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조선 世宗代 초반 朝日交涉에서 九州探題의 역할과 위상

同黎 2019. 3. 21. 19:41

조선 世宗代 초반 朝日交涉에서 九州探題의 역할과 위상

 

박세연

 

머리말

1. 己亥東征’과 朝日關係의 변화

2. 戰後 조일교섭과 九州探題의 역할변화

  1) 사신의 왕래와 九州探題의 중재

  2) 九州探題를 중심으로 하는 朝日通交의 재편

3. 九州探題의 약화와 對馬島州로의 교섭 창구 일원화

맺음말

 

머리말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는 14세기 한반도 전역에 출몰했던 왜구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막아내고 유력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한반도의 정치세력에게는 일본을 어떻게 방어하고 통제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중국 역시 지속적인 왜구의 노략질에 시달렸고 명의 초기 황제들 역시 일본 정벌을 생각할 정도로 왜구 문제에 민감하게 대응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세종 원년에 일어난 대마도 정벌 즉 ‘己亥東征’은 왜구문제를 통교문제로 변화시키는 매우 중요한 계기였다. 기해동정 이후 왜구의 발생이 매우 줄어들고, 조선과 일본이 평화적으로 외교와 무역을 행하는 善隣關係로 이행한 것이다. 즉 이 시기는 동아시아의 해상 정세가 획기적으로 바뀌는 중요한 시기였다.

 15세기 전반 조일관계에 대한 연구는 한·일 양측에서 모두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먼저 조선과 일본은 조선과 막부의 상호 동등한 교린관계와 조선과 쓰시마 사이의 기미관계적 교린관계의 중층적이고 다원적 관계라는 견해가 주목된다.1) 이는 조선이 일본을 상대하는 방식에서 교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도 실제로는 동등한 관계의 일본국왕과 상하적 관계의 쓰시마 및 다이묘의 중층적 관계를 가지고 일본과의 외교를 진행했음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견해는 일본의 고전적인 15세기 조일관계의 이해인 일본이 ‘책봉’을 받음으로써 명을 매개로 조선과 일본이 대등한 외교를 하게 되었다는 견해를 반박한 것이다. 즉 조선국왕=일본국왕(쇼군)이라는 등식을 성립함으로써 천황이 존재하는 일본이 자신만의 세계관을 버리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는 것이다.2) 한편 최근 정다함의 경우 교린과 소중화의 개념이 조선 지배층이 조선을 중심으로 다른 집단을 위계화 시키는 것이며, 이를 근대 역사학이 근대주의적으로 받아들였고3) , 그러한 과정에서 기해동정 역시 조선의 天命을 드러내는 의례적 성격을 드러내고 있다고 지적했다.4)

 

 ‘기해동정’ 즉 세종대의 쓰시마 정벌에 대해서는 70년대 이후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70~80년대의 연구는 1419년 이루어진 쓰시마 정벌에 대한 구체적 사실들을 밝혀가는 가운데, 이를 왜구의 침입에 대한 대응이자 왜구의 소굴을 소탕하기 위한 적극적 군사행동으로 평가하였다.5) 이후 이루어진 연구에서는 조금 더 다양한 성격이 주목되었는데, 한문종은 쓰시마 정벌을 적극적 왜구 대책으로 여기면서도 이를 한편 정벌 전후에 왜구 근절을 위한 외교적 노력도 있었음을 강조하였고, 정벌을 통해 대일외교체제를 주도적으로 운영하고 쓰시마를 기미관계의 외교에 편입시키는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하였다.6)  한편 이규철은 기해동정의 목표가 왜구의 근절이 아니라 세종이 북방지역의 경략에 집중하기 위해 준비하는 가운데 명의 일본 정벌계획을 저지하려 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7) 장준혁은 이규철의 의견에 대체적으로 동의하는 가운데 대일교역의 주도권 획득과 대일외교에서의 능동적 대응이라는 면 역시 중요하다고 지적하였다.8) 김일환의 경우 전쟁사적 입장에서 충실하게 기해동정의 과정을 정리하였다.9)

 이후 조일관계의 연구는 주로 계해약조와 그 이후 수직왜인, 도서왜인, 통교왜인 등의 통제책에 집중되어 있다. 계해약조를 맺은 조선의 외교관에 대한 관심10) , 조선에 들어온 여러 왜인들에 대한 통제와 처벌 방식11) 등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최근에는 양국 간에 오간 使臣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서 조선국왕사와 일본국왕사에 대한 기초적인 연구가 진행중이며12) , 특히 계해약조 이후 일본국왕사 혹은 유구국왕사의 이름으로 조선에 건너간 僞使의 성격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다.13)

 그 동안 진행된 많은 연구로 새로운 시각들이 쌓였음에도 불구하고 기해동정 직후 조선과 일본 사이에 어떠한 외교적 교섭과 시도가 있었는지는 기존연구에서 자세히 언급한 것을 찾기 어렵다. 제한적으로 하카타 상인들의 수습 노력에 대한 연구14) 가 있긴 하지만 이러한 내용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대부분 기해동정을 계기로 왜구가 상당 기간 사라졌으며 계해약조로 조일관계가 안정기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더욱이 조선과 일본 간 주고받은 사신의 성격과 朝日간 교섭에 관한 연구는 더욱 이루어지지 않아 그 구체적인 양상에 대해서는 거의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15)

 

 기해동정은 일본에 큰 위기의식을 주었으며 이로 인해 조선에 사신을 파견해 그 실태를 파악하려 하였다. 기해동정 이후 조선과 무로마치 막부가 큰 문제없이 통교하게 된 것은 두 나라 사이의  교섭의 결과였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두 나라의 화호를 위해 노력한 규슈의 九州探題를 비롯한 지역세력들이 있었다. 막부가 성립했지만 중앙집권정치가 완성되지 못하고 지방의 다이묘가 독자적인 세력을 그대로 유지하는 일본의 특성 상, 다양한 입장을 가진 지방 세력이 존재하며 이들이 막부와 조선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중재하거나 혹은 방해했다. 조선도 이러한 사정을 이해하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방세력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관계를 재편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이 부분은 많은 연구에서 공백으로 남아 있거나 간단한 언급만 되어있을 뿐이었다.

 이 글에서는 기해동정의 사후 처리를 위한 조선과 일본의 교섭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 조선은 왜구를 막고 안정된 동아시아 정세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일본은  남북조의 전란이 끝나고 무로마치막부가 전국의 다이묘들을 지배해 안정된 국내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1장에서는 기해동정의 배경과 기해동정에 따른 조·일 양국의  반응과 후속책을 살펴보고 2장에서는 조선 조정과 무로마치막부의 교섭 끝에 대마도주와 九州探題를 중심으로 歲遣船 제도를 성립시켜 규슈의 다이묘들을 통제하려는 결과가 도출되었음을 논증할 것이다. 그리고 3장에서는 결국 막부가 다이묘들을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九州探題가 허명화되고 결국 조선이 文引制度를 통해 對馬島主로 일본의 교섭 창구를 일원화시켰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본고는 당시 상황에 대한 가장 자세한 연대기 기록인 『朝鮮王朝實錄』과 함께 일본 막부 내부의 상황을 보여주는 자료들을 바탕으로 하였다. 기해동정 이후 첫 회례사로 교토의 막부에 파견된 송희경의 『老松堂日本行錄』은 조선사신과 교섭한 일본인들과 당시 막부의 분위기를 기록하고 있어 참고가 된다. 후대의 기록이긴 하지만 신숙주의 『海東諸國記』는 일본에 대한 15세기의 가장 상세한 기록으로 조선정부의 일본 인식을 살피는 기본적 사료가 된다.

 한편 일본에는 쓰시마 정벌 당시 쓰시마에서 작성된 당대의 사료는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일본 황족인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 친왕(伏見宮貞成親王)16) 의 일기인 『看聞日記』 역시 일본인의 시각으로 당시 교토의 분위기를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또한 무로마치막부의 외교문서를 정리한 『善隣國寶記, 무로마치시대의 外記局 官人 中原康富의 업무일지인 『康富記』는 자료의 훼손과 편집의 한계가 있지만 참고가 된다. 또한 당시 黑衣宰相으로 불리며 쇼군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쳤던 승려 만사이(滿濟)17) 의 일기인 『滿濟准后日記』는 당시 막부의 측근에서 작성된 소중한 사료이다. 본고에서는 조선과 일본의 상황을 동시에 살피기 위해 『실록』과 일본사료를 적극적으로 함께 검토하도록 하겠다.

 

 

1. 己亥東征’과 朝日關係의 변화

 

 ‘기해동정’은 세종 원년(1419) 5월 쓰시마의 왜구가 명의 요동반도를 공격하는 사이 조선이 왜구의 근거지를 소탕하기 위하여 이종무 등을 출전시켜 쓰시마를 공격한 사건이다. 한편 명에서는 조선에서 제공한 정보를 바탕으로 왜구와 전투를 벌여 望海堝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를 통해 조선은 쓰시마에 왜구의 제어를 명령하고 대마도주의 인신을 하사하여 통교를 하도록 허락했다. 흔히 기해동정의 배경을 왜구 문제에서 찾지만 14세기 후반에 비하여 태종대는 왜구의 수가 많이 줄어든 때였다. 그런데 갑자기 쓰시마에서 요동반도로 향하는 대규모 왜구가 발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내부의 정세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14세기 해상에 번성했던 왜구의 실체에 대해서는 국내외에서 여러 추정이 있었으나18) , 많은 수가 일본의 남북조 쟁탈 과정에서 발생한 것은 분명하다.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중심으로 하는 북조를 지지하는 다이묘와 고다이고 천황을 중심으로 하는 남조를 지지하는 다이묘는 일본 전국으로 나누어져 투쟁했는데, 그 중에서 규슈의 다이묘들은 주로 남조를 지지하는 측이 많았다. 이러한 남북조의 항쟁은 1대 쇼군 다카우지, 2대 쇼군 요시아키라를 거쳐 3대 쇼군 요시미츠의 대까지 지속되고 있었다.

 3대 쇼군 요시미츠는 1367년 아버지 요시아키라의 뒤를 이어 쇼군에 취임하고 무로마치막부의 통치체제를 본격적으로 완성한다. 교토를 탈환한 막부는 교토의 행정권과 과세권을 막부로 일원화하고 교토에 쇼군의 거처인 室町殿(御所)를 지어 교토의 통제를 강화한다. 한편 남조세력이 남아있던 규슈에는 九州探題를 설치하고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을 규슈탄다이로 파견하여 규슈를 평정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율령제 하의 규슈의 차관직인 大宰少弐를 세습하던 少弐氏와 마찰을 빚게 되지만 어느 정도 규슈 정벌에 성공한다.19) 결국 1392년 남조 측의 고카메야마천황(後亀山天皇)和約을 요청하여 남북조가 통합되면서, 요시미츠는 공히 일본 전체의 지배자가 되었고 그 권력도 어느 때보다 높아지게 되었다.20)

 

 남북조를 통일한 요시미츠는 과의 외교관계를 복원하게 위해 명의 책봉을 받는다. 이때 명의 건문제는 요시미츠를 日本國王으로 책봉하는데, 요시미츠는 책봉사를 정중하게 맞이하고 『대명회전』의 법식에 맞춰서 책봉례를 진행한다.21) 이때 일본 국내에서는 책봉을 받는 것과 일본국왕의 명칭을 사용하는 것에 대하여 굴욕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다.22) 특히 일본국왕이라는 명칭의 사용이 天皇을 범하는 무례한 일이 아니냐는 비판도 있었다.23) 그러나 요시미츠는 명의 책봉을 받아 일본국왕으로서 전통적 조공-책봉체제 안에 진입해 명과 감합무역을 진행하였고 조선과도 직접 사신을 파견해 외교를 진행하였다. 명 역시 일본의 입조를 기뻐하며 ‘日本國王之印’이라는 金印을 내려주었다.

