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남의 글

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 윤소영

同黎 2013. 11. 13. 00:10

알튀세르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윤소영

나의 분석적 방법은 인간이 아니라 경제적으로 주어진 사회적 시대에서 출발한다.

- 마르크스(1879~80)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융합’의 역사에서의 ‘스탈린적 편향’=‘경제주의(기본)+주의주의(부차)’의 특수형태

- 알튀세르(1972~76)


1. 알튀세르

루이 알튀세르 Louis Althusser는 누구인가? 그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알튀세르적 단계’를 개시한 사람이다. 또한 그는 프랑스 밖에서 이른바 ‘알튀세르주의 Althusserianism’를 창시했다고 하여 찬양과 동시에 비난을 한 몸에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조차도 그의 사상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는 못하다고 한다. 197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좌파가 쇠퇴할 조짐을 보이기 시작하기 전까지 그가 대중정치에 직접 개입한 바가 없었다는 사실이 이와 무관하지는 않으리라. 그는 1948년부터 1980년까지 파리 고등사범학교에 재직하면서 - 그리고 그 구내에 거주하면서 - 연구와 교육에만 전념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예를 들어 장-폴 사르트르 Jean-Paul Sartre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철학자이다. 프랑스 밖에서 그의 저작들은 저자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해석되어 응용되어왔다. 폴 허스트 Paul Hirst와 배리 힌데스 Barry Hindess의 경우는 그 예외적이며 역설적인 형태 - 과잉 알튀세르주의 hyper-Althusserianism에서 후기 알튀세르주의 post-Althusserianism로의 이행 - 속에서 이러한 알튀세르 수용의 보편적 경향을 실현할 뿐이다. 그렇자면 도대체 알튀세르는 어떻게 수용되어야 하는가?

기존의 알튀세르 평전 - 그는 별다른 사생활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평전’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지만 - 중에서 가장 충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사울 카르 Saül Karsz의 『이론과 정치: 루이 알튀세르 Théorie et Politique: Louis Althusser』(Fayard, 1974)는 1973년까지의 저작들만을 다루고 있다. 이것은 알튀세르의 저작들 중 대강 2/3 정도에 해당하는 것인데 우리가 나중에 보겠지만 단순한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후기 알튀세르의 문제의식의 질적 발전을 고려해보더라도 지금에 와서는 상당히 불완전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더욱이 중기의 알튀세르를 다루는 데 있어서도 1974~75년간에 공간된 주요 저작들이 빠져 있다. 이에 비하면 최근 조르쥬 라비카 Georges Labica와 제라르 방쉬상 Gérard Bensussan의 감수로 편집된 『마르크스주의 고증사전 Dictionnarie Critique du Marxisme』(P.U.F., 1982; 2(?) éd. refondue et augmentée, 1985)에 수록된 논문들은 알튀세르 이후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발전을 잠정적으로 결산한다는 의미에서 보완적인 역할을 할 수는 있겠지만 물론 그 자체로서는 알튀세르 평전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한편 프랑스 밖에서 씌어진 알튀세르에 대한 글들 중에서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있는 것들을 중심으로 살펴보자면 우선 미리암 글룩스만 Miriam Glucksmann의 『현대 사회 사상에서의 구조주의적 분석: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와 루이 알튀세르 이론의 비교 Structuralist Analysis in Contemporary Social Thought: A Comparison of the Theories of Claude Lévi-Strauss and Louis Althusser』(R.K.P., 1974; 국역, 한울, 1984가 있고 최근에서는 알렉스 칼리니코스 Alex Callinicos의 『마르크스주의의 미래는 있는가? Is There a Future for Marxism?』(Macmillan, 1982; 국역, 열음사, 1987)가 나와 있다. 전자는 어떤 의미에서이든 알튀세르의 사상을 제대로 평가한 글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이 글은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알튀세르를 소개한 것으로서 그를 ‘구조주의자’로 낙인찍는 데 중요한 기여를 했다. 후자는 그에 앞서 나온 『알튀세르의 마르크스주의 Althusser's Marxism』(Pluto, 1976)의 속편으로서 두 글을 같이 읽어야만 온전한 의미에서 알튀세르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우리가 나중에 살펴보겠지만 이 글들이 갖는 결함이 보다 뚜렷하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알튀세르의 평전은 아니지만 페리 앤더슨 Perry Anderson의 『서구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찰 Considerations on Western Marxism』(N.L.B., 1976; 국역, 이론과실천사, 1986)은 나름대로 중요한 글이다. 이 글도 그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역사적 유물론의 궤적: 웰렉도서관 강의 In the Tracks of Historical Materialism: The Wellek Library Lectures』(Verso, 1983)와 함께 읽는 것이 좋다. 이 글들은 알튀세르를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평가하는 것으로 그러한 근본적인 오류에도 불구하고 입문적인 기능을 가질 수 있다. 한편 그의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의 논쟁 Arguments within English Marxism』(Verso, 1980)은 에드워드 톰슨 Edward Thompson이 『이론의 빈곤 The Poverty of Theory and Other Essays』(Merlin, 1978)에서 알튀세르에 가한 비판에 대한 훌륭한 반비판이다. 우리나라의 인문학도들 중에서도 톰슨의 ‘동키호테’ 식의 비판을 읽고 알튀세르를 읽는 수고를 스스로 면제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은데 그들은 먼저 앤더슨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톰슨과 앤더슨의 ‘논쟁’은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부의 사정이므로 여기서 알튀세르에 대한 이해 그 자체를 얻기는 힘들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의 논쟁을 맥락으로 알튀세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이클 켈리 Michael Kelly의 『현대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Modern French Marxism』(The Johns Hopkins University Press, 1982)를 보면 좋다. 우리가 앞으로 이 글에서 밝혀보려고 하는 가장 중요한 논점 중의 하나는 바로 알튀세르를 수용하는 맥락이 국제 운동사 속에서의 논쟁이며 알튀세르는 그러한 보편적 논쟁을 프랑스 운동사 속에서 특수 역사적인 형태로 관철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이러한 글들 - 이것들은 모두 앵글로 색슨계의 학자들의 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영어와 그 밖의 외국어 사이에 ‘언어 장벽’이 있다 - 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알튀세르 수용에는 적합치 않은 것들이다. 물론 알튀세르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를 ‘원전’으로 읽는 것이겠지만 - 여기서도 저 ‘언어 장벽’은 너무나도 높다 - 그러한 본격적인 연구를 위해서도 그의 사상을 총괄적으로 검토하는 평전은 필수불가결하다. 우리나라에서의 알튀세르 수용은 아까 언급했던 프랑스 밖에서의 보편적인 상황과도 또다른 독자적인 측면이 있다. 먼저 알튀세르의 저서 가운데 일부 - 그 영역본 - 가 최근에 와서 영인본의 형태로 보급되고 그의 논문 가운데 일부 - 「레닌과 철학 Lénine et la Philosophie」, 「헤겔 이전의 레닌 Lénine devant Hegel」,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하여 Sur le Rapport de Marx à Hegel」, 이 세 글은 『레닌과 철학 Lénine et la philosophie』(2 éd. augmentée, Maspero, 1969)에 수록된 것인데 처음 두 개는 김학노 편역, 『레닌』(녹두, 1985)에, 나중 한 개는 정과리 역, 『우리 시대의 문학』 6집, 1987년 여름호에 각각 실려 있다 - 만이 번역되어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는 알튀세르가 아직은 인문학도들을 중심으로 그것도 주로 문학 이론․비평 이론의 차원에서 수용되고 철학이나 역사학의 수준에서는 아직 그와의 해후는 요원한 것 같다. 사회과학도들 중에는 80년대초 종속 이론에 대한 ‘작은 소동’ 속에서 생산양식 접합론 또는 구조주의 국가론의 차원에서 그를 ‘우회적으로’ 수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방식으로 알튀세르를 제대로 이해할 리가 없다는 것은 최근 사회과학도들 중에서 나타나는 두 가지 극단적인 태도 - 그 하나는 정진성, 「80년대 한국 사회구성체 논쟁과 주변부 자본주의론」(『한국사회연구․5』 1987)이고 다른 하나는 이진경,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아침, 1987)인데 전자는 자신의 입장과 전혀 상반되는데도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후자는 그와 반대로 한다 - 만으로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을 볼 때 최근에 간행된 그레고리 엘리어트 Gregory Elliott의 『알튀세르: 이론의 우회 Althusser: The Detour of Theory』(Verso, 1987)는 알튀세르의 사상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그에 대한 새로운 평전으로서 우리나라 독자들에게도 매우 유용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뿐만 아니라 엘리어트의 새로운 알튀세르 평전은 이제까지의 글들과 비교할 때 중요한 공백을 메우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는 알튀세르의 대부분의 저작들을 - 미공간의 글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익명의 글까지 포함하여 - 충실하게 요약․정리해 주면서 더욱이 그러한 글들이 어떤 (국내외) 정치 정세 속에서 씌어진 것들인가를 일목요연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실 필자도 나름대로 알튀세르를 공부해 보려고 애는 써봤지만 엘리어트가 인용하는 알튀세르의 글들 - 또는 알튀세르에 대한 글들 - 중에는 못본 것들도 더러 있고 더구나 알튀세르의 동료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얻은 구체적 정보에 대해서는 처음 듣는 것들도 꽤 있다. 그래서 필자가 볼 때 엘리어트의 평전은 알튀세르의 이론적 편력을 체계적으로 고찰하고 그 이론적 기여의 현실적합성을 검토하는 데 필수적일 뿐만 아니라 그의 ‘품성’ - 그는 ‘평판’과는 달리 겸손하고 기품있는 사람이며 더욱이 용기와 신념을 가진 철학자이다 - 을 엿볼 수 있는 일화들까지 곁들여 상당히 읽는 재미도 있을 것 같다. 앞으로 알튀세르 저작집(서독의 Argument-Verlag에서 페터 셰틀러 Peter Schöttler와 프리더 볼프 Frieder Wolf의 편집 하에 전 8권으로 간행 예정)이 완간되고 그에 대한 보다 객관적인 평가가 나올 때까지 엘리어트의 알튀세르 평전은 당분간 유용할 것이다.

엘리어트의 알튀세르 평전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머리말

1. 알튀세르의 계기 moment

2. 변증법적 유물론의 재출발

3. 마르크스로 돌아가자? 역사적 유물론의 재구성

4. 이론의 시간, 정치의 시간

5. 스탈린주의의 문제들

6. 알튀세르주의의 실추 eclipse

맺음말: 미완의 역사


그는 머리말에서 영국 마르크스주의 내부에서의 알튀세르 수용을 둘러싼 이제까지의 논쟁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알튀세르의 저작 활동을 대체로 3기로 구분하여 제 1장에서는 초기 알튀세르(1949/50~1966/67 - 그러나 50년대까지의 알튀세르는 매우 과작인데 1959년에 와서야 『몽테스키외. 정치와 역사 Montesquieu. La Politique et l'Histoire』(P.U.F.)를 공간하고 그 이듬해 포이에르바하 선집 『철학 선언(1839~1845) Manifestes Philosophiques(1839~1845)』를 편역해낼 따름이어서 이 시기는 실은 1959/60년부터 시작된다)의 문제제기를 그 역사적 맥락으로부터 검출해 내고 제 2장과 제 3장에서는 초기 알튀세르의 입장을 대표하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Pour Marx』(Maspero, 1965)와 『『자본론』을 읽자 Lire le Capital』(Maspero, 1965)에서의 논의를 정리한다. 다음 제 4장과 제 5장은 중기 알튀세르(1966/67~1975)의 입장을 대표하는 『철학과 학자의 자생적 철학(1967) Philosophie et Philosophie Spontanée des Savants(1967)』(Maspero, 1974)을 비롯하여 『레닌과 철학』(Maspero, 1968; 2(?) éd. augmentée, 1969), 「마치오치에게 보낸 편지 Lettres à M.-A. Macciocchi」(1968~1969) (Feltrinelli, 1969),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 Réponse à John Lewis』(Maspero, 1973), 『자기 비판의 제요소 Eléments d'Autocritique』(1972) (Hachette, 1974), 『입장 Positions』(Editions Sociales, 1976) 등에서의 논의를 검토한다. 다음 제 6장은 후기 알튀세르(1976~1980)의 입장을 대표하는 『제 22차 당대회 22(?) Congrès』(Maspero, 1977), 『공산당 내에서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 Ce Qui Ne Peut Plus Durer dans le Parti Communiste』(Maspero, 1978)과 다른 논문들에서의 논의를 정리하고 맺음말에서는 알튀세르에 대한 나름대로의 평가를 시도한다.

