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17~18세기 僧軍役 운영방식의 변화와 義僧防番錢制의 시행 (조선시대사학회 발표문)

同黎 2015. 5. 27. 03:47

17~18세기 僧軍役 운영방식의 변화와

義僧防番錢制의 시행

 

박세연 (고려대 박사과정)

 

머리말

1. 17세기 전반 국가의 승군 활용

2. 17세기 후반 義僧役의 시행과 승려 조발 방식의 변화

3. 17세기 말~18세기 地方 僧軍의 증가와 義僧防番錢制의 시행

결론

 

 

머리말

 

조선은 성리학의 이념으로 건국되였다. 일찍이 성리학자들에 의해 허무적멸의 도로 지목된 불교는 조선전기 사위전·사사노비 屬公을 통해 위축되었다. 또한 출가한 승려는 職役을 지지 않았기 때문에 국가는 國初부터 백성이 승려가 되는 것을 통제하려 하였다. 『經國大典』에서 度牒을 발급할 때 丁錢을 징수하거나, 시험을 통과하지 못해 도첩을 3개월 이상 받지 못할 경우 환속시켜 본래 직역으로 돌려보내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1)에서도 알 수 있듯이 국가는 승려를 일종의 피역층으로 인식하였다.  

조선전기의 僧役은 이처럼 조선의 국가정체성을 유지하고 국가재정의 누수를 막기 위해 생겨난 특수한 役이었다. 조선전기의 승역은 단기적으로 대규모 토목공사에 無度牒僧을 동원하고 도첩을 발급하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국가의 승려 동원은 규모면이나 횟수 면에서 훨씬 확대되었고 활용 범위도 다양해졌다. 중앙정부는 산릉조성이나 궁궐영건 같은 토목사업에 승려를 동원하였고, 종이 같은 공물·진상품의 마련도 승려에게 부담시켰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국가가 승려에게 군사적 임무를 담당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국가는 南·北漢山城이나 지방 산성의 수직 승군과 같은 僧軍役을 새롭게 승려들에게 부담시켰다. 이러한 조선후기 승역의 변화상에 주목하여 일찍이 이에 대한 연구도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승역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는 주로 국가의 승려 동원과 그로 인한 사원경제의 피폐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임진왜란에서 승병이 활약한 것을 계기로 국가는 승려를 활용 가능한 인적 자원으로 재인식하였다.2) 이를 통해 승려의 위상이 다소 높아지고 국가로부터 승려 통제를 위임받은 도총섭과 같은 고위 승려들이 출현하게 되었다.3) 그러나 근본적으로 승역은 승려들을 수탈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고 차츰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됨에 따라서 사원경제는 피폐해지고 승려가 역을 피해 유망하는 일이 많아졌다는 것4)이 기존의 승역에 대한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승역은 크게 분류하여 승려의 人身을 징발하는 역과 사찰에 물종을 생산하게 하는 역으로 나눌 수 있다.5) 사찰에서 생산·납부해야 하는 것은 주로 지방에서 공물·진상 및 官需에 소용되는 물종들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종이 납부, 즉 紙役을 중심으로 연구가 이루어졌으며6), 조선후기 제지수공업 연구에서 역시 함께 다루어지는 경우가 있었다.7) 그 밖에 契房 등 지방의 잡역을 다루는 연구에서 승역이 함께 언급되기도 하였다.8)

승려의 인신을 직접 징발하는 역에 관한 연구는 요역의 승역화에 대한 윤용출의 연구가 대표적이다. 조선후기 승려의 토목공사 동원은 요역제가 해체되고 고용노동 즉 募立制가 정착하는 상황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9) 윤용출은 요역제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국가가 승려들을 동원해 연호군을 대체하였으나 승려들의 저항과 도망으로 인해 영조대에 종료되었다고 보았다.

한편 승군은 서울 주변과 지방의 산성 및 水營·北邊 등지에서 守直의 역할을 하였다. 승군의 연원이 되는 임진왜란기와 戰後의 승군 조직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연구가 진행되었다.10) 그리고 승군의 활동이 조선후기 승려 위상 변화와 많은 연관이 있음을 밝혀 조선후기 불교사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하려는 노력을 보여주고 있다.11) 승군 중 승려에게 가장 많은 부담이 되었던 南·北漢山城의 義僧과 義僧立番의 錢納을 허용한 英·正祖代의 義僧防番錢制에 대해서도 연구가 이루어졌다.12) 그러나 자료의 미비 탓으로 義僧制度의 연원에 대해서는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으며,13)17세기 승군이 役의 한 종류로 자리 잡는 과정에 대해서도 정치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해 승역의 많은 부분이 밝혀졌지만 아쉬운 점은 주로 국가의 승려 ‘수탈’이라는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승역의 종류와 운영방식, 승려가 부담해야 했던 역의 양적 측면에서는 많은 것이 밝혀졌지만, 그것이 17세기에 조선이 처했던 대내외적 상황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아직 밝히지 못했다.14) 특히 산릉·영건 등의 공역에 승려를 동원하는 것은 조선전기부터 이미 활발하게 진행되었던 반면 승려에게 군사의 역할을 맡기는 승군역은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 새롭게 나타난 것이다. 조선전기와는 달리 임진왜란 이후 승려가 군사로 동원되는 현상과 이후 승군역이 변통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조선후기 승려와 사찰 그리고 국가의 관계를 조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승역이 수탈이었는지 아닌지의 여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승역을 둘러싼 관계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조선후기 승군역의 성립과 운영 과정은 당시 조선이 처한 상황과 제도의 변화에 따라 국가와 승려의 관계는 어떻게 정립되며 국가라는 틀 안에서도 중앙정부와 지방의 관계는 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가? 조선후기 역제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국가가 승려라는 특수한 집단의 역을 어떻게 운영하는가를 통해 조선후기 양역변통과는 또 다른 역제 운영·변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17세기 전반 국가의 僧軍 활용

 

조선이 본격적으로 승군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임진왜란 기간 동안 활동했던 義僧軍으로 볼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 淸虛 休靜(1520~1604)·四溟 惟政(1544~1610) 등에 의해서 조직되고 동원된 승군은 전투뿐만 아니라 군량·무기의 수송 및 보관 등 보조적 업무에서도 큰 역할을 하였고, 선조가 직접 승군의 활약에 대하여 칭찬하였다.15) 병자호란에서도 역시 覺性(1575~1660)을 중심으로 義僧軍이 일어났는데 이들의 활동에 대해서도 긍정적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었다.16)

임진왜란시기 승군의 활약을 통해 국가는 새로운 군사자원 중 하나로 승려를 주목하게 되었다. 私賤이 束伍軍役을 부담하게 된 것과 마찬가지로 승려 역시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는 계층으로 바뀌게 되었다. 국가는 승려들에게 각종 역을 부담시켜 민의 부담을 완화하는 한편 부족한 국역 자원을 보충하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전기까지 공역에만 활용되었던 승려들은 다른 영역에까지 동원되기 시작하였다. 산릉·영건은 물론이고 진상·공납에 소용되는 물건들을 납부하여야 했다. 무엇보다도 큰 변화는 승역의 영역이 확대되어 승군이 군사적 요지에 배치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전기의 지방 방어체제의 문제점이 밝혀지면서 조선은 지방 방어체제를 보완할 여러 가지 방안을 내놓고 있었다. 鎭管體制를 기본으로 하되 무장을 파견하는 營將制를 실시하고,17) 임진왜란 도중 만든 임시로 만든 속오군을 차츰 정규군화하려고 노력하였다.18) 이러한 과정에서 삼남지방의 주요 거점에 산성을 건설하였다.

