다의 신인 마조는 대만, 남중국에서 널리 신앙되는 신입니다.


중국 황벽종 승려들은 이에 대해서 반기를 일으킵니다. 말차의 다도에서는 처음에 진한 농차 다음에 옅은 박차를 마시는데 농차를 마실 때는 일체 말이 허용되지 않으며 박차의 경우 약간의 담소만 허용됩니다. 중국 승려들은 이러한 엄숙주의에 반발하여 차는 가볍고 즐겁게 마셔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복잡한 다도구를 간략화하고 중국에서 들여온 새로운 다도구를 도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차는 식사시간이나 담소를 나눌 때도 간략하게 마실 수 있는 물건이 되었습니다.

교토 흥복사에 모셔진 관우상. 주창과 관평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18세기 이후 만복사를 중심으로 한 엽차문화는 점차 확산되었습니다. 특히 차의 제배가 더욱 쉬워지고 대량화되면서 과거에는 보기도 힘든 엽차들의 생산량도 들어났습니다. 그리하여 만복사를 중심으로 하여 아예 기존의 일본 다도에 대응하는 센차도(煎茶道)라는 새로운 조류가 나타납니다. 차를 마심에 있어서 도구가 바뀌면서 용문당, 귀문당, 금수당 같은 무쇠 주전자 공방이 교토에 들어서는 것도 이때입니다.

센차도가 확산되면서 일본에는 가정이나 식당에서도 엽차를 즐기는 문화가 생겨났습니다. 이 와중에 1788년 교토에서 텐메이의 대화재라고 불리는 엄청난 화재가 발생했습니다. 교토의 80%가 전소되는 대화재였고 오래된 사찰과 관청 및 천황이 거주하는 어소(御所)마져 소실된 그야말로 대화재였습니다. 그런데 이 화재는 일본 차문화에도 일정한 영향을 주게됩니다. 센노 리큐를 계승한 3개의 가문 저택과 오래된 다실이 소실되었고, 특히 교토 산조에 있던 오래된 부사들의 공방이 모두 소실됩니다. 이때 전통적인 몇가문을 제외하고 많은 부사들이 맥이 끊겼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일본 제일이라는 칭호를 들었던 와다 가문의 경우 공방을 잃고 오히려 용문당 등 한수 아래로 평가되던 주전자 공방으로 들어가 운색당 같은 공방을 열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다도의 중심지인 교토가 폐허가 되면서 말차를 중심으로 한 일본 다도도 쇠퇴하게 됩니다. 

이후 메이지 시대에 엽차 문화는 더욱 확산됩니다. 특히 전후 전일보센차도연맹이 설립되면서 중국차가 많이 소개되고 일본의 경제성장과 버블로 인하여 차산업도 성장하면서 1960~70년대에는 일반 엽차와 함께 우롱차 같은 중국차가 엄청나게 보급됩니다. 지금도 일본인들이 즐겨마시는 암차 계열의 차들은 모두 이때 보습된 것입니다.

이렇게 중국의 정치 변화는 일본 차문화에 영향을 끼쳤습니다. 지금은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도 겨울에는 따듯한 엽차를 내옵니다. 일본 엽차는 중국과는 달리 80도 아래에서 우려내야 하고 풀내가 심하단느 평을 들어 중국차와는 다른 풍미를 지닙니다. 다만 그 종류와 산지가 다양한 만큼 일본의 엽차문화도 생각보다 다양합니다. 언제가 기회가 되면 그 문화도 즐겨보시길 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