알튀세르의 지적 활동에 대한 엘리어트의 시기 구분은 그가 이제까지의 평전들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았던 제 3기까지를 포괄했다는 점만을 제외한다면 실은 통상적인 것이다. 그도 다른 대부분의 논평자들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의 초기 저작들을 하나의 ‘체계’로 상정하면서 - 이 때문에 좋은 의미에서이든 나쁜 의미에서이든 ‘알튀세르주의’라는 상투적인 정식화가 사용된다 - 이후의 알튀세르 작업을 이러한 잣대를 기준으로 재단하게 된다. 그는 자신의 책의 말미(p. 340, n. 29)에서 에티엔 발리바르 Etienne Balibar의 말을 인용해서 이러한 자신의 평가를 뒷받침하고 있는데 이는 명백히 잘못이다. 여기서 엘리어트가 발리바르의 말로 인용하고 있는 부분의 맥락은 앵글로 색슨 마르크스주의자들 - 여기서 구체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1971~73년간 영국에서 활동하였던 『이론적 실천 Theoretical Practice』 그룹이다 - 이 ‘알튀세르주의’의 미망에 빠져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자기비판을 ‘오류’로 간주했던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즉 “초기의 알튀세르[……]는 매우 중요한 이론가이지만, 그러나 이후의 정정은 [……] 초기의 작업에 비추어볼 때 후퇴이다”라는 평가는 자칭 ‘알튀세르주의자’들의 고집이고 이에 대해 발리바르는 알튀세르의 초기 저작에 현존하는 ‘일정한 요소들로부터 하나의 체계를 구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으면서도 이후 “알튀세르가 이러한 체계를 해체하고자 - 단순히 그것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적 모순들을 발전시키고자 - 노력하였다” - 같은 맥락에서 피에르 마슈레이 Pierre Macherey의 말 - 는 사실의 의미를 무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엘리어트는 중기 및 후기의 저작들을 초기 저작들의 ‘각주들’에 해당한다고 위치지우고 있는데 이러한 평가도 마찬가지로 부당하다. 이것은 1968년 이후 알튀세르의 작업이 대부분 집단적인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는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관계만 보더라도 그의 『역사적 유물론의 5연구 Cinq Etudes diu Matérialisme Historique』(Maspero, 1974) - 엘리어트는 이 글을 인용하지만 가장 핵심적인 「잉여가치와 사회계급(정치경제학 비판을 위하여) Plus-Value et Classes Sociales(Contribution à la Critique de l'Economie Politique」은 인용하지 않는다 - 라든지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Sur la Dictature du Prolétariat』(Maspero, 1976) - 이 글은 발리바르와 알튀세르의 공동 연구로 계획된 것이라고 한다 - 는 알튀세르의 자기비판을 역사유물론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보자면 알튀세르와 그의 동료들의 저작들이 주로 발표되어 왔던 마스페로 Maspero의 ‘이론 총서 Collection Théorie’(알튀세르 감수)의 구성을 보아도 초기에는 1965년에 공간된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자본론』을 읽자』 외에 1966년에 마슈레이의 『문학 생산 이론을 위하여 Pour une Théorie de la Production Littéraire』 밖에 없다. 그러나 1968년 이후에는 ‘이론 총서’ 안에 독립된 시리즈로서 ‘텍스트 Textes’ ‘분석 Analyses’ ‘과학자를 위한 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ur Scientifiques’ ‘정치적 저술 Ecrits Politiques’ 등이 개설되어 발리바르, 도미니크 르쿠르 Dominique Lecourt, 미셸 페쇠 Michel Pêcheux 등등이 새로운 필진으로 가세하여 알튀세르의 프로그램 - ‘알튀세리안’들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론 Théorie’ 그룹의 ‘이론적 행동 강령’(그 ‘슬로건’은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론』을 읽자’이다) - 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다. 엘리어트가 ‘알튀세르주의의 쇠퇴기’라고 평가한 1976년 이후의 기간만 보아도 이들은 계속 중요한 저작들을 발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1년 이후 알튀세르가 더 이상 ‘공적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후에는 P.U.F.에서 발리바르와 르쿠르의 감수 하에 ‘이론적 실천 Practiques Théoriques’이라는 총서가 새로이 간행되고 있다. 이 새로운 총서는 기왕의 ‘이론 총서’의 프로그램을 프랑스 노동운동사에 대한 연구 - 그 주요한 필진은 쟝-루이 므와노 Jean-Louis Moynot, 제라르 노아리엘 Gérard Noiriel 등이다 - 로까지 확장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두 개의 총서 외에도 다른 출판사에서 동일한 프로그램 하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도 많은데 - 예를 들어 알튀세르 자신이 아셰트 리테레르 Hachette Littéraire에서 ‘분석 총서 Collection Analyse’를 개설하는데 여기에서 르네 발리바르 Renée Balibar(에티엔의 모친)의 『허구적 프랑스어들, 프랑스 국어와 문학적 문체들의 관계 Les Français Fictifs. Le Rapport des Styles Littéraires au Français National』(1974)와 『프랑스 국어, 프랑스 혁명 하에서 국어 정책과 그 실천 Le Français National. Politique et Practiques de la Langue Nationale sous la Révolution Française』(1974)이 공간된다 - 우리가 앞서 말한 『마르크스주의 고증사전』은 이러한 집단적 작업의 소산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소 장황하지만 다음과 같은 발리바르의 지적에 주목해 보자.


지금 프랑스에서 알튀세르적 사상, 알튀세르적 문제설정 problématique이 있는가 하는 문제 즉 이러한 문제설정에 따라 작업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프랑스에 마르크스주의적 사상, 마르크스주의적 이론지반 terrain이 있는가 하는 문제와 불가분이다. 프랑스에서 알튀세르적 이론의 유용한 활용[의 문제]는 프랑스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상황 및 그 계기적 진화라는 일반적 문제와 불가분이다. [……]

사실 알튀세르와 대결하지 confronter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지난 20여년간의 그리고 바로 지금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궤적 trajectoire을 진지하게 살펴볼 수는 없다. 아마도 프랑스에는 엄밀한 의미에서 하나의 폐쇄된 체계 또는 ‘학파’로서의 ‘알튀세르주의’란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프랑스에서는 [……] 소그룹의 사람들만이 알튀세르의 작업을 선취했던 것은 아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처음부터 불가피하게 논쟁과 모순적 경향들 [……] 속에서 수용되어 왔기 때문이다. [……]

[……] 지금 프랑스에서 진행되고 있는 사태를 살펴보면 알튀세르의 개입의 발자취 - 내 생각으로는 매우 깊은 흔적이지만 어떤 시각에서 보더라도 하나의 체계를 닮은 것은 아니다 - 를 여기저기서 발견할 것이다. (Diacritics, p. 47)


따라서 만일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알튀세르적 단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1959/60~1966/67년간에 시작되어 67/68년 이후에 발전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엘리어트가 말하는 ‘알튀세르주의의 소멸’로의 경향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한편 다시 엘리어트가 인용하는 발리바르의 다른 말로 돌아가 보자면 “알튀세르가 그에 대한 어떤 비판가들의 눈으로 그 자신의 텍스트들을 읽었다.” 즉 알튀세르가 “그의 본래의 입장에 대하여 부당하게 [자기]비판하였다”는 지적은 초기 알튀세르의 입장을 그 자신의 말대로 ‘이론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알튀세르가 말하는 ‘이론적 실천’(또는 ‘징후적 독해’) 등의 개념 또는 범주에 대한 해석의 문제로서 발리바르는 ‘이른바 알튀세르의 오류’는 비판가들이 시사하는 그러한 ‘특수한 형태’로는 규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실 바로 이 부분이 엘리어트의 평전이 갖고 있는 가장 결정적인 쟁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방금 살펴본 대로 초기 알튀세르의 입장을 하나의 ‘체계’로 상정하여 ‘알튀세르주의’를 조작해 낸다든지 또는 바로 그러한 시각에서 중기 내지 후기의 알튀세르의 작업을 왜곡한다든지 하는 문제도 모두 이 문제로 집약된다. 엘리어트가 중기의 알튀세르 작업에서 ‘알튀세르주의의 모순(또는 그 발전)’을 발견하고 후기 작업에서 ‘알튀세르주의의 소멸’을 확인하는 것은 초기의 작업에서 ‘알튀세르주의의 역사적 경향’을 나름대로 검출해 내는 것의 결과이다. 그것은 바로 알튀세르의 마오주의적 경향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엘리어트의 견해에 전혀 찬성할 수 없다.

우리는 우선 알튀세르 자신도 그러하고 그의 동료들도 그러하듯이 그들은 ‘알튀세르주의자’들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는 사실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는 마르크스주의의 모순들을 발견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추동해 나가는 그 기본 모순과 주요 모순을 발전시켜 나가는 데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모순들이라는 관점은 후기 알튀세르의 입장을 집약하는 테제이지만 우리는 이러한 테제의 입장에서 알튀세르와 그 동료들의 작업 전체를 의미있게 재구성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작업의 목적이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융합’의 역사에서 ‘스탈린적 편향’을 올바르게 해결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알튀세르가 마르크스의 ‘인식론적 단절’ - 나중에는 ‘정치적․철학적 단절’ - 이라고 불렀던 것도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즉 마르크스주의의 ‘3대 원천’을 구성하는 19세기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들과 그 ‘3대 구성 부분’ 간의 관계 - 양자는 철학․정치경제학․사회주의라는 상동성 homology을 갖는데 이러한 분류법의 기원은 모제스 헤스 Moses Hess의 것을 그대로 차용하여 ‘2개의 과학’이라는 정식화와 결합하는 카우츠키에게서 찾아진다 - 가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모순이고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발전의 현단게에서 그 주요한 형태는 경제주의 - 객관주의 - 와 주의주의(主意主義) - 역사주의/인간주의 - 의 결합으로서의 스탈린적 편향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이제까지 알튀세르 비판가들이 다양한 입장에서 다양하게 퍼부었던 비난들은 대체로 자신의 편향성을 드러내는 것들이 아닐 수 없다(엘리어트의 책, pp. 3~4, n. 7). 예를 들어 ‘교조주의자들’ - 그들은 반드시 스탈린주의자는 아니다 - 의 비판은 그렇다 치더라도 ‘무당파적 independent’ 마르크스주의자들(sic?) -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제외하면 모두가 스탈린주의자들이다 - 의 비판은 너무나 상투적이다. 우리의 상대인 엘리어트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의 입장을 ‘반․반알튀세르주의 Anti-Anti-Althusserianism’(같은 책, p. 10. 그는 자신의 책을 ‘병상의’ 알튀세르에게 헌정하고 있다)로 규정하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상당히 애매한 채로 남을 수 밖에 없는데 짐작컨대 ‘무당파’를 기본으로 하면서 트로츠키주의적 경향성을 갖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그의 글이 전개되어 나가는 대체적인 맥락이 앤더슨이나 특히 칼리니코스의 입장과 가깝다는 것에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데 앤더슨이야 우리가 설명할 필요도 없는 유명한 논객이지만 칼리니코스는 철학적으로는 이므르 라카토스 Imre Lakatos를(엘리어트라면 여기다 로이 바스카 Roy Bhaskar를 추가할 것이다) 정치경제학적으로는 토니 클리프 Tony Cliff와 마이클 키드론 Michael Kidron을 추종하고 있다. 실제로 프랑스에서도 알튀세르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가들은 트로츠키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알튀세르를 스탈린주의자이거나 마오주의자 - 대부분 무당파적 지식인들은 그들에게 양자는 구별될 필요가 없다 - 라고 규정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엘리어트는 특이하게도 스탈린주의와 마오주의를 구별하고 더욱이 역설적으로 알튀세르의 마오주의적 경향성을 검출해내는 과정에 병행하여 알튀세르에 대한 마오주의적 비판 - 그 대표적 논객은 알튀세르의 제자였던 자크 랑시에르 Jacques Rancière이다 - 을 광범위하게 원용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무당파적 지식인들의 비판에 대해 한번도 대응한 적이 없다. 예를 들어 엘리어트가 알려주듯이 그는 톰슨과의 논쟁(?)을 정중하게 거부한 바 있다. 한편 알튀세르는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서도 거의 관심을 표시하지 않는데 예를 들어 트로츠키의 스탈린에 대한 비판을 반비판하면서 그것의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적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남는 것은 마오와 그람시에 대한 알튀세르의 입장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알튀세르를 마오주의자로 몰아부치는 것은 꽤 상투적인 수법인데 이때 무시되는 것은 알튀세르의 주된 논적 중의 하나가 그람시였다는 사실 - 초기 알튀세르가 비판한 루카치는 부차적이다 - 이다. 이것은 최근에 발리바르 등의 증언에 의해서도 확인될 수 있다. 그렇자면 왜 그람시가 주된 논적이 되는가? 그것은 알튀세르의 이론 작업이 P.C.F.의 유로코뮤니즘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 - 앞서 인용한 켈리의 글을 보라 - 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엘리어트도 이 점에 대해서 주목하고 있지만 그러나 그는 국제운동사에서의 중․소 논쟁을 보다 직접적인 맥락으로 오인하는 바람에 - 예를 들어 그는 알튀세르의 ‘반인간주의’가 1960~63년간 중소분쟁에서 마오의 입장으로 환원된다고 주장한다 - 알튀세르와 그람시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따라서 알튀세르와 마오의 관계도 왜곡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맥락을 옳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앞서 지적한 대로 국제 운동사에서의 보편적 논쟁이 프랑스에서 특수 역사적인 형태로 관철된다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역사적 ‘융합’의 형재적 형태로서의 ‘스탈린적 편향’을 말하는 것인데 알튀세르는 그 근원을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에서 찾고자 하는 것이다. 이때 엘리어트를 비롯한 대부분의 알튀세르 비판가들이 애써 발견한 이른바 ‘알튀세르주의의 모순’도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아래에서는 우선 국제운동사에서의 논쟁의 보편적인 맥락을 잡기 위하여 ‘스탈린 비판’ - 그것은 단순히 그의 ‘품성 personnalité’에 대한 비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 이후 소련 철학계에서의 논쟁을 살펴볼 것이다. 그런 다음에 알튀세르의 작업이 어떤 의미에서 ‘스탈린적 편향’을 정정하려는 이론적 노력인가를 보다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2. 소련 철학계의 논쟁