전쟁의 와중이었던 선조 26년(1593)에는 전라도 潭陽의 金城山城, 長城의 笠岩山城이 수축되었다.19) 그리고 이후 인조 5년(1627) 茂州의 赤裳山城이 수축되었는데, 이 세 산성은 전라도의 가장 중요한 산성들로 湖南의 三山城이라고 불리며 특별히 중시되었다.20) 笠岩山城과 金城山城은 大路를 향하고 있었으며, 赤裳山城은 險地에 기대고 있었기 때문에 천연의 요새가 되어 『實錄』과 『璿源錄』을 봉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1) 이들 산성에는 모두 승군이 배치되어 있었다.22) 남해안의 水營에는 임진왜란 도중 統制使 李舜臣(1545~1598) 아래에서 종전했던 승군이 전후에도 그대로 배치되어 있었다. 浮休 善修 (1543~1615)에서 碧巖 覺性의 법통으로 이어지는 浮休系 僧軍은 전후에도 잔존하여 그대로 統制營과 全羅左水營에 소속되어 있었다.23) 그밖에도 鼎足山·五臺山·赤裳山의 史庫에 승군이 배치되었다.24)

양계지방에도 역시 승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함경도 승군은 南漢山城 築城役을 면제받고 端川에 소속되어 은을 채취하고 있었다.25) 평안도는 정묘호란의 와중에 凌漢山城에서 승군이 활약하였다는 기록이 있어,26) 평안도 내륙 방어에 승군이 동원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양계지방, 특히 평안도는 병자호란 이전에는 毛文龍軍이 淸川江 以北에 횡행하면서, 병자호란 이후에는 청의 감시 대상이 되어27) 산성을 함부로 수축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승군 역시 크게 활약하지 못했다. 선조 38년(1605) 황해도 首陽山城의 隱寂寺에 총섭을 둔 것이나,28) 인조 4년(1626) 안주에서 자체적으로 승려를 모아 作隊한 경우29)처럼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승군을 활용한 사례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아직 대대적으로 승군을 활용하지는 못했다.

요컨대 17세기 전반 승군은 주로 전라도 지역의 山城과 남해안의 水營에 집중적으로 배치되어 있었다.30) 이는 국가가 승군 조직의 특성을 고려하여 승군에게 임진왜란 당시 그들이 활동하던 지역의 왜적 방비를 맡긴 것이다. 승군은 본래 국가에서 조직적으로 동원한 것이 아니라 전쟁 중에 명망 있는 승려들이 의병의 형태로 일으킨 것이었다. 그러자 조정에서는 都摠攝·摠攝·僧代將 등 여러 승직을 의승군의 지휘승에게 내려 이들의 지휘권을 인정해주었기 때문에 전쟁 이후에도 고위 승려를 통해 승군을 동원하는 일이 빈번하였다. 그래서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강한 세력을 보였던 浮休系 승군을 그대로 전라도와 남해안에 배치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전국적으로 승군을 배치할 상황은 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급격히 성장한 建州女眞이 조선에 위협이 되면서 光海君代부터 仁祖代 초에 이르는 기간 동안 평안도와 황해도 주요 교통로 인근의 산성의 성곽을 보수하고 군사를 보충하는 작업이 진행되었다.31)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明과 淸(後金), 그리고 모문룡 군이 얽힌 복잡한 상황과 병자호란 이후 청의 감시가 심해진 상황에서 승군을 체계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 당시 승군제도가 체계를 갖추지 못한 데에는 국가적 차원의 승군 조발 방식이 확립되지 못했다는 사실도 원인으로 작용했다. 임진왜란 직후부터 시작된 승군의 조발은 기본적으로 전쟁 중 명망있는 승려들이 일으킨 승병 집단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 전쟁 당시 고위 승려들이 승병을 일으키면 국가에서는 이들에게 都摠攝·摠攝·副摠攝 등의 僧職을 내려 그 권위를 인정해주었다.32)

임진왜란 기간에는 잠시 폐지된 禪敎 兩宗의 관직인 禪敎兩宗判事가 등장하기도 하지만 양종의 부활을 염려하여 이후로는 승군을 통솔하는 都摠攝·摠攝·僧統 등의 승직이 제수되면서 군사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승군을 통솔할 승직이 필요하지만 僧科와 禪敎 兩宗의 부활을 통한 공식적 승직을 부여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법전에 실리지 않은 명예직으로서의 성격이 강한 승직을 부여한 것이다. 그 후 도총섭 등의 승직이 승군의 책임자로 변모하면서 실질적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33)

승군은 승려의 師弟 법통 관계를 중심으로 형성되었고, 국가는 고위 승려에게 도총섭 등의 승직을 주어 고위 승려의 권한을 사실상 인정해주었다. 국가는 승병을 일괄적으로 통제하는 체계를 갖추지 않았고, 승군 조직 내부에서도 전국적으로 통일된 지휘체계가 성립되기 어려웠다. 예컨대 임진왜란 당시 서로 다른 법통을 지닌 西山系와 부휴계 승병은 각기 상이한 지휘체계를 가지고 평안도와 전라도를 중심으로 따로 움직이고 있었다.34)

승군이 군사적으로 활용되면서 통일되지 않은 승군의 지휘체계는 승군 조발에도 문제가 되었다. 조선후기 山陵役·築城役·營建役 등 요역의 기본적인 승려 조발 방식은 도첩 발급을 대가로 하여 총섭·승장 같은 고위 승려를 경유하여 승려를 모집하는 것이었다. 募集·募入·勸募 등으로 불리는 이러한 방식은 국가에 일정한 역을 부담한 승려에게 면역을 증명하는 도첩을 발급하여 승려가 더 이상의 역을 부담하지 않을 수 있도록 증명해주는 것이었다.35) 중앙정부-道-郡縣-寺刹로 이어지는 체계적 승려 조발 방식이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임진왜란 이후에는 강화된 도총섭의 위상에 기대어 승려를 동원하는 일이 빈번했다. 南漢山城 축성역은 각 도별로 額數를 분정해 승도를 올리는 한편 赴役하는 승군에게 도첩을 지급하기로 약속하여 승려를 모집하였다.36) 여기에는 摠攝 覺性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그런데 승군을 산성이나 水營 등에 주둔시키는 경우는 공역의 경우보다 총섭의 역할이 더 중요했다. 공역의 경우 일정 기간 동안, 혹은 역사가 완성될 때까지 승려를 사역시키고 돌려보내면 되었지만 승려를 군사로 활용하는 경우 대부분 성 안팎에 있는 사찰에, 혹은 새롭게 사찰을 지어서 승군이 그곳에 영구적으로 거주하게 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승려들이 사제관계와 거주 지역에 따라 서로 다른 계통의 지휘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나 지방의 직접적인 승려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일괄적으로 승군 조발을 분정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산성 등에 주둔할 승군을 모집하는 역할은 고위 승려에게 맡겨졌다. 고위 승려에게 승직을 주고 성 내외의 사찰에 거주하며 군사적 역할을 수행할 승려를 모집했던 것이다. 이때 승직의 직첩은 주로 備邊司에서 발급하였다.37) 17세기 전반 대규모 산성의 축성은 대부분 비변사에서 지휘·감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募集되어 사찰로 들어와 수직하는 승려에게는 다른 승역이나 출가 전의 신역이 면제되었다.38) 원칙적으로 승려는 도첩을 발급받아야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럴 경우 출가 이전의 직역에 해당하는 신역을 계속 부담하여야 했다. 또한 지방이나 京衙門·宮房에서 사찰에 부과하는 각종 역을 부담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산성에서 수직하는 승려는 산성에 속한 사찰에 머물면서 여타의 역은 면제받았다.  

