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을해정식자료 3

同黎 2014. 7. 30. 01:01
숙종실록 21년 8월 3일 임진

대신(大臣)과 비국(備局)의 여러 재신(宰臣)을 인견(引見)하였다. 좌의정(左議政) 유상운(柳尙運)이 이 해가 흉년듦을 가지고 청하기를,
경술년(현종 11) 의 전례에 의거하여 어공(御供)의 물건 및 종묘(宗廟)의 천신(薦新)에 쓰는 소목(燒木)과 각사(各司)의 공물의 값을 감하고, 경아문(京衙門) 및 외방(外方)의 각 영문(營門)의 저축(儲蓄)한 은(銀)·포(布)·미곡(米穀)의 수(數)를 실지대로 상문(上聞)케 하여 이를 취하여 씀에 대비(對備)하며, 경외(京外)의 영선(營繕) 및 무릇 백성을 소요(騷擾)케 하는 일은 일체 정지하소서. 문수 산성(文殊山城)의 창고(倉庫)의 역사(役事)와 낙선군(樂善君) 이축(李潚)의 묘소에 돌을 끄는 역사 및 경외의 추노(推奴) ·징채(徵債) 같은 것을 모두 정지하고 외방의 관원으로서 말미를 받는 자는 친병(親病) 외에는 일체 허락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우의정(右議政) 신익상(申翼相)이 새로 생긴 왕자(王子)의 궁(宮)을 영조(營造)하는 역사와 사행(使行) 때에 상방(尙方) 의 물건 무역(貿易)을 정지하기를 청하고, 병조 판서(兵曹判書) 서문중(徐文重)은 강도(江都)의 영전(影殿) 보수(補修)의 역사를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세화(李世華)가 내의원(內醫院)의 약재(藥材) 무역의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약재는 곧 일용(日用)의 물건이니, 그 중에서 긴요치 않은 것은 재감(裁減)하여도 가하다.”
하였다. 유상운이, 양서(兩西)가 흉년듦을 가지고 삼남(三南) 연해(沿海)의 여러 고을의 신포(身布)를 민원(民願)의 어떠함을 물을 것 없이 그 값을 조금 감하여서 쌀로 대봉(代捧)하여 곡식을 모으는 터전으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제신(諸臣)에게 물었는데, 제신이 모두 이것이 아니면 곡식을 모을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임금이 이를 허락하여 말하기를,
“난편(難便)의 형세(形勢)가 있다면 도신(道臣)이 마땅히 계문(啓聞)하여야 한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이세화(李世華)의 소 안에 진달한 두 건(件)의 일이 진실로 사의(事宜)에 맞습니다. 그 소의 비답(批答)에, ‘어의궁(於義宮)의 절수(折受)할 결수(結數)를 작정(酌定)해 주어야 하는데 혁파되었다.’는 하교(下敎)가 계셨으니, 성상께서 결수를 양정(量定)하시어 하교하심이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무진년(숙종 14) 이후에 절수한 4천 결 중에서 1천 결을 획급(劃給)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무진년 이전에 절수한 것이 4백여 결이 있는데, 이것도 또한 1천 결의 수에 들어가는 것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다만 무진년 이후에 절수한 것을 가지고 1천 결을 획급하는 것이 가하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세 궁방(宮房)의 절수를 혁파하는 대신으로 은화(銀貨)와 미·두(米豆)를 양급(量給)하는 일을 이제 마땅히 품정(稟定)하여야 합니다. 모처(某處)【장 희빈방(張禧嬪房)을 가리킨다.】는 지금은 후궁(後宮)이지만 다른 궁방과 다른 까닭에 병인년(숙종 12) 에 2백 결의 획급의 명이 있었는데, 2백 결은 곧 왕자방(王子房)과 옹주방(翁主房)의 절수의 수이니, 이를 왕자방과 같게 함은 성의(聖意)의 속셈이 있는 듯합니다. 무진년에 대신의 진달을 인하여 제궁가(諸宮家)의 직전(職田)의 대신으로 왕자방·옹주방은 은(銀) 4천 냥을 주는 일로 정탈(定奪)하였으니, 이번 세 궁방도 무진년의 정한 바에 의거하여 4천 냥으로 수를 정함이 어떠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신설(新設)되는 궁은 어떻게 하여야 하겠는가?”
하므로, 대답하기를,
“새로 생기는 왕자궁 말입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하므로, 대답하기를,
“마땅히 일체(一體)로 하여야 합니다.”
하였더니, 임금이 이를 허락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궁장(宮庄)을 아직 갖추기 전에는 마땅히 미·두를 주어야 하니, 그 석수(碩數)는 밑에서 작정(酌定)하겠지만 연한(年限)은 감히 함부로 정하지 못하오니, 마땅히 몇 년을 기한으로 하여야 할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5년을 기한으로 함이 가하다.”
하였다. 유상운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왕자궁에는 매년 선혜청(宣惠廳)에서 쌀 2백 석을, 군자감(軍資監)에서 콩 1백 석을 실어 보내고, 세 궁방도 또한 마땅히 이에 의거하여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允許)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유상운은 지위가 대신(大臣)에 있으므로, 무릇 궁부(宮府)의 일에 관계되는 것은 다만 마땅히 소견을 곧게 진달하여서 성명(聖明)의 재처(裁處)를 기다려야만 하는데도, 이제 그렇지 아니하여 어의궁(於義宮)의 1천 4백 결이 지나침이 되는 줄 알면서도 감히 밝게 말하지 못하고, 곧 ‘무진년(숙종 14) 이전의 4백 결이 또한 이 수에 들어갑니까?’라는 등의 말을 가지고 거짓 알지 못하는 것처럼 하여서 임금의 낯빛을 기다리니, 임금이 어찌 능히 그 정상(情狀)을 살피지 못하겠는가? 또 희빈(禧嬪)의 칭호(稱號)를 무슨 감히 말하지 못할 일이 있기에, 곧 모처(某處)로써 일컬으며, 희빈이 비록 동궁(東宮)을 탄생하였지만 동궁은 중궁(中宮)의 아드님이 되었으니, 희빈은 또한 한 후궁일 뿐인데, 무엇을 가지고 다른 궁(宮)과 다르다고 말한단 말인가? 하물며 병인년은 아직 원량(元良)을 탄생하기 전이니, 무엇을 가지고 2백 결의 획급이 성의(聖意)의 속셈이 있는 듯하다고 말한단 말인가? 하물며 두 궁방은 무슨 다른 궁과 다른 일이 있기에 또한 희빈으로 더불어 왕자방에 비례(比例)한단 말인가? 교묘하게 아첨하는 말을 꾸며 임금의 뜻에 영합(迎合)하고자 하면서 그 말이 말을 이루지 못함과 그 뜻이 가리울 수 없음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니, 아! 비루(鄙陋)한 사나이와 더불어 임금을 섬길 수 있겠는가? 임금의 새로 낳은 왕자의 궁방이 누락(漏落)당함을 염려하여 따로 제기(提起)하여 이를 묻는 것도 또한 조그만 사랑에 빠져 대체(大體)를 소홀히 함을 면치 못하니, 애석(哀惜)함을 금할 수 없다.”.


