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지식인 - 최원

同黎 2013. 3. 8. 00:57

나는 이 글에서 지식인과 대중의 "경계"라기 보다는 '경계들'에 관해 말하고자 하며 그것들의 부단한 전위 속에서 우리가 수행해야할 싸움들의 복잡성에 관해 논하고자 한다.


첫 번째 경계: 지식인과 대중을 유식자와 무식자의 단순한 대립 속에서 파악하려는 시도들은 언제나 모종의 엘리트주의로 귀결되었을 뿐이다. 이를 피하기 위해 혹자는 지식인이란 항상 이미 대중이라는 점(즉, 그들도 대중 안에 생활인으로 실존한다는 점)을 강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입장 안에는 '언행의 불일치'를 비롯한 지식인들의 '위선'이란 결국 그들이 동시에 대중의 한 사람이기 때문에 갖는 속물근성이라는 식의 이해(그들은 더 '영리하게' 속물적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 대중들보다 더 속물적이다)가 엿보이고, 이는 속물근성의 원인을 여전히 대중들로부터 찾는다는 점에서 엘리트주의를 약화시키기는커녕 반대로 그것을 이념화시키고 강화시키는 것처럼 보인다(즉, 실존하는 각각의 지식인은 이러저러한 대중적 천박함을 갖고 있지만 이념Idea으로서의 '지식인'은 별 심각한 손상 없이 저 높은 곳에 그대로 보존된다).

이에 대해 역사상 위대했던 사유의 초개인성에 관한 사상가들은 대중이란 어떤 의미에서는 항상 이미 지식인들이라는 정반대의 테제를 제출해 왔다. 예컨대 그람시는 '모든 인간은 철학자'라는 입장 속에서 자신의 독특한 '유기적 지식인'이라는 통념을 가공해냈고, 또 이보다 앞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테제에 대해 '인간은 생각한다'라는 단순한 정리를 대립시킴으로써 지적 사유의 필연적으로 개인횡단적인 성격(즉, 지적 활동은 대중을 관통해서 일어난다)을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으려고 하였다. 나중에 알튀세르가 '이론'을 사회적 실천들의 공간적 은유로서의 '토픽topique' 상에 이중적으로 기입할 것을 주장했을 때, 그는 철학과 이데올로기(그에게 이데올로기는 인식으로서의 최소한의 긍정성을 갖는 것이다)가 이론적 실천들 뿐 아니라 (대중들의) 정치적 실천들 안에도 편재한다고 말함으로써 나름대로 그와 같은 테제를 반복했던 셈이다. 이러한 입장들은 그러므로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대를 표명하는 그 만큼의 독특한 방식들이지만, 그 입장들의 유효성은 모두 역설적으로 '반지성주의'에 대한 발본적인 비판을 통해서 보장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전문적인 지식인들의 지적 작업을 억압하지 않으면서 대중들의 발언권을 전면적으로 보장할 수 있는 민주주의의 정치적 형태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 . . 첫 번째 허물기.

두 번째 경계: 지식인과 대중 사이의 문제는 그러나 자본주의의 시작과 더불어 새로운 양상을 획득하게 되었는데, 이는 기본적으로 지식인이 자본주의하에서 이중적인 실존(혹은 지위)을 갖게되는 사태로부터 연유한다. 에티엔 발리바르에 따르면 자본주의 안에는 한 편으로 국가를 통해 지배계급과 결합되는 정치적, 이론적, 기술적 이데올로그들(이들은 지배계급과 함께 국가부르주아지를 형성한다)이 있고, 다른 한 편으로 생산과정 내의 지적 분할의 결과로서 (대규모의 탈숙련화된 노동자들과 함께) 등장하는 과잉숙련화된 노동자들의 존재가 있게 된다. 특히 전자가 전(前)자본주의적 기원을 갖는 지식인의 전형적인 실존 양태라고 한다면, 후자는 자본주의에만 종별적인 것으로 '테크놀로지'의 역사적인 등장과 더불어 나타나는 지식인의 범주이다(주지하다시피, 고유한 의미에서의 테크놀로지란 자본주의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과잉숙련화와 탈숙련화의 현상은 무엇보다도 소위 연구원 노동자들을 비롯한 고도로 지적인 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일반 노동자들로부터의 분리 및 그 양자간의 교통의 전적인 부재라는 방식으로 나타나게 되는데, 본질적으로 학교라는 국가장치 내부의 분할에 뿌리박고 있는 이러한 분리는 맑스가 탁월하게 지적했듯이 개별 노동자들에 대한 지적 지배를 노동과정의 내부로부터 조직함으로써 기계에 의한 잉여노동의 효과적인 "흡착"을 가능하게 만들기 위한 자본의 전략들에 핵심적인 것이다.