仁祖代에도 도총섭 覺性에게 印信을 주고 승군을 모아 赤裳山城에 주둔하게 하였다.39) 覺性은 병자호란 당시 승군을 募得하였는데,40) 그 영향력을 인정하여 전쟁 이후에도 覺性에게 도총섭의 직첩을 주고 승군을 모아 적상산성을 지키게 한 것이다. 현종 4년(1663)에도 인천 자연도에 진을 설치할 때 승려 文哲(?~?)에게 인신을 주고 승려를 모아 사찰을 짓고 수직하도록 하였다.41)

요컨대 임진왜란의 의승군에서 시작된 승군의 산성 수직은 17세기 전반 양남지방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복잡한 대외정세와 총섭 등 고위 승려에 의지한 모집 방식의 조발 때문에 전국적이고 체계적인 형태를 갖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2. 17세기 중반 義僧役의 시행과 승려 조발 방식의 변화

 

국가의 승군 동원은 17세기 중반을 기점으로 큰  변화를 맞았다. 바로 南漢山城에 승려를 주둔시키는 義僧役이 시작된 것이다. 즉 승군역 중에 특수한 義僧役이 새롭게 나타나는 것으로 이는 이전까지의 승역과는 입역 방식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는 義僧役을 일반적인 여타 僧軍役과 동일한 종류의 승려의 軍役으로 이해해왔다. 그러나 義僧과 승군은 국가가 승려를 군사적인 목적으로 동원했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동일하지만 역 운영의 주체와 방식에 있어서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조선후기 60여 곳에 달하는 장소에 승군이 배치되었는데 주로 서울을 둘러싼 지역을 중심으로 義僧이 배치되거나 혹은 배치할 것이 논의되었다. 南漢山城과 大興山城은 일반 僧軍과 義僧이 함께 편제되었고 北漢山城은 義僧만으로 편제되었다. 강화 鎭海寺의 경우 義僧을 둘 것이 논의되었으나 僧弊가 지나치다 하여 募僧으로 편제되었다.42) 효종대의 南漢山城 義僧立番을 시작으로 숙종대 大興山城·江華島·北漢山城 등에 義僧·僧軍이 배치되어 17세기 후반부터 수도를 둘러싼 義僧·승군이 집중적으로 증가했음을 알 수 있다.43)

수도 주변의 義僧은 수도 방어를 위한 軍營에 소속되어 保障의 임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승군이었다. 대부분 慕入의 형태로 조발했던 승군과는 달리 양계지방을 제외한 전국의 승려를 대상으로 역을 부과한 것이었다. 義僧이라는 명칭 또한 수도와 국왕을 지키는 保障의 특수한 임무를 지고 있었으므로 국가에서 그 명호를 높게 붙여 준 것이라고 생각된다.44)

그렇다면 義僧은 일반적인 승군과 구체적으로 어떻게 다른가? 우선 義僧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살펴보자. 사료에 나타나는 僧軍·僧徒와 義僧이라는 표현에는 차이가 있다. 營建·築城·山陵役 등에 동원되는 승려들은 僧軍 혹은 僧徒라고 통칭된다. 지방의 산성에 수직하던 승려들도 승군이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었다. 이들은 군기와 병량을 지키는 일부터 직접적인 군사업무까지 다양한 일을 담당했다. 그러나 義僧이라는 표현은 南·北漢山城 등 특수한 몇몇 사례에서만 보인다.

그렇다면 南·北漢山城에 있는 모든 守直僧을 義僧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義僧의 정확한 의미는 숙종 13년(1687) 강화도에 義僧을 설치하는 문제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A 李健命이 계하길, “작년 가을에 강화유수 申晸이 강화 義僧의 일을 경연 중에 진달하였는데, 그 때 領敦寧府事 金壽恒이 ‘당초 南漢山城을 축성할 때 승도로써 부역시켰으므로 일곱 사찰을 세우고 여러 도의 승인들로써 분정하여 立番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강화도의 형세는 南漢山城과는 다르니 외방의 義僧이 立番하는 사이에 그 폐가 셀 수 없을 것이니, 우선 경기 屬邑과 ... (以下 缺)’ 이 뜻으로써 비변사에 馳報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의논하기를 ‘南漢山城의 義僧은 그 폐가 이미 지극한데 지금 또 강도에 설치하면 수호하는데 무익하고 도리어 해가 된다.’ 고 하였습니다. 대신이 금방 입시하오니 다시 정탈하여 분부하심이 어떠합니까?” 하였다. 상이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南九萬이 말하길 “소신 또한 公事를 보았는데 南漢山城의 義僧은 비록 八路에 분정하지만 폐를 끼침이 오히려 많습니다. 지금 연백과 남양, 풍덕 등은 모두 野邑이니 승도가 본래 적어 적은 수의 승인이 輪回入番하는 것은 반드시 힘이 모자를 것이어서 한갓 폐를 끼침이 돌아오는 것이 되니 신의 뜻으로는 결코 불가합니다.45)

 

위 논의에서는 강화의 義僧 배치 논의가 폐단이 된다는 이유로 부결되자 총섭을 통해 승군을 모집하는 것이 결정되었다.46) 이처럼 義僧은 해당 사찰에 모집되어 거주하는 승려가 아니라 각 도에 분정하거나 혹은 여러 고을에 輪回分定하여 立番하는 승려들을 말한다. 즉 이들은 마치 軍役을 지고 있는 양인과 같이 순서에 따라 南漢山城으로 들어가 일정한 기간 동안 義僧役을 지고 입역 기간이 종료되면 다시 거주하던 사찰로 돌아갔다. 이처럼 승군과 義僧은 力役을 부담하는 승려라는 의미에서는 동일하지만 그 입역 방식에 있어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승군이 총섭의 모집에 응하는 것이었으며, 역을 부담하는 승려 역시 일정한 규정이 없었던데 비하여 義僧役은 양계지방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승려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었다. 즉 義僧役의 시행으로 전국의 승려를 대상으로 한 정기적·정규적 형태의 승군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義僧 立役의 정확한 성립 시기는 알기 어렵다. 그러나 여러 정황을 추정해 볼 때, 효종대 전반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47) 義僧이 소속되어 있는 수어청 자체가 인조 12년(1634) 이후에나 성립되며,48) 병자호란 이후 남한산성이 淸의 주요 감시 대상이 되어 新城이 축조되자 청의 칙사가 굳이 南漢山城을 직접 둘러보고 새로 수축된 부분을 허물어버리도록 요구하기까지 하였기 때문에49) 南漢山城은 상당기간 군사적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방치되었다.50) 인조 2년(1642) 남한산성이 설치되면서 도총섭 각성이 성 안에 머물고, 성 안 7사에 승군들이 머물러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의승은 승군과는 별로도 지방에서 상번하는 군사들로 남한산성의 성립과 의승 제도의 성립을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다.

아래 <사료 B>를 살펴보면 의승 입역의 시기를 추정해볼 수 있다.