 이러한 상황은 요시미츠의 아들이자 4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모치(足利義持)가 실권을 쥐면서 변화를 맞이하였다. 1408년 요시미츠가 사망하자 명의 영락제는 1409년 조문사를 보내고 시호를 내리며 동시에 왜구의 단속을 당부했다. 이 때까지 요시모치는 선대에서 구축한 명과의 책봉관계를 잘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요시모치는 다음 해인 14112월 일본에서 보낸 사은사를 따라 다시 온 명의 칙사 왕진의 교토 入京을 거부하고 돌려보낸 뒤 더 이상 명과의 조공-책봉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것임을 천명한다. 이때 영락제는 분노하며 조선에 일본을 공격하려 한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24) 영락제는 1417년 다시 한 번 일본에 來을 요구하는 칙사 여연을 보내지만 역시 入京을 거부당한다. 이 때는 규슈의 시마즈씨가 대신 사신을 보내 무마하지만 1419년 다시 칙사로 온 여연을 거부하며 단교는 신의 뜻이라고 단호한 입장을 밝힌다.25) 26) 요시모치의 단교 선언은 명과의 감합무역 역시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요시모치의 치세는 쇼군이 다이묘들을 통제하기 더욱 어려워진 상태로 아버지 요시미츠의 시대보다 오히려 중앙집권력이 쇠퇴하였다. 남북조의 통합은 이루어졌으나 1410년에는 남조 출신의 고카메야마상황(後亀山上皇)이 황위계승 문제에 불만을 품고 교토를 탈출하고 1416년까지 각지에서 남조의 세력들이 재봉기하였다. 게다가 1416년에는 일본 관동지방의 칸레이(関東管領)였던 우에스기 젠슈가 반란을 일으켰고(上杉禅秀) 관동의 여러 다이묘들과 요시모치의 친동셍인 요시츠구(足利義嗣)까지 연루되었다. 이후에는 쇼군가의 방계로 동일본을 다스렸던 가마쿠라쿠보(鎌倉公方)와의 갈등이 일어났다.27) 결국 만년에는 다이묘들 사이나 내부의 정쟁도 관여하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막부가 규슈와 쓰시마, 잇키 일대의 다이묘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것을 당연한 일이었다.28) 특히 무역에 의지했던 이들 세력이 무역이 끊긴 상태에서 왜구로 전환하는 것을 막는 건 막부가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요시모치는 명과 단교하고도 조선과는 정상적인 외교를 유지했다. 다만 보내는 국서에 발신자를 기존의 ‘日本國王 原○○’ 대신 ‘日本國 原○○’로 표현할 뿐이었다. 조선 역시 일본이 명과 단교한 것을 알았지만 특별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상황에서 굳이 그 점을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조선에서 막부에 국서를 보낼 때는 여전히 日本國王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었다. 명과의 감합무역이 종결된 상황에서 조선과의 무역은 중요했고, 하카타의 상인들이나 규슈의 大內氏, 大友氏 같은 세력도 조선과의 관계를 좋게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쓰시마의 상황은 조금 달랐다. 요시미츠의 왜구 단속 강화에 뜻을 같이했던 대마도주 소 사다시게(宗貞茂)1418년 병사하여 그 아들 소 사다모리(宗貞盛, 도도웅와)가 대마도주에 올랐지만 당시 대마도의 실권은 명목상 가신이자 독자적 해적 세력을 지휘하고 있던 호족 소다 사에몬타로(早田左衛門太郎)가 쥐고 있었다.29) 당시 오우치씨가 조선과의 무역에 눈독을 들이자 쓰시마 세력은 오토모씨와의 세력 대결에서 밀린 쇼니씨와 힘을 합치고 규슈의 다른 세력과 적대하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주도 하에 중국 요동반도를 목표로 한 대규모 왜구가 탄생하였다.

 조선의 입장에서는 少弐氏와 소씨(宗氏)가 중심이 된 대규모 왜구에 대한 정보가 들어오고  일본에서 탈출한 중국인 포로 등에 의해 왜구가 전선을 만들고 있으며 14193월 중국 연해로 쳐들어 갈 것이라고 보고받게 되자 이를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었다.30) 또한 당시 명과의 관계를 고려하면 이를 명에 고지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명의 의심을 살 수 있는 일이었다. 명에서 역시 요시모치의 단교와 왜구의 발생에 일본정벌론이 힘을 얻고 있었다. 조선은 왜구의 근원을 뽑고 대일관계에서 주도권을 명에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세종 원년(1419) 상왕 태종의 주도로 쓰시마를 정벌할 것을 결정하게 된다.31)

 141955일 왜구가 조선의 충청도 비인 도두음곶에서 전투를 벌였고,32) 그 결과 3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33) 며칠 후인 511일에는 황해도 해주의 연평곶에서 다시 전투가 벌어졌다.34) 이후 서해안에 머무는 왜구를 토벌하기 위해 백령도에서 전투를 벌였고 결국 승전하였다.35) 한편 요동반도로 들어간 왜구는 대비하고 있던 명군과 전투를 벌이고 명군은 望海堝에서 대승은 거둔다.

 

 조선은 대규모 왜구가 또 발생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요동반도로 들어간 왜구가 돌아오기 전 왜구의 소굴이 되는 쓰시마를 섬멸할 것을 논의한다.36) 상왕 태종은 논의 끝에 쓰시마를 공격하여 그들의 처자식을 잡아오고, 거제도로 물러나 있다가 적을 요격하여 이들을 섬멸하되 규슈의 왜인은 공격하지 않도록 결정한다.37) 그리하여 이종무를 三軍都體察使로 임명하고 中軍·左軍·右軍3군으로 나누어 원정군을 구성하였다.38) 거제도 견내량에 집결한 원정군은 병선 227, 병력 17,285명의 대병력이었다. 이들은 619일 출발하여 쓰시마를 공격했고 73일 철군하였다. 비록 대마도주의 완전한 항복을 받아내지 못하고 중간에 180명의 전사자를 내기도 했지만 어쨌든 쓰시마에 분명한 경고를 준 커다란 사건이었다.39)

 일본에서 오에이의 외구(応永外寇)라고 불리는 기해동정은 규슈와 교토의 막부에 큰 충격을 주었다. 조선의 쓰시마 정벌에 관한 소식은 규슈를 거쳐 교토의 막부에게까지 들어갔다. 처음에 교토에 전달된 소식은 쇼니씨가 전한 것으로 쓰시마에 500척의 몽고선이 도래했으며 소 사다모리가 전투를 치루어 대장 2명을 생포하고 대부분의 적을 전사시켰으며 이들이 고려인이라는 자백을 받아냈다는 것이었다. 또한 당선 2만 척이 6월 일본에 도래할 예정이었지만 태풍으로 대부분 침몰했다는 것이다.40) 이러한 내용은 교토 전체로 퍼지게 되는데 당시 황족인 伏見宮貞成親王의 일기인 『看聞日記』나41) , 쇼군의 고문이었던 満済의 일기인 『満済准后日記』에도 비슷한 내용이 실려있다.42)

 처음에 들어온 보고는 쇼니씨가 작성하여 쓰시마 측이 승리하였으며 더 많은 元寇가 일본 본토로 쏟아져 들어올 것을 막았다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이는 막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쇼니씨가 자신들의 전공을 과시하면서 동시에 조선으로의 침공을 정당화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看聞日記』에는 쇼니씨가 九州探題의 명의를 도용해 작성한 것으로 보이는 「探題持範注進状」이 실려 있기도 하다.

 쇼니씨의 보고가 들어오자 쇼군과 만사이는 바로 외교를 담당했던 상국사로 들어가서 실태를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43) 이들에게 중립적인 소식을 전해줄 수 있는 세력은 오우치씨나 조선에 九州節度使라고 칭하며 九州探題로 있던 시부카와씨였다. 조선은 기해동정을 시작하면서 조선 내부에 있던 일본인들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항왜로 활약했던 平道全의 아들 平望古조차 죽일 정도로 각별히 정보에 신경을 썼다.44) 이러는 과정에서도 당시 구주절도사의 사신으로 와 있던 승려 正祐를 후하게 대접하고45) , 경상도의 到泊倭人販賣倭人 591명을 잡아 가두는 상황에서도 九州節度使의 사신은 제외했다.46) 전술했듯이 쓰시마를 공격하는 와중에는 규슈 출신은 공격하지 않도록 했는데 이는 쓰시마 원정이 규슈의 제 세력까지 확전할 의사가 없다는 분명한 표현이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을 보면 쇼니씨에 의하여 쓰시마의 정보는 철저히 통제된 것으로 보인다. 규슈탄타이 명의의 주진장이 쇼군에게까지 전달된 것은 막부와 쓰시마의 관계는 쇼니씨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었음을 의미한다. 규슈탄다이의 사자는 마침 조선에 가 있었지만 쓰시마는 쇼니씨와 그 지휘를 받는 호족 소다 사에몬타로의 손 안에 들어와 있었다. 쇼니씨로서는 오랜 거점이었던 하카타가 규슈탄다이인 시부카와씨와 이를 후원하는 오우치씨의 손에 떨어져있는 가운데 대규모 왜구를 발생시켜 명과 조선의 정벌을 야기시켰다는 책임을 지게 되면 규슈에서의 세력갈등에서 열세에 빠질 위험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과 명이 2만 척의 배를 동원해 일본을 추가 침공할 것을 자신들이 막았다는 거짓 보고를 하면서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쇼니씨의 이러한 걱정은 당시 교토의 분위기와 관련이 있었다. 看聞日記』에 따르면 이미 요시모치의 단교 등으로 인해 명이 南蠻, 조선과 함께 일본을 공격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져 쇼군이 매우 불안해하고 있었다.47) 또한 異國이 침입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일본의 주요 신사나 사찰에서 불길한 일이 생겼다는 보고가 잇따라 올라오고 심지어 천황이 머무는 御所에서 피가 흐르는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48) 이런 상황에서 조선이 쓰시마를 공격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이것은 제2元寇, 즉 몽고의 침략으로 여겨졌고 교토는 패닉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

 교토의 불안은 당시의 급격히 퍼진 神功皇后八幡神에 대한 신앙으로도 확인할 수 있다. 看聞日記』에 기록된 당시 풍설에 따르면 고려군(조선군)이 쓰시마를 침공했을 때 巨人 여성이 나타나 고려군과 몽고군이 탄 배를 파괴했다고 한다.49) 이 여인은 곧 신공황후와 동일시되어 규슈와 교토에 하치만신앙의 광풍을 가져왔다. 쇼군 요시모치와 만사이 또한 기해동정의 보고 이후 하치만신을 로 하는 放生會를 열어 지속적으로 神佛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인다.50) 하치만신은 본래 규슈지역의 토속신이었으나, 8세기 이후 국가에 의해 皇祖神으로 편입되어 15대 오진천황(応神天皇)과 동일시되며 오진천황의 어머니인 신공황후와도 동일시된다. 이들 신은 의 일본 침략 때 神風을 일으킨 주체로 생각되는 신들이다. 이 시기 하치만신과 신공황후에 대한 신앙이 강조되며 神國思想이 강조되는 것은 일본의 위기감이 얼마나 절실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이다.51) 52)

 결국 일본 막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세종의 즉위를 축하한다는 명목으로 승려 亮倪를 정사로 하는 사신을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는 태종 14년 이후 5년 만의 일본국왕사 파견이었다. 이 사행에는 九州摠兵官 즉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의 사신과 함께 비인현 도두음곶에서 포로로 잡힌 前 司正 姜仁發과 쓰시마 정벌 당시 잡힌 조선인들이 포함되어 있었다.53) 정보를 살핌과 동시에 조선에 화친의 제스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 세종은 양예 등을 접견하고 쓰시마를 정벌한 연유를 설명하며 양국의 화친을 강조하고 구청한 대장경을 하사했다. 이때 양예는 聖朝皇化에 감사한다는 시를 지어 올려 조선에 우호적인 태도를 표현한다.54) 조선과 일본 막부가 더 이상의 확전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제 확인이 되었다. 그러나 양국은 서로의 사정을 더 살필 필요가 있었고 이에 따라 조선과 일본 간의 3차례에 이르는 會禮使 외교가 시작되었다.

 

 

2. 戰後 조일교섭과 九州探題의 역할변화

 

1) 사신의 왕래와 九州探題의 중재

 

① 첫 번째 일본국사와 회례사

 세종의 즉위를 축하하는 일본 막부 측의 사신이 돌아가면서 조선에서도 일본에 사신을 보내기로 결정한다. 이때 사신의 명칭은 回禮使로 명목상은 막부 쇼군의 축하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회례사는 仁寧府 少尹 宋希璟으로 정해졌는데 일본에서 구청한 대장경을 전하는 동시에 표류하거나 왜구에게 잡혀간 조선의 백성을 쇄환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55) 1월에 파견된 회례사 일행은 10개월이 지난 1025일 쇼군의 국서를 가지고 復하였다.56)

 세종 2년에 파견된 첫 번째 회례사는 요시미츠의 사망 이후 변화된 일본 외교 상황 때문에 많은 고생을 겪었다, 이것은 송희경이나 통사 윤인보의 복명 내용에서도 드러나며 송희경이 일본 사행에서 쓴 『老松堂日本行錄』이 남아 있어 사신 일행이 만난 일본 측 인물들과 교섭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57) 아래에는 『노송당일본행록』과 『실록』에 기초하여 송희경의 교섭 과정을 살펴보았다.

 송희경은 세종 2(1420) 115일 일본국왕사 亮倪 및 구주절도사 사신 正佑와 함께 서울을 출발해서 213일 부산을 통해 대마도로 건너갔다.58) 이들은 순조롭게 쓰시마에 도착했으며 중간에 쓰시마인들을 만나 전쟁이 끝났음을 알리기도 하였다.59) 도주 宗貞盛(都都熊瓦)와 그 동생 宗俊(都都熊守)은 규슈에 들어가 있었으며 소다 사에몬타로는 쓰시마가 오래전부터 쇼니씨를 섬겨왔으므로 조선이 쓰시마를 경상도에 부속한다면 전쟁이 벌어질 수 있음을 경고했다.60) 송희경은 소다 사에몬타로에게 조선이 대마도를 부속시킬 생각이 없을 것이라고 일단 설득했다.

 31일 쓰시마를 떠난 회례사 일행은 2일 잇키(壹岐)에 들어갔으며 다음날 하카타로 출발하여 4일 하카타에서 규슈탄다이 源義珍·源義俊 父子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이곳에서 머물면서 교토에서 입경 허락을 기다렸다. 그 동안 하카타의 상인인 平方吉久와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의 가신인 平萬景, 伊東殿 및 승려들의 대접을 받았다.61) 규슈탄다이는 조선에 서신으로 간 적도 있는 승려 宗金을 교토로 보내 쇼군을 설득하고 조선 사신을 만날 것을 청하였다.

