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왜 그들은 마르크스를 버리지 못하는가

同黎 2013. 3. 8. 00:44


왜 그들은 마르크스를 버리지 못하는가 



산 자본주의가 죽은 마르크스를 살린다

카드빚에 시달린 젊은 엄마가 아이 셋을 데리고 아파트에서 뛰어내렸다는 소식은 충격적이다 못해 괴기스럽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것이 살아 있는 자의 도리이자 예의다. 더욱이 투신자살을 결행하기까지 겪어야 했을 심적인 고통을 생각하면 망자에 대한 악담일수 있겠으나 나는 무엇보다도 젊은 엄마를 질책하고 싶다. 삶이 인생을 속일지라도 생명을 버려서는 안된다.

뉴스로 전해진 젊은 엄마의 나이는 나와 동갑이다. 한 동갑일 망정 사업을 부도 맞은 남편을 대신해 세 아이를 부양하며 가족의 생계를 꾸려야 했던 젊은 어머니가 체감하는 삶의 무게와 인생의 고달픔은 늙은 부모 등치며 집에 빌붙어 지내는 노총각의 그것과는 견주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팍팍하고 육중했으리라. 그럼에도 그 팍팍함과 육중함이 생명의 가벼움으로 전화되어서는 곤란하다. 구차하고 비루해도 우리 모두에게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악랄하게 살아 남아야 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

생명사상에 심취한 것도 아닌 내가 이토록 비분강개하면서, 죽음을 통해 인생의 고통에 종지부를 찍어야할 만큼 궁지에 몰렸던 젊은 어머니를 원망하는 까닭은 단지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집안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비명에 가야 했던 어린 세 생명에 대한 안타까움을 억누를 수 없어서일 게다.

내가 아주 오래 전에 들었던, 제본소에 다니던 어머니가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아주머니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기억의 우물에서 건져 올리도록 하겠다. 스토리가 너무나 처연해서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가 일나가는 제본소에 홀로 딸 셋을 키우는 아주머니가 있었다. 큰딸이 나와 엇비슷한 연배였으므로 아주머니의 나이는 공장에서는 비교적 젊은 축에 속했나보다. 그 아주머니가 중병에 걸렸다고 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무리하게 노동을 했으니 골병이 들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제본소 근무시간은 오전 8시 40분에서 시작해 잔업과 야근까지 포함해 밤 10시에 끝났다. 정식휴일은 한 달에 겨우 이틀이었다. 휴일 이외 날에 결근하면 3일치 일당이 까졌다. 반면, 휴일에 출근하면 이틀로 일당이 계산되었다. 이 후유증으로 내 어머니의 손목은 팔의 각도와 어긋나 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제본소에서 일했던 아주머니는 병이 악화되어 회복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병원비가 없어 치료조차 못 받는 판국이니 임종도 결국 집에서 맞게 되었다. 자리를 지키는 것은 어린 세 딸뿐이었다. 딸들에게 죽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어머니는 초등학교 4~5학년쯤에 불과한 큰딸에게 밖으로 나가 먹을 것을 사먹으라며 돈을 쥐어줬다. 철이 약간 들었던 큰딸은 어머니의 말뜻을 이해해고 동생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딸들이 나갔다 들어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숨을 거둔 후였다.

이 서글프고 막막한 이야기를 잊지 못하게 만든 것은 어머니가 딸에게 주었던 돈의 액수 때문이었다. 단돈 50원이었다. 세상에 태어난 한 인간이 죽음의 문턱에 도달하기 직전까지 뼈가 으스러지고 내장이 썩어 문드러지도록 일해서 자식들에게 남겨준 전재산이 겨우 50원 짜리 동전 한 닢이었던 것이다.

세 아이가 50원으로 사먹을 수 있는 것이 과연 있었을까? 그 이야기를 들었을 당시, 50원을 가지고 가게에서 구입할 수 있는 먹거리는 크라운 산도뿐이었다. 50원으로 먹을 것을 사기 위해 아이들은 꽤 오랫동안 을씨년스런 변두리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다녔을 게다. 사고무친의 세 고아 소녀가 맞닥뜨렸을 세상은 달랑 50원을 가지고 가게 앞을 기웃거리는 어린 영혼들을 싸늘하게 대했을 가겟집 주인들처럼 차갑고 매정했으리라.

변두리의 가난한 집안 자제들이라면 어린 적부터 "연탄가스라도 맡고 전부 죽자"는 부모들의 비감 어린 장탄식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면서 자랐을 것이다. 실제로 신문 사회면 귀퉁이에는 "생활고 비관한 일가족 연탄가스 집단자살..."하는 비극적 기사가 빈번히 등장했었다. 고층 아파트에서 아찔하게 아래를 바라봐야 하는 고역을 생략하고, 간단히 연탄 아궁이만 열어놓으면 일가가 편안하게 잠든 것처럼 가는 방법이니 마음만 독하게 먹으면 언제든지 실행에 옮길 수 있는 편리(?)한 자살수단이었던 셈이다.

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들에게 자신의 생명이 꺼져 가는 광경을 보여주지 않았던 제본소 아주머니의 결정은 어느 위대한 정치가와 장군의 결단에 못지 않은 용기 있는 선택이었다고 믿는다. 그것은 좌절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굴하지 말고, 기죽지 말고 단단하고 당차게 모진 세파를 헤치고 살아가라는 유언이었던 것이다. 삼성왕국 임금님처럼 편법증여로 제 아들에게 수천억원을 물려주지는 못했지만, 나는 그 어머니가 자식들에게 쥐어준 50원 짜리 동전이야말로 진정으로 위대한 유산이었다고 외치고 싶다. 배고픈 가난한 집 딸들이 걷기 쉬운 편하게 돈버는 길을 그들은 기꺼이 마다했으리라.