소련 철학계에서의 알튀세르에 대한 평가는 엘리어트도 인용하고 있는 토마스 네메스 Thomas Nemeth의 「알튀세르의 반인간주의와 소련 철학 논쟁 Althusser's Anti-Humanism and Soviet Philosophy」(Studies in Soviet Thought, Vol. 21 [1980] No. 4)에서 그 윤곽을 알 수 있다. 네메스에 의하면 소련 철학자들 중에서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내린 사람은 디치오에프 O. I. Džioev라고 하는데, 그는 주로 변증법에 있어서 마르크스-헤겔 관계와 반영론으로서의 논리-역사주의에 대해서는 알튀세르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이러한 변증법이 ‘역사 인식론’으로서 갖는 한계 즉 이행론에 있어서 역사주의의 무시, 역사에서의 개인의 역할 즉 인간주의의 무시라는 ‘구조주의’적 편향을 지적한다. 요컨대 그에게 있어 알튀세르의 ‘철학관’은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엄밀히 구별하는 탓에 ‘세계관’으로서의 성격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평가는 실은 소련 철학계에서의 ‘스탈린 비판’의 역사적 맥락을 모르고서는 별다른 논평 없이 무비판적으로 인용할 뿐이다. 즉 알튀세르의 철학과 소련 철학은 차이와 대립만이 있을 뿐이다. 사실 엘리어트에게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소련이나 기타 동구 철학계에서의 논쟁과 알튀세르의 입장을 의미있게 연결시키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그에게 이론적인 ‘스탈린 비판’은 - 트로츠키(주의자들)를 제외한다면 - 이제까지 한번도 없었으며 알튀세르의 시도도 -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무시하므로 - 처음부터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소련이나 동구에서의 철학 논쟁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또한 알튀세르에 대한 그의 평가를 상당히 왜곡시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을 읽자』에서 일레노프 Evald Vasilievich Il'ienkov를 (긍정적으로) 거명하고 있고 르쿠르는 『위기와 그 쟁점. 철학에서 레닌의 입장에 대한 에세이 Une Crise et Son Enjue. Essai sur la Position de Lénine en Philosophie』와 『뤼센코. ‘프롤레타리아 과학’의 현실 역사 Lyssenko. Histoire Réelle d'une 'Science Prolétarienne'』에서 케드로프 Bonifatii Mikhailovich Kedrov에 (비판적으로) 주목하고 있다. 바로 이 케드로프와 일렌코프가 소련 철학계에서 스탈린 비판을 일정하게 추동해 왔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하고자 한다. 우리는 케드로프와 일렌코프의 문제제기를 검토하고 그들을 알튀세르와 비교함으로써 알튀세르의 문제제기가 갖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검출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우리는 아직 소련 철학계의 논쟁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것은 우리나라의 특수한 상황과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또한 국제운동사에서 스탈린적 편향의 문제가 아직 옳게 해결되어 있지 못한 보편적 상황과도 관련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 케드로프/일렌코프 논쟁을 중심으로 그 대체적인 경과와 쟁점만을 추출해 보기로 한다.

케드로프 논쟁은 1958년에 간행된 콘스탄티노프 F. V. Konstantinov 감수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기초』의 서술 체계를 둘러싸고 1950년대말~1960년대초에 전개된다. 이 철학 교과서는 서론, 제 1부 변증법적 유물론, 제 2부 역사적 유물론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서론과 제 1부는 글레제르만 G. E. Glezerman, 코프닌 P. V. Kopnin, 쿠츠네소프 I. V. Kuznetsov, 로젠탈리 M. M. Rozental' 등이 담당하고 제 2부는 콘스탄티노프, 페도세예프 P. N. Fedoseyev, 글레제르만, 캄마리 M. D. Kammari 등이 담당한다. 논쟁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것은 서론의 「제 1장: 철학의 대상」의 서술 체계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1. 철학의 근본문제. 철학의 주요한 유파로서의 유물론과 관념론

2.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대상. 다른 과학들에 대한 철학의 관계

3.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사상적 무기이다.


케드로프는 여기서 철학과 다른 과학들간의 관계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진정한 주제 subject-matter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새로운 철학관에 따르자면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과학의 과학’ 즉 ‘일반적 과학’이며 이 때문에 그 대상은 ‘세계 전체 the world as a whole’가 아니라 물질 운동의 일반적 법칙일 뿐이다. 철학 교과서의 서술 방식에 대한 케드로프의 이러한 ‘미묘한 견해차’는 사실 철학 교과서의 체계에 내재하고 있는 기묘한 절충성 - 그 내용은 차차 밝혀질 것이다 - 을 여지없이 폭로하는 효과를 갖는다. 그것은 우선 모든 철학의 근본 문제라고 생각되어 왔던 물질과 의식간의 관계를 변증법의 기본 법칙(물질운동 뿐만 아니라 그 반영으로서의 인식과정까지 해당)에 포섭․종속시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 1부의 서술 순서는 전도되어야 한다. 더욱이 마르크스의 철학의 주제․대상이 케드로프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의 특수한 응용에 불과한 역사적 유물론은 이미 철학이 아니라 다른 과학들 중의 하나 즉 ‘특수한 과학’으로 위치지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 2부는 철학 교과서에서 삭제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철학은 ‘일반적 과학’이므로 이데올로기로서의 ‘세계관’과는 엄밀하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당파성은 ‘주관적 당파성’이 아니라 ‘객관적 당파성’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케드로프에 의해 제기된 ‘근본 문제론’에 대한 ‘일반 법칙론’에서의 비판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성격 또는 정의에 대한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케드로프 논쟁의 역사적 맥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4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는 이미 당시에 스탈린적 철학관에 대해서 일정한 의문을 갖고 있었던 것 같다. 1947년 알렉산드로프 G. F. Aleksandrov 감수의 『서구 철학사』에 대한 ‘철학 토론’에서 쥬다노프 A. A. Zhdanov는 철학 전선에서 견지되어야 할 투쟁 노선으로서 당파성의 문제를 새삼 강조하게 된다. 『서구 철학사』는 1932~33년에 간행된 미틴 M. B. Mitin과 라주모프스키 I. Razumovskij의 『변증법적 및 역사적 유물론』이 1938년 스탈린의 『변증법적 및 역사적 유물론』에 의해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린 상황에서 새로운 철학 교과서를 준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철학 사전』과 함께 미틴, 유딘 P. Yudin 등의 감수로 1939년부터 간행되기 시작한 『세계철학사』의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었다. 케드로프는 『서구 철학사』가 쥬다노프에 의해 비판된 직후 창간된 『철학의 제문제』지의 초대 편집장이 된다. 그런데 그는 쥬다노프에 반하여 양자물리학자인 마르코프 M. A. Markov의 논문과 멘델주의자인 슈말가우젠 I. I. Shmal'gauzen의 논문을 게재하고 이 논문들에 대한 반비판을 기각한다. 이러한 그의 전선 이탈 또는 노선 이탈은 즉각 편집장직에서의 해임으로 응징되고 같은 해인 1948년에 소련 철학사에 길이 남을 ‘뤼센코 T. D. Lysenko 사건’이 터진다. 당시 케드로프의 반응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는데 문예전선에서의 유사한 쥬다노비즘 현상(1946~48)으로 미루어보아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1953년 스탈린의 사망 이후 케드로프는 자신의 철학관을 보다 체계적으로 개진할 기회를 맞는다. 1954년 콘스탄티노프 감수의 『역사적 유물론』 제 2판(초판은 1950년)의 공간과 함께 대망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알렉산드로프 감수로 공간된 것을 계기로 - 다음 해에 로젠탈과 유딘이 새로운 『철학소사전』을 펴내고 1957년부터 디니크 M. A. Dunnik 등의 감수로 『세계철학사』(전 6권)가 간행된다 - 그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스탈린적 서술 체계의 비판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마르크스주의적인 변증법적 방법’을 4개의 테제(상호 관련 및 의존, 운동 및 발전, 양질 전화, 내적 모순)로 요약하고 그것의 우위 하에서 ‘마르크스주의적인 철학적 유물론’을 3개의 테제(세계의 물질성, 물질의 의식에 대한 선차성, 세계의 인식가능성)로 정리한 다음 그러한 7개의 테제들을 사회의 역사에 응용함으로써 ‘역사적 유물론’을 도출하는 스탈린적 서술 방법 - 이 때문에 변증법적 및 역사적 유물론‘이라는 명칭이 나온다 - 에 대하여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1954년의 철학 교과서는 물론이고 1958년의 철학 교과서도 이러한 스탈린적 서술 체계를 기본적으로 수용한다. 후자에서는 유물론이 변증법의 우위에 위치하고 변증법의 기본 법칙으로서 ’부정의 부정‘이 복권되지만 그러나 스탈린의 서술 방법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변증법과 유물론의 분리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것이 우리가 앞에서 말한 1958년 교과서의 절충적이고 케드로프는 바로 이것을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1954년 논쟁은 이후 논쟁의 맹아를 형성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케드로프의 문제제기는 소련 철학계에서 그대로 수용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통상적으로 소련 철학사에서 케드로프는 스탈린적 ‘존재론주의’ 또는 그 경향(유물론주의?)에 대한 ‘인식론주의’ 또는 그 경향(변증법주의?)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평가된다. 1969년 오이제르만 T. I. Oizerman은 이러한 양대 경향을 ‘세계관’으로서의 철학이라는 관점에서 절충하여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서의 ‘변증법적 및 역사적 유물론’을 ‘과학적 철학의 세계관’ 또는 ‘과학적 이데올로기’로 ‘다시’ - 이러한 정식화는 이미 스탈린에 의해 제출되었던 것이다 -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오이제르만 류의 철학관은 1970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열린 철학학술회의에서 공인받는다. 예를 들어 1979년 콘스탄티노프 감수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기초』는 논쟁의 직접적 대상이 되었던 서론 부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제 1장. 철학, 그 주제와 다른 과학들에 대한 지위

1. 철학의 주제 개념의 발전

2. 철학의 근본 문제

3. 변증법과 형이상학

4. 마르크스-레닌주의 철학의 주제와 다른 과학들과의 관계

5. 철학의 당파성


여기서도 변증법과 유물론을 분리하여 취급하는 것은 여전하다. 단 철학의 당파성의 문제가 이제는 철학의 성격 내지 정의 속에 용해되어 들어간다. 1979년 교과서를 1958년 교과서와 비교해보면 대체로 역사적 유물론 부분이 확장된다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 두어야 할 것은 1958년 교과서의 「제 16장: 경제적 사회구성체의 교체의 합법칙성으로서의 사회혁명」에서 다루어졌던 사회주의 혁명 및 건설론이 1979년 교과서의 해당 부분인 「제 15장: 사회 혁명」에서는 삭제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련 철학 서술 체계의 중요한 변경의 하나인데 그것은 1959년 쿠지넨 O. V. Kuusinen 감수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기초』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 독립된다.

그렇다면 소련의 철학 논쟁에서 케드로프의 문제제기가 제대로 해결되지 못하고 그냥 절충될 뿐인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선 스탈린의 철학관에 대한 케드로프의 문제제기가 지극히 근본적이어서 20년대의 철학 논쟁으로까지 소급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주지하는대로 20년대 논쟁은 1922~23년간 철학에서의 ‘청산파’(미닌 S. Minin, 엔치멘 E. Enchmen, 아도라츠키 V. V. Adoratskij 등의 ‘과학도 아니고 이데올로기도 아닌 마르크스주의 철학 그 자체’의 존재에 대한 부정론자들)에 대한 투쟁에서 시작하여, 1924~29년간 ‘기계론자들’(티미리아제프 A. K. Timiriazev, 스테파노프 I. I. Stepanov, 악셀로드 L. Akselrod 등의 과학주의자들 또는 ‘부하린주의의 철학적 분견대’)에 대한 ‘변증론자들’(데보린 A. M. Deborin, 스텐 I. Sten, 카레프 N. Karev 등의 철학주의자들 또는 ‘데보린주의자들’)의 비판을 거쳐, 1930~31년간 ‘변증론자들’(‘트로츠키주의의 철학적 무기’로서의 ‘멘셰비키화적 관념론’의 주장자들 - 데보린은 플레하노프의 제자였다)에 대한 ‘철학의 볼셰비키화론자들’(미틴, 유딘 등)의 비판으로 종결된다. 이렇게 해서 확인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레닌적 단계’는 스탈린의 『레닌주의의 기초』에서 정식화된 사상․이론․방법으로서의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철학적 기초를 우선 엥겔스를 통한 헤겔의 영유 - 1925년에 공간된 『자연 변증법』에 따라 변증법은 존재론화되고 부정의 부정은 폐기된다 - 에서 찾고 그것에 레닌적 특징 - 1922년에 공간된 「전투적 유물론의 의의」에 따라 철학의 당파성을 철학=과학적 이데올로기로 재해석한다 - 을 추가한다. 스탈린의 『변증법적 및 역사적 유물론』이 전자의 측면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면 쥬다노프는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 왜냐하면 후에 스탈린에 의해 부정되므로 - 후자의 측면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스탈린 사후의 철학 논쟁에서 케드로프가 때로는 관념론자, 때로는 변증론자로 규정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20년대의 논쟁과 유사한 맥락에서 평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케드로프의 철학관은 과연 옳은 것일까? 우리의 생각으로 그의 입장은 스탈린적 철학관과 완전히 단절되어 있는 것은 아닌 것 같다. 특히 그는 위에서 지적된 엥겔스를 통한 헤겔 영유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한 것 같다. 그는 변증법의 존재론화에 반대하는 대신에 부정의 부정의 복원을 주장한다. 이러한 문제는 케드로프의 철학관을 지지하는 일렌코프의 경우 - 그는 여러 모로 20년대의 아이삭 루빈 Isaac Rubin을 연상케 한다 - 에 좀더 뚜렷하게 부각된다. 그는 엥겔스보다도 마르크스 특히 『자본론』을 통해 헤겔을 영유하고자 하면서도 역시 케드로프와 마찬가지로 ‘변증법=인식론=논리학’이라는 도식에 집착한다. 그런데 케드로프와 일렌코프의 이러한 동요는 결국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한 절충적 입장으로 귀결되고 역사주의/인간주의와의 단절을 부정하게끔 한다. 실제로 일렌코프는 『자본론』의 객관법칙론이 초기 마르크스의 역사주의/인간주의의 ‘새로운’ - 과학적․혁명적 - 형태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케드로프/일렌코프의 입장은 사실 소련 철학계의 전체적인 동향과도 관련된다. 예를 들어 1979년 모스크바국립대학 철학학술회의에서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정의 속에 ‘인간’ 개념을 포함시킬 필요성이 새삼 강조되고 철학적 인간학의 발전이 제안된다.