 

 16일간의 대기 끝에 규슈탄다이가 쇼군의 허락을 받아 321일 하카타를 출발하여 23일 아카마가세키(赤間關)에 정박하였다.62) 여기서 다시 7일간 대기한 이들은 쇼군의 허락이 떨어지자 다시 아카마가세키를 출발해 세토 내해를 따라 교토로 향했다. 중간에 해적을 만나기도 했으나 쇼군이 호송선 9척을 보내주어 무사히 지날 수 있었다.63) 이들은 416兵庫에 정박한 뒤 亮倪가 교토에 가 쇼군의 허락을 받기를 기다리다가 드디어 421일 교토에 도착해 통사인 중국인 위천의 집에 유숙했다.64) 그리고 다음 날 숙소를 교토 북쪽 仁和寺의 말사인 深修庵에 정했다. 이들의 경호는 막부의 管領인 시바씨의 가신인 甲斐殿이라는 인물이 담당하였다.65)

 423일부터 쇼군 일행과 조선 회례사 간의 교섭이 진행되었다. 쇼군 요시모치는 직접 오지 않고 사신의 숙소에 중국인 출신 陳外郞66) 과 통사 유천을 보내어 먼저 쇼니씨의 보고를 이야기하며 이번 쓰시마 원정이 명과 함께 일본을 원정할 계획의 일환인지를 물었다. 송희경은 쓰시마 정벌은 단지 왜구를 치기 위해서이며 대마도주와 규슈는 물론이고 본국 역시 공격하지 않을 것이며 명과의 합동 공격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 문제가 된 것은 국서의 연호 문제였는데 일본 측 인사들은 이것을 일본 연호로 고치면 안 되겠냐고 문의하지만 송희경은 국서를 고칠 수 없다고 이를 거부한다.67) 막부에서는 이 일로 국서를 접수하지 않은 채 며칠 동안 사신을 불러보지 않고 亮倪와 다른 승려만을 보내 교통하였다.68)

 亮倪는 쇼군과 회례사 사이를 적극적으로 교통하며 교섭하였다.69) 그는 하카타 의 주지로 규슈탄다이와 하카타 상인들의 의중을 받아 조선과 막부의 사이를 중재하기 위해 노력하던 인물이었다. 결국 쇼군은 이들을 寶幢寺70) 에서 만나 보면서 국서와 예물을 받아 들였다. 함께 들어온 승려 惠珙周頌五山에 속하는 相國寺71) 의 승려들로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이들이었다.72) 이들은 연호 등 몇 가지 문제를 따졌으나 별 문제 없이 지나갔다. 송희경 측의 일본 본토 공격 예정이 없다는 해명이 상당히 받아들여져 이후 회례사에 대한 대우는 한결 나아졌다.73) 이후 송희경은 天龍寺74) , 臨川寺75) , 西方寺76) 등의 주요 禪寺를 직접 찾기도 하는데 이는 유람의 목적도 있었지만 國文書를 다루는 승려를 직접 찾아 문의를 하기 위해서이기도 하다.77)

 

 회례사 일행은 627일 교토를 출발하여 왔던 길과 마찬가지로 효고를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들어온 길과 같이 효고를 거쳐 해적을 피해 세토 내해의 여러 곳에서 머물다가 아카마가세키를 거쳐 하카타로 돌아왔다. 도중에 여러 일본인 승려 등을 만나 조선이 일본을 칠 뜻이 없음을 거듭 알리기도 하였다.78) 하카타에서 전현직 규슈탄다이 源義珍(源道鎭)源義俊을 다시 만났으며 쇼니씨가 조선을 향해 보복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쇼니씨를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79)

 1025일 한양에 돌아온 송희경은 세종과 태종을 만나 복명하였다. 송희경이 스스로 평가하기로 자신의 사행은 성공적이었다. 스스로는 명과 조선이 일본을 칠 것이라는 일본국왕의 의혹을 풀었으며 구주절도사(규슈탄다이)는 자신이 도적에게 침범당하지 않도록 특별히 보호하여 무사히 돌아올 수 있었다.80) 그러나 通事 尹仁甫先行은 쇼군의 의심과 연호로 다툰 이야기, 쇼니씨와 도도웅수 등의 불만 등을 있는 그대로 전하면서 조선에서는 쓰시마에 대한 재정벌론 등을 논의하기도 하였다.81) 다만 송희경을 따라 조선에 들어온 규슈탄다이와 쓰시마의 사자가 함께 들어왔는데, 규슈탄다이의 사자를 통해 쓰시마를 회유하도록 하였다.82)

 

② 두 번째 일본국사와 회례사

 일본 쇼군의 사신은 1년 뒤인 1421년 파견되어 세종 4(1422) 조선에 들어왔다. 이들이 조선에 파견된 이유는 명목상으로는 修好와 함께 쇼군의 母后가 새로 절을 지었기 때문에 대장경을 얻으려 한다는 것이었다.83) 이때 사신으로 온 승려 圭籌는 이미 태종 14(1414) 한번 쇼군의 사신으로 온 적이 있던 이였다.84)

 이 때 일본의 사신은 쇼군의 모후가 대장경을 구청한다는 명목으로 왔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쇼군 요시모치의 생모는 이미 1399년 죽었고, 요시미츠의 正室繼室 역시 이미 죽었으며 영향력 있던 나머지 側室들 역시 대부분 죽었다. 게다가 『만사이준후일기』를 살펴보면 이때는 고려대장경 대신 임제, 천태, 진언종의 승려들이 筆寫 一을 조성 중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대장경이 당장 필요치 않았다.85) 또한 당대의 기록을 살펴보더라도 이 때 새롭게 사찰을 건조한 것은 없다. 일본 측 외교기록인 『善隣國寶記』에 실려있는 국서를 보더라도 일본 측 기록은 대장경 구청에 관한 것만 있을 뿐 모후에 관한 기록은 없다.86) 그러나 조선은 쇼군과 태후가 청한 총 2부의 대장경을 부쳐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87)

 

 그렇다면 세종 4년 쇼군의 사신은 어떤 목적에서 보내졌을까? 일반적 대장경 구청의 목적이라기에는 시기가 너무 이르고 잦다. 특히 주목되는 말은 太后의 사자가 언급한 말로 태후가 ‘그러나 나는 婦女라 이 뜻을 친히 여쭙지 못하다가 지금 九州節度使가 조선국과 더불어 通好한다 함을 듣고 節度使를 통하여 조선국에 이 뜻을 여쭌다.88) 라고 했다는 것이다. 즉 이들은 규슈탄다이의 보고가 정확한지를 확인하려고 내려왔던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이 조선에 온 시기는 조선과 쓰시마 사이의 조치가 취해진 후였다. 당초 조선을 대마도를 경상도의 속주로 삼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내보였다.89) 그리하여 대마도주에게 글을 보내 입장을 정하도록 하고 만약 대마도주가 항복을 거부할 경우 그해 9. 10월에 다시 정벌을 하도록 정하였다.90) 쓰시마는 결국 대마도주 도도웅와 명의로 예조판서에게 신서를 보내 항복하였고91) , 인신을 받아갔으나 조선은 이를 믿지 못했다. 특히 송희경이 복명하여 연호 문제와 쇼니씨 및 도도웅수의 불만을 이야기하자 대마도 재정벌을 계획하고92) , 이를 구주절도사에게 서간을 보내 통보했다.93) 그러나 구주절도사가 중간에서 이를 계속 중재하고94) , 대마도주와 소다씨 등 쓰시마 세력 역시 계속 臣屬을 청하고 인신을 받아가며 왜관을 통해 무역하자 마침내 기해동정 당시 잡아온 포로들을 돌려보냈다.95) 이러한 상황 속에서 막부의 사신이 왔던 것이다. 즉 세종 4년의 日本國王使는 기해동정을 마무리 짓는 과정을 살피기 위한 사신이었다.

 이 사신에 대해서도 조선은 회례사를 보낸다. 回禮使 朴熙中副使 李藝가 국서와 대장경 2부를 가지고 교토로 떠났다.96) 이 회례사에 대해서는 『실록』에도 피로된 조선인을 쇄환했다는 기록 밖에 없으며97) , 善隣國寶記』 등 일본 측 사료에는 아예 해당 國書가 빠져있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박희중이 조선 선군을 죽인 하카다의 승려들을 잡아 가둔 것98) 을 볼 때 두 나라 사이에 큰 마찰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③ 세 번째 일본국사와 회례사

 일본 쇼군의 3번째 사신은 회례사와 동시에 도착했다. 2번째 사신으로 왔던 승려 규주가 승려 梵齡 135인의 왜인을 이끌고 서울에 올라왔다.99) 이들이 온 목적은 지금까지와 같은 印經本 대장경이 아니라 대장경 목판 자체를 求請하기 위해서였다. 세종은 처음에는 이것을 주려고 했다가 일본의 요구가 과도해질 것을 걱정하여 내어주지 않았다. 그러면서 대장경판은 1본 밖에 없으므로 범자로 된 密敎大藏經板과 대각국사 의천이 송나라에서 가져온 註華嚴經板, 金字로 된 華嚴經 寫經, 대장경 인출본을 내려주었다. 하지만 규주는 대장경판을 계속 요구하였고, 심지어 단식까지 하였다.100) 게다가 이들은 대장경판을 주지 않을 경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수도 있다는 소문을 퍼트리고 이것이 발각되자 통사 윤인보에게 책임을 돌린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조선 역시 적당히 윤인보에게 책임을 지우고 관대하게 이 일을 처리했다.101) 102) 이를 보아 조선 역시 일본과의 관계를 대부분 해결된 것으로 생각하고 사건을 확대시키는 것을 피한 듯하다.

 

 조선은 돌아가는 규주 등과 함께 3번째 회례사로 朴安臣副使 李藝를 파견하였다.103) 이들이 따로 남긴 여행기는 없지만 『실록』에 復기사가 자세히 남아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104) 이에 따르면 이들은 아카마가세키에서 쇼군을 허락을 받지 못해 55일간 구류되어 있었다가 오우치씨의 도움으로 상경했다. 교토에 올라간 이들은 목판과 불경을 相國寺에 두고, 等持寺에서 쇼군을 접견했는데 요시모치는 대장경판을 주지 않은 것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하며 경판과 불경만 받고 나머지 국서와 예물 수령을 거부했다.105) 회례사는 외교문서를 담당하는 승려인 鹿苑僧録106) 周噩에게 중재를 요청하여 국서를 접수시키고 돌아왔다. 이들은 돌아오는 길에 규슈탄다이를 만나 사신이 너무 번다하니 사신의 符驗圖書를 확인하고 春秋 두 차례만 보낼 것을 합의했다. 잇키에 이르러서는 왜구의 습격을 받을 뻔했으나 쓰시마의 소다씨와 규슈탄다이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었다.

 조선 전기 일본에서 대장경을 구청하는 것을 백 차례가 넘을 정도로 많은 일이었다.107) 조선 역시 대다수의 경우에는 인출된 대장경이나 불경 등을 내려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처럼 막부가 간절하게 대장경판을 요청한 경우는 없었다. 善隣國寶記』에는 쇼군이 조선국왕에게 보낸 대장경판 구청을 위한 국서를 5차례나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왜 이렇게 요시모치가 강력하게 대장경판을 요구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한 원인을 알 수는 없다. 다만 몇 가지 추측은 가능하다.

 

 일본 측 사료를 살펴보면 먼저 이 시기 천황 일가의 병환이 심각했다.108) 먼저 상황이었던 後小松天皇이 계속 질병에 시달리다가 위독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109) 천황이었던 称光天皇 역시 14224월부터 병에 시달려 위독했으며110) , 동년 12월 기적적으로 소생하였다.111) 게다가 後小松天皇의 차남이자 称光天皇의 동생으로 유일한 황위계승자였던 小川宮 역시 계속 병에 시달리다가 1425년 사망한다.112) 천황의 혈통이 귀한 상황해서 이렇듯 북조의 정통성을 가진 직계 황실의 주요 인원이 계속 병약하자 불교계를 중심으로 계속해서 祈禱, 修法을 베풀게 되었고, 그 기도의 방식 중 하나가 대장경 轉讀이었다.

