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박제인가 희망인가 - 김규항

同黎 2013. 6. 30. 02:15
‘일베’라는 곳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을 심각하게 왜곡·폄훼하고 심지어 희생자들 사진을 음식에까지 비유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일베의 행태에 분노하는 건 시민의 상식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당연한 분노에 머물러선 안된다. 일베에 분노하며 일베만큼만 생각해선 안된다. 역사는 악의에 의해서만 왜곡되는 게 아니라 게으른 선의에 의해서 더 많이 왜곡된다.

역사 속에서 저항적 사건은 대개 처음엔 체제에 의해 금지되거나 불온시되면서 일부 저항세력에게서만 존중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존중은 일반화하고 공식화한다. 물론 그 사회가 느리게라도 진보하고 있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일부의 존중이 일반적이고 공식적 존중으로 변화함으로써 그 사건은 명예를 회복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건에 담긴 정신은 위기를 맞기 시작한다. 저항적 사건의 정신은 체제 내로 수용되면서, 기념일과 기념관과 기념묘역이 생기면서 박제화하는 속성이 있다. 역사에 대해 냉철한 편인 프랑스인들이 파리 코뮨전사의 벽을 그리 소박한 상태로 두는 것도 그런 맥락에 닿아 있다.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행사에서 부르는가 못 부르는가, 5·18 민중항쟁을 인정하는가 모독하는가는 물론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임을 위한 행진곡’의 정신이 살아있는가와 5·18 민중항쟁의 정신이 오늘 현실에 살아있는가다. 박제된 역사는 더 이상 역사가 아니다. 역사는 단지 과거의 기억으로서가 아니라 현실을 밝히고 미래를 보여줌으로써 역사일 수 있다.

5·18 민중항쟁의 저항정신은 대개 둘로 볼 수 있다. 독재에 맞서 자유민주주의를 회복하려 한 저항, 그리고 자유민주주의를 넘어 계급투쟁과 이상주의적 공동체 건설의 면모를 보인 저항. 그것은 흔히 ‘수습파’의 정신과 ‘항쟁파’의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진보적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자유민주주의 회복 운동이던 한국의 사회운동이 1980년대 중반 이후 급격하게 변혁운동으로 발전한 것 역시 바로 광주에서의 미국 역할에 대한 각성과 항쟁파의 역사 덕이었다.

독재가 물러나고 옛 저항세력이 체제 내로 진입해 옛 독재세력과 경쟁하거나 심지어 집권하는 수준에 이르자 5·18의 정신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체제 안의 새로운 기득권 세력이 된 옛 저항세력은 5·18의 정신에서도 자신들의 현실에 부합하는 부분만 취사선택했다. 항쟁파의 정신은 슬그머니 잊혀지고 수습파의 정신만 강조되기 시작했다. 오늘의 광주, 지금 여기의 항쟁파들의 가슴을 뜨겁게 하던 5·18은 어느새 잘 차려입은 정치인들의 헌화 행렬에 더 어울리는 역사가 되어갔다.

오늘날 일베 사태와 관련한 논란이 역사를 모독하는 사람들과 역사를 박제로 만든 사람들의 논란의 경향을 보이는 건 그 자연스러운 귀결인 셈이다. 더욱 애석한 것은 일베의 몰상식에 대한 대중적 반감이 진보세력의 집권놀음을 위한 정치 선동에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일베 사태는 보수정권 6년 동안 청년들이 극우적 경향에 물들었음을 보여준다”는 식의 주장이 바로 그런 경우다. 보수정권 6년에 청년들이 영향을 받았다니 대체 무슨 소리인가. 청년들이 ‘이명박의 치명적인 매력’에 대거 홀리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이명박과 그 패거리의 풍모는 보수로 갈 젊은이도 막아세울 만큼 낡고 악취 나는 것이었다. 박근혜 정권도 아직은 딱히 나은 게 없다.

극우가 자본주의의 자식이라는 것, 한 사회가 심화하는 착취 구조와 반복되는 불황·공황이라는 자본주의적 모순에 갇혀 아무런 출구를 찾지 못할 때 극우의 우물을 찾는 청년들이 생겨난다는 건 상식적인 이야기다. 물론 한국의 기존, 장년층 극우는 전쟁과 분단이라는 특별한 역사에 기인한 바 크지만 일베 사태에서 보이는 자생적, 청년 극우는 그 전형적인 경우라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 청년들의 처지를 보라.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모조리 입시에 바치고 한 해에 1000만원을 넘는 등록금에 시달리며 간신히 대학을 졸업하면 비정규 노동과 아르바이트가 기다린다. 이런 상황에서 서유럽, 북유럽에도 있는 극우 청년들이 여태 없었다는 건 오히려 희한하고 감사한 일일 수도 있다.

청년들이 극우의 우물을 찾는 건 보수의 영향 때문이 아니라 진보가 희망을 만들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희망은커녕 이 상황을 만든 주역이기 때문이다. 그걸 ‘신자유주의’라 부르든, ‘재벌 왕국’ 혹은 ‘부자의 천국’이라 부르든 이 상황이 진보정권 10년과 보수정권 6년의 변함없는 행진 덕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그 진보가 지난 6년 동안 한 거라곤 모든 문제를 보수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것이었다. 자신을 진보라 여기는 기성세대가 청년들 앞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보수 정권 6년의 영향” 따위 속이 빤한 정치 선동이 아니라 ‘깊은 성찰’이다. 그게 청년들이 제가 살아온 사회를 사랑하게 할 수 있게 만드는 첫걸음이자 박제된 5·18의 역사에 숨길을 불어넣는 일이다. 일베는 단지 시작일 뿐이다. [경향신문-혁명은 안단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