도대체 철학적 인간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이 과연 마르크스주의적인가? 이러한 문제는 변증법적 유물론보다는 역사적 유물론과 관련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검토될 수 있다. 소련에서는 1963년 철학연구소 내에 ‘사회 연구의 철학적 문제에 대한 세미나’가 개설되어 구레비치 A. Ia. Gurevich, 굴 리가 A. V. Gulyga, 레바다 Iu. A. Levada등을 중심으로 ‘역사인식론’에 대한 연구가 진행된다. 이것은 실은 역사 연구자들이 제기한 ‘역사학에서 개인숭배의 제 귀결의 청산’(게프터 M. Ia. Gefter)에 대한 요구에 응답하기 위한 것이었다. 실제로 스탈린의 역사 발전의 ‘5단계 piatichlenka’론에 대한 의문제기를 필두로 하여 ‘아시아적 생산양식’론의 복원, 노예제론의 부정, ‘소경영 생산양식’론의 가능성, 다우클라드론의 현실성 등의 다기한 문제가 제기되고 이와 관련하여 이행론에서는 노예제에서 봉건제로의 이행을 추동하는 모순의 내적 또는 외적 성격의 문제, 절대주의 형성 과정의 기본 요인으로서 불균등발전에서의 진보와 후퇴의 복합적 결합으로서의 ‘예상적 반영 anticipatory reflection’의 문제 등이 제기되었다. 역사학의 영역에서 제기되는 이러한 문제들은 역사인식론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선 사회구성체론 그 자체에 대한 재검토를 요구한다. 즉 사회의 역사에서 ‘경제적으로 또는 계급적으로 중립적인’ 요인들, 즉 ‘토대에도 상부구조에도 위치지울 수 없는’ 요인들에 대한 논쟁이 제기된다. 그러한 요인들은 지리적 환경을 비롯한 자연적 조건, 인구학적․생물학적 요인들을 비롯한 문화적 전통 등의 민족적 특수성, 가족 및 기타 일상생활을 비롯한 사회․심리 현상들을 포함한다. 이러한 요인들은 대부분 스탈린의 『변증법적 및 역사적 유물론』(1938)에 의해 배제된 것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1950)에 의해 재도입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러한 논쟁은 결국 사회구성체를 토대와 상부구조만으로 정의할 수 있는가 라는 문제와 나아가 사회구성체의 개념과 현실의 사회 간의 관계의 문제 - 이것은 단순히 ‘보편의 특수화’로 해결될 수는 없다 - 를 제기하는 것이다.

사회구성체론 그 자체에 대한 이러한 논쟁은 토대의 결정적 역할과 상부구조의 반작용의 관계에 대한 문제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최근 소련 철학계에서는 토대로서의 경제의 개념을 재정의하면서 상부구조 특히 국가가 경제적 토대로 편입되는 문제와 동시에 ‘과학-기술 혁명’(STR)에 조응한 ‘비물질적’ 요소, 나아가 ‘정신적’ 요소의 편입 문제까지도 제기된다. 즉 생산력에 물질 뿐만 아니라 ‘인간’ - 노동력이 아니다! - 까지를 포함하여 전자를 결정적 요소로, 후자를 ‘주요한’ 요소로 규정하게 된다.

사회구성체론과 관련된 이러한 논쟁은 결국 ‘세계사의 합법칙성’에 대한 논쟁으로 집적된다. 여기서 ‘5단계’론을 유지하면서 인류사회 전체의 역사적 발전 단계를 표상하는 ‘세계체계로서의 사회구성체’론을 주장하는 세메노프 Iu. I. Semenov의 견해에 대해 구레비치는 역사에서의 ‘일반적 법칙’과 ‘구체적 합법칙성’을 구별하고 양자를 매개하는 ‘인간’의 역할에 의해 전자의 결정성이 수정되어 후자의 비결정성으로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즉 구레비치는 세메노프와는 달리 구체적 사회의 현실적 역사 속에서 ‘선형적 시간성’을 ‘복합적 시간성’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적 유물론에서의 ‘인간’의 문제는 실은 50년대에 이미 추가리노프 V. P. Tugarinov에 의해 제기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전거로 하여 역사적 유물론의 출발 범주가 생산양식이 아니라 ‘실천활동’이라고 주장하면서 소위 ‘구성체 접근법’에 대하여 ‘활동 접근법’을 제안한다. 이러한 견해는 플레트니코프 Iu. K. Pletnikov에 의해 계승되는데 그도 자신의 입장의 전거를 청년 마르크스의 저작들에서 구한다. 이러한 입장은 구레비치의 견해를 계승하는 코발손 M. Ia. Koval'zon에 의해 비판되는데 그는 사회의 역사에서의 ‘자연사적 측면’(객관적 합법칙성)과 ‘인간주의적 측면’(주체적인 창조적․의식적 활동)의 관계에서 전자를 주요한 것으로, 후자를 부차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논쟁은 1980~81년간 철학연구소 내에서 다시 전개되는데 최근 사가토프스키 V. N. Sagatovskii 등이 제시한 객관 법칙과 주체 요인 간의 ‘상호작용’론 - 그들은 또한 토대와 상부구조 간의 ‘상호작용’론도 제시하는데 이제 ‘최종심’은 단기와 구별되는 장기로 이해된다 - 은 이러한 논쟁을 ‘절충’하려는 시도일 뿐이다.

역사적 유물론의 영역에서 전개되어 온 이상의 논쟁은 역사학자들의 문제제기에 대한 인식론적 대응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이미 본 바와 같이 이러한 논쟁은 변증법적 유물론의 영역에서 전개되어 온 논쟁과도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앞서 본 바와 같은 역사주의와 인간주의에 대한 케드로프와 일렌코프의 타협적 입장이 이제 구레비치/코발손의 입장을 매개로 하여 사가토프스키와 같은 절충적 견해로까지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즉 변증법적 유물론에서 스탈린적 편향의 문제를 옳게 해결하지 못한 결과는 역사적 유물론에서 절충주의를 낳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네메스의 알튀세르에 대한 평가는 전혀 부당한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의 스탈린적 편향은 왜 그 자체로서 해결되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는 이제 스탈린적 편향의 핵심을 검출해내지 않으면 안될 순서에 이르렀다. 우리는 앞에서 1958년 철학교과서에서 사회주의 혁명 및 건설론 요컨대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론이 1959년 쿠지넨 교과서에서는 각각 제 4부와 제 5부로 독립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다. 이러한 혁명 및 건설론은 1962년 수슬로프 M. A. Suslov의 제안으로 마르크스․레닌주의의 독립된 구성 부분으로서의 ‘과학적 공산주의’ - 이것이 이전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대하여 갖는 외형상의 유사성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 로 재구성된다. 과학적 공산주의론은 사회주의 사회 및 그 국가의 성격에 대한 이론으로서 사회주의의 정치경제학으로서의 ‘사회주의적 생산양식’(SMP)론을 그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SMP론이야말로 스탈린적 편향의 이론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1951년 정치경제학 교과서 초안에 대한 토론에 개입하기 위하여 1952년에 쓴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문제』에서 ‘광의의 정치경제학’ - 이것이 역사적 유물론과 정치경제학의 매개항이다 - 의 입장에서 생산양식의 기본법칙론을 전개하고 그에 준거하여 SMP론의 기본적 논점들을 제시한다. 이러한 지침에 따라 서술된 것이 오스트로비치아노프 K. V. Ostrovitianov와 레온티에프 L. A. Leontiev등이 저술한 1954년의 『정치경제학 교과서』이다. 이러한 정치경제학의 서술 체계를 둘러싸고 앞서 본 바와 같은 철학 논쟁과 유사한 방식으로 정치경제학 논쟁이 전개된다는 것은 극히 시사적이다.

이러한 SMP론의 현단계는 아발킨 L. I. Abalkin등의 ‘선진 사회주의’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브레즈네포가 1967년에 최초론 언급한 이후 1971년 제 24차 당대회에서 정식화되어 1977년의 개정 헌법에서 공식화된다. 그것은 흐루시초프가 1959년 제 21차 당대회 및 1961년 제 22차 당대회에서 선언한 ‘사회주의의 완전한 최종적 승리’에 조응하는 ‘공산주의 건설’ 노선을 ‘대체’하는 것으로서 ‘선진 사회주의’라는 독립적인 역사 단계를 설정함으로써 공산주의로의 경로와 일정을 수정하고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전략과 잔술을 보다 구체적․현실적으로 정의한 것으로 평가된다. 세메노프 V. S. Semenov에 의하면 사회주의의 선진성 또는 성숙도는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재생산 과정 속에서 공산주의의 건설을 실현할 수 있는 단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이론은 STR을 그 추동력으로 하는 사회주의적 생산양식의 발전 속에서 사회주의의 공산주의로의 ‘성장전화 pererastat’를 규정하는 것인데 이러한 의미에서 선진 사회주의론은 공산주의론을 ‘가상적’으로 대체한다(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적 공산주의론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이데올로기적 이론은 아닐까?). 이러한 선진 사회주의는 그 건설 과정의 기간(1917~67) 이상으로 지속되는 protracted/prolonged 역사 시대이며 그 본질적 특징은 STR이다. 이상과 같은 선진 사회주의론을 도식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


주: (1) 흐루시초프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최종적 승리’가 1950년대말~60년대초에 이루어졌다고 선언한다.

(2) 동구권은 50년대말~60년대초에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이룩한다.

(3) 중국에서의 사회주의 ‘초급 단계’/저차 단계 = 사회주의 건설 또는 선진 사회주의 건설 또는 ?


이와 같은 도식을 이론적으로 성립할 수 있게 하는 근거는 SMP론인데 그것은 그 자체 발생․발전하는 유기체로서 그 발전의 최고 단계로서의 선진 사회주의가 곧 공산주의 건설과 일치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회주의의 공산주의로의 ‘성장 전화’의 추동력이 STR에서 구해지는 것은 사회주의의 기본 경제법칙이 ‘욕구의 합리적 충족’이고 그것은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 - 이것은 후에 설명된다 - 에 의해 실현된다는 것에 의해 보완된다.

한편 이러한 선진 사회주의의 상부구조 - 그 주요한 이론가는 예의 글레제르만이다 - 는 어떤 성격을 갖는가? 그것은 우선 국가론의 차원에서는 1977년 개정 헌법에서 ‘노동자․농민․인텔리 기타 근로인민의 국가’로서의 ‘전인민의 국가’로 규정된다. 그러한 국가는 사회계급들이 존재하지만 그것들간의 관계는 비적대적이므로 계급독재적 성격을 갖는 것이 아닌데 그대신 ‘대외적 위협’(제국주의 진영의 실존)과 ‘대내적 일탈’(비사회주의적 개인 또는 시민의 실존)에 대항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광의의 국가론’?).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국가는 사회주의로의 이행 과정에서만 존재하고 (선진) 사회주의 하에서는 그것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전인민의 국가만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러한 전인민의 국가론은 실은 흐루시초프가 1961년의 ‘신강령’ - 1919년 제 8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제 2차 당강령(‘사회주의 건설 강령’)에 대하여 ‘공산주의 건설’을 선언하는 강령으로서 이는 1981년 제 26차 당대회에서의 결의에 따라 1986년 제 27차 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에 의해 그 ‘신판’으로 수정된다 - 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그 역사적 사명을 완수했다”고 선언하면서 최초로 정식화한다. 그리고 그러한 정식화의 맹아는 이미 스탈린에게 있었는데 그는 1936년 ‘신헌법’ - 1918년에 채택된 레닌 헌법(‘사회주의 이행헌법’)에 대하여 ‘사회주의 승리’를 선언하는 스탈린 헌법으로서 이는 1977년에 와서 브레즈네프에 의해 개정된다 - 에서 소련 사회에서의 계급적대의 소멸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종언을 선언하고 ‘노동자․농민의 국가’라는 새로운 규정을 채택하는 것이다(여기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민주적 독재’ 간의 교묘한 말장난에 주목하라). 그러한 선언은 1939년 제 18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의 결정적[또는 완전한] 승리’ 테제에 의해 추인되고 이 때부터 그 토대로서의 SMP론으로의 탐험이 시작된다.

