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원군 집정의 성격과 권력구조의 변화 (연갑수,『한국사론』27, 1992)
토론문
연갑수의 본고는 대원군 집정의 성격과 대원군의 권력 장악 과정을 실증하고 있는 논문이다. 본고에 따르면 대원군 정권은 김병국 등을 중심으로 한 유력가문세력들과 공존하면서 권력을 재분배하는 성격을 띠었다. 이는 세도정치 기간을 통해 그러나 차츰 대원군이 정권 장악하려고 시도하면서 비변사를 의정부로 바꿔가며 삼군부 설치를 중심으로 무반들을 포섭하였고, 재정권을 장악하였고 결국 고종 9년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권력을 장악하였으나, 유력가문세력들의 반발로 인하여 고종 11년 국왕의 친정 선언을 계기로 권력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연갑수의 논리를 그대로 따르면, 대원군 집정기는 여전히 세도정치의 그늘이 드리워진 시기였다. 대원군의 집권 초반에는 안동 김씨와 풍양 조씨를 비롯한 유력가문들의 협조가 필요했으며, 정권을 장악한 다음에도 무반 외에 반남 박씨, 전주 이씨 등 여전히 가문이 중앙정치에 진출하는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즉 교목세신이 여전히 최상위 지배계층을 구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북인과 남인이 의정으로 진출하기도 하지만, 그 기간은 대단히 짧고 제한적이었다. 그리고 대원군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했다고 평가되는 고종 9년 9월 이후에 불과 2년도 지나지 않은 고종 11년 4월 대원군을 권력을 잃는다. 그 원인을 연갑수는 유력정치세력의 반발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대원군의 권력이 개인의 역량에 달려있음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구조적인 면에서 정치권력의 이동을 설명하고 있지는 못하다고 생각한다. 비록 글의 중심주제는 될 수 없겠지만 연갑수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려면 고종 친정 이후 권력의 추이를 집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연갑수의 주장대로 대원권 집정기를 이해한다면, 대원군의 통치 방식은 세도정치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구체적인 정책이로는 다른 면이 있겠지만, 결론적으로 대원위분부를 통하거나, 국정은 사적인 공간에서 처리하는 것은 결국 세도정치와 큰 다를 바가 없지 않을까? 또한 연갑수가 밝히고 있듯이 세도정치세력은 국왕에게 권위를 의탁하고 있었으며, 고종의 친정 또한 국왕의 의지가 강하게 나타났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대원군 정권의 쇠퇴의 원인을 왕에게서 고찰해보지 않은 점은 본고가 놓치고 있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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