 

(水原府使) 李泰淵이 말하길 “수원의 일은 소신이 임지에 도착한 후 거의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예전에 守禦使 從事官이 되었을 때 보니 앞서 義僧을 성내에 모아둔 것은 南漢山城의 수호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래 義僧이 고을로부터 모이는 일은 지난날과 같지 않기 때문에 장차 수호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걱정할 만합니다. 외방의 여러 일로 승려가 군사가 되는 것은 그 수가 매우 많다고 합니다. 이로써 義僧에 채워 넣으면 편하고 마땅할 듯합니다. 신이 이 뜻으로 수어사에게 말하고자 합니다.” 상이 말하길 “義僧의 일은 또한 폐를 끼치는 것이 너무 많다. 경이 수어사에게 가서 보고 서로 의논하여 함이 가하다.”51)

 

위 사료에서 보이는 李泰淵(1615~1669)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가 수어사의 從事官이었을 때에는 義僧을 단지 성 안에 모아두었을 뿐이었다. 이태연이 수어사의 종사관이 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인조 23년(1645)에나 정6품 實職을 지냈기 때문에52) 적어도 그 이후에 종사관이 되었을 것이다. 즉 인조 재위 말에는 아직 義僧立番이 실시되지 않고 있다가 근래 즉 효종 8년(1657) 이전 어느 시점에 각 고을로부터 義僧을 모이게 하는 義僧立番이 실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義僧立番의 시작을 효종대로 추정하는 이유는 의승 입번과 南漢山城과 守禦廳을 둘러싼 국내외 정세의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南漢山城이 다시 정비되면서 군비가 급증한 것은 효종 3년(1652) 李時昉이 다시 수어사로 임명된 이후였다. 孝宗代는 두 번에 걸친 호란의 충격이 조금 수습되고 세폐·방물이 감면되는 등 淸의 압박이 조금 완화되던 시기이며 따라서 북벌을 비롯한 군사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효종은 復讐雪恥를 명목으로 강력한 군비증강책을 시행하였다. 효종의 군비증강책은 수도 방어를 강화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南漢山城과 강화도의 군비가 급증하게 되었는데 그 중에서도 효종 재위 초에는 南漢山城의 군비가, 후반에는 강화도의 군비가 급증하게 되었다.53)

특히 이 시기 남한산성의 군비 확장은 크게 주목된다. 이시방이 수어사로 임명된 이후 總戎使 소속의 죽산영을 남한산성에 소속시키고 산성에서 먼 충주와 청주병은 충청도로 환속시켰다. 또한 군사력 강화를 위하 수어 아병을 사수와 포수로 편성해 화력을 증강하였으며, 청천강 이북 고을의 세미와 충주의 관곡을 산성의 군량으로 투입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54)

효종대 군비 확장은 신료들의 많은 비판에 직면하였다. 군영을 중심으로 재정이 집중되고 군액이 확장되면서 疊役을 지게 된 백성들이 반란을 생각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55) 민생의 피폐로 인하여 북벌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조차도 효종의 군비증강책을 비판하는 상황이 되자 효종의 정국 운영은 위기에 빠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한산성의 유지와 관리를 위한 인원을 수어청 군액 확장 대신 피역층으로 지목되던 승려에게 맡기는 것은 민폐가 된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있는 하나의 방법이었다. 의승역의 성립은 바로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처음 정해진 의승의 원액은 알기 어렵다. 그러나 숙종 원년(1675) 기록에 보이는 당시 전라도 의승의 수56)가 영조대 「南北漢山城義僧防番錢磨鍊別單」에서 보이는 것과 별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아 현종대를 거치며 南漢山城의 緇營寺刹이 추가되면서 팔도 분정이 완성되고 義僧의 원액이 대략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그 수는 400여 명이었다.57)

또한 原居僧58)이라는 승려들이 있어 의승과 함께 수직 업무를 담당하였다. 南漢山城을 축조했을 때 그 성지의 안에는 7개의 사찰이 있었다.59) 그 후 차차 사찰이 더 지어져 총 9개의 緇營寺刹이 자리를 잡았다. 이 사찰에 살고 있던 승려들로 수어청에 속하게 된 것이 바로 원거승이다. 이들은 輪回立番하는 의승과는 계통을 달리하는 승려들이었다. 輪回立番하는 의승과 상주하던 원거승이 따로 분리되어 파악되고 있다는 사실은 의승이 외방에 분정한 승려만을 가리키는 특수한 용어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해준다.

의승은 1년을 6番으로 나누어 立番하였으므로 한 번에 상주하는 인원하는 60~70명이 되었다. 남한산성에는 原居僧을 합치면 대략 200여 명의 승군이 항시 있었던 것이다. 의승은 계속 조련을 받되 그 군사적 역할은 주로 비상시의 것으로 여겨졌고, 주된 업무는 산성의 성벽을 보수하고 창고를 수직하는 것이었다.60) 別庫監官·射料監官·庫直 등의 직책은 이러한 의승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의승역의 조발 방식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앞서 살펴보았듯이 17세기 전반 승군의 조발은 총섭을 통한 모집이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다른 역을 면제해 준다는 반대급부가 존재하였다. 그런데 의승역은 양계지방을 제외한 전국의 승려에게 의무적으로 부과한 역이었다. 조발 방식 역시 기존의 승군과는 달랐다. 의승은 중앙정부-도-군현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분정을 통해 조발되고 있었다.

南漢山城의 의승역이 처음 성립할 당시의 자료가 남아있지 않아 초기의 조발 및 운영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이후 연대기 사료에 보이는 義僧 관련 기사들과 영조 32년(1756) 반포된 「南北漢山城義僧防番變通節目」(이하 「義僧變通節目」) 및 「南北漢山城義僧防番錢摩鍊別單」(이하 「義僧番錢摩鍊別單」)을 보면 그 대체적인 내용을 밝혀 낼 수 있다.

의승은 남한산성 내에 있는 八道都摠攝이 관리하고 있었지만 남한산성의 도총섭은 지방 산성의 총섭과는 달리 의승 조발에 직접 관여하지 못했다. 의승의 조발은 조정에서 각도에 정액을 분정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남한산성을 관리할 의승을 숫자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매달 정해진 수의 군사력을 상번시키는 일종의 정액제를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실제 지방에서 의승은 어떻게 應役하였을까? 아래 사료를 살펴보자.

 

C (守禦使) 金錫冑가 말하길 ㉠“南漢山城의 일곱 사찰은 각기 팔도에 분속되어 있습니다. 先臣(金左明)이 수어사가 되었을 때 한 사찰을 더하여 여덟 사찰이 되었는데 ㉡각도의 義僧으로 하여금 스스로 식량을 갖추어 산성의 절에 立番하게 하였으니 그 역이 심히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리고 ㉢호남의 義僧은 六番으로 나누어 아무 달에 아무 사찰을 세우며, 1년에 한 사찰에서 立番하는 승려가 항상 백여 명을 내려가지 않았으니, ㉣한결같이 군사가 上番하는 예와 같이 上番하는 義僧이 왔습니다. 그 도의 各寺의 재물을 받아 義僧의 역에 보냈으니 그 실제는 한 도의 승려가 모두 담당하는 것이었습니다.61)

 

<사료 C>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로 ㉠에서 보이듯 남한산성의 각 사찰이 각도에 분속되어 있었고, ㉢에서 보이듯 의승의 조발은 일정한 방식이 없이 도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고 있다는 것이다. 의승 조발 체계의 가장 상부에는 수어청과 같은 군영이 있었으나 그 실제적 운영은 각도의 사정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湖南의 경우 1년을 6번으로 나누어 2개월마다 한 사찰에서 의승을 모두 上番시키고 다른 사찰에서는 재물을 보내 의승을 올려 보내는 비용으로 쓰게 했는데, 한 사찰에서 백여 명을 올려 보냈다고 한다. 영조대 「義僧番錢摩鍊別單」에 나타나는 전라도가 남·북한산성에 들여보내는 의승의 원액이 198명이고 그 중 남한산성의 원액이 136명이다. 북한산성의 의승역이 시작되면서 의승의 액수가 조정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사료 C>의 백여 명은 호남에서 1년에 올려 보내는 의승의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데, 전라도는 순서대로 한 사찰에 이를 모두 부담시키는 식으로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경상도는 각 읍별로 의승의 액수가 정해져 있었으며 산성의 여부에 따라 그 액수를 조절하는 식으로 조발하였다. 중앙정부는 도별 액수만 정한 채 각 읍별 액수는 크게 상관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62) 일종의 정액제로 의승역을 운영했던 것이다. 18세기에 반포된 「義僧變通節目」과 「義僧番錢摩鍊別單」의 내용을 보면 숙종 13년(1687)의 경상도 상황과 마찬가지로 각 읍의 액수가 정해져있다.