 본래 기도와 수법 등은 진언종, 천태종 등 주로 밀교 계통에서 주도하던 것이었다. 그런데 무로마치 막부와 깊이 결합한 선종의 무소 소세키(夢窓疎石)를 중심으로 한 무소파의 특징은 顯密의 결합을 강조하는 것으로 기도와 수법을 중시하였다.113) 그렇기 때문에 『만사이준후일기』에도 각종 기도와 수법, 기우제 등을 南禪寺相國寺 등 선종사찰에서 여러 종파의 승려들이 함께 수행하는 기사가 자주 보인다. 때문에 무소파를 중심으로 불교계에서 천황가의 병환을 위한 기도의 목적으로 대장경을 전독하기 위해 새로운 대장경을 구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두 번째는 무로마치 막부 초기에 사찰의 건축과 불교 정책의 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초대 쇼군 다카우지는 자신이 죽인 이들을 위하여 전국 66개 쿠니()安國寺라는 이름의 사찰을 세우고 利生塔이라는 탑을 세울 것을 맹세한다. 이러한 전국 안국사의 건립은 요시모치 때까지 지속된다.114) 그리고 남조의 명복을 빈다는 이유로 교토에 天龍寺 등 대규모 사찰을 세우게 된다. 3대 쇼군 요시미츠는 이에 더해 천황의 거처 북쪽에 자신의 야욕을 드러내는 相國寺를 세우고 109미터의 칠층목탑을 세운다. 4대 쇼군 요시모치 역시 상국사, 東福寺 등 대규모 사찰의 중건을 진행한다. 이러한 대규모 사찰 불사에 더불어 빈번한 화재와 재건으로 대장경이 계속 필요했을 것이다. 그리고 오우치씨, 호소카와씨, 우에스기씨 등 지방의 슈고다이묘들도 계속하여 자신의 사찰을 세웠다. 이들 지방 세력이 개별적으로 조선과 접촉하여 대장경을 받아간 기록도 보이지만, 세종 재위 초반은 아직 쇼군의 통제가 강했고, 조선으로부터 받은 대장경의 분배도 쇼군의 권한이었다.115)

 이 밖에도 1420년대는 잇따른 기근과 역병 때문에 요시모치의 치세 중 가장 많은 혼란이 있던 시기로 평가되고 있다. 기우제와 더불어 금주령이 내려지고 교토의 역병 또한 심각했다.116) 때문에 요시모치가 불교적 지도자의 자격으로, 또한 전국의 다이묘를 대표하는 무사들의 대표로써 자신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대장경의 원본이 되는 대장경 목판을 아예 구청하여 소유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117)

 

 아무튼 3번째 사신 왕복으로 일본도 조선도 서로 간의 전쟁 위협은 사라졌다는 것을 완전히 인식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 사신들의 조선 침공 소문을 관대하게 처리하였고, 막부 역시 조선이 공격해오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에 대장경판을 구청하는 무리한 요구를 해왔을 것이다. 결정적으로 조선은 박안신의 복명 이후 더 이상의 전쟁의 위협은 없고 일본의 욕구를 채우려 함만 남았기 때문에 회례사는 필요치 않다고 판단을 내렸다. 실제로 이후 일본으로 가는 조선 사신은 쇼군(일본국왕)의 사망 등을 계기로 修好를 위한 通信使가 파견될 뿐이며, 4~5년 가까이 직접 사신을 파견하지 않는다.118) 기해동정 이후의 교섭이 일단락 된 것이다. 그리고 왜구에서 통상으로 패러다임이 바뀐 조일관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조선은 많은 사신을 정리해 가려서 받는 조치가 필요했다. 조선이 이를 논의한 것은 바로 막부의 대리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규슈탄다이였다.  

 

2) 九州探題를 중심으로 하는 朝日通交의 재편

 

 윗 절에서 살펴보았듯이 기해동정 이후 조선은 막부 및 규슈와의 전쟁을 막기 위해 많은 교섭을 진행했다. 세종은 개국 이래 쇼군에게 가장 많은 8회의 사신을 파견했다.119) 그 외에 세종 재위 초반에는 규슈탄다이(구주절도사)에게 총 수십 차례의 사신이 왕복하였다. 이것은 쓰시마를 제외한 가장 많은 횟수의 교섭이었다. 막부에서도 규슈탄다이를 신뢰하고 있었다. 기해동정 이후 조선에 보낸 첫 사신은 하카타의 승려 양예였으며 양예와 규슈탄다이는 송희경 편에 따로 사신을 보내 명의 일본 침략 가능성을 묻기도 했을 만큼 적극적으로 조선과 쇼군을 중재하는데 노력하였다.120) 그리고 매번 오가는 사신 편에 반드시 규슈탄다이의 사자가 함께 서울과 교토를 오갔다.

 그렇다면 『실록』에서 九州節度使, 九州摠管, 九州都元帥로 표현되는 규슈탄다이(九州探題)  정확히 무엇이고, 이것을 맡고 있는 시부카와씨(渋川氏)는 어떤 세력이었을까? 九州探題는 무로마치 막부가 규슈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내려 보낸 막부의 대리인으로 1336년 처음 설치되었다. 규슈지역은 무로마치 막부에게 저항하는 남조세력이 강력하게 남아있었으며 쇼니씨, 오토모씨, 키쿠치씨, 시마츠씨 등 오래된 슈고다이묘가 각자 호족처럼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중 북부 규슈의 거점이자 항구인 하카타는 오랫동안 쇼니씨가 율령제 상 규슈 통치기관인 大宰府少弐 관직을 세습하면서 차지하고 있었다. 쇼니씨는 막부와 힘을 합쳐 남조를 공격하기도 했지만 막부가 규슈탄다이를 설치하고 규슈를 통치하려 하자 남조 측으로 돌아섰다.

 

 한편 남북조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3대 쇼군 요시미츠는 잇따라 여러 세력을 교체해가며 규슈탄다이를 파견하고 많은 패전 후 이마가와 료순(今川了俊)을 파견해 규슈 평정에 성공하고 남조세력도 항복시킨다. 이마가와 료순은 조선에도 사신을 보내며 선린관계를 만들어나가지만 역시 막부의 통제에서 점차 벗어나 호족화하려 했고, 자신보다 이른 시기에 막부에 의해 파견된 오우치씨를 지나치게 몰아 붙여 반란을 일으키게 한 혐의로 규슈탄다이에서 해임되고 교토로 불려가게 된다(応永). 이후 요시미츠가 규슈탄다이로 임명해 세습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부카와씨(渋川氏)이다.121)

 시부카와씨는 아시카가씨의 방계 중 하나로 가마쿠라시대에 시바씨(斯波氏)와 함께 아시카가 宗家에서 갈라져 나온 성씨로 코즈케노쿠니(上野国, 현재의 군마현 북부)에 정착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거병하면서부터 높은 가신으로 활동하였고 여러 싸움에서 쇼군을 대신하여 죽은 경우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단히 가격이 높아서 막부 종가의 혈통이 끊길 경우 쇼군 후보를 낼 수 있는 御一家 세 가문 중의 하나였다. 2대 쇼군인 요시아키라 역시 시부카와씨의 딸을 정실로 받아들였으며 남조세력에게 공격당했을 때 많은 도움을 받았다.122) 이렇게 사실상 한집안이나 다름없는 믿을 수 있는 가문이었기 때문에 시부카와씨는 많은 호족들이 자리를 지키는 규슈를 통치할 규슈탄다이로 부임할 수 있었다.

 조선과 적극적으로 교섭한 인물은 조선에서 源道鎭이라고 부르는 시부카와 미츠요리(渋川満頼, 1372~1446)와 그 아들로 조선에서 源義俊이라고 부르는 시부카와 요시토시(渋川義俊, 1400~1434)이다. 특히 미츠요리는 공식적으로는 1419년 기해동정 이전에 규슈탄다이의 자리에서 물러나 직위를 아들 요시토시에게 물려줬지만 기해동정이 일어나자 아들과 함께 전면에 나서서 조선과의 교섭을 진행하였다. 조선도 이 두 인물을 우호적으로 보고 이들을 중심으로 규슈 세력의 사신들의 통제책을 짜려 한 것으로 생각된다.

 시부카와씨와 조선의 첫 통교는 미츠요리가 규슈탄다이에 임명된 다음해인 태조 6(1397) 부터였다.123) 이들은 기해동정 이전까지 태조 6(1397)부터 기해동정 이전(1419)까지 22년간 32회간 통교하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探題라는 이름으로 통교하다가 구주절도사, 구주도원수, 구주총관 등의 조선식 관직명을 사용하여 자신들이 규슈지역에서 가장 높은 직위에 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오우치씨에 밀려 조선과 아주 가까운 관계를 가지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이 하카타의 상인, 승려와 결합하면서 규슈탄다이는 점차 조일통교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124) 그리하여 이들은 태종에게 요청해 인신을 내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하는데125) 이는 受図書制의 선구적 모습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126)

 시부카와씨가 조선과의 통교에 있어서 양적, 질적으로 획기적인 성과를 보인 것은 바로 기해동정 이후이다. 이 시기 대마도와의 중재부터 단순한 통교까지 많은 사신들이 조선을 찾았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구주절도사 등의 명목으로 조선을 찾았던 시부카와씨의 사신은 세종 원년부터 세종 10년까지 총 87회에 달한다. 이는 앞서 살펴본 태조~태종 간 22년의 절반 이하의 기간에 3배에 가까운 횟수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 재위 초반 쓰시마를 제외한 규슈지역의 다른 어떤 세력보다도 활발하게 조선과 통교한 이들이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라는 것을 증명한다.127) 기해동정 이후~세종 10년까지 시부카와씨가 여러 명목으로 조선과 통교한 횟수를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1】 세종 원년(1419)~세종 10(1428)간 규슈탄다이의 조선 교섭 횟수

 

源道鎭

九州節度使

九州摠兵官

九州都督

源義俊

九州摠管

九州都元帥

源滿直128)

源俊臣129)

합계

세종 원년

2

5

1

 

1

 

 

 

9

세종 2

7

3

 

4

 

 

 

 

14

세종 3

4

 

 

5

 

1

 

 

10

세종 4

4

 

 

10

 

 

 

 

14

세종 5

10

 

 

9

 

 

1

1

21

세종 6

4

 

 

3

 

 

 

 

7

세종 7

5

 

 

1

 

 

 

 

6

세종 8

2

1

 

 

 

 

 

 

3

세종 9

 

 

 

 

 

 

 

 

0

세종 10

 

 

 

 

2

1

 

 

3

합계

38

9

1

32

3

2

1

1

87

 

 

 규슈탄다이 본인 외에도 시부카와씨와 함께 하는 가신 및 동조세력들도 실록에 적지 않게 보인다. 시부카와씨의 휘하에 있는 이들의 전체적인 통교 양상을 함께 보아야 전체적인 규슈탄다이 세력의 조선 통교 상황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 아래 있었던 가신들은 다음과 같다.130) 먼저 石城管事, 民部小補를 표방하는 板窓滿家는 이타쿠라씨로 이후 기록에 등장하는 平宗壽=平宗秀로 이어지는 세력으로 보인다. 이들은 시부카와씨의 규슈 도래 이전부터 하카타에 있었으며 시부카와씨의 규슈탄다이 부임 이후 그 휘하에서 규슈의 제 세력과의 조정을 맡았다. 石城은 곧 하카타를 가리키는 다른 말로 이들은 하카타를 대변하여 조선과 가장 많은 통교를 하는 세력이기도 하다.

 原昌清 혹은 吉見昌清으로 나타나는 세력은 요시미씨(吉見氏)로 본래 관동지역의 무사였다가 시부카와씨의 규슈탄다이 부임 이후 가신이 되어 함께 규슈지역으로 넘어온 것으로 보인다. 시부카와씨와는 조상이 같은 혈족으로 히젠지역(지금의 나가사키현)의 태수를 자임하고 있다. 역시 다른 세력의 조선 통교가 약해지는 태종 말~세종 초의 기간에 오히려 더 활발하게 조선과 통교하고 있다.

 역시 석성관사를 자임하고 있는 平満景은 그 실체가 정확하지 않다. 다만 오우치씨 때부터 하카타의 일을 맡아보는 代官으로서 시부카와씨의 규슈탄다이 부임 이후 시부카와씨에게 종사하고 있다. 여러 사료 상, 하카타의 무역을 담당하는 인물로 자신의 상위 세력이 바뀌더라도 하카타의 이익을 위해 종사하는, 상인 및 승려와 밀접한 무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평만경은  시부카와씨와 별도로 단독으로도 조선에 사신을 보내고 있어 비교적 독립적인 세력이라는 것을 추정케 한다.

 

 시부카와씨의 가신은 아니지만 九州巡撫使라고 자칭하는 平常嘉 역시 규슈탄다이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세력이다. 平常嘉는 막부에서 규슈탄다이를 보좌하기 위해 파견한 규슈조시(九州上使) 고바야카와 노리히라(小早川持平)를 가리킨다.131) 고바야카와씨는 본래 세토 내해의 해상세력을 기반으로 한 다이묘로 시부카와씨보다 家格은 다소 떨어진다. 그러나 규슈조시는 규슈탄다이의 명령을 받지는 않았으며 주로 규슈탄다이를 보좌하며 막부에 반항하는 키쿠치씨와 아소씨(阿蘇氏) 등 주로 히고(肥後, 현 구마모토현)지역을 다스렸다. 이곳에는 조선으로 가는 독립된 항구가 없었으며, 또한 위계상 시부카와씨가 고바야카와씨 위였기 때문에 고바야카와씨 역시 규슈탄다이를 통해서 조선과 교섭하였다.    