한편 앞서 본 것처럼 선진 사회주의론은 STR론과 관련하여 생산력으로서의 ‘인간’의 문제를 제기할 뿐만 아니라 전인민국가론과 관련하여 ‘사회주의적 생활양식’론을 제기한다. 1971년 제 24차 당대회에서는 단편적으로만 언급되는 이 규정은 1976년 제 25차 당대회에서 전면적으로 검토되고 역시 1977년 개정 헌법에서 공식화된다. 바로 이 규정과 관련하여 역사적 유물론에서의 구성체 접근법과 활동 접근법 간의 ‘절충’의 근거가 적극적으로 구해지는데 부텐코 A. P. Butenko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전거로 하여 그것을 ‘생활 활동의 제 형태의 총합’으로 규정한다. 이러한 생활양식은 그 물질적 조건으로서의 생산양식과 구별되면서도 또한 통일된다. 사회주의적 생활양식은 그 자체 규범적 의미를 가지면서 ‘당의 중심성’을 실현하는 ‘새로운 인간형’의 창조에 대한 요구로 통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의 우위’ 하에서의 이론적 절충에도 불구하고 논쟁은 끊이지 않는데 예를 들어 1980년대 이후 가열되는 사회주의 모순 논쟁은 구래의 사회주의 기본 법칙 논쟁의 재연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실은 선진 사회주의론의 핵심으로서 STR론과 사회주의적 생활양식론의 맹아가 이미 스탈린에게서 발견된다는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는 이미 『레닌주의의 기초』(1924)에서 새로운 작업 스타일(작풍)로서 ‘아메리카적 방식’을 요구했을 뿐만 아니라 1936년 ‘신헌법’을 채택하면서 “인간이 가장 귀중한 자본(sic)이다”라는 슬로건을 제시한다. 물론 전자는 당과 국가의 일꾼들에게 요구되었던 것이지만 후자는 명시적으로 인간을 생산력에 포함시키는 것으로서 후자의 발전에 따라 전자가 전사회로 확대적용될 가능성은 항상 잠재해 있다고 할 것이다.

이상과 같은 소련 철학계에서의 논쟁과 비교해 볼 때 알튀세르의 문제제기의 보편성과 특수성이 보다 객관적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현상적으로 지적될 수 있는 논점들을 간단히 열거해 두자면 먼저 소련 논쟁에서는 스탈린적 편향의 문제가 철저하게 그 뿌리에 이르기까지 검토되지는 못한 것 같다. 이는 스탈린적 편향의 핵심을 SMP론으로 파악하고 그러한 시각에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문제를 검토하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다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철학자들의 무능력 때문만은 아니고 궁극적으로는 우리가 본 바대로 SMP론이 이미 철학의 영역에서 독립된 영역에서 다루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이 때문에 스탈린 사후 소련 철학계에서의 논쟁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는 존재론적 경향과 인식론적 경향을 절충하고 - 그 전거는 ‘변증법=인식론=논리학’이라는 헤겔적 정식화이다 - 역사적 유물론에서는 구성체적 접근법과 활동적 접근법을 절충한다 - 그 전거는 예의 반영론으로서의 논리역사주의이다. 소련 철학계의 이러한 상황은 우리가 처음에 언급한 다치오예프의 알튀세르 평가에 정확히 반영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알튀세르의 작업이 그 생명력을 얻는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탈린적 편향의 이론적 핵심이 SMP론이라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 여기서 GC론에 대한 그의 비판이 파생된다 - 그러한 편향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서의 경제주의와 주의주의 - 인간주의는 그 극단이다 - 의 결합이라는 특수한 형태로 실현된다는 것을 발견한다. 더욱이 그는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역사적 융합’에서 불가피했던 이러한 편향의 근원에는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이 있음을 밝혀 낸다.


3. 다시 알튀세르로

이제 다시 엘리어트의 알튀세르 평전에 대한 검토로 돌아가자. 앞서 본 바와 같이 엘리어트는 마르크스주의의 'partisan/artisan'으로서의 알튀세르의 이론적 편력을 다음과 같이 3기로 나눈다.

1960~65: 혁신적 innovative 철학자로서의 활동기(엘리어트의 제 1~3장의 대상)

1968~75: 침체된 역사의 일화(제 4~5장)

1976~78: ‘무당파적 열성자 independent militant’(sic)로서의 활동기(제 6장)

제 1기의 작업은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론』을 읽자』로 집약되고 1966년의 「이론, 이론적 실천과 이론 구체성.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투쟁 Théorie, Pratique Théorique et Formation Théorique. Idéologie et Lutte Idéologique」(미공간)과 「역사적 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 Matérialisme Historique et Matérialisme Dialectique」은 이것을 요약․정리하는 글들이다. 제 2기의 작업은 『레닌과 철학』,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 국가장치(연구노트) Idéologie et Appareils Idéologiques d'Etat(Note pour une Recherche)」,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 『자기 비판의 제요소』 등이고 1967년의 『철학과 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은 그 개시이다. 한편 1975년의 「철학에서 마르크스주의자가 되는 것은 단순한 일인가?(아미엥의 주장) Est-il Simple d'Etre Marxiste en Philosophie?(Soutenance d'Amiens)」은 제 1기 및 제 2기의 작업을 요약․정리하는 글이다. 제 3기의 작업은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 Enfin la Crise du Marxisme!」,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 Marxisme Aujourd'hui」, 『당내에서 더 이상 계속될 수 없는 것』 등이다.

한편 이러한 알튀세르의 이론적 편력은 마르크스의 경우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그 정치적 입장의 변화 즉 제 1기의 ‘정통주의’(sic) -> 제 2기의 ‘마오주의’(sic) -> 제 3기의 ‘좌익 유로코뮤니즘’(sic)으로의 이행에 의해 추동된다. 이때 제 1기에서 제 2기로의 이행의 계기는 1966년의 「문화혁명에 대하여 Sur la Révolution Culturelle」(익명)와 1967년의 「이론적 노동에 대하여. 곤란과 자원 Sur le Travail Théorique. Difficultés et Ressources」에서 제 2기에서 제 3기로의 이행의 계기는 1974년의 「새로운 것 Quelque Chose de Noveau」과 1976년의 『제 22차 당대회』에서 각각 구해진다. 이제 이러한 엘리어트의 설명에 대해서 검토해 보자.

초기 알튀세르의 작업을 특징지우는 가장 기본적인 내용은 이른바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테제로 집약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청년 마르크스와 장년 마르크스의 이론적 입장의 변화를 이른바 마르크스주의의 3대 원천과 3대 구성 부분의 의미를 재해석함으로써 확인하는 것이다. 독일의 고전적 관념철학(특히 헤겔과 포이에르바하)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특수성, 영국의 고전적 정치경제학(특히 리카도)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의 특수성, 그 귀결로서의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에 대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특수성이 문제가 된다. 여기서 초기 알튀세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헤겔 변증법에 대한 마르크스 변증법의 특수성, 리카도 정치경제학에 대한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또는 보다 정확히 정치경제학 비판으로서의 역사과학의 특수성이다. 이것은 1956년 제 20차 당대회 이후 ‘스탈린주의’(sic) = 경제주의 비판의 명목으로 역사주의와 인간주의가 부활하는 상황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스탈린적 편향’의 문제를 옳게 해결하기 위한 시도이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우선 이데올로기적 철학(‘세계관’)과 구별되는 과학적 철학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것은 철학의 당파성에 대한 쥬다노프 식의 편향을 옳게 해결하기 위한 시도이다. 그러한 철학은 우선 ‘이론의 이론’인데 전자의 이론은 과학적 이론 뿐만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이론까지 포함하므로 후자의 이론은 과학들의 역사 - 특히 그 전사로서의 이데올로기적 이론에서 그 본사로서의 과학적 이론으로의 이행 - 의 이론이다. 여기서 우리는 초기 알튀세르에 대한 가스통 바슐라르 Gaston Bachelard의 ‘역사적 인식론’과 죠르쥬 캉기옘 Georges Canguilhem의 ‘인식론적 역사’의 영향을 볼 수 있다. 한편 이러한 이론의 이론이 가능한 것은 이론이 하나의 실천 즉 ‘이론적 실천’이기 때문이다. 이론도 하나의 실천인 이상 그것은 다른 비이론적 실천들과 동형성 isomorphism을 갖는데, 그러나 동시에 반영론으로서의 논리역사주의에 따라 사고대상에 대한 현실대상의 우위가 확보된다. 여기서 알튀세르가 말하는 실천이 독일 관념론에서 말하는 이론과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실천이 아니라 물(物) 일반의 생산․전화․발전 - 그 핵심은 노동이다 - 과 동형임을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이론의 이론은 비이론의 이론까지도 포함하는 실천 일반의 구조와 역사의 이론이다. 이러한 알튀세르의 변증법 이해는 ‘경험주의’ 일반과 결별함으로써 역사주의/인간주의의 변증법 이해를 비판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런데 이러한 인식론으로서의 변증법 이해는 뜻하지 않게도 스탈린적 존재론주의를 다른 형태로 재생산하게 된다. 그것은 알튀세르가 이론과 비이론을 실천 일반의 ‘존재론’에 의해 근거지우고 그러한 반영론적 논리역사주의의 전거를 결국 엥겔스의 『자연변증법』에서 구하기 때문이다. 초기 알튀세르는 엥겔스를 통한 헤겔 영유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알튀세르가 자신의 최초의 편향을 ‘이론주의’라고 스스로 규정했던 것은 잘못이다. 더욱이 이러한 알튀세르의 편향은 주로 1963년의 「유물변증법에 대하여(기원의 불균등성) Sur la Dialectique Matérialiste(De l'Inégalité des Origines)」과 『『자본론』을 읽자』의 「서론: 『자본론』에서 마르크스의 철학으로 Preface: Du Capital à la Philosophie de Marx」에서 극대화되는 것이며 이후 알튀세르가 그러한 편향을 정정할 수 있게 해 주는 추동력은 1962년의 「모순과 과잉결정(연구노트) Contradition et Surdétermination(Notes pour une Recherche)」에 내장되어 있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변증법적 유물론의 문제는 그렇다 치고 역사적 유물론의 문제는 어떠한가? 앞서 본대로 알튀세르의 변증법 이해가 이미 비이론의 구조 및 역사의 이론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자본론』을 읽자』의 「『자본론』의 대상 L'Objet du Capital」은 그러한 이론을 고전파 정치경제학과의 대비 속에서 검출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는 ‘젊은’(당년 23세) 발리바르의 「역사적 유물론의 근본 개념들에 대하여 Sur les Concepts Fondamentaux du Matérialisme Historique」에서 보다 체계적으로 수행된다. 발리바르는 역사를 계급투쟁으로 규정하는 『공산당 선언』에서의 고전적 정식화를 1859년 「서문」에서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기본모순론으로 논증하는 것을 자기과제로 한다. 그는 우선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보다 엄밀한 정의를 시도한다. 즉 생산 일반 또는 오히려 노동과정의 제요소에서 출발하여 그 사회적 관계의 두 측면을 각각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규정하는데 이 때문에 생산력에는 노동력이 포함되고 - 따라서 그것은 ‘기술적’인 사회적 관계이며(스탈린 - 또한 플레하노프! - 처럼 인간 또는 노동자가 아니라 노동력임을 주목하라) - 생산관계에는 생산수단이 포함된다 -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인간들 간의 관계만은 아니다. 생산양식은 이렇게 새로이 정의된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적 결합이다.

이로써 역사학의 전통적인 시대구분의 문제는 이제 생산양식의 재생산과 이행의 문제로 대체된다. 발리바르는 재생산의 문제를 생산양식의 구조의 공시태(共時態)(정태 및 동태)로, 이행의 문제를 그 통시태(通時態)로 각각 이해하고 양자를 생산양식의 역사적 경향론에 의해 매개하고자 한다. 그런데 재생산의 문제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행의 문제는 해결하기에 곤란한 것이 있다. 발리바르는 『『자본론』을 읽자』의 초판(1965)에서는 매뉴팩추어를 ‘이행적 생산양식’으로 이론화하다가 재판(1968)에서는 그것을 절대주의와 관련하여 ‘생산양식 접합론’으로 이론화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발리바르가 이행을 사회구성체의 차원이 아니라 생산양식의 차원에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도 지적하듯이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 간의 관계가 통상적으로 사회의 경제적 심급과 사회적 전체, 하나의 지배적 생산양식에 조응하는 사회적 전체와 몇 개의 생산양식들 - 또는 하나의 지배적 생산양식과 다른 종속적 생산형태(우클라드)들 - 의 접합으로 구성되는 사회적 전체, 또는 심지어 사고대상으로서의 사회적 전체와 현실대상으로서의 사회 등등의 복합적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과도 관련된다(첫째와 셋째의 사용법은 발리바르에 의해 명시적으로 거부된다). 이러한 발리바르의 작업의 곤란은 알튀세르의 그것에 조응하는 것인데 이후 발리바르도 자기비판의 준거로서 1962년 알튀세르의 모순론 논문을 복권시키게 된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이행적 생산양식’으로서의 생산양식들의 공존․결합(≠ ‘유제’)은 현실 역사의 이행 과정(및 그 구체적 정세)의 결과지 원인은 아니게 된다 - 사회구성체의 합법칙적 발전으로서 그 특수성. 또한 예를 들어 봉건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과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의 차별성이 옳게 이해된다. 그런데 이것은 생산양식과 사회구성체 간의 관계 나아가 재생산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요구하는 것이고 - 여기서 양자를 좁은 의미에서의 생산양식과 넓은 의미에서의 생산양식으로 관련지우는 것은 재생산의 문제를 그대로 남긴다는 의미에서 유효하지 않다 - 바로 그것을 위해서 1962년 모순론 논문의 복권이 필요하게 되는 것이다.