두 번째는 ㉡과 ㉣에서 알 수 있듯이 의승의 立番은 일반 군사의 上番하는 예와 같았다는 점이다. 부역 승군과 마찬가지로 의승은 스스로 식량을 마련하여(自備糧) 立番했다. 그리고 ㉣에서 보이듯 일반적인 군사가 입역하는 것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이렇듯 의승은 1년에 2개월 동안 上番하여 산성에 수직하고 입번하는 비용은 일체 자신이 속한 사찰에서 부담했으며, 정해진 입역 기간이 끝나면 다시 사찰로 돌아갔다. 군영에서는 가끔씩 의승을 대상으로 試取하였고 우수한 성적을 거둔 승려는 총섭 등의 고위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63) 이러한 모습은 일반적인 軍役과 유사성을 보인다.

하지만 의승역은 일반적인 良役=軍役과 차이점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첫째, 의승역의 특징은 일반적인 양역 내지 직역으로는 인식되지 않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후기 호적자료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慶尙道丹誠縣戶籍臺帳』을 기준으로 살펴볼 때 호적에 실린 승려의 이름 앞에는 출가 이전의 신분을 기준으로 良人僧, 寺奴僧, 驛吏僧 등 다양한 직역이 기재되었다. 즉 승려는 그 자체로는 독립된 직역이나 신분이 아니었으며 따로 품계나 승직을 얻은 경우가 아니면 출가 전의 신분이 출가 후에도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승려를 피역층으로 보고 국역으로부터의 이탈을 막으려는 국가의 의지가 담겨있는 한편 의승이 별도의 직역으로 파악되지는 않았음을 보여준다.

호적상 승려 기재의 또 다른 독특한 점은 승려가 일반 남녀와 별도로 파악되어 있다는 것이다. 단성호적에는 각 식년의 마지막 호적의 끝 부분에 별도의 僧籍을 작성하였다. 이러한 체제는 『慶尙道大邱府戶籍臺帳』에서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또한 각 식년 호구를 정리하는 都以上에도 승려의 호구수를 별도로 취급하고 있다.64) 이 역시 국가가 승려를 별도의 집단으로 파악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따라서 의승역은 승려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역이었지만 여타의 역과 같이 특징인의 인신에 부여하는 직역은 아니었던 것이다.

둘째, 역 조발의 단위가 사찰이라는 집단 공동체에 부과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앙정부(軍營)-도-군현으로 이어지는 수직적 분정 조발체계의 최종 단위는 사찰이었다. 역 조발의 분정체계가 확고하게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사찰이 역 부과의 단위로써 중요하게 되었다. 아래 <사료 D>를 보면 義僧 조발의 최종 단위가 사찰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의승의 上番 비용은 사찰이 공동으로 책임지고 있었다.

 

湖南釐正使 李成中이 復命하고 書啓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 異端은 우리 儒家에서 매우 배척하는 것입니다마는, 우리나라의 僧徒는 그렇지 않아서 身役에 응하는 평민이나 編伍의 군졸에 지나지 않으니, 그 愛護하는 것도 평민이나 군졸과 같아야 할 것인데, 南漢의 義僧이 上番하는 것은 승도의 괴로운 폐단입니다. 본도는 큰 절이면 너댓 명이고 작은 절도 한두 명인데, 한 명을 資裝하여 보내는 데에 거의 1백 金이 들기에 한 절에서 해마다 4, 5백 金의 비용을 책임지니, 저 草衣木食하는 무리가 어찌 바랑을 메고 떠나 흩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남한의 守臣은 팔도의 義僧이 上番하는 것은 保障하는 데에 그 뜻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마는, 兩廳의 軍官, 卒隷도 다 각 고을의 시골에서 사는 자에게는 쌀·베를 거두고 성안에 사는 자를 대신 세우니, 어찌 義僧에게만 이 예를 쓸 수 없겠습니까? 이제부터 定式하여 義僧은 上番하지 말고 매명마다 錢 16냥을 代送하되 義僧防番錢이라 이름하여 각 고을로 하여금 軍布의 규례와 마찬가지로 거두어 모으게 하면, 승도의 큰 폐해를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65)

 

군현에서 각 사찰에 상번시킬 의승의 수를 정해주면 사찰에서는 의승의 상번 비용을 마련하여 승려를 입번시켜야 했다. 사찰의 사세에 따라서 책정되는 의승의 수는 달랐다. 왕실과 아문의 願堂, 陵園의 수호사찰의 승려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찰 승려들은 일부는 해당 朔의 의승이 되어 상번하고, 같은 사찰의 나머지 승려들은 상번 비용을 보조했던 것이다. 그런데 위 사료에서 보이듯이 의승 상번을 위해 사찰과 승려가 부담해야 할 경제적 부담은 대단히 컸다.

의승역에 드는 비용을 구체적으로 산출해내기는 어렵지만 18세기의 義僧防番錢을 참고하면 대략적인 부담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영조 32년(1756) 남·북한산성의 의승 입번을 폐지하고 錢으로 대납하는 義僧防番錢制가 시행되었을 때, 정해진 代錢은 의승 1명에 錢 10~22냥이었다.66) 그러나 10냥을 부담하는 경기지방의 의승은 20명에 불과했고 호서·해서·강원의 의승은 18냥을, 전체 약 63%를 차지하는 양남의 의승은 22냥을 지불해야 했다. 당시 錢 1냥이 대략 米 3斗에 해당했는데, 당시 田稅가 結 당 4斗, 大同稅가 12~16斗에 불과한 것을 생각해보면 큰 부담이었다고 생각된다. 義僧防番錢制가 성립할 때 영조가 승려들의 부담을 조금 덜어주었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실제 부담의 정도는 「義僧番錢摩鍊別單」의 규정 이상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영남 의승 한 명이 한 차례 상번하는데 드는 비용이 30냥에 달한다거나,67) 大刹은 50~60냥을 부담해야 한다는 기록도 보인다.68)

의승 개인이 이를 부담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의승역이 사찰을 단위로 부과되었던 것은 결국 토지 소유 문제와 관련이 깊다고 보인다. 17세기 이후 승려 개인의 토지 소유가 인정되기도 했지만,69) 그 규모는 대체적으로 영세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토지를 소유하면서 여러 승려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하던 사찰이 자연스럽게 역 부과의 단위가 될 수밖에 없었다.70) 따라서 의승을 上京 입번시키는 것은 단순히 승려 개인의 역이 아니라 해당 사찰이 온 힘을 기울여 공동으로 부담해야 하는 큰 역이었다. 군현이 의승의 분정을 사찰별로 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요컨대 지금까지 산성의 수직승군은 승려 개인을 모집하던 것이었던데 비하여, 義僧役은 사찰에 부과하는 역으로 그 성격이 달라진 것이다.