이와 유사한 사연이 어머니가 제본공장에서 가져왔던 낙장으로 가득 찬 책에도 실렸었다. 현직교사들이 경험한 교육현장의 애환을 엮어서 소개한 실화집이었다. 책에 실린 이야기에는 약간의 후일담이 보태져 있다. 딸들이 어머니가 준 50원 동전의 중앙에 구멍을 뚫어 서로 번갈아 목걸이처럼 차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내가 살던 신수동 출판단지 근처 동네에는 궁상맞고 구슬픈 라이프 스토리가 비일비재했다. 이 가운데 몇몇이 누군가에게 채록되어 책에까지 실렸던 것으로 추론할 수 있겠다. 책의 행방은 묘연하다. 지나가는 고물상이 파는 강냉이와 교환되었을 것이다.

가난과 빈곤이 안겨다주는 비극과 고난을 당사자의 의지와 능력으로 극복하라고 근엄한 표정으로 설교할 수 있는 것은 정확히 여기까지다. 아이 셋을 데리고 투신 자살한 젊은 엄마를 나무라는 언설(言說)과, 딸에게 50원 동전을 쥐어주며 굳세게 살아가라고 격려한 어머니를 칭송하는 행동이 억울하게 죽은 아이들을 살려내고, 엄마 품에서 어리광을 피울 나이에 세상 한가운데 팽개쳐진 자식들에게 도움을 주지는 못한다.

제 먹을 것은 다들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옳은 말씀이다. 그런데 제 먹을 것이 어디에는 터무니없이 많이, 어디에는 형편없이 적게 나뉘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가난은 나라도 구제하지 못한다고 한다. 맞다. 그러나 국가는 빈곤을 벗어나고자 분투하는 이들에게 허탈함과 박탈감을 심어주는 파렴치한 작태를 일삼는 무리들을 규율한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는 갖춰야 한다.

한국사회는 스타일에서는 상당히 변모했지만 구조에서는 별로 나아지지 못했다. 동반자살의 일반적 스타일이 연탄가스에서 아파트 투신으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가난에 쪼들리는 부모들이 애들을 길동무 삼아 자살하도록 몰아붙이는 구조에는 하등 변함이 없다.

사회안전망이 취약하다, 기초적인 생계보장대책이 미흡하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는 지적과 문제제기는 불균등한 조건에서 개인들을 무자비한 경쟁으로 내모는 기존의 경제시스템에 근본적 수술이 가해지지 않는 한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있고, 내일도 존재할 것이다. 부조리한 시스템을 일거에 뜯어고치려는 대담한 발상과 모험적 시도도 끊임없이 계속되리라.

건국대학교 학생 두 명이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경찰에 검거됐다. 마르크스주의 주의주장을 추종했다는 것이 죄상이다. 이들이 소지한 소위 이적표현물인 '맑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에는 스타일과 형식의 변화에 상응하는 내용과 구조의 변혁을 추동하지 못하는 한국사회를 향한 절절한 성토와 맹렬한 규탄이 배어 있다.

개인의 노력과 분발은 중요하다. 제 아이들에게 더 좋은 음식을 먹이고, 더 좋은 옷을 사주고, 더 넓은 집을 마련해주려는 부모들의 욕망은 경제를 유지하는 기본적 동력이다. 아이들과 관련된 모든 사항을 국가와 사회가 전적으로 도맡는다면 부모들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경제의 활력도 시들어질 것이다.

자식의 허물은 아비의 허물이 될 수 있다. 아비의 허물이 자식의 허물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부모의 허물로 철모르는 애꿎은 자식들이 굶주리고 죽어 나가는 사태는 절대적으로 막아야 한다. 이런 원초적인 인륜적 요구조차 실천하지 않는 나라가 국가의 안위를 보위하겠다며 젊은이들을 가두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구성원의 생명과 생계를 수호하지 못하는 체제는 국민들에게 충성을 강요할 자격과 권능이 없다. 미래의 노동자이자 생산의 주역인 아이들의 연약한 생명의 불꽃이 생계에 쪼들리고 빚더미에 몰린 부모들의 손에서 힘없이 꺼지도록 방치하는 국가는 존립의 발판을 제 발로 걷어찬 것이다.

MBC에서 방영되었던 '우리들의 천국'의 한 장면이 있다. 주인공인 홍학표의 선배로 등장한 문성근은 위장취업자로 감옥까지 갔다온 인물이다. 그의 애인이자 학교후배인 배종옥은 중견기업주의 외동딸이다. 배종옥의 아버지와 대면한 문성근은 호된 꾸지람과 더불어 노조의 폐해에 대한 일장 훈시를 듣는다. 시종일관 묵묵히 듣기만 하던 문성근이 조용히 대꾸한다.

"사장님의 그런 욕심이 그치지 않는 한, 마르크스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 무덤에서 마르크스를 불러들은 것은 젊은 학생들이 아니다. 그것은 50원을 딸들에게 쥐어주고 눈을 감은 어머니와, 아이 셋을 데리고 아파트 계단의 창문에서 콘크리트 바닥으로 뛰어내린 젊은 엄마를 가르는 20여 년의 세월 동안 전혀 진화하지 않은 무능한 국가와 불평등한 경제시스템인 것이다. 공권력이 옥에 가둬야 할 대상은 무능한 국가와 불평등한 경제시스템이지 책 읽고 유인물 돌린 청년들이 아니다.

무능한 국가와 불평등한 경제시스템이 온존하는 이상, 마르크스의 이름도 그를 신봉하는 젊은이들도 대한민국에서는 결코 사멸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