 이 밖에도 하카타의 승려, 상인들 역시 시부카와씨의 하카타 상실 이전까지는 시부카와씨의 세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종금, 양예 등의 승려는 조선에 사신으로 파견가고 막부와 직접 접촉하기도 하였다. 중국 출신인 陳外郞과 그 아들 平方吉久 역시 하카타에서 규슈탄다이와 협력하며 조선과의 교섭에 힘을 쓰고 있었다. 하카타의 어용상인과 각 사찰들은 중간자적 입장을 잘 살려서 규슈탄다이와 막부를 조선과 연결시키며 그 사이에서 자신들의 필요를 충족시켰다. 아래 표는 이들 세력이 조선과 통교한 횟수이다.132)

 

【표2】 세종 원년(1419)~세종 10(1428)간 규슈탄다이 지배 하 세력의 조선 교섭 횟수

 

平滿景

平宗秀

滿種

平方行吉

平方宣行

平常嘉

宗金 등 승려·상인

합계

세종 원년

1

 

 

 

 

 

1

2

세종 2

4

1

 

 

 

 

1

6

세종 3

7

1

 

 

 

 

 

8

세종 4

2

 

 

 

 

 

4

6

세종 5

10

 

1

 

 

3

 

14

세종 6

2

 

 

 

 

2

1

5

세종 7

2

 

 

 

1

1

3

7

세종 8

 

 

 

3

 

1

4

8

세종 9

2

 

 

1

 

1

 

4

세종 10

2

 

 

 

 

3

7

12

합계

32

2

1

4

1

11

21

72

 

 

 위의 표에서 알 수 있듯이 시부카와씨 세력은 세종대 초기 백여 차례의 활발한 교섭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규슈의 다른 세력과 비교하면 이 수치는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아래 <3>은 같은 기간 시부카와와 오우치, 쇼니 등 다른 규슈의 세력이 조선과 교섭한 횟수를 비교한 것이다.

 

 

【표3】 세종 원년(1419)~세종 10(1428)간 규슈 주요 세력의 조선 교섭 횟수

 

渋川

大内

少弐

松浦

島津

伊集院

宗像

大友

세종 원년

9

 

 

1

 

 

 

 

세종 2

14

4

 

1

1

 

 

 

세종 3

10

1

 

 

 

 

 

 

세종 4

14

3

 

1

 

 

 

 

세종 5

21

1

1

 

3

 

 

 

세종 6

7

2

3

 

 

 

1

 

세종 7

6

 

 

 

 

 

 

 

세종 8

3

 

2

 

1

1

 

1

세종 9

0

 

 

 

1

2

 

 

세종 10

3

1

5

 

2

1

 

 

합계

87

12

11

3

8

4

1

1

 

 

 <3>에서 알 수 있듯이 시부카와씨의 본세력이 통교한 횟수가 압도적이다. 전통적으로 규슈의 강자였던 오우치, 쇼니, 시마즈(이주인 포함), 오토모, 키쿠치 중에 규슈탄다이와 우호관계에 있던 오우치씨는 수는 적지만 시부카와씨와 비슷한 경향성을 보이고 있으며, 시마즈 역시 조선과의 통교를 이어가고 있다. 쇼니씨는 주로 시부카와씨가 약화되는 세종 8년부터 많은 통교를 보이며, 그 외에 오토모, 키쿠치씨는 거의 통교가 없다시피 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시부카와씨가 세종 초기 조선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실제 내용상에서 조선은 규슈탄다이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이미 앞서 살펴봤듯이 사행에서 조선은 많은 부분의 중재를 규슈탄다이에게 부탁하고 있다. 그런데 조선은 규슈탄다이를 단순한 막부와의 교섭 중재자뿐만 아니라 대마도를 제외한 규슈의 다른 세력과 통교할 때 중간에서 이를 조정해주는 매개 역할까지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133) 아래 사료는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내온 平滿景에 대한 예조의 답변이다.

 

參議平滿景에게 보낸 답서에는 말하기를, "본조가 지난해 겨울에 源公에게 글월을 보내어, 구주 경내는 다 摠管의 휘하이니, 사사로이 사람을 보내는 것은 체통에 어긋나는 것인즉, 반드시 원공의 書契을 받아 가지고 와야 비로소 예로 응접함을 허락하겠다 하였거늘, 이제 족하가 마음대로 스스로 사람을 보내었으니, 의리로 말하면, 응당 받지 아니할 것이나, 생각하건대 전번 글이 아직 실시되기 전인가 하여, 아직 예를 차려 대접하노라." 134)

 

 위 사료를 살펴보면 조선은 평만경에게 반드시 구주총관(도독)의 서계를 받아야 통교하겠다고 통보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 규슈의 세력이 모두 규슈탄다이 지배 하에 있다고 인정하면서 그 서계를 통해 통교왜인을 통제하려는 모습이 보인다.135) 또한 3번째 회례사인 박안신은 돌아오는 길에 하카타에서 규슈탄타이인 원의준(시부카와 요시토시)를 만나서 일본에서 원의준의 명의로 오는 사신이 1년에도 20여 차례가 되니 진짜와 가짜를 구별할 수 없어 춘추 각 한차례씩 도서를 찍어 보내도록 합의하는데, 이는 세견선 약조가 최초로 합의된 것이다.136) 또한 이는 규슈의 여러 세력이 규슈탄다이를 통해 조선과 통교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조선에 오는 일본인을 통제하기 위함이라고 보인다.

 

 또한 주목되는 점은 규슈의 오래된 다이묘인 오우치씨, 시마즈씨 등의 사신이 조선을 통교할 때 규슈탄다이의 사신에 동행하거나 피하인 신분으로 조선에 오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세종 2519일 원도진과 원의준이 사신을 보낼 때 오우치씨인 多多良滿世의 사신이 함께 오고 있다. 동년 1026일의 경우에는 하카타의 여러 세력들이137) , 128일에는 마쓰우라씨인 田平殿 源省과 시마즈씨인 日向州刺使 藤元久가 함께 들어오고 있다.138) 이후 쇼니씨와 관련된 사신 역시 규슈탄다이와 함께 들어오고 있는데 아래의 <4>는 구체적으로 규슈탄다이와 함께 사신을 보낸 구체적인 사례들이다.

 

【표4】 세종대 초기 규슈탄다이와 함께 입조한 세력 정리

//

세력

//

세력

2/2/25

九州前都元帥 源道鎭

肥州太守 源昌淸

5/7/11

源義俊

平滿景

2/5/19

西海道九州前摠管 源道鎭

九州都督 源義俊

西海路民部少輔 平滿景

預州太守 多多良滿世

佐文多羅

5/9/16

九州都元帥 源義俊

美作太守 平常嘉

2/11/25

九州摠管 源義俊

濃州太守平宗壽

筑州石城管事民部少輔 平滿景

石城商倭 宗金

5/9/18

九州前摠管 源道鎭

筑州府 石城管事 平滿景

2/12/8

九州都元帥右武衛 源道鎭

田平殿 源省

5/10/10

西海道源道鎭姪 中務大輔 源滿直

關西道九州右衛門 佐大莊氏滿種

一歧守護代 源朝臣

白濱伯耆守 沙彌 光秀

2/12/9

九州摠管 源義俊

日向州刺使 藤元久

5/10/18

九州 源義俊

平常嘉

源昌淸

3/2/23

源義俊

平宗秀

平滿景

5/10/25

源義俊

平滿景

源省

左衛門大郞

3/11/6

前九州摠管 源道鎭

平宗壽

5/11/24

源道鎭

平滿景

4/1/24

九州節度使 源義浚

薩摩州 藤源賴

肥州 田平殿 源省

6/2/7

九州前都元帥 源道鎭

筑前州太宰府少卿 藤原滿貞

大內殿多多良公

九州都元帥將監 源義俊

4/2/26

源義俊

藤源賴

源省

7/1/9

九州前摠管 源道鎭

石城管事 平滿景

對馬島 左衛門大郞

宗彦七

筑州平方式部丞 行吉

4/7/6

九州前都元帥 源道鎭

筑州府 平滿景

7/10/13

源道鎭

平常嘉

宗金

4/7/22

九州前總管 源道鎭

摠管 源義俊

大內多多良道雄

7/11/1

九州 源道鎭

筑州平方式部丞 宣行

5/1/28

九州摠管 源道鎭

駿州太守 源省

肥州太守 源昌淸

8/11/6

九州前摠管 源道鎭

筑前州 冷泉津 平方式部尉 行吉

5/6/21

源道鎭

源義俊

平滿景

源俊信

常嘉

 

 

 위의 표에서 보듯이 규슈탄다이의 사자는 하카타를 기반으로 하는 세력을 중심으로 그 외에도 오우치, 쇼니, 마쓰우라 등의 세력과 함께 도래하고 있다. 특히 오우치씨와 관련된 세력이 많은데 이는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가 북부 규슈지방의 대 다이묘이자 시부카와씨의 후원세력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남부 규슈를 장악했던 시마즈씨 역시 단독으로 움직이기보다는 규슈탄다이와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이들은 시부카와씨보다 세력이 강했지만 조선과 쉽게 교섭하기 위해서 규슈탄다이의 사신과 함께 움직였던 것이다. 이는 <3>에서 보았듯이 규슈의 여러 세력이 단독으로 조선과 교섭하는 횟수가 매우 적은 것과 대비되는 경향이다. 즉 적어도 기해동정부터 세종 8~9년까지는 조선과 규슈 및 일본 본토를 이어주는 중계자로서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가 제 역할을 했음을 증명한다.

 

3. 九州探題의 약화와 對馬島主로의 교섭 창구 일원화

 

 세종 10(1428) 일본에서 섭정 중이던 4대 쇼군 요시모치가 사망하고 6대 쇼군 요시노리가 즉위했다.139) 이에 따라 조선은 通信使朴瑞生을 파견하는데, 이때 박서생은 賜物을 할 세력으로 오우치씨를 지적하고 조선은 쇼니씨에게도 물건을 내리기로 한다.140) 그런데 조선이 사신을 보내며 왕복의 안전을 부탁하는 의미에서 의례히 물건을 내리는 세력에서 규슈탄다이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즉 세종 10년에는 조선이 규슈탄다이에게 부탁하거나 의지할 일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의 세력이 약화되었음을 의미하며, 또한 쇼군의 권위 약화로 규슈의 상황이 혼란스러워졌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무로마치 막부 4대 쇼군 요시모치의 치세는 막부의 내리막길이었다. 이 당시의 혼란은 중앙에서의 역병과 기근, 지방에서의 슈고다이묘들의 이반으로 요약된다. 우선 중앙에서는 보기 드문 기근이 몇 년째 이어져서 기민이 대량으로 발생하였다. 이 때의 기근은 오에이의 기근이라 하여 일본사에서도 기록적이었다. 이에 요시모치는 각 신사와 사찰에 기도를 올릴 것을 명하고 스스로도 잘못된 송사를 치룬 것이 없는지 살펴보는 포고를 내리기도 했다.141)

 역병의 경우 막부에 더 직접적인 타격을 주었다. 일반 들 뿐만 아니라 주요 지배층들이 죽거나 중병을 앓았다. 後小松上皇, 称光天皇, 小川宮 삼부자가 모두 병을 앓았고 상황과 천황은 기적적으로 살아나지만 小川宮은 결국 1425년 세상을 떠나고 称光天皇 역시 계속 병에 시달리다가 1428년 사망한다. 또한 요시모치는 1423년 은거 후 출가하고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요시카즈(足利義量)17살의 나이에 5대 쇼군으로 앉히지만 1425년 역병으로 죽게 된다.142) 이후 요시모치는 새로운 쇼군을 세우지 않고 쇼군좌가 공백인 상태에서 1428년 자신이 죽을 때까지 임의로 통치하게 된다.

 한편 지방의 동요는 더욱 심각했다. 이는 막부가 스스로의 약화를 인정하지 않고 다이묘들의 후계문제에 끼어들면서 자초한 일이었다. 1416년 관동에서 일어났던 대규모 반란(上杉禅秀)은 이듬해 진압되었지만, 사회 기저에 불안감이 휩싸이게 하여 하급 무사들의 연이은 봉기를(上総本一揆) 가져왔다. 이를 진압한 가마쿠라쿠보(鎌倉公方)는 동일본에 대한 권한을 요구하지만 쇼군 요시모치는 이를 무시하고 곧 쇼군과 가마쿠라쿠보의 대립은 각자의 입장에 선 다이묘와 무사들의 전투로 번져갔다. 이 갈등은 1424년 수습되지만 이후 동일본 지역의 큰 불안의 씨앗으로 남는다.143)

 한편 요시모치는 점차 불교에 심취하고 정사는 칸레이인 호소카와씨(細川氏), 하타케야마씨(畠山氏), 우에스기씨(上杉氏)씨가 담당하면서 이 다이묘들의 정쟁이 날로 심화되었다. 특히 아들 요시카즈가 요절하고 나서는 후계자를 정하지 않아 각자 지지하는 후계자들로 정파가 갈라져 중앙 정계가 혼란스러워졌다. 결국 1428년 요시모치가 죽고 제비뽑기라는 황당한 방식으로 6대 쇼군 요시노리(足利義教)를 뽑지만 10년도 되지 않아 그는 막부의 후계문제로 불만을 품은 다이묘에게 암살당한다.