 

3. 17세기 말~18세기 地方 僧軍의 증가와 義僧防番錢制의 시행

 

남한산성에 이어 북한산성에도 의승이 배치되는 운영되는 가운데 숙종 재위 후반부터 중앙정부의 승군 정책에 변화가 오기 시작하였다. 그 원인은 숙종대 대외 정세의 변화와 그로 인한 지방 방어 체제의 정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조선의 군사력에 대하여 민감하게 반응하며 특히 산성 축조와 수리를 강력하게 저지하던 청은 山海關 入關 후 조선에 대한 감시를 한층 완화하였다. 특히 현종 13년(1672) 三藩의 亂이 발생하자 조선에 대한 강경책은 유화책으로 변하게 되었다.71)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은 이전보다 비교적 자유롭게 산성을 개축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숙종 초반부터 江華의 墩臺들을 정비하고 개성에 大興山城을 수축하는 등 관방시설의 일대 정비가 이루어지게 되었다.72)

숙종대 후반에는 寧古塔回歸說이 대두되고 三藩의 亂 등 대외 정세의 불안이 보고되었다.73) 대외 정세에 대한 불안은 곧 관방시설의 증가로 연결되었다. 먼저 가장 중요한 保障處였던 강화도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가 이루어져 돈대가 설치되고 鼎足山城이 수축되는 한편,  通津의 文殊山城을 수축하였다. 수도인 서울을 방어하기 위해 도성을 개축하고, 새로운 보장처인 북한산성과 그 외성인 蕩春臺城을 신축하였다. 또한 기존의 보장처였던 남한산성의 외성이 신축되었다. 여기에 숙종 재위 초에 축성된 대흥산성을 더하여 서울을 둘러싼 도성방어체계가 정비되게 되었다.74)

그런데 숙종대 정비된 도성방어체제는 서울 및 경기지역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남쪽과 북쪽, 두 변방에서 외적이 수도로 쳐들어올 수 있는 예상 경로의 외방 산성을 동시에 정비하였다. 그리하여 서울로 향하는 상경로를 중심으로 서북방과 남방의 각종 산성을 수축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75) 한편 영조 4년(1728)에 일어난 戊申亂을 계기로 지방방어체제를 정비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무신란의 진압 직후 영조는 「束伍節目」을 반포해 속오군 제도를 재정비하고 지방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였다.76) 한편으로는 平壤城, 淸州邑城, 大邱邑城 등을 수축하여 지방 거점 방어시설을 강화하였다.77) 그리고 宣川의 東林山城, 鐵山의 西林山城, 漆谷의 架山山城, 昌城의 當峨山城, 淸州의 上黨山城 등을 증축하였다. 이렇듯 숙종에서 영조대에 걸친 기간동안 많은 산성이 증축되거나 신축되었다.

18세기 늘어난 산성들 중 삼남과 해서지방의 산성은 독자적인 산성진으로 편제되는 경우가 많았다. 영장제 하에서 지역의 군사적 요지가 되는 산성은 따로 진을 설치하여 독자적인 운영을 하도록 하였다. 그것이 바로 山城獨鎭 혹은 山城鎭이다. 산성진은 산성 소재지의 수령이나 별도의 守城將이 책임자가 되어 오로지 정해진 지역만을 수비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立番할 군사와 양향을 마련하기 위하여 주변 군현을 屬邑으로 내려주는 경우도 있었다. 이들 산성들은 기본적으로 監營과 兵營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구체적인 관리와 운영은 해당 지방의 수령이 책임지거나 營에서 파견한 別將이 담당하였다. 결국 산성진의 관리는 결국 지방의 各營과 各官이 책임져야 했기에 지방재정에 부담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국가가 관리하는 산성은 19세기 까지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續大典』 단계에서는 경상도의 鳥嶺山城·金烏山城·禿用山城과 전라도의 赤裳山城·笠岩山城·金城山城·威鳳山城·蛟龍山城, 황해도의 正方山城·首陽山城·九月山城·大峴山城·長壽山城, 평안도의 慈母山城·黃龍山城이 산성진이 되었다.78) 東萊의 金井山城은 산성진은 아니었지만 東萊守城鎭이 사실상 독진이었고, 산성의 군사 역시 독진의 예와 같이 획급되었다.79) 『增補文獻備考』에는 경상도의 架山山城·矗石山城, 황해도의 太白山城, 평안도의 東林山城·當峨山城·白馬山城·鐵甕山城·龍骨山城·雲暗山城·凌漢山城·堡山山城이 산성으로 추가되어 있다.80)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산성진의 확대는 곧 산성을 수직할 승군의 확대로 연결되었다. 산성진에는 의례히 사찰이 소속되어 있었다. 산성은 위급시에 군사가 들어가는 곳이었으므로 지속적으로 시설을 수리해야했고, 군기와 군량을 비치해야했다. 특히 山城穀은 지속적으로 改色 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군량고를 계속적으로 관리해주어야 했다. 그런데 일반적인 진영과는 달리 산성진에는 한정된 수의 군현만이 소속되거나 산성이 위치한 군현만이 소속되었다. 산성진의 승군 수직은 산성진의 물적·인적 자원을 보충해주기 위한 것이었다.

지방 산성이 확대되고 산성 수직 승군이 늘어나면서 지방 승군의 조발 방식에도 변화가 이루어졌다. 산성에 수직하는 승군의 조발은 기본적으로 감영과 병영의 책임이었다. 승군 조발의 방식으로는 여전히 모집의 방식도 유지되고 있었으나, 승군의 확대로 인하여 새로운 방식이 등장하였다. 숙종 13년(1687) 경상도 善山府使 趙持恒이 산성 수직을 이유로 영남 의승을 타도로 이정해 줄 것을 요청한 것에 대한 비변사의 회계에 따르면 경상·전라도는 남한산성 의승의 예와 마찬가지로 각 읍의 승도로써 도 내의 산성에 승군을 수직시키고 있었다.81)

아래의 <사료 E>는 18세기 초 각도에서 산성의 승군을 어떻게 분정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고 있다.

 

E 相考하실 일입니다. 本城을 重修하는 초에 義僧 40명을 定額으로 各邑에 분배하였는데 中年에 10명을 감하였고, 남아 있는 30명은 매 삭에 3명씩 輪回入番 하는데, 연전에 僧統이 營門에 보고한 바로 인하여 또 10명을 감하였습니다. 本縣의 10명 중에 1명과 光州의 9명 중 3명, 和順의 3명 중 1명, 光陽의 5명 중 2명, 谷城의 3명 중 1명을 제감하고, 구례의 1명을 全減해주었으나 매삭 2명이 立番하면 즉 번역이 고되고 무거워 義僧은 견디기 어려우며 원통함이 된다 하거늘 그 물정을 상세히 들어보니 즉 僧將 代將을 공궤하는 바의 鹽醬·菜蔬·茸藿 등의 물종의 잡비를 각각 그 절로부터 義僧에게 갖추어 납부하게 하여 立番에 책응하게 하며 앞서 役에 있었던 삼·사인이 힘을 합칩니다. 그러므로 번 중에 應役함이 심하게 편중되지 않으며, 醬庫·軍器庫 守直과 城內 禁伐 등을 일을 힘을 나눠 담당하다가 이제 승려는 적어지고 역은 번다하여 주야로 길게 입역하니 그 노고가 南·北漢山城의 立番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82)  

 

위 자료는 영조 12년(1736) 南原縣에서 全羅監營에 올린 牒報이다. 여기에서 먼저 살펴봐야 하는 것은 사료 안에서 나오는 ‘義僧’이라는 단어의 의미이다. 여기서의 의승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은 남·북한산성의 의승이 아니라 지방의 산성에 입번하는 승려를 뜻한다. 남원현에서 관리하는 본성은 교룡산성이다. 위 첩보의 내용을 살펴보면 전라감영에서 교룡산성을 중수하던 숙종 38년(1712) 남원과 光州·和順·廣陽·谷城·求禮의 6개 군현에 총 40명의 ‘의승’을 분정하였는데 그 후에 10명씩 두 번을 감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의 입번처는 남한산성이 아니라 교룡산성이었다.