壬辰/引見大臣、備局諸宰。 左議政柳尙運, 以年凶, 請依庚戌例, 減御供之物及宗廟薦新所用燒木、各司貢物價, 京衙門及外方各營門所儲銀、布、米穀之數, 使之從實上聞, 以備取用, 京外營繕及凡係擾民之事, 一切停止, 如文殊山城倉舍之役、樂善君墓所曳石之役及京外推奴、徵債, 竝皆停止, 外方官受由者, 親病外一切勿許, 上皆從之。 右議政申翼相, 請停新生王子宮營造之役、使行時尙方貿易之物, 兵曹判書徐文重, 請停江都影殿修補之役, 上皆從之。 戶曹判書李世華, 請停內局藥材貿易之事, 上曰: “藥材乃日用之物, 其中不緊者, 裁減可也。” 尙運以兩西凶荒, 請三南沿海邑諸色身布, 不問民願之如何, 稍減其直, 以米代捧, 以爲聚穀之地, 上問于諸臣, 諸臣皆以爲非此, 無以聚穀, 上許之曰: “如有難便之勢, 則道臣自當啓聞矣。” 尙運曰: “李世華疏中所陳兩件事, 誠合事宜, 而其疏批答, 有於義宮折受, 酌定結數而革罷之敎。 自上量定結數而下敎宜矣。” 上曰: “戊辰以後折受四千結中, 以一千結劃給可也。” 尙運曰: “戊辰以前折受者, 有四百餘結。 此亦入於一千結之數耶?” 上曰: “不然。 只以戊辰以後折受者, 劃給一千結可也。” 尙運曰: “三宮折受革罷之代, 量給銀貨米豆事, 今當稟定矣。 某處【指禧嬪房。】今則後宮, 而異於他宮, 故丙寅年, 有二百結劃給之命。 二百結, 乃王子、翁主房折受之數也。 使之同於王子房者, 聖意似有所在矣。 戊辰因大臣陳達, 諸宮家職田之代, 王子、翁主房, 則給銀四千兩事定奪矣。 今番三宮房, 依戊辰所定, 以四千兩定數何如?” 上曰: “新設宮, 何以爲之耶?” 對曰: “新生王子宮耶?” 上曰: “然矣。” 對曰: “當一體爲之矣。” 上許之。 尙運曰: “宮庄未備之前, 當給米豆。 其碩數則當自下酌定, 而年限不敢擅定, 未知當以幾年爲限耶?” 上曰: “以五年爲限可也。” 尙運曰: “然則王子宮, 每年自宣惠廳輸送米二百石, 軍資監輸送豆一百石, 三宮房, 亦當依此爲之也。” 上允之。
【史臣曰: “柳尙運, 位在大臣, 凡係宮府之事, 只當直陳所見, 以俟聖明之裁處, 而今乃不然, 知於義宮一千四百結之爲過, 而不敢明言, 乃以戊辰以前四百結, 亦入於此數等語, 佯若不知者然, 以俟上之顔色, 上豈不能燭其情狀耶? 且禧嬪稱號, 有何不敢言之事, 而乃以某處稱之耶? 禧嬪雖誕生東宮, 東宮爲中宮之子, 則禧嬪亦一後宮, 何以曰異於他宮耶? 況丙寅乃未誕元良之前, 則何以曰二百結劃給, 聖意似有所在耶? 況兩宮房, 有何異於他宮之事, 而亦與禧嬪, 比例於王子房耶? 巧飾諂媚之辭, 欲以迎合上意, 而不自覺其言之不成說, 其情之不可掩, 噫! 鄙夫可與事君也哉? 上之以新生王子房之見漏爲慮, 別爲提起而問之者, 亦不免溺於小愛而忽於大體也, 可勝惜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