 막부의 약화는 곧 시부카와씨의 약화로 이어졌다. 1396년 규슈탄다이인 시부카와 미츠요리(원도진)는 쇼니씨의 當主였던 쇼니 미츠사다(少弐満貞)와의 싸움에서 하카타를 빼앗았고 쇼니씨를 치쿠젠 지역(지금의 후쿠오카현) 일부로 몰아넣었다. 쇼군에게 우호적이었던 오우치, 오토모씨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쇼니 미츠사다는 기해동정 당시 자신들이 승리했다는 거짓된 보고를 막부에 올리며 이를 계기로 군대를 일으키려고 하려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423(세종 5) 시부카와씨는 쇼니씨와 키쿠치씨 연합군에게 공격받아 일시적으로 하카타를 다시 빼앗기지만 많은 교전 끝에 1425(세종 7) 오우치씨의 후원을 받아 하카타를 되찾게 된다. 그러나 1428년 쇼니씨가 다시 하카타를 공격해 승리하고 시부카와씨의 세력을 치쿠젠 동북쪽 구석으로 밀어냈다.144)

 

 1428년의 전투로 인하여 막부에서는 규슈 정책을 바꾸기로 마음먹게 되었다. 먼저 오랫동안 규슈탄다이를 맡으면 조선과 일본 사이를 중재했던 시부카와 미츠요리(원도진), 요시토시(원의준) 부자를 교토로 소환하였다. 이들은 쇼니씨에 패배했지만 御一家로 높은 신분을 지니고 있었으며 요시모치가 신뢰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대신 미츠요리의 조카인 시부카와 미츠나오(渋川満直)가 규슈탄다이로 임명되고 이후 규슈탄다이는 전국시대까지 미츠나오의 후손들이 세습하였다. 중앙으로 소환된 시부카와씨는 申叔舟의 『海東諸國記』에 右武衛殿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巨酋의 대우를 받고 있다. 한편 규슈의 시부카와씨는 본가와 분리되어 分家로 대대로 탄다이직을 계승했으나 1434년 쇼니씨와의 전투에서 당주가 전사하는 등 그 세력이 지속적으로 축소되었고 오우치씨의 보호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海東諸國記』에는 九州節度使라고 등장하며 매년 1~2척의 세견선을 보내는 소규모 세력으로 등장한다.145)

 시부카와 미츠요리 부자가 소환되고 그 정치적 공백은 막부와 가장 가까운 입장을 가지고 있던 오우치씨가 채웠다. 사실상 막부는 오우치씨를 통한 규슈의 간접지배를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하카타의 상인들은 소규모 세력이 된 시부카와씨 대신 오토모씨를 자신들을 후원할 정치적 세력으로 삼은 듯하다. 오우치씨가 강대하지만 하카타를 차지하지는 못했고 쇼니씨는 오토모씨와 하카타를 탈환했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세력이 많이 축소해 있었다. 하카타의 승려이자 상인으로 오래도록 조선에 드나들었던 宗金이 오우치씨의 사자와 함께 조선에 오거나,146) 후일의 증언이지만 宗金이 오우치씨와 쇼니씨의 싸움에서 병화를 피했다147) 는 점은 하카타 상인들이 더 이상 규슈탄다이와 쇼군의 권위에 복속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조선 역시 세종 10년 이후에는 규슈탄다이와 형식적인 관계만 가지고 있었다. 구주절도사·구주도원수 명의의 사자는 1년에 한 차례도 안 될 정도로 줄었고 통신사를 파견할 때 형식적으로 조선에서 예물을 하사하는 예만 보일 뿐이다. 문제는 세종 10년 이후 이전보다 다양한 세력이 조선과 통교를 원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쇼니씨와 오토모씨의 교섭이 늘어난 것은 물론이고 규슈 이외 일본 본토 산요, 산인, 키나이 지역의 세력들까지 사자를 보내어 통교하기를 원하기 시작했다. 조선으로서는 이들을 중간에서 통제하고 매개 역할을 해줄 새로운 상대가 필요했다.

 對馬島主가 일본인 통제의 중심으로 떠오른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이었다. 초기에 규슈탄다이와 이야기했듯이 書契에 의한 일본인 통제는 규슈탄다이의 약화 때문에 안정적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148) 때문에 조선이 선택한 방법은 바로 대마도주에게 文引을 받은 일본인만을 교섭 상대로서 인정하는 것이었다. 즉 이제 쓰시마 내외의 세력을 막론하고 조선과 통교하고 싶은 이들은 대마도주에게 받은 문인을 소지하고 있어야 했다.149) 당시 대마도주였던 소 사다모리(종정성)은 기해동정 때처럼 연소하지도 않았고 조선과 수차례 통교하였으며 특히 호족이었던 소다 사에몬타로가 1428년 사망하여 정치적으로 안정된 상태였다.150) 더욱이 쇼니씨가 하카타를 점령함으로 인하여 소 사다모리는 하카타와 직접 통교할 수 있는 이점도 생기게 되었다. 때문에 조선은 對馬島主를 일본 통교의 매개자로 인정하고 대마도주의 문인을 증명서로 인정하였던 것이다.

 

 대마도주의 문인은 路引이라는 이름으로 세종 8(1426) 처음 사용이 협의되었다. 石見州 賜物管押使로 일본에 다녀온 李藝는 쓰시마에서 宗貞盛를 만나 使船興利船는 모두 路引을 가져와야 응접할 것이라고 협의했다.151) 다만 이 때의 路引이 쓰시마의 세력에게만 해당하는 것인지, 일본 전 세력에게 해당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대마도주의 文引이 쓰시마 외의 세력에게도 확실히 통용되도록 한 조치는 세종 20(1438)에 이루어졌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금번에 李藝對馬州에 보내어 宗貞盛과 더불어 이미 약속을 정하고 왔으니, 바라건대, 이제부터 對馬州宗彦七·宗彦次郞·宗茂直, 萬戶 早田六郞次郞, 그리고 一岐志佐殿·佐志殿, 九州田平殿·大友殿, 薩摩州·石見州 등 각처에서 사자로 보내 온 사람으로 宗貞盛文引이 없을 것 같으면 그의 접대를 허락하지 아니하며, 對馬州 사람이 인민의 송환을 요청하러 온 사람이라도, 8월 이후에 오는 자는, 또한 접대하지 말도록 하되, 해상을 건너가는 동안의 식량까지 갑자기 주지 않으면, 반드시 원한을 초치하게 될 것이오니, 아직은 배마다 3석씩을 지급하도록 하옵소서." 하니 따랐다.152)

 

 위 사료에 따르면 대마도주의 문인은 쓰시마 내의 세력뿐만 아니라 잇키 및 규슈의 마쓰우라, 오토모, 오우치 및 본토에 해당하는 이와미(石見)의 야마나씨(山名氏)153) 까지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당시의 통교상황을 보면 일본국왕(쇼군)을 제외한 거의 모든 통교세력을 규정한 것으로 통교의 중개자가 대마도주로 일원화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리고 5년 후인 세종 25(1443)에는 계해약조로 쓰시마의 세견선에 관한 조항이 만들어지고 『해동제국기』 단계까지 가면 일본 전국의 세력과의 세견선 규정이 완성되었다.

 즉 세종 초기 기해동정부터 시작된 일본과의 통교 체계의 일원화를 위한 노력은 쇼군의 지원을 받는 규슈탄다이를 통해 진행되었으나 규슈탄다이는 막부의 안정적 지원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규슈 장악과 하카타의 관리라는 두 가지 목표를 규슈탄다이가 이루지 못하고 약화하자 조선은 막부 대신 대마도주로 교섭 방향을 바꾸어 대일통교의 일원화된 체계를 완성시켜 나갔던 것이다.154)

 

 

맺음말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후기부터 조선 개국 직후까지 조선을 괴롭히던 왜구는 태종대에 접어들면서 상당히 줄어들었다. 이는 명과 조선의 강력한 해금정책과 더불어 일본이 남북조의 항전을 끝내고 무로마치 막부 중심의 안정된 정치권력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막부의 3대 쇼군 요시미츠는 명으로부터 日本國王으로 책봉을 받았고 감합무역을 하는 대신 왜구를 통제했다. 그러나 4대 쇼군 요시모치는 이를 정면으로 뒤집었고 명과 외교 및 무역을 중단하였다. 서서히 막부의 통제가 흔들리는 시점에서 쓰시마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왜구가 발생했고 명의 일본 정벌을 걱정한 조선은 기해동정이라는 대규모 원정으로 왜구를 진압하려고 하였다. 한편 기해동정에 놀란 일본의 막부와 규슈세력은 이를 명과 조선의 대규모 침입의 전초전이라고 생각하였다.

 세종의 즉위 축하를 명목으로 온 쇼군의 사신은 기해동정에 대해 문의하였고, 조선은 이들에게 회례사를 보내어 조선이나 명이 일본 본토나 규슈를 침입할 의사가 없음을 확인시켜주려 하였다. 첫 번째 회례사로 일본에 간 송희경은 구주절도사라고 불렸던 규슈탄다이와 하카타의 승려, 상인들의 도움을 받아 막부와의 오해를 어느 정도 해소했다. 이후 세종 4년 조선과 쓰시마와의 관계를 어느 정도 정리하는 과정에는 이를 확인하고자 일본의 사신이 왔고 이에 다시 조선은 두 번째 회례사를 보냈다. 이 과정에서 막부의 의혹은 대부분 풀린 것으로 생각된다. 곧바로 온 세 번째 일본 사신은 대장경판을 강하게 요청했고, 이어 일본에 간 회례사 박안신의 보고에도 오직 대장경판만을 요구했다. 이는 조선과의 긴장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일본도 인식했음을 의미하며 조선 역시 더 이상의 회례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이후 修好의 목적으로 하는 통신사만을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한편 양국 사신의 교섭 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중재한 것은 구주절도사라고 조선에 알려진 규슈탄다이 시부카와씨였다. 시부카와 미츠요리(원도진)과 요시토시(원의준) 부자는 적극적으로 쇼군과 조선을 중재하였고 그를 따르는 하카타의 승려와 상인들 역시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 결과 기해동정 이후 조선과 규슈탄다이와의 교섭은 매우 늘어났다. 조선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규슈탄다이를 통한 대일외교의 일원화를 추진하였으며 실제로 많은 규슈의 세력들이 독자적 사신 대신 규슈탄다이의 사신과 함께 조선에 도래하였다. 기해동정을 통해 왜구의 침략을 중단시킨 조선은 규슈탄다이를 통해 막부 및 규슈의 제세력과 통교하는 조일외교의 재편을 도모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1428년을 기점으로 규슈의 쇼니, 오토모, 오우치 세력 등의 갈등으로 시부카와씨는 하카타를 잃고 작은 세력으로 축소되었다. 막부의 정책도 시부카와 부자를 소환하고 오우치씨를 통한 간접 통치로 바뀌었다. 그에 따라 조선 역시 규슈탄다이를 통해 조일통교의 재편 역시 좌절되었다. 대신 당시 쓰시마 일대를 장악한 대마도주를 통한 통교 일원화가 이루어졌다. 본래 쓰시마 내 세력에게만 통했던 대마도주의 文引을 조선에 교섭하는 거의 모든 세력에게 의무로 받아오게 함으로써 대마도주를 통한 대일교섭의 일원화를 이루어 낸 것이다.

 이상의 내용은 기해동정 이후 조선이 막부와 교섭하며 복잡한 대일외교를 최대한 단순화하려 했던 흔적이다. 일본은 에도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앙집권화가 되지 않고 지역의 각 세력들이 제각기 조선과 통교관계를 맺었고 그에 따라 이를 일원화하는 것은 조선전기 南邊을 안정화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그 동안의 연구를 통해 많은 점이 밝혀졌으나 공백으로 남아 있는 막부와의 교섭, 그리고 규슈탄다이라는 세력의 특수성은 어느 정도 밝혔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양국이 서로를 알아가고 이해하는 과정이 있었으며 그 결과로 『海東諸國記』와 같은 외교서적이 탄생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아직 중세 한일관계 연구가 일본에 비해 한국에서의 연구가 절대적으로 적다. 또한 일국사적 시각을 넘어서 동아시아의 시각으로 당시의 대외관계사를 살펴봐야 한다는 과제는 여전히 남았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일본은 교토의 중앙정권(황실-공경, 막부)와 지방의 여러 세력이 모두 각자의 입장을 가지고 별도의 움직임을 하고 있었다. 예컨대 쓰시마는 막부에게 직접 접촉할 수 없는 작은 세력이었으나 독립된 세력이었고 동시에 규슈의 여러 세력과 접촉하고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관계를 정리하려 막부는 규슈탄다이를 설치하였으나 지방세력의 반발로 이는 실패로 돌아갔다. 조선은 이러한 일본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또한 쓰시마를 자신들의 藩屛으로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이렇듯 15세기 조일관계는 단순히 조선과 일본의 관계라는 한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관계였다. 때문에 다양한 시각으로 조선과 일본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만들어가는 것을 과제로 남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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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손승철, 1994, 朝鮮時代 韓日關係史硏究, 지성의 샘; 민덕기, 2007,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다만 손승철은 중국의 책봉체제를 전제로 양국관계가 성립되었다고 보지만 민덕기는 중국의 책봉체제와는 무관하게 양국관계가 성립되었다고 주장해 차이를 보인다. 한편 일본인 학자 高橋公明은 이들보다 면저 조선의 교린정책을 일본 막부, 류큐등의 대등한 관계와 서일본 제세력과의 華夷적 자세의 통교를 동시에 같은 관계로 이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여 손승철, 민덕기 연구에 영향을 미치는 선행 연구를 내놓은 바 있다. 高橋公明, 1982, 外交儀礼よりみた室町時代日朝関係, 史学雑誌91-8; 高橋公明, 1985, 室町幕府外交姿勢, 歴史学研究546; 高橋公明, 1987, 朝鮮外交秩序アジア海域交流, 歴史学研究573 참조.