당시 남원을 비롯한 전라도 6개 군현에서 부담하고 있던 義僧의 역은 중앙정부에서 분정하는 남·북한산성의 의승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것이었다.83) 그렇다면 왜 의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교룡산성은 숙종 30년(1704) 축성될 때부터 모입한 승군 수백 명이 있었다.84) 그런데 전라감영에서 분정한 의승은 輪回立番한다는 것이 특징이며 위 첩보에서 남원현이 밝히고 있듯이 그 응역방식이 남한산성의 입번과 동일하다. 그렇기 때문에 ‘募入’한 승려와는 구분되는 ‘輪回立番’하는 승려들을 南漢山城 義僧의 예에 따라 의승이라고 불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 같은 ‘지방 의승’의 존재는 邊山의 格浦鎭과 茂州의 赤裳山城에서도 확인된다. 격포진에는 당시 行殿의 임무를 담당하던 승장이 있었다. 이 승장에게는 ‘의승’ 2명을 차정해주어 변산의 4개 사찰에서 번갈아 가며 보내주고 있었고 또 승도들이 매년 40斗의 쌀을 보내주고 있었다.85) 무주의 적상산성 역시 의승이 있어 번갈아 번을 서다가 영조 18년(1742) 이전 혁파되었다.86) 여기서도 알 수 있듯이 ‘의승’ 이라는 용어는 윤회입번하는 승군을 의미하는 단어로 지방에까지 확장되고 있었다.

이러한 ‘지방 의승’이 얼마나 있었는지 구체적인 사례는 더 면밀히 검토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방 군현과 各營의 승려에 대한 활용이 더욱 확대되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추세가 계속되어 18세기 전반에는 군현이 승려 개개인의 인신까지 파악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이를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南原과 求禮 사이에 있었던 도망 승려의 刷還 문제이다. 영조 12년(1736) 남원에서는 구례 華嚴寺로 도망간 승려 3명의 쇄환을 구례에 요구했는데 오히려 구례에서는 泉隱寺 소속 승려 8명을 쇄환해달라고 남원에 요청하였다. 그리고 구례에서는 쇄환을 요구한 승려 8명의 친족을 구금하여서 구례와 남원 간의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다.87) 여기서 우리는 군현이 각 사찰의 거주승의 수와 인적사항 그리고 그들의 친족관계까지 파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지방의 승려 통제력은 18세기에 더욱 강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숙종 40년(1714) 북한산성 의승입번이 시작되면서 의승의 수는 400여 명에서 700여 명으로 확대되었다. 남한산성 의승이 이미 민폐가 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가능했던 배경으로는 대외정세에 대한 위기감 고조, 숙종대 지방에 대한 중앙정부의 지배력 확대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지방의 산성이 계속하여 축조되면서 자연히 지방 승군의 수요도 늘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북한산성 의승입번이 시작되면서 중앙의 군영에 입번시켜야 하는 의승이 확대되자 의승역 대한 지방의 불만이 계속되고 있었다. 경상도에서는 산성이 많다는 것을 이유로 의승을 감해줄 것을 비변사에 청하였고88), 전라도 남원의 교룡산성 축성시에도 의승을 감해줄 것이 논의되었다.89) 이 밖에 의승이 외방의 큰 폐가 된다는 지적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실제 지방 승려의 상경 입번도 그대로 지켜지지는 않고 있었다. 북한산성 의승입번이 시작된 직후부터 의승의 代立은 이미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除番을 명목으로 돈을 거두었고 그것이 외방의 막대한 폐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90) 산성의 확대로 외방에서 승군을 조발할 일이 더 확대되는 가운데 남·북한산성의 의승 입번 은 지방과 사찰 모두에게 부담이 되었기 때문에 실제로 입번하는 대신 총섭에게 돈을 내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즉 국가에서 승려를 더 분정하려고 하여도 지방의 사정이 17세기 전반과는 많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하여 경종 3년(1723)에는 외방의 폐가 지대하다는 左議政 崔錫恒(1654~1724)의 건의에 따라서 북한산성 의승을 혁파하고 의승 1명마다 10냥 혹은 15냥의 돈을 받아 승군을 雇立하자는 논의가 진행되어 시행되었다.91) 그러나 영조 5년(1729) 승려의 무리는 고립과 다른데 斂錢之政이 승려에게까지 미치는 것은 부당하고, 북한산성의 방비가 약해질까 걱정된다는 이유로 승군의 고립은 다시 혁파되었다.92) 영조 8년(1732) 흉년으로 다시 한 번 의승을 혁파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 다시 혁파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93)

그런데 영조의 태도는 영조 27년(1751) 변화했다. 嶺南均稅使 朴文秀(1691~1756)가 入侍하여 균역법의 시행에 따른 여러 문제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의승의 문제를 더불어 제기한 것이다.

 

또 아뢰길 … “義僧만 가지고 말하더라도 防番錢은 15냥이 되는데 근년 이래로 南北漢의 승도들은 절 안에 수응과 접대 등의 일을 모두 義僧에게 담당하게 하므로 義僧이 한번 번에 오르는데 드는 비용이 많게는 30냥에 이릅니다. 이 때문에 승려들의 원망이 떼 지어 일어나서 모두 防番錢을 내기를 원하니 견디지 못하여 원통함을 호소하는 정상을 여기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일은 南北漢에 분부하여 각별히 잘 처리하여 각 도의 승려들이 원망하는 폐단을 없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감히 앙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길, “그렇게 하라. 義僧의 폐단은 잘 알고 있다. 備局에 명하여 稟處하게 하라.”고 하였다.94)

 

그러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의승을 입번시키는 본래의 뜻을 지키고 단지 엄한 申飭으로 僧弊만 제거하자는 領議政 金在魯(1682~1759)의 반대로 인하여 결국 의승역은 그대로 유지되었다.95) 하지만 균역청추사목이 완성된 이후인 영조 31년(1755) 湖南釐正使 李成中(?~?)의 別單에 의하여 다시 한 번 義僧防番錢의 필요성이 언급되었다.96)

결국 영조 32년(1756)에 남·북한산성의 의승입번을 폐지하고 각 지방에서 병조로 의승역의 代錢인 義僧防番錢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그 돈을 남·북한산성에 지급하여 승려를 雇軍하도록 하였다.97) 비슷한 시기에 산릉역에 승군을 동원하는 일도 중단되었다.98) 이후 중앙정부에서 승려를 직접적으로 조발하는 일은 사라지게 되었다.

義僧防番錢制의 시행에는 均役法의 시행이 큰 영향을 미쳤다. 균역법은 2匹役과 1匹役으로 이원화되어 있던 良役을 1匹役으로 일원화시키는 조치였다.99) 이러한 대대적인 조치로 중앙재정에 엄청난 양의 재정부족이 야기되었고 이는 결국 지방재정을 희생하여 중앙재정이 대대적인 給代를 해 주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궁방·아문뿐만 아니라 지방의 수입이 되기로 했던 魚鹽船稅의 균역청 귀속이 바로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100)

