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근현반의 시니어들에게 - 김대일(한사 98)

同黎 2013. 3. 8. 00:30
근현반의 시니어들에게 

난 호기심과 지적 열정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난 왕성한 호기심을 갖고 있고, 세상에 대한 갖가지 궁금증들은 끊긴적이 없다. 늘상 이야기하듯이 지하철 문이 왜 양쪽에서 열리는지, 정말 궁예가 신라의 왕족이었는지 따위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며 나를 자극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지적 열정과 냉정하게 분리하였던 것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는 지식은 감히 '지식'의 범주에 들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갖고 있는 것은 호기심인가, 아니면 지적인 열정인가.

  이른바 '진보적인 학자들'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 중 타인의 노동에 기대어 펜대를 놀리며 스스로의 삶과 타인의 삶에 조금도 개입하지 않고 '진보적인'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다만) 글을 적는 것으로 자족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들이 갖고 있는 지식은, 그것이 얼마나 고급한 수준인지는 모르겠다만 모두 호기심으로 형성된 잡학에 불과하다고 난 냉정하게 생각한다. 맑스주의가 대학원생들의 세미나교재로 전락하였다고 탄식하였던 한 유럽 사회주의자의 글에 가슴 절절히 동의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었으니 집회를 나오라는 따위의 저열한 대사가 아니다. 지적 열정은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스스로의 삶에 깃대어 있는 모순을 통찰하고, 그 모순을 자신의 삶을 한발짝 더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으로 삼는 것에서 지적 열정은 비롯된다. 책을 읽고, 고민을 하고, 대화를 하고, 실천을 하고 - 이 모든 것들은 사실 구분되는 행동들이 아니라 하나이다. 책을 읽고 있음에도 스스로의 삶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면, 세련된 단어들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합리화하며 자신의 삶에는 일점의 전진도 없다면, 그 모든 것들에 '호기심' 이상의 단어는 허락될 수 없다. 

  책을 읽는 것은 무척이나 불편한 경험이다. 책장 속에서는 역사가 휘몰아치고, 글자 하나하나에는 수많은 사람들의 피가 녹아있다. 그 글귀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어야 했는가를, 그 공식 하나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존의 벼랑끝에 내몰렸는가를 마음 깊이 받아들이며 읽는다면 어떻게 글을 '쉽게' 읽고 쓸 수 있는가. 어떻게 감히 우리가 그들의 삶을 이렇게 쉽게 '소비'할 수 있는가. 이것은 그들에 대한 모독이다. 이론이 이론으로 머무는 순간 타락한다. 이론의 겹겹에 숨어있는 사람들의 피땀을 놓치는 순간 이론은 교조가 되고 도식이 되고 땅바닥에 내쳐져 값싼 대화의 소잿거리로 전락한다. 역사에서도, 내 주변에서도 그러한 장면은 수도없이 보아왔다. 

  그러한 글을 읽는 것은, 우리의 삶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고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것으로 대답되어야 한다. 그 질문의 절박함만큼이나, 글을 읽는 것도 절박해야 한다. 글을 읽는 것이 그토록 절박했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삶을 한발짝 더 밀어나가는 힘이 될 것이다. 이렇게 읽는 것이다. 그것이 그 글을 만들기 위해 쏟아졌던 수많은 이들의 노동과 역사에 대한 예의다. 

  온갖 종류의 학습열풍이 불어닥치고 있는 우리 과반에서, 오히려 사람들의 삶이 그 열풍만큼 건강할까하는 두려움에 적는다. 못난 선배의 가슴 절절한 부탁이라 생각해주길. 두꺼운 커리만큼이나, 우리의 삶도 두껍고 건강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p.s : 어디 적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결국은 근현반 까페에 적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