2)  中村英孝, 1970, 日鮮關係史硏究, 吉川弘文館; 田中健夫, 1975, 中世對外關係史,東京大學出版會; 田中健夫, 1981, 中世海外交涉史硏究, 東京大學出版會; 村井章介, 1988, アジアのなかの中世日本, 校倉書房

3)  정다함, 2011, 「‘事大’와 ‘交隣’과 ‘小中華’라는 틀의 초시간적인 그리고 초공간적인 맥락」, 『한국사학보』42

4)  정다함, 2013, 征伐이라는 戰爭/征伐이라는 祭祀 : 世宗代 己亥年 '東征'婆猪江 '野人征伐'을 중심으로」, 『한국사학보』52

5)  신석호, 1959, 「麗末鮮初倭寇와 그 對策, 國史上諸問題3, 국사편찬위원회; 鉉淙, 1964, 朝鮮前期 對日交涉史硏究, 한국연구원; 李銀圭, 1974, 15世紀初 韓日交涉史 硏究-對馬島征伐中心으로-, 『호서사학』3; 孫弘烈, 1978, 麗末·鮮初對馬島征伐, 『호서사학』6; 張學根, 1984, 鮮初 對明關係主權意識; 對外戰爭中心으로」, 學術論叢8; 李相泰, 1988, 「대마도 정벌 고찰」, 『군사』17

6)  한문종, 1997, 朝鮮初期倭寇對策對馬島征伐, 『전북사학』19·20

7)  이규철, 2009, 1419년 대마도 정벌의 의도와 성과」,『역사와 현실』74

8)  장준혁, 2014, 「麗末鮮初동아시아 국제정세 속의 대마도 정벌」, 『역사와 실학』53

9)  김일환, 2012, 「세종대 대마도정벌의 군사적 전개과정」, 『순천향인문과학논총』31-2

10)  한문종, 1989, 朝鮮初期 對日交涉 活動에 대하여」, 『전북사학』12; 한문종, 2007, 「조선초기의 向化倭人李藝, 『한일관계사연구』28

11)  한문종, 2004, 「조선전기 倭人統制策과 통교위반자의 처리」, 『일본사상』7

12)  橋本雄, 1997, 遣朝鮮国書幕府五山外交文書作成発給―」, 日本歴史589; 橋本雄, 1998, 室町幕府外交成立中世王権, 歴史評論583; 橋本雄, 2000, 室町幕府外交王権論といかにわるのか?」, 人民歴史学145; 橋本雄, 2005, 朝鮮国王使室町幕府, 日韓歴史共同研究報 告書 第二分科(中近世), 日韓歴史共同研究委員会

13)  米谷均, 1997, 16世紀日朝關係における僞使派遣構造實態, 『歷史學硏究697; 橋本雄, 2012, りの外交使節: 室町時代日朝關係, 吉川弘文館; 伊藤幸司, 1999, 十五·世紀日明·日朝交涉夢窓派華藏門派 -日本國王使外交僧をめぐって, 朝鮮學報171; 유재춘, 2005, 朝鮮前期 僞使 발생 요인에 대하여」, 『왜구·위사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14)  姜在彦, 2002, 北九州から韓日交流える -1419応永外寇(己亥東征)する博多対応中心, 『동북아문화연구』3

15)  일본에 보낸 사신의 종류에 대해서는 한문종, 1992, 朝鮮前期對馬島敬差官, 『전북사학』15에서 잠시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장순순, 2005, 通信使 硏究現況課題,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2,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16)  후시미노미야 사다후사친왕은 북조 3대인 스코천황(崇光天皇)의 손자이자 102대 천황인 고하나조노천황(後花園天皇)의 아버지이다. 101대 쇼코천황(称光天皇)의 칠촌으로 쇼코천황의 아들이 요절하여 황위계승자 후보에 올랐지만 쇼코천황의 후궁과 간음한 의혹을 받고 쇼군 요시모치의 비호 아래 출가하여 겨우 목숨을 구했다. 그리하여 자신이 직접 황위에 오르지 못했고 아들 고하나조노천황이 쇼코천황의 뒤를 이어 천황에 올랐다. 이후에는 太上天皇의 존호를 받았으나 정치에는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남북조의 황통 계보 상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横井清, 2002, 室町時代一皇族生涯: 看聞日記世界, 講談社 참조.

17)  만사이는 公卿 출신의 승려로 어머니가 3대 쇼군 요시미츠의 정실을 모셨던 관계로 요시미츠의 양자가 되었고 이후 승승장구하여 진언종의 대찰인 醍醐寺의 좌주에 올랐다. 당시 분열된 진언종을 정비하여 학문적으로도 큰 성과를 내었다. 이후 최고 승직인 大僧正에 오르고, 승려로는 최초로 太皇太后·皇太后·皇后 준하는 신분을 의미하는 准三后의 칭호를 받았다. 4대 쇼군 요시모치부터 6대 쇼군 요시노리까지 내외정의 정치자문의 역할을 하여 黑衣宰相이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만사이의 일생에 대해서는 森茂暁, 2004, 満済: 天下義者公方ことに御周章, ミネルヴァ書房 참조.

18)  14세기의 왜구(前期 倭寇)에 대해서는 일본인들이 주도했다는 설과 고려인, 중국인 해적들이 주축이었다는 설이 일본 내부에서도 대립한 바 있다. 이에 대하여 이영은 일본 南北朝의 대립 상황에서 규슈의 남조 세력이 병량을 공급하기 위하여 고토 열도의 해적과 함께 활동한 것이 왜구의 주축 세력이었다는 주장을 하였다(이영, 1996, 「고려말기 왜구구성원에 관한 고찰-‘고려・일본인 연합론’ 또는 ‘고려・조선인주체’론의 비판적 검토」, 『한일관계사연구』5). 한편 윤성익은 쓰시마 왜구의 이동 경로를 추적하며 조선이나 중국 내부에 이들과 행동을 같이하는 일련의 세력이 있을 수 있다는 추정을 내놓은 바 있다(윤성익, 2011, 明初(洪武~) 동아시아 해역에서의 倭寇, 『명청사연구』35). 필자가 다루고 있는 왜구의 경우 15세기 쓰시마와 이키를 근거지로 하는 일본 출신의 왜구로 일본인들이 분명하기 때문에 따로 왜구의 정체성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19)  당시 규슈의 상황에 대해서는 横山浩一·藤野保 編, 1987, 九州日本社会形成, 吉川弘文堂, 117~131쪽 참조.

20)  아시카가 요시미츠의 일생에 대해서는 伊藤喜良, 2008, 足利義持, 吉川弘文館; 小川剛生, 2012, 足利義滿 : 公武君臨した室町將軍, 中央公論新社 참조.

21)  田中健夫, 2012, 倭寇 : , 講談社, 71~74.

22)  『善隣國寶記卷中, 應永 9

23)  이 때 ‘日本國王’의 성격을 두고는 일본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으며, 요시미츠가 천황의 자리를 찬탈하려 했다는 의견도 있다. 일본국왕에 대해서는 최근 기존의 연구를 집대성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荒野泰典·石井正敏·村井章介 編, 2010, 倭寇日本國王」』, 吉川弘文館). 한편 최근 橋本雄는 일본국왕이라는 칭호가 무역적 이익을 위해 전통적 책봉체제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요시미츠의 개인적인 기호에 의한 것이기도 하다는 의견을 제시하여 눈길을 끈다(橋本雄, 1998, 室町幕府外交成立中世王權, 歴史評論583).

24)  『太宗實錄』 권25, 13320일 기해

25)  『善隣國寶記卷中, 應永 26

26)  요시모치가 명과의 단교를 강행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아버지인 요시미츠와의 불화설, 시바 요시마사와 만사이 등 측근들의 대명외교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받아들였다는 설, 왜구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한계에 달해 명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었다는 설, 요시미츠의 대명외교를 굴욕적으로 여기는 여론이 팽배했기 때문이라는 설 등이 있다. 민덕기, 1994, 室町幕府시대의 對明 冊封관계의 성립과 변화」, 『청대사림』6; 伊藤喜良, 2008, 足利義持, 吉川弘文館 참조.

27)  鎌倉公方는 가마쿠라에 설치한 鎌倉府의 수장으로 관동지방의 무사들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다. 초대 쇼군 다카우지의 4남 모토우지의 가계가 대대로 역임했으며 우에스기가가 執事로서 후원을 맡았다.

28)  伊藤喜良, 1993, 義持政権をめぐって禅秀乱前後における中央政局一側面-」, 日本中世王権権威, 思文閣出版

29)  한문종, 2000, 「조선전기 對馬 早田氏對朝鮮通交, 『한일관계사연구』12, 71~72.

30)  『世宗實錄』 권3, 세종 원년 113일 무오

31)  민덕기, 2007, 「명대 초기 일본정벌론과 조선의 대응」, 『젼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조·일관계』, 경인문화사; 이규철, 2009, 앞의 논문

32)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57일 신해

33)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529일 계유

34)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513일 정사

35)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523일 정묘

36)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512일 병진

37)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513일 정사

38)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518일 임술

39)  조선의 쓰시마 정벌 내용에 관해서는 김일환, 2012, 앞의 논문에 자세하다.

40)  『宗氏家譜. 佐伯弘次, 2010, 応永外寇アジア, 史淵147에서 재인용.

41)  『看聞日記應永 26813

42)  『満済准后日記應永 26723

43)  『満済准后日記應永 26

44)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61일 갑술

45)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529일 계유

46)  『世宗實錄』 권4, 세종 원년 64일 정축

47)  『看聞日記應永 26523

48)  『満済准后日記應永 26626; 満済准后日記應永 2673; 満済准后日記應永 26717

49)  『看聞日記應永 26813

50)  『満済准后日記應永 26818; 満済准后日記應永 2694; 満済准后日記應永 26929; 満済准后日記應永 26114; 満済准后日記應永 261221

51)  太田弘毅, 2002, 倭寇八幡大菩薩信仰, 倭寇 : 商業軍事史的硏究, 春風社

52)  당시 일본에 이러한 ‘신국사상’이 펼쳐질 수 있었던 것은 남북조 항쟁이 막 끝났다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도 작용했다. 남조와 북조가 서로 정통성을 가지고 대립하던 상태에서 무가정권 시기에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던 ‘삼종신기’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자연히 천황을 둘러싼 과거의 신화 역시 주목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남조의 주요 거점인 규슈의 지역신이었던 하치만신이나, 규슈 곳곳에 남아 있던 신공황후 신화가 부각되고 연결되면서 이러한 ‘신국사상’의 부흥에 더욱 영향을 끼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53)  『世宗實錄』 권6, 원년 1120일 경신

54)  『世宗實錄』 권7, 216일 을사

55)  『世宗實錄』 권7, 2년 윤115일 갑신

56)  『世宗實錄』 권10, 21025일 경신

57)  『노송당일본행록』은 송희경이 지은 이후 분실되었다가 1556  梁山甫가 남원에서 발견해 송희경의 후손인 宋純에게 전하였고, 이후 임진왜란 당시 분실되었다가 정유재란 당시 일본으로 잡혀갔던 鄭得慶이 일본의 승려가 가지고 있는 발견하고 서사한 것을 목활자본으로 재간행한 것이다. 다행히 원본으로 추정되는 책이 일본에 전래되고 있다. 이 책의 전래 과정과 이본에 대해서는 村井章介, 2008, 「『老松堂日本行錄』 해설」, 『동아시아속의 중세 한국과 일본』, 경인문화사; 이효정, 2015, 「『노송당일본행록(松堂日本行錄)』 이본 비교 연구 - 대일본·불교 인식을 중심으로 -, 『국제어문』64 참조.

58)  『老松堂日本行錄215

59)  『老松堂日本行錄217

60)  『老松堂日本行錄228

61)  『老松堂日本行錄34

62)  『老松堂日本行錄323

63)  『老松堂日本行錄416

64)  『老松堂日本行錄421

65)  『해동제국기』, 일본국기에 따르면 甲斐殿는 시바씨(左武衛殿)의 일을 전담한다고 나와있다.

66)  陳外郞은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던 인물로 본명은 陳宗敬으로 전한다. 원명교체기 일본으로 건너와 하카타에 있다가 쇼군을 위해 교토로 상경하여 일하였으며 그의 아들 平方吉久 혹은 陳吉久는 하카타의 상인으로 일하면서 규슈탄다이에서 봉사하고 있었고 양예의 사신의 부사로 조선에 오기도 하였다. 이후 제약사업으로 성공하여 지금까지 그 후손이 관동지역에 살고 있다 한다. 中丸和伯, 1982, 陳外郎宇野家北条氏綱, 近世国家成立過程, 塙書房

67)  『老松堂日本行錄423

68)  『老松堂日本行錄425

69)  『老松堂日本行錄51; 『老松堂日本行錄517

70)  요시모치가 세운 절로 十刹 第5. 현재 鹿王院이라는 이름으로 일부 가람이 잔존.

71)  3대 쇼군 요시미츠가 쇼군의 거처인 무로마치어소 근처에 지은 대사찰. 일본 역사상 가장 높았던 7층 목탑이 있던 건물로 유명하며 사실상 무로마치 시대 선종의 중심지. 五山 第2. 현존.

72)  惠珙等持寺의 주지로 등지사는 초대 쇼군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무덤이 있는 중요한 사찰로 아시카가씨의 보리사이다. 周頌은 상국사의 塔頭사찰인 林光院의 주지로 요시모치가 명과 단교할 때 명의 사신과 접촉한 승려이다(善隣國寶記』 권중, 應永 26)

73)  『老松堂日本行錄517

74)  초대 쇼군 다카우지가 夢窓疎石를 초대해 자신과 대립했던 後醍醐天皇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운 사찰. 五山 第1. 현존.