알튀세르의 자기 비판의 핵심은 첫째 철학의 재정의, 둘째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관계의 재정의, 그리고 결국 마르크스의 인식론적 단절의 재정의로 이루어진다. 이미 본 대로 그에 의하면 변증법적 유물론은 이론의 이론 특히 과학의 과학이고 역사적 유물론은 비이론의 이론 특히 역사의 과학이다. 그는 자신의 이러한 견해를 정치적 실천 내에서의 ‘이론과 실천의 결합의 부재’라는 의미에서의 ‘이론주의’, 철학과 과학의 차별화의 부재 나아가 철학과 정치 간의 유기적 관계의 부재라는 의미에서의 ‘실증주의’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자기 비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부당’하다는 것은 앞서 지적한 바 있지만 실제로 알튀세르도 한두가지 뉘앙스를 첨가한다. 즉 그러한 것들은 자신의 오류 또는 편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글들이 그렇게 읽혀지게 되었다는 것과 또한 특히 ‘실증주의’는 ‘사변주의’ 즉 존재론으로 통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철학은 이제 이론에서의 정치적 개입 및 정치에서의 이론적 개입 요컨대 최종심에서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 재정의되고 따라서 과학과의 관계도 재정의된다.

알튀세르의 자기 비판은 두 단계로 이루어진다. 그 첫 단계는 1967년 10월부터 1968년 5월 ‘학생 사태’로 중단되기까지 계속되었던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의 ‘과학자를 위한 철학 강의’에서의 자신의 「서론」(1967. 10~11. 『철학과 학자들의 자생적 철학』)과 1968년 2월의 『레닌과 철학』에서 이루어지는데 『마르크스를 위하여』, 『『자본론』을 읽자』의 이탈리아어판 공간을 계기로 한 1967년 11월의 인터뷰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여덟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 La Philosophie comme Arme de la Révolution (Réponse à Huit Questions)」에서 그 대체적인 윤곽이 그려진다. 그리고 새로운 철학적 입장에서 자신의 이전의 작업을 재해석하는 「마르크스와 헤겔의 관계에 대하여」를 1968년 1월에 집필하고 자신의 새로운 이론적 입장을 요약․정리하는 「헤겔 이전의 레닌」을 1969년 4월에 집필한다. 이러한 최초의 자기 비판에서 그는 이전의 존재론적 유제 - 그것은 단지 유제일 뿐인데 왜냐하면 스탈린과 달리 알튀세르에게는 처음부터 변증법=유물론이기 때문이다 - 를 극복하고 다음과 같은 ‘객관성에 대한 유물론적 테제’를 제시한다.

① 존재(또는 현실)의 사고(또는 의식)에 대한 우위

② 지식의 객관성

첫 번째 테제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고 이제 그것을 보완하는 두 번째 테제는 ‘객관적 당파성’의 문제를 보다 정확히 제기한다. 나아가 그는 헤겔 변증법의 문제를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그 ‘합리적 핵심’을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로 확정한다. ‘구조 인과율 causalité structurale’이라는 스피노자적 범주를 대체하는 이 범주는 1962년 모순론 논문을 더욱 발전시킨 것일 뿐만 아니라 제 2단계의 자기 비판에서 보다 더 명시화되는 - 제 1단계의 자기 비판에서 알튀세르는 주로 변증법적 유물론만을 문제삼고 있을 뿐이다 - 역사적 유물론의 재정의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알튀세르의 자기 비판을 앞서 살펴 본 케드로프/일렌코프의 입장과 비교해 본다면 세계관으로서의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어떻게 철학 속에 수용되어야 하는가 라는 문제 뿐만 아니라 마르크스주의 철학에서의 스탈린적 편향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일정한 시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러한 제 1단계의 자기 비판을 ‘즉흥적’ ‘타협적’이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을 더욱 발전시키기 위하여 노력한다. 그가 자기 비판을 보다 체계화하게 되는 것은 루이스와의 논쟁을 계기로 해서이다. 그는 1972년에 『존 루이스에 대한 답변』과 『자기 비판의 제 요소』를 통해 고전적 인식론을 비판하고 유물론적 인식론을

① 과학적 실천의 조건과 형태의 이론

② 차별적․구체적 과학들에서 그러한 실천의 역사적 이론

으로 재정의한다. 이러한 재정의는 제 1단계의 자기 비판에서 채택된 유물론적 객관성 테제를 철학에 대한 ‘정치의 우위’ 하에서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마르크스주의 철학으로서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마르크스주의 과학으로서의 역사적 유물론의 한 부문 이론이 되고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관계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아니라 역사적 유물론의 차원에서 해명되어야 할 문제가 된다. 우리는 여기서 초기 알튀세르의 작업에 영향을 주었던 바슐라르와 캉기옘의 문제의식이 극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이제 알튀세르는 역사적 인식론 또는 인식론적 역사의 문제를 재정의하면서 초기의 철학관에서 문제가 되었던 이론과 비이론간의 관계 일반, 특수하게는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 간의 관계를 재정의하게 된다. 여기에서 엘리어트가 지적하듯이 알튀세르가 역사적 유물론의 과학성을 주어진 것으로 간주한다기보다는 오히려 노동자운동과의 결합에 의해 담보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알튀세르는 고전적 인식론 - 그것은 실제로 부르주아 법이데올로기의 제 1형태로서 ‘진리의 기준’의 합법적 de jure 성격을 추구하는 철학의 부르주아적․법률적 실천이다 - 과 그 반사적 대립물로서의 ‘실용주의’ - 즉 ‘진리의 기준’의 사실적 de facto 성격을 추구 - 양자를 모두 비판하고 객관적 당파성의 원칙으로서의 실천의 기준 - 이제 그것은 진리 그 자체의 기준이 아니라 진리의 검증의 기준이다 - 을 지침으로 하는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발견한 것이다. 여기서 앞서 보았던 모순론에서의 ‘주체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는 ‘거울 없는 반영’이라는 인식론적 범주로 전화된다(cf.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에 대한 소견 Remarque sur une Catégorie: 'Procès sans Sujet ni Fin(s)'」, 1972). 이러한 범주는 르쿠르의 『위기와 그 쟁점』에서 보다 더 체계적으로 검토되면서 초기 알튀세르의 ‘지식 효과 effet de connaissance’라는 범주를 대체하게 된다.

이상과 같은 변증법적 유물론에서의 재정의는 역사적 유물론의 재정의에 조응한다. 이제 그것은

① 인민 대중이 역사를 만든다

② 계급투쟁이 역사의 동력이다

라는 두 개의 테제로 집약되는데 이 때문에 그것은 다른 과학들과 동일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혁명적 과학으로 재정의된다. 즉 그것은 ‘계급투쟁의 조건, 메커니즘, 형태의 과학’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착취는 이미 계급투쟁이므로 - 말하자면 지배계급의 피지배계급에 대한 공격이므로 - 계급투쟁 속에서 계급이 형성된다 - 말하자면 그러한 지배계급의 계급투쟁에 조응하여 피지배계급의 계급투쟁이 처음에는 방어적인 형태로 궁극적으로는 공격적인 형태로 발전한다. 따라서 위의 두 테제 중에서 제 2테제가 제 1테제에 대하여 우위를 갖게 되고 이를 가리켜 사회계급 또는 인민대중에 대한 ‘계급투쟁의 우위’ - 계급투쟁은 ‘주체 없는 과정’이므로 인민대중은 ‘주체’가 아니다(이러한 명제는 구레비치/코발손의 것보다 더 합리적이다) - 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초기 알튀세르 또는 발리바르의 용어법으로 말하자면 계급형성으로서의 사회구성체의 전화 속에서 계급투쟁의 물질적 토대 또는 실존으로서의 생산양식의 전화가 이루어진다. 이 때문에 재생산과 이행의 문제는 계급투쟁에 의한 사회구성체의 재생산과 그 속에서의 그 혁명적 전화의 동시적 설명에 의해 해결된다. 여기서 계급투쟁으로서의 ‘역사동력’론 - 이것은 마오주의적이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적인 테제이다 - 이 초기 알튀세르의 ‘사회 효과 effet de société’ 범주를 대체하게 된다(cf. 인민대중은 ‘담지자 Trägger’ 범주를 대체). 이상과 같은 역사적 유물론의 재정의는 발리바르의 자기 비판인 「역사변증법에 대하여(『『자본론』을 읽자』에 대한 몇 가지 비판적 소견) Sur la Dialectique Historique (Quelques Remarques à propos de Lire Le Capital)」(1973)에서 보다 구체화된다. 또한 발리바르는 「『자본론』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Comment Lire Le Capital?」(1969), 「『자본론』 제 1부의 독자들에 대한 서문 Avertissement aux Lectures du Livre I du Capital」(1969), 「마르크스주의와 계급투쟁 Marxisme et Lutte de Classe」(1970) 등에서의 알튀세르의 시사를 「잉여가치와 사회계급」(1974)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우위 하에서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발전시킨다. 특히 여기서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의 『자본론』의 계기가 어떻게 『제국주의론』의 계기로 발전하는가 라는 새로운 문제가 제기된다.

이상과 같은 제 2단계의 자기 비판 - 철학의 새로운 실천/혁명적 역사과학 - 을 구현하는 가장 중요한 추동력은 과학적 이데올로기론에 의해 제공된다(이러한 시도를 오이제르만류의 ‘절충’과 비교해 보라). 이미 본 바와 같이 초기의 알튀세르도 이데올로기론을 일정하게 제시하지만 - 예를 들어 1964~65년간의 「프로이트와 라캉 Freud et Lacan」, 「마르크스주의와 인간주의 Marxisme et Humanisme」, 「‘현실인간주의’에 대한 보충노트 Note Complémentaire sur l''Humanisme Réel'」를 보라 - 그러한 이론도 자기 비판에 조응하여 더욱 발전된다. 그것은 1969년의 「이데올로기와 AIEs」에서 이루어지는데 그러한 새로운 이데올로기론의 의의는

① 토대/상부구조라는 고전적 범론(汎論) topique을 재생산의 관점에서 개념화하면서

② 노동력의 재생산 과정 - 이것은 단순한 소비 과정이 아니다 - 의 관점을 도입한다.

는 데 있다. 그는 이러한 과정에서 국가를 매개로 계급투쟁을 재생산 과정 속에 삽입한다. 바로 여기서 법적․정치적 제도 또는 경제적 제도 뿐만 아니라 기타 사회적 제도들까지를 포괄하는 ‘이데올로기적-국가-장치(들)’ - 이 개념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다수성에 현혹되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처음부터 중요한 것은 ‘시민사회/국가’ 또는 ‘사적인 것/공적인 것’이라는 부르주아 (법)이데올로기적 대당(對當) couple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 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그 핵심은 국가를 매개로 하는 이데올로기의 물질화이다.

그렇다면 이데올로기 그 자체는 무엇인가? 알튀세르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① 이데올로기는 개인들(‘인간’)의 그 현실적 실존 조건들(‘세계’)에 대한 가상적 관계의 ‘표상’이다.

② 이데올로기의 물질성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을 매개로 하는 이데올로기적 실천(들)로 실존하고 이데올로기에 의한 현실과 가상의 전도는 이데올로기적 의식(들)으로 실현된다.

첫 번째 테제는 초기부터 있어 왔던 것인데 이제 두 번째 테제에 의해 보완됨으로써 ‘자생성’과 ‘체험’의 문제를 보다 정확하게 해명할 수 있게 된다. 두 번째 테제 중 위에서 설명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들)는 이제 이데올로기 일반의 메커니즘 즉 이데올로기적 실천과 의식의 전도 메커니즘의 정의로 발전하는데 알튀세르는 이것을 'interpellation'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전도 메커니즘의 효과가 'Sujet'(예를 들면 사회 또는 국가)와 'sujets'(예를 들면 시민 또는 국민의 일원)의 동시적 생산으로서의 주체화=종속 assujetissement/sujétion 및 그에 조응하는 실천과 의식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자신의 이데올로기론을 라캉 Jacques Lacan을 본따 ‘이데올로기의 이중적 거울 구조’론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소외론 또는 물(상)화론과는 전혀 다른 것이며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이데올로기론’의 원천으로서의 물신숭배론을 극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주체성 subjecthood의 주입 inculcation으로서의 주체 형태의 생산은 이데올로기 일반의 가장 뛰어난 효과가 되고 인간주의는 이데올로기 일반의 구조를 이론적으로 재생산할 뿐인 것이다.