이렇게 봤을 때, 테크놀로지란 어떤 중립적인 기술들techniques의 이러저러한 집합이 아니라 자본주의가 상대적 잉여가치의 착취(이는 자본주의에만 고유하다)를 위해 지적 노동을 육체 노동으로부터 특정하게 분리시켜 그것에 대립시키는 방식 그 자체로부터 유래하며 이윤과 생산성의 극대화라는 자신의 유일한 사상(思想)인 '생산력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자본이 조직해온 학문-기술-경영의 총체적인 체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오늘 '이행'을 위한 자본의 지식 권력의 해체라는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것은 자본이 활용하는 지식들의 단순한 재전유가 결코 아니라 그것이 발전시킨 지식 체계 전체를 탈구성하는 것에 이르는 보다 포괄적이고 복잡한 실천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이는 한 편으로 학교 교육을 일반적으로 확장시키고 학교 교육의 형태 자체를 변형시키는 것에 의해(즉, 노동력 형성 과정을 개조함으로써), 그리고 다른 한 편으로 생산력주의에 반대하여 공장 그 자체를 지식활동의 장으로 변형시키고 생산수단을 이윤 생산 활동으로부터 분리시켜 활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에 의해(즉, 공장과 학교의 특정한 융합을 시도함으로써) 그것을 양면적으로 공격해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는 (그것의 정치적 실패가 반드시 그것의 이론적 무의미함으로 간주될 수는 없는) '문화혁명'의 공과(功過)를 정밀하게 평가하는 것이 중요해 진다 . . . 두 번째 허물기.

이 두 가지 경계와 허물기의 실천을 특징짓기 위해 다시 그것들을 '위로부터의 싸움' 및 '아래로부터의 싸움'이라고 부르는 것도 유용할 것이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통한 대중의 발언권의 보장을 위한 싸움이 위로부터의 싸움에 해당한다면 노동과정 내부의 지적 분할의 해체를 위한 싸움은 아래로부터의 싸움에 해당될 것이다. 문제는 위로부터 그리고 아래로부터의 그 싸움들이 현재 다시 복잡화되고 있는 양상이다(그리고 이로부터 다른 경계들이 지도 안으로 또 다시 삽입된다).

먼저 위로부터: 인터넷 등을 통해 최근에 경험되고 있는 대중적 발언권의 인플레라는 현상은 '위로부터의 싸움'이라는 모토 자체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오히려 이러한 작금의 사태는 발언권의 제한이 반드시 발언할 수 있는 기회의 물리적 제한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렇다고 우리가 발언권의 양적 확대에 단순하게 대립되는 그것의 질적 확대를 주장할 순 없다. 결국 이는 다시 엘리트주의로 귀결될 뿐이다. 인터넷의 저질 문화, 저질 언어 등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근엄하게 한 소리 씩 하고자 하는 일부 지식인들이 보여주듯이 말이다. 차라리 문제는 양적 확대 자체의 미분(微分)이다. 즉, 자신의 상징적 질서와 언어 자체의 결핍으로 인해 자신의 발언권은 고사하고 자신의 발언 그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과소인간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들리게 하기 위한 것으로서의 '미분적 확장' 말이다. 여성은 여기서 탁월한 예이지만 그것의 유일한 예는 아니다. 어린아이, 이반, 장애인, 그리고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명백한 인종주의적 차별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 등 그 경계들이 끊임없이 다시 미분되어 나간다. 형식적인 민주주의의 달성을 넘어 민주주의를 그것의 한계로 접근시켜나가는 일. 거기서 지식인이 해야할 일이란 바로 대중들과의 결합 속에서 그들의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가공하고 그들 스스로에게 인지 가능한 언어로 되돌려주는 일이다. 다시 한 번, '반지성주의'는 여기서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다음 아래로부터: 오늘날 고전적인 육체 노동과 정신 노동 사이의 경계는 무너지고 있다. 사무 작업 등의 전산화로 인해 점점 사무 노동자들(과거에 이들은 지적 노동에 종사하는 자들로 분류되곤 했다)의 노동의 성격이 육체 노동자들의 그것과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상상하는 이데올로기적인 경계는 보다 완고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킨다. 그리고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연작용은 지식 노동자들의 노동권의 주장을 집단적 이기주의로 몰아 부치는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의 강력한 근거로 봉사하게 된다. 그러나 이는 노동자들을 분할 통치하려는 기만적인 자본의 공세일 뿐이다. 고전적인 프롤레타리아트와 지식 프롤레타리아트와의 연대는 오늘날 가장 중요한 노동운동의 과제다. (앞서 언급했던) '문화혁명'은 따라서 이행 이후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 우리의 투쟁의 한 복판에서 시작되어야만 될 긴 싸움을 칭하는 이름으로 인식되어야 한다.

지식인과 대중의 경계는 단순하게 소멸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경계를 허물기 위한 싸움이 그 경계들을 또한 끝없이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 그 경계들의 폭은 줄어들 수 있고 그 경계들의 지형 자체는 변형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목표로 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