75)  夢窓疎石가 마지막으로 은거한 사찰로 十刹 第2. 현존.

76)  초대 쇼군 다카우지가 夢窓疎石를 초대해 지은 사찰. 西芳寺라는 이름으로 현존.

77)  『老松堂日本行錄516

78)  『老松堂日本行錄722

79)  『老松堂日本行錄813

80)  『老松堂日本行錄1026

81)  『世宗實錄』 권10, 21026일 신유

82)  『世宗實錄』 권10, 2111일 을축

83)  『世宗實錄』 권18, 41126일 기묘

84)  『太宗實錄』 권27, 14620일 신유

85)  『満済准后日記應永 294월부터 일체경 조성에 대한 기사가 3달 이상 나온다.

86)  『善隣國寶記』 권중, 應永 29

87)  『世宗實錄』 권18, 41216일 기해

88)  『世宗實錄』 권18, 41126일 기묘 ‘太后使者言 太后命我曰 新營佛宇 欲請大藏於朝鮮國王殿下 然予婦女 未能親達 今聞九州節度使與朝鮮國通好 其依節度使以達

89)  『世宗實錄』 권4, 1717일 경신

90)  『世宗實錄』 권4, 1717일 신유

91)  『世宗實錄』 권5, 1920일 신유

92)  『世宗實錄』 권10, 21021일 병진

93)  『世宗實錄』 권10, 21115일 기묘

94)  『世宗實錄』 권12, 3610일 신축; 世宗實錄』 권15, 4124일 임오; 世宗實錄』 권16, 4712일 정묘

95)  『世宗實錄』 권18, 41220일 계묘

96)  『世宗實錄』 권18, 41220일 계묘

97)  『世宗實錄』 권22, 51013일 경신

98)  『世宗實錄』 권22, 5125일 임자

99)  『世宗實錄』 권22, 51225일 임신

100)  『世宗實錄』 권23, 612일 기묘

101)  『世宗實錄』 권23, 6122일 기해

102)  일본측 연구에서는 대체로 이 사건을 대장경판을 받아내기 위한 일본 측의 자작극으로 보고 있다. 예컨대 이들이 거짓말을 지어냈다고 지목한 畵僧 周文의 경우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에서 相國寺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한 대표적인 화가 중 하나이다(村井章介, 2008, 「중세 한일 교섭 속의 漢詩, 『동아시아속의 중세 한국과 일본』, 경인문화사 참조).

103)  『世宗實錄』 권23, 627일 계축

104)  『世宗實錄』 권26, 61217일 무오

105)  橋本雄은 요시모치가 조선 사신을 이렇게 박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조선사신을 假想朝貢使節로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남북조시대 황위쟁탈전에서 만들어졌고 기해동정 이후 위기감에서 고조되었던 神國思想이 요시모치의 측근인 만사이를 통해 요시모치에게까지 투영되었다는 것이다.  (橋本雄, 2011, 朝鮮國王室町幕府, 中華幻想: 唐物外交室町時代史, 勉誠出版, 252~255) 한편 조선이나 명 사신을 외부에서 들어온 부정한 것으로 보고 이들을 분리하고, 무사의 대표자인 쇼군은 이를 박대하는 모양세를 취했다는 의견도 있다. (関周一, 1995, 中世後期における唐人をあけるぐる意識, 前近代日本アジア, 吉川弘文館 

106)  鹿苑僧録은 상국사 탑두인 鹿苑院의 주지이면서 외교문서를 책임지는 최고 담당자로 상국사파 승려들이 에도시대 이전까지 계속해서 담당했다. 橋本雄, 1997, 遣朝鮮国書幕府五山外交文書作成発給―」, 日本歴史589 참조.

107)  일본의 대장경 구청과 관련되어서는 다음의 연구가 참고된다. 村井章介, 1991, 中世日朝貿易における經典輸入, 國境えて, 校昌書房; 이재창, 1993, 麗末 鮮初對日關係와 고려대장경」, 韓國佛敎史諸問題, 우리출판사; 나종우, 1996, 朝鮮前期 高麗大藏經日本 傳授, 韓國中世對日交涉史硏究, 원광대출판부; 한문종, 2002, 「조선전기 일본의 大藏經求請과 한일간의 文化交流, 『한일관계사연구』17; 須田牧子, 2004, 15세기 일본의 朝鮮佛具 수입과 그 의의-大內氏大藏經 수입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사연구』20; 馬場久幸, 2016, 室町時代高麗版大蔵経受容活用, 日韓交流高麗版大蔵経, 法蔵館)

108)  해당 부분의 자세한 내용은 八木聖弥, 2006, 「『看聞日記における(1)·(2)·(3)·(4), Studia humana et naturalia37·38·39·40, 京都府立医科大学医学部医学科 (教養教育) 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109)  『看聞日記應永 3019

110)  『看聞日記應永 29410

111)  『康富記應永 29123

112)  『看聞日記應永 32216

113)  馬場久幸, 2016, 앞의 논문 참조. 다만 바바 히사유키는 대장경의 구청은 쇼군의 무운장수를 비는 誕生日祈禱와 연결지었다. 그러나 필자는 이처럼 다급한 대장경판 구청의 목적으로 매년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탄생일기도는 근거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114)  대표적인 경우가 하코네에 세워지는 안국사로 이 때 역시 요시모치가 조선에 대장경을 구청했다.

115)  関周一, 1997, 室町幕府朝鮮外敎 -足利義持·義敎期日本国王使中心として-, 日本社会における王権封建, 東京堂出版

116)  吉田賢司, 2017, 足利義持: 累葉武将一朝重臣たり, ミネルヴァ書房, 162~175

117)  橋本雄는 무로마치 막부의 대외관을 ‘小中華’로 규정하고 조선과 류큐의 사신을 가상의 조공사신으로 설정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求請’의 대상인 대장경을 얻기 위해 보내는 사신을 불편해했고 그 때문에 아예 대장경판을 가져오려 했다는 것이다(橋本雄, 2011, 앞의 논문). 이는 무라이 쇼스케의 등의 논지를 발전시킨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은데 요시모치의 사상적 배경이 되는 만사이와 시바 요시유키나 만사이 조차 그러한 생각을 하지는 않았으며 만사이의 경우 오히려 6대 쇼군 요시노리에게 명의 연호를 쓰고 외교를 재개할 것을 권하고 또 그렇게 명과의 외교가 재개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조선·명 멸시관’류의 논지는 지나치게 일본 一國史적 시각이라는 조광의 지적(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005, 『한일역사공동연구보고서 제3권』,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 237~239)은 일리가 있다고 할 수 있다.

118)  3번째 회례사 다음으로 일본에 건너가는 사신은 요시모치의 죽음을 계기로 파견되는 通信使 朴瑞生이다.

119)  한문종, 1996, 『조선전기 대일 외교정책 연구 - 대마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전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39.

120)  『世宗實錄』 권10, 21111일 을해

121)  横山浩一·藤野保 編, 1987, 앞의 책, 117~125,

122)  이상의 설명은 姓氏家系大辞典刊行会, 1931, 姓氏家系大辞典, 姓氏家系大辞典刊行会; 谷口雄太, 2017, 中世後期ける御一家渋川氏動向, 戦国期政治史論集 西国編, 岩田書院을 요약하였다.

123)  『太祖實錄』 권12, 61229일 정미

124)  川添昭二, 1996, 九州探題渋川満頼·義俊日朝交渉, 対外関係史的展開, 文献出版

125)  『太宗實錄』 권20, 101224일 병진

126)  中村永孝, 1969, 朝鮮初期受図書倭人, 『日鮮関係史研究, 吉川弘文館, 517

127)  田村洋幸, 1967, 北九州地域対鮮貿易, 中世日朝貿易研究, 三和書房

128)  원도진의 조카

129)  원도진의 동생

130)  시부카와씨의 가신에 관한 내용은 田中健夫, 1981, 日鮮貿易における博多商人活動, 中世海外交涉史研究, 東京大学出版; 川添昭二, 1996, 앞의 논문을 요약, 수정한 것이다.

131)  川添昭二, 1996, 앞의 논문, 200.

132)  有光保茂, 1937, 博多商人宗金とその家系, 史淵16. 宗金은 상인인 동시에 승려로 妙楽寺의 주지를 맡고 있었다. 당시 妙楽寺는 하카타 일대의 선종사찰 네트워크의 중심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妙楽寺는 쇠락하여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지만 현재도 항구에서 가까운 원위치에 있다. 전국시대 무역의 중심지가 하카타에서 사카이로 바뀌고 에도시대 중국계 선종인 黃檗宗이 하카타와 나카사키를 중심으로 크게 유행하면서 하카타의 商僧들은 힘을 잃게 된다.

133)  당시 조선이 쓰시마와 일본 본토를 분리하여 보고 있음은 쓰시마 정벌 이후 경상도 속주화 정책을 추진했다는 점이나 대마도주에게 관직이나 본향을 하사하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시 쓰시마를 경상도 동래부조에 수록하고 있어 조선이 대마도와 일본 본토를 분리해서 보는 경향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라이 쇼스케, 2003, 『중세 왜인의 세계』, 소화, 71~91; 김보한, 2013, 「중·근세 일본인의 조선에 대한 경계인식 고찰」, 『한일관계사연구』39)  

134)  『世宗實錄』 권8, 276일 임신 ‘參議答平滿景書曰 本曹於去歲之冬 致書源公 九州境內 皆是摠管麾下 私自遣人 有違體統 必受源公書契以來 方許禮接 足下擅自遣人 義不可受 想其書尙未施行 姑許禮對

135)  서계, 도서, 문인 등을 통한 일본인 통제에 관해서는 한문종, 1996, 朝鮮前期受圖書倭人, 『한일관계사연구』5; 한문종, 2004, 「조선전기 倭人統制策과 통교위반자의 처리」, 『일본사상』7 참조.

136)  『世宗實錄』 권26, 61217일 무오

137)  『世宗實錄』 권10, 21026일 신유

138)  『世宗實錄』 권10, 2128일 임인; 世宗實錄』 권10, 2129일 계묘

139)  5대 쇼군으로 요시모치의 아들인 요시카즈는 2년 만에 요절했고, 이후 요시모치가 따로 쇼군을 세우지 않고 섭정하다가 사망 직전 만사이 등을 불러 제비뽑기를 해 자신의 동생인 요시노리를 쇼군으로 임명한다.

140)  『世宗實錄』 권42, 101126일 갑술

141)  清水克行, 2008, 大飢饉室町社会!, 吉川弘文館

142)  八木聖弥, 2006, 앞의 논문 참조.

143)  伊藤喜良, 1993, 義持政権をめぐって禅秀乱前後における中央政局一側面, 日本中世王権権威, 思文閣出版; 杉山一弥, 2014, 篠川公方室町幕府, 室町幕府東国政策, 思文閣出版 참조.

144)  黒嶋敏, 2012, 九州探題考, 中世権力列島, 高志書院 참조.

145)  『해동제국기』에서는 右武衛殿九州節度使의 관계를 잘 서술하지 못하고 있다. 右武衛殿의 경우 원도진과 그 후손으로 명확히 알고 있으나, 九州節度使는 매우 오래 전 처음 통교했다가 문종, 단종시기에 源敎直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통교한 세력으로 파악하고 있다.

146)  『世宗實錄』 권42, 101214일 신묘; 世宗實錄』 권50, 12121일 정묘

147)  『世祖實錄』 권1, 원년 724일 정유

148)  한문종, 1996, 앞의 논문, 66.

149)  文引, 路引 등과 병행 혹은 혼용되고 있다. 문인의 유래와 세종 이전의 사용에 대해서는 한문종, 1996, 앞의 논문 참조.

150)  소다 사에몬타로의 아들 六郞次郞은 소 사다모리의 일개 官人으로 되었을 정도로 소다씨의 세력은 약화되고 소 사다모리의 세력은 안정되었다. 한문종, 1989, 朝鮮初期 對日交涉 活動에 대하여」, 『전북사학』12, 75~77쪽 참조.

151)  『世宗實錄』 권32, 8521일 갑인 ‘石見州賜物管押使 大護軍 李藝 復命啓曰 宗貞盛 備禮迎命 受賜賻 待臣等甚厚 出餞于四十五里訓羅串 謂臣曰 臣當繼先父貞茂之志 專心向化 近因不在本島七八年 未得使人 禮信俱失 今者專使致賻 感戴無涯 臣恐諸處 雜人汎濫 橫行各處 使船及興利船 皆給路引 今後無路引者 勿許接待

152)  『世宗實錄』 권82, 20918일 기해

153)  이와미 지역은 세종 7년 울릉도로 가다가 표류한 조선 어민을 이와미의 지배자가 송환해주며 통교를 청한 것에서 시작된다. 이때 조선에 서계를 보낸 이는 石見洲 長濱 因蟠守로 되어 있어 이와미와 이나바(因幡) 중 어느 세력인지 정확치 않지만 두 지역 모두 당시 야마나씨의 세력 하에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야마나씨라는 것은 추정할 수 있다.

154)  다만 조선이 왜 완전한 일본이 아니라 조선의 속주, 번병 혹은 조선과 일본의 중간지대로 인식했던 쓰시마로 일본 통교의 일원화를 추진했는지는 의문이다. 조선의 속주이기 때문에 대일교섭에서 유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추정할 수 있지만 명확한 확증은 없다. 이에 대해서는 양국의 경계의식에 관한 더 정교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