그런데 알튀세르는 1970년의 「추기 P.S.」에서 위의 제 2테제의 ‘추상성’에 대하여 주의할 것을 요구한다. 그것은 1969년 논문에는 계급투쟁과의 관계 속에서 이데올로기 메커니즘의 제 효과 즉 구체적인 계급이데올로기들 - 특히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들과 피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들 - 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제 2테제는 단지 이데올로기 일반의 메커니즘만을 해명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구체적 분석은 지배계급의 계급투쟁과 피지배계급의 계급투쟁의 결합으로서의 재생산 과정 전체에 대한 이론을 요구한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런데 이러한 재생산 과정 전체의 분석은 단지 국가론의 차원에서만 수행되는 것이 아니라 잉여가치론의 차원에서도 수행되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후에 발리바르에 의해 실현된다(「역사변증법에 대하여」, 「잉여가치와 사회계급」 참조). 그런데 어쨌든간에 이러한 구체적 분석으로까지 확장된 알튀세르의 이론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대체하고 국가의 유형과 형태라는 고전적 분류법은 그 권력과 장치의 개념화 속에서 보다 엄밀하게 생각할 수 있게 해 준다. 이러한 의미에서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은 단지 인간주의 뿐만 아니라 역사주의의 이데올로기론도 일정하게 비판하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재정의에 조응하는 ‘인식론적 단절’ 테제의 재정의에 대해서 살펴 보자. 그것은 1970년의 「청년 마르크스의 발전에 대하여 Sur l'Evolution du Jeune Marx」 - 이 글의 영역 제목 「마르크스의 과학적 발견의 조건들 (철학의 새로운 정의에 대하여) The Conditions of Marx's Scientific Discovery (On the New Definition of Philosophy)」는 매우 시사적이다 - 에서 처음 나타난다. 이제 단절은 단순히 인식론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입장의 발전에 의해 추동되는 철학적 전향으로 파악된다. 즉 ‘정치적-철학적 단절’이다. 과학적 혁명의 조건은 정치의 규정적 역할과 철학의 매개적 역할에 의해 보증된다. 이러한 정식화는 물론 역사주의로 환원될 수는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철학의 매개적 역할이란 다름 아닌 게급이론적 조건의 담보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편 이러한 정식화는 앞서 살펴 본 헤겔 변증법의 ‘합리적 핵심’을 ‘주체 없는 과정’으로 확정하는 데 있어서 헤겔과 ‘젊은 헤겔주의자들’ - 또는 『정신현상학』의 ‘젊은 헤겔’과 『대논리학』의 ‘장년 헤겔’ - 을 구별할 수 있게 해 준다(「‘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이라는 범주에 대한 소견」 참조).

그런데 이상과 같은 알튀세르의 자기 비판은 과연 유효한 것일까? 엘리어트는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질문에 부정적인 답변을 던진다. 여기서 제 1절에서 지적한 엘리어트와 우리의 가장 중요한 견해차가 발생한다. 우리는 엘리어트가 알튀세르 작업의 의의를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의 스탈린적 편향의 정정에서 찾으면서도 스스로 스탈린적 편향의 본질을 깨닫지 못함으로써 그러한 의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제 2절에서 소련 철학계의 논쟁을 그 윤곽에 있어서나마 살펴보고자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논점을 좀더 객관적이고 보편적으로 부각시키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미 본 대로 초기 알튀세르는 스탈린적 편향 그 자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핑계로 만연되는 역사주의/인간주의에 대한 비판에 주력하게 되고 이러한 상황에서 문제가 된다면 스탈린적 편향의 특수한 형태로서의 쥬다노비즘 또는 뤼센코이즘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있어서 마오는 역사주의/인간주의의 비판가로서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알튀세르는 마오의 철학 논문들 중에서 유일하게 1937년의 『모순론』만을 인용하고 그것과 동시에 씌어진 『실천론』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즉 그에게 있어서 이론적 마오주의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비판 이후 알튀세르가 파악한 스탈린적 편향의 핵심은 무엇일까? 알튀세르는 1972년의 「‘개인숭배 비판’에 대한 노트 Note sur 'la Critique du Culte de la Personnalité'」에서 그것을 ‘제 2인터내셔널의 사후 복수’로서의 경제주의 -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제국주의적 경제주의 - 를 그 토대 base로 하고 인간주의 - 역사주의는 스탈린에 대한 그람시의 나름대로의 대응이다 - 를 그 부속물 appendice로 하는 경제주의의 특수한 형태 - 즉 사회주의 건설 과정에서 ‘역사적으로 불가피했던’ 형태 - 로 규정한다. 그러나 사실 알튀세르도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스탈린적 편향의 전모에 대해서 알기 위해서는 우선 소련 사회의 성격 - 그 생산양식, 사회구성체, …… - 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분석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여기서 이른바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은 하나의 ‘인식론적’ 또는 오히려 ‘정치적․이론적 장애’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이 스탈린적 편향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이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의 이론적 제 곤란이 어떻게 유발되었는가를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먼저 스탈린적 편향의 성격을 옳게 이해해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알튀세르는 그것을 ‘교조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 반대하는데 우리의 생각으로는 이것이 중요하다.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은 사회주의에 대한 고전적 정식화 - 과학적 사회주의론 - 에 대한 중요한 수정이며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수정으로 집적된다. 이러한 핵심적 수정은 ‘사회주의의 정치경제학’의 이론적 가능성을 ‘광의의 정치경제학’의 구성 및 그것에 조응하는 정치경제학의 범주 및 법칙의 체계 속에서 찾으려고 함으로써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에도 중대한 수정을 가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그 결과가 바로 스탈린 식의 마르크스주의 철학과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이다. 엥겔스를 통한 변증법의 존재론화와 그것에 조응하는 광의의 정치경제학의 구성! 이러한 객관주의와 경제주의의 야합은 주의주의 특히 인간주의로의 길을 열어 놓는다.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시대에는 동요적으로 브레즈네프 시대에는 안정적으로 재생산되는 스탈린적 편향은 ‘스탈린의 사후 복수’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그람시의 역사주의는 이것에 대한 나름대로의 대응이다.

그런데 그렇다면 스탈린적 편향은 스탈린의 어떤 부분으로 집적되는가?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1950),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 문제』(1952) 등의 저작은 쥬다노프의 주의주의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정 효과를 갖는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전자는 또한 기술관료주의를 후자는 바로 사회주의적 생산양식론을 배태하고 있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레닌주의의 기초』(1924)와 『레닌주의의 제 문제에 대하여』(1926)가 트로츠키적 편향에 대하여 제국주의론(‘가장 약한 고리’론)과 일국사회주의론(‘승리’론)을 방어한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들 저작은 『두 개의 진영』(1919)에서 그 맹아를 보이는 진영 테제가 처음에는 『코민테른 강령』(1928) - 이것은 스탈린과 부하린의 합작물인데 양자의 차이는 진영론과 붕괴론이라 할 수 있다 - 에서 나중에는 『제 16차 당대회 정치 보고』(1930) - 부하린 비판 - 에서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론과 결합하는 매개가 된다. 한편 알튀세르는 『변증법적 및 역사적 유물론』(1938)에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구별하고 부정의 부정을 유물론적 변증법의 기본 법칙에서 제외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여기서 변증법과 유물론을 구별하고 전자를 존재론화함으로써 주관적 당파성의 맹아가 배태될 뿐만 아니라 변증법적 유물론의 역사적 유물론에 대한 우위라는 편향이 나타난다. 요컨대 알튀세르가 지적하는 스탈린의 이론적 장점은 곧 그 단점과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실존한다. 스탈린의 이론적 입장은 모순적이다! 그리고 이러한 모순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수정을 통해 하나의 편향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러한 편향을 정정하는 데 있어서 마오가 수행하는 역할은 무엇인가? 우리는 앞서 마오의 이론적 의의에 대해서 알튀세르가 취하는 유보적 입장을 지적했지만 알튀세르는 실제로 마오의 의의를 스탈린적 편향에 대한 구체적․현실적 비판에서 찾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마오주의’ - 말하자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계승․발전하는 새로운 사상․이론 체계 - 가 아니라 중국혁명 -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 현실에 ‘창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으로서 즉 ‘마르크스주의의 중국화’로서 ‘모 사상(毛思想)’이란 바로 이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 이다. 그리고 그러한 한에서 그것은 모순적 비판이다. 말하자면 ‘행위 actes’(비스탈린적 행동)와 ‘텍스트 textes’(친스탈린적 말)가 일치하지 않는다. 따라서 알튀세르가 ‘문화혁명’(1966~69)을 전거로 해서 - 그가 마오의 『『소련 사회주의의 경제적 제문제』 및 『정치경제학 교과서』 비판』(1958~60)을 전거로 들지 않는 것은 시사적이다 - 스탈린적 편향을 비판한다고 해도 그는 중국공산당의 ‘스탈린 숭배’와는 거리를 둔다. 후에 발리바르가 지적하는 ‘문혁’의 모순 또는 나아가 ‘모 사상’의 모순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모 사상’이 ‘마오주의’로 전화하여 그 보편성을 강조하게 되면 그것은 스탈린적 편향의 가장 극단적인 모습 - ‘동방의 쥬다노비즘’ -을 보이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알튀세르가 ‘마오주의자’라는 혐의를 받으면서도 마오 또는 중국혁명을 예로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그것은 P.C.F.를 포함한 유로코뮤니즘의 우편향과 그 이론적 지주로서의 그람시적 편향을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미 본 바와 같이 그람시적 편향은 스탈린적 편향의 반사적 대립물일 뿐이다. 그것은 루카치적 편향이 스탈린적 편향의 하나의 부속물로 전락할 수 있었던 것 - 루카치 자신의 이력에서도 분명히 읽을 수 있는 것(스탈린 사후 그의 스탈린 비판은 이미 설득력을 상실한 것이다) - 과는 달리 독자적인 생명력을 갖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그람시에 대항하기 위하여 ‘혁명의 국제적인 예’ 또는 ‘사회주의의 현실적으로 살아 있는 준거’로서 마오의 중국을 선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러한 ‘예’ 또는 ‘준거’에 대한 알튀세르의 집착은 엘리어트를 비롯한 모든 무당파적(무정부적?) 마르크스주의자들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물론 그러한 알튀세르의 필사적인 노력에는 어떤 연민스러운 것도 있다. 이것이 말하자면 알튀세르의 모순이다.

그런데 마오의 모순이든 또는 알튀세르의 모순이든 어쨌든간에 이러한 모순의 근원으로서 스탈린적 편향은 왜 발생하는 것일까? 여기서 우리는 알튀세르가 30여 년간의 작업의 결과로서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을 보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이다. 엘리어트가 말하는 제 3기의 알튀세르는 바로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역사 뿐만 아니라 그것의 노동자운동과의 ‘융합’의 역사의 문제를 제기한다. 즉 스탈린적 편향은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자운동의 ‘융합’의 역사 속에서만 올바르게 인식되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제 2기의 알튀세르가 변증법적 유물론의 문제는 이데올로기론을 매개로 역사적 유물론의 영역으로 전위시켰음을 보았다. 그런데 제 3기의 알튀세르는 바로 역사적 유물론의 영역에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이 응축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그에 의하면 - 1977년의 「대담 Entretien」 - 마르크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계급투쟁의 조건 및 형태의 이론’만을 그것도 그 기초(‘주춧돌’이라는 은유)만을 남겼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은 초기의 알튀세르의 기본 관점인 ‘인식론적 단절’ 테제를 대체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중기의 알튀세르가 인식론적 단절을 추동하는 정치적 단절을 강조했음을 보았는데 이제 후기의 알튀세르는 ‘단절’이 아니라 ‘모순’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의 3대 원천, 3대 구성 부분에 대한 근본적으로 새로운 입장을 의미한다. 즉 이제 마르크스주의 철학, 마르크스주의 과학으로서의 정치경제학, 과학적 사회주의의 특수성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현대 마르크스주의 속에서 재생산되는 부르조아 이데올로기로서의 현대 수정주의가 문제이다. 이 때문에 헤겔이나 리카도 그 자체가 아니라 이제 스탈린 또는 그에 의해 재생산되는 헤겔이나 리카도가 문제이다(cf. 「완료된 역사, 미완의 역사 Histoire Terminée, Histoire Interminable」, 1976).

알튀세르는 1977년의 「마침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가!」에서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에 있는 ‘두 가지 이론적 곤란’과 ‘두 가지 이론적 공백’을 지적한다. 전자는 『자본론』의 ‘허구적’ 통일성과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수수께끼’이다. 즉 마르크스는 그 착취론에서 고전파와 완전히 단절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이 때문에 부단히 헤겔 변증법으로 복귀하게 된다. 1850년 이래 30여 년간의 마르크스의 고투를 보라. 이러한 곤란은 엥겔스의 『반뒤링론』에 의해 ‘가상적’으로 해결될 뿐이다. 한편 후자는 마르크스주의적 국가론 및 조직론의 부재로 나타난다. ‘입헌적 환상’ 또는 ‘의회적 환상’에 대한 경고만으로는 노동자운동에서 부르조아 정치형태의 재생산을 예방할 수 없다. 또한 이러한 사정은 혁명 이후의 사회에서 국가와 당의 ‘융합’(sic) 나아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수정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정치경제학 비판에 조응하는 정치학 비판의 ‘부재’(sic)!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알튀세르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1977년의 「서문 Avant-Propos」(뒤메닐 G. Duménil의 『『자본론』에서의 경제 법칙의 개념 Le Concept de Loi Economique dans Le Capital』 소수)과 「오늘날의 마르크스주의」에서 보다 상세히 부연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알튀세르의 유산은 발리바르에게 계승될 수 밖에 없었다. 발리바르는 이미 1973~74년에 「역사변증법에 대하여」「잉여가치와 사회계급」「마르크스주의 이론의 역사에 있어서 유물론과 관념론 Matérialisme et Idéalisme dans l'Histoire de la Théorie Marxiste」 등의 글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의 우위 하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을 확립한다. 또한 1976년에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를 발표한다. 이러한 작업은 우리가 앞서 지적했던 것과 같이 알튀세르의 자기 비판을 역사유물론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것인데 이제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자본론』이라는 계기와 더불어 『제국주의론』이라는 계기가 명시적으로 고려된다. 한편 1975년의 「다시 모순에 대하여: 계급투쟁의 변증법과 변증법 내의 계급투쟁 A Nouveau sur la Contradiction: Dialectique des Luttes de Classes et Lutte de Classes dans la Dialectique」과 1977년의 「바슐라르에서 알튀세르로: ‘인식론적 단절’의 개념 From Bachelard to Althusser: The Concept of 'Epistemological Break'」은 자기 비판 이후의 알튀세르의 철학적 입장을 방어하는 글이다. 그는 이렇게 해서 중기 알튀세르의 작업을 기반으로 해서 스스로 마르크스주의와 모순을 해명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다. 1979년 이후 발리바르의 작업은 정치경제학 비판의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을 해명하기 위한 고투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 엘리어트와는 다른 의미에서 - ‘알튀세르주의’(sic)는 아직 ‘미완의 역사’이다.


보론: ‘2. 소련 철학계의 논쟁’에 대해서

- 철학의 주제로서의 ‘세계관’ 또는 그 대상으로서의 ‘세계 전체’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과학적 철학의 세계관’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라는 정식화는 1969년에 오이제르만이 제출하였지만, 철학의 주제로서의 ‘세계관’ 또는 그 대상으로서의 ‘세계 전체’라는 정식화는 이미 그 이전부터 존재해 왔다. 이미 1920년대말에 미틴은 철학의 당파성을 논하면서 세계관으로서의 유물론이라는 정식화를 제출한 바 있었는데, 그러한 철학관은 폴류타 E. S. Poliuta의 철학의 대상으로서의 ‘세계 전체’라는 정식화와 1954년 철학 교과서에서 최초로 결합된다. 즉 이미 1954년 철학 교과서에 ‘과학적 세계관’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이라는 정식화와 그러한 총체적 세계관의 대상으로서의 ‘세계 전체’라는 정식화가 등장하였다. 이제 그러한 과정의 중요한 계기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 보자.

스탈린은 1927년 제 15차 당대회에서 트로츠키를 비판한 직후부터 농업집단화를 전면적으로 가속화한다. 1929년말~1930년초 농업 집단화는 이미 레닌이 강조했던 ‘자발성’의 원칙에서 벗어나 관료주의적․형식주의적인 방법으로 강행되는데 이때 스탈린은 트로츠키나 프레오브라젠스키 Evgenij Preobrazhenskij의 논리와는 뉘앙스의 차이를 갖는 프롤레타리아 독재 하에서의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간의) 계급투쟁 격화론 - 이것은 ‘자본주의의 일반적 위기’론을 매개로 이른바 ‘제 3기’론 또는 ‘계급 대 계급’/‘사회-파시즘’론으로 발전한다 - 을 제출한다. 이것이 1930년 제 16차 당대회에서 부하린 비판의 논거가 된다는 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우리가 방금 지적한 미틴이나 폴류타의 철학관은 이러한 스탈린의 정치적 실천을 반영한 것이다.

스탈린의 정치적 좌편향은 1934년 제 17차 당대회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1936년 ‘신헌법’에서 계급적대의 소멸이 1939년 제 18차 당대회에서 ‘사회주의의 결정적 승리’가 각각 선언되는 상황 - 이것은 1935년 코민테른 제 7차 세계대회에서의 ‘정책 전환’과도 관련된다 - 에서 그것에 조응하는 새로운 철학관이 요구된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1936년 이후 미틴 등의 철학관이 ‘추상적․스콜라적’인 ‘정치적 문맹’으로 매도되고 새로운 철학 교과서에 대한 요구가 제기되는 정치적 맥락이다.

이때 기준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스탈린의 『변증법적 및 역사적 유물론』이다. 여기서 스탈린이 말하는 상호관련 및 의존이라는 변증법의 제 1법칙과 세계의 물질성이라는 유물론의 제 1법칙은 바로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대상으로서의 ‘세계 전체’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과학적 세계관’이라는 정식화는 - 그러한 용어는 없어도 그 개념에 있어서 - 이미 스탈린에게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이미 본 대로 스탈린의 철학관에 있어서 주요한 특징은 변증법적 방법과 철학적 유물론이라는 체계의 분리인데 - 그 서술 순서는 부차적인데 당시 전자가 후자보다 우위에 놓여졌던 것은 데보린 류의 ‘전투적 유물론’(데보린은 나름대로 철저한 루카치 비판가였다)의 유제라고 할 수 있다 - 이것이 바로 ‘세계관’/‘세계 전체’라는 범주를 매개로 하는 그의 존재론주의의 핵심이다. 한편 여기서 스탈린이 ‘부정의 부정’을 폐기했던 것은 앞서 지적한 그의 정치적 우편향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후 1954년에 이르기까지의 소련 철학계의 상황이라든가 1954년 철학 교과서에 대한 케드로프의 문제제기는 이미 본문에서 본 바와 같다.

이러한 1954년 철학 논쟁의 발전으로서 1958년 철학 교과서에 대한 논쟁이 근본문제론과 일반법칙론의 대립이라는 형태를 갖는다는 것도 이미 검토한 바 있지만, 케드로프의 입장에서 오이제르만 류의 ‘과학적 철학의 세계관’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케드로프에 의하면 본래 엥겔스가 말하는 철학의 근본 문제로서의 존재와 사상(또는 의식), 물질과 정신의 우위 관계(‘선차성’)은 ① 세계의 본질로서의 그 물질성, ② 세계의 인식가능성이라는 두 측면을 갖고 있는 것이며(『포이에르바하론』), 그것은 따라서 자연․사회․사상(의식) - 인간 그 자체가 아니다! - 의 운동 및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법칙의 과학, 즉 특수과학에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일반과학으로서의 유물변증법(『반뒤링론』) 속에 포섭․종속되는 것이다. 또한 엥겔스에게 있어서는 세계의 상호연관 및 의존은 독립된 변증법의 법칙이 아니라 세계의 통일성으로서의 물질성이라는 유물론의 근본 법칙과 동일한 것이고 따라서 그에게 있어서는 ‘세계 전체’라는 범주는 그 용어에 있어서나 개념에 있어서나 부재하는 것이다. 즉 존재론이 아니라 인식론 epistemology(/논리학?)으로서의 변증법이 엥겔스의 철학관의 핵심이고 또한 이것은 레닌의 철학관(『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철학 노트』)의 핵심이기도 하다.

따라서 케드로프에 의하면 유물론(나아가 철학의 근본 문제)은 변증법(즉 일반 과학) 속에 포섭․종속되는데 이때 객관변증법은 존재론이 아니고 주관변증법은 선험적 인식론 gnoseolgy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로서의 ‘세계관’의 문제는 오이제르만의 경우에 있어서와 같이 철학 속에서 과학과 절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1954년 철학 교과서와 오이제르만의 정식화 또는 1979년 철학 교과서 간의 약간의 차이에 주목할 수 있다. 전자는 ‘세계 전체’에 인간 또는 사상․의식을 배제하고 후자는 그것을 포함한다. 전자의 경우 세계관은 존재론화되므로 철학의 근본 문제와 갈등이 생기고 후자의 경우 세계관과 철학의 근본 문제가 혼동된다. 어느 경우이든 세계와 인간 간의 관계에 있어서 과학과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부재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케드로프의 철학관에 의하면 ‘세계 전체’는 철학 뿐만 아니라(또는 철학이 아니라?) 모든 과학(또는 특수과학들)의 대상이고 따라서 ‘세계관’은 과학적일 뿐만 아니라(또는 과학적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이다.

이상과 같은 케드로프의 철학관을 알튀세르의 그것과 비교해 보자. 양자 간의 (동일성과) 차별성에 대해서는 본문 중에서 간간히 지적한 바 있지만 특히 변증법의 이해와 관련하여 보자면 케드로프는 양질전화 또는 부정의 부정을 강조하는 데 반하여 알튀세르는 (현실) 모순을 강조한다. 이러한 변증법 이해는 케드로프가 그것을 우선 인식론의 차원에서 수용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알튀세르는 그것을 역사과학의 차원으로 전위․응축시키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차이는 철학적 물질관 따라서 인간관과 과학적 물질관/인간관의 구별과 관련 - 1950년대 이후 소련 철학계의 특징은 양자의 혼동이다 - 에 대한 양자의 입장의 차이에서도 나타난다.

한편 오이제르만과 알튀세르를 비교해 보자면 전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과학성과 이데올로기성을 ‘세계관’이라는 범주 속에 절충하고 있지만 후자는 그러한 절충을 회피하면서도 마르크스주의 전체의 과학성과 이데올로기성 -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모순의 한 측면이다 - 을 승인하고 있다. 요컨대 소련 철학과 알튀세르 철학의 차이는 역사주의/인간주의와의 타협성 여부, 결국은 경제주의와의 단절성 여부에 있는 것이며 그러한 차이는 변증법적 유물론보다는 역사적 유물론, 역사적 유물론보다는 과학적 사회주의론에서 더욱 현격해 진다. 따라서 양자의 차이는 다치오예프가 말하듯이 단순한 ‘세계관’으로서의 성격 여부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추기] ⑴ 이 글을 교정하던 중에 소련 철학계의 최근 동향을 소개한 안드레이예프 A. Andreyev, 조브추크 M. Jovchuk 및 마슬린 M. Maslin의 「오늘날의 소련 철학: 전망과 새로운 방향 Soviet Philosophy Today: Perspectives and New Directions」(Science and Society, Vol. 51(1987) No. 3)과 수 과순 Su Guoxun의 「소련 철학에 대한 학술대회 보고 The Conference on Soviet Philosophy in Nanning, China, June 8~18, 1985」(Studies in Soviet Thought, Vol. 33(1987) No. 1)를 읽을 수 있었다. 처음 글은 소련의 철학 연구자들이 미국 철학계에 자기 나라 철학계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직접 쓴 것이고 나중 글은 중국의 소련 철학 연구자들이 자기 나라 철학계에 소련 철학계의 사정을 알리기 위해 쓴 것이다. 이 글들에서 정리한 바에 의하면 우리가 제 2절에서 요약한 내용이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소련 철학계에서 존재론주의/인식론주의 외에도 ‘인간 중심의 철학’(추가리노프적 경향?) - 중국 철학자들의 명명에 의하면 ‘철학적 인격론 personalism’(철학적 인간학 anthropology?)의 관점 - 이 ‘소수 견해’로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소련 철학계에서도 최근에는 유물론과 변증법의 동일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등장하고 - 이러한 경향과 구체적으로 어떠한 관련을 갖고 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 변증법적 유물론에 대한 역사적 유물론의 우위(그리고 나아가 생산력에 대한 생산관계의 우위?) - 중국 철학자들의 명명에 의하면 ‘철학적 사회학’(케드로프적 관점에서 역사적 유물론은 ‘특수적 과학으로서의 사회학’이다)의 관점 - 도 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경향들은 알튀세르/발리바르의 입장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생각되는데 물론 아직까지는 ‘소수 견해’에 불과하다고 한다.

⑵ 우리가 소개했던 역사적 유물론에서의 사가토프스키적 경향이 대체로 소련 철학계의 공식적 입장으로 수렴되어 가고 있는 것 같은데 예를 들어 그의 입장은 페도세예프 - 『과학적 공산주의』 교과서의 감수자! - 에 의해 지지되고 있다. 한편 변증법적 유물론에서도 유사한 경향이 등장하고 있는데 그것을 실현하고 있는 것은 멜류킨 S. T. Meliukhin의 ‘상호작용으로서의 모순론’이다.

콘스탄티노프 사후 그의 역할은 일리쵸프 L. Ilyichev에 의해 대행되고 있다고 한다. 일리쵸프 등의 감수로 간행되고 있는 『발전의 일반적 이론으로서의 유물변증법』(1982~83년간에 3권 간행; 제 4권은 미간)은 소련 철학계의 공식적 입장을 정리하고 있다. 또한 그는 페도세예프와 함께 사가토프스키적 경향을 지지하고 있다.

⑶ 한편 케드로프와 일렌코프는 그 철학관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변증법 이해에서는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일렌코프는 ‘변증법=인식론=논리학’이라는 정식화를 문자 그대로 ‘동일성 identity’으로 이해하고 있는 데 대해서 케드로프는 그것을 ‘통일성 unity’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케드로프에 의하면 인식론과 논리학은 변증법 그 자체가 아니라 변증법의 내적 구조와 관련된 문제로서, 전자는 객관변증법과 주관변증법의 관계, 후자는 주관변증법 특히 개념변증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특히 변증법적 논리학과 형식논리학의 관계가 새로운 문제로 제기될 수 밖에 없는데, ‘통상적’인 설명은 전자는 ‘종합적 synthetic’ 발견 방법, 후자는 ‘분석적 analytic’ 증명 방법으로 또는 전자를 사고 내용의 논리, 후자를 사고 형식의 논리로 각각 관계지운다. 그러나 일렌코프에 의하면 처음부터 형식논리 그 자체가 부정되므로 - 그에게 논리학은 곧 변증법이다 - 이러한 문제는 전혀 제기되지도 않는데, 이 때문에 그는 ‘통상적’으로 신헤겔주의자로 불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