균역법으로 인한 지방재정의 손실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급대자원을 마련하기 위해 지방에서 자체 재원으로 사용하던 은결이 收括되었다.101) 또한 正軍의 役價가 1필로 통일되면서 營官에서 자체적으로 役價를 받았던 아병이나 수첩군관 등의 私募屬도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102) 지방의 영관은 모집한 인원의 이탈을 막기 위해서 역가를 하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바로 지방의 인적·물적 자원의 부족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늘어난 산성의 수직을 실제로 담당하던 지방 승군을 예전과 똑같은 방식으로 입번시키는 것은 늘어난 지방의 부담을 생각할 때 적절치 않은 것이었다. 산성은 바로 균역법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감영과 병영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의승방번전제는 「南北漢山城義僧防番變通節目」에서 밝히고 있듯이 중앙정부에서 승역이 각도 영읍의 잡역 및 紙役에 활용되고 있는 사실을 인정하고 이를 보장해주기 위해서였다. 또한 궁극적으로는 각 사찰이 규모에 따라 적절한 역가를 부담하도록 하여 均役의 이상을 지킬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따라서 의승방번전제는 균역법의 후속작업의 일환으로 시행된 것이었다. 실제 「南北漢山城義僧防番變通節目」을 작성하고 수정하는 것은 균역청에서 담당하고 있었다.103) 영조가 의승방번전제에 대한 태도를 바꾼 것은 균역법 실시 이후 지방의 각종 문제를 제기한 박문수의 보고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를 결정적으로 추진하기로 결정한 것은 균역법 시행 후 그 문제점을 보완한 「均役廳追事目」을 작성한 뒤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남·북한산성의 의승은 고립군으로 전환되었다. 의승의 명목은 계속 남아 있었지만 이들의 위급 시에만 도총섭의 호령에 따르기로 되어 있었고, 평소에는 방번전만 납부하였다. 이 돈으로는 승군을 고립하도록 하였는데, 客僧의 고립을 금지하고 본래 살고 있는 승려를 고립하도록 하여 의승이 상비군으로 활용됨으로써 결과적으로 남·북한산성의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의승방번전제는 定額制로 운영되었다. 거리의 원근을 계산하여 1명당 최소 10냥에서 최대 22냥의 방번전을 납부하도록 하였다. 경기의 경우 陵園에 속한 일곱 사찰은 의승방번을 영원히 제하여 주었다. 6도의 방번전을 합치면 총 14,354냥이었는데, 여기에는 駄價와 雇立僧의 給料, 그리고 南漢山城의 添給錢과 윤달을 대비한 예비비 및 造紙署에 劃送할 비용이 포함되어 있었다.도총섭이나 군영의 침학을 막기 위하여 방번전은 병조가 직접 수납하도록 하였다.

한편 의승방번전을 병조로 납부해야할 책임은 지방에 있었는데 「南北漢山城義僧防番變通節目」에는 이 과정이 잘 드러나고 있다. 보통의 부세는 春等과 秋等의 2번에 나누어 내는 경우가 많았지만 의승방번전은 사찰에서 협력하여 거둔 것이었기 때문에 軍保의 예에 따라 1년에 한번 거두었다. 그리고 각 지방에서는 따로 監色을 정하지 않고 병조의 價布를 걷는 편에 일시 상납하게 하였다.

그러나 중앙정부는 각 군현에서 의승방번전을 어떠한 방식으로 수취하는가에 대해서는 관여하지 않았다. 실제 정조대의 『義僧防番錢半減給代事目』을 살펴보면 지방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의승방번전을 수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승려가 직접 납부하는 방식이 다수를 차지하지만, 군현에서 환곡을 운영하여 그 이자를 취하여 납부하거나, 官防納을 하고 있는 경우도 보인다. 지역에 따라서는 별도로 保人을 설정하여 그 돈을 내게 하는 방식도 있었다. 의승방번전의 수취 방식을 지방에 위임하게 되면서 중앙정부에서 직접적으로 승려를 관리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었다. 지방의 사정과는 정반대로 중앙정부가 승려 통제를 강화할 이유는 점차 사려져갔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중앙정부에서 승역 활용을 중단한 것은 단순히 승려들의 저항이나 유망이 심해졌기 때문이 아니었다. 중앙정부 나름의 합리적 판단과 均役이라는 재정이념에 따라서 중앙정부에서 직접 수취하던 승역이 중단되었던 것이다. 18세기 이후 승역 수취의 중심은 중앙에서 지방으로 이동하였으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각 지방관청에서 다양한 승역이 계속되고 있었다.

요컨대 산성 수직 승군을 중심으로 한 지방 승군이 증가하는 반면 중앙정부에서 직접 조발하는 의승은 점차 代立·雇立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지방재정의 희생이 필요해지자 마침내 32년(1756) 영조는 의승방번전을 거두어 의승을 고립하도록 하였고, 그 수취 역시 지방에 전적으로 책임지우면서 지방재정의 부담을 덜어주려고 하였다. 지방의 각영에서는 남·북한산성의 의승역처럼 군현에 승군을 분정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군현에서도 승려 개개인의 인신까지 파악하는 등 지방의 승려 통제는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18세기 이후 승역의 수취는 주로 지방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결정은 중앙정부의 판단과 ‘均役’이라는 재정이념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結論

 

지금까지의 논의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의 승역은 조선전기에 비하여 질적·양적으로 확대된 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므로 이에 주목한 많은 연구가 이미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주로 국가의 승려 수탈이라는 관점에 초점이 맞추어졌을 뿐 조선후기 국가재정의 변화와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많은 논의가 진행되지 못했다.

조선전기 국가는 승려의 출가를 억제하여 避役層의 확대를 가능한 막고자 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역 부과대상 확대에 따라 국가는 전쟁 당시 활약했던 승군을 전쟁 이후에도 그대로 군사적으로 이용하였다. 이로써 山陵·營建 등의 工役에만 동원되던 승려들은 17세기 전반부터 산발적으로나마 군사로 활용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는 일괄적이고 직접적으로 승군을 조발하기보다는 불교계 내부의 질서를 이용해 명망 있는 고위 승려를 총섭 등으로 임명하고 이들로 하여금 승군을 募集하게 하는 방식으로 필요한 인원을 확보하였다.

17세기 후반 효종은 강력한 군비증강책을 시행하면서 義僧이라는 이름의 특별한 승군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효종 재위 전반, 南漢山城 정비와 군비 확장의 과정에서 이미 과도한 부담을 지고 있던 軍役 담당층을 대신하기 위해 승군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모집과는 달리 양계지방을 제외한 전국의 승려를 輪回分定하여 올라와 立番하도록 하는 義僧役이 시행된 것이다. 義僧은 바로 이렇게 윤회분정되어 立番하는 승군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되었다.

義僧役의 시행은 곧 중앙정부(軍營)-도-군현-사찰로 이어지는 직접적인 승군 조발체계가 성립했음을 의미한다. 중앙정부는 지역별 분정을 통해 南漢山城에 필요한 義僧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이러한 분정체제의 말단에는 사찰이 있었다. 당시 사찰은 토지를 공동으로 소유하였기 때문에 義僧이 일반적인 軍役담당자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승려의 人身을 계산하는 대신 사찰의 殘廢를 가늠하여 道-郡縣別 分定을 통해 義僧役을 수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앙정부의 직접적 義僧 調發은 肅宗代 전반까지 강화되었다. 그러나 三藩의 亂과 寧古塔回歸說 등 북방 정세에 대한 불안이 대두되면서 義僧役 역시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북방 정세에 발맞춰 18세기 전반 도성방어체계가 정비되고 외적이 도성으로 오는 길목의 주요 산성 역시 정비되었다. 지방 산성이 잇따라 축조되고 그에 따른 지방 승군의 수효가 늘어난 반면 균역법이 시행되면서 지방재정은 더욱 어려워졌다. 따라서 승려를 직접 上番시키는 義僧役에 대한 지방의 부담은 더욱 증가되었다. 결국 영조는 균역법의 보완 과정에서 기존에 관행화된 義僧의 代立을 인정하여 義僧의 上番을 폐지하고 이를 지방에서 돈으로 대납하게 하는 義僧防番錢制를 실시해 南·北漢山城의 義僧을 雇立하였다.

반면 지방 승군은 더 확대되었다. 지방은 승려의 호적 등재 등을 계기로 승려에 대한 통제력을 더욱 강화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체적으로 산성에 승군을 윤회분정하는 ‘地方 義僧’ 같은 승군역이 나타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승려 개개인의 인신을 파악하고 통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즉 승군을 관리하는 책임은 지방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승려의 부세 저항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승역을 보다 합리적으로 운용하면서도 均役의 이상을 지키기 위한 중앙정부의 의지에 의한 것이었다.

 


1) 『經國大典』 卷3, 禮典 度僧 “爲僧者 三朔內告禪宗 或敎宗試誦經(心經金剛經薩怛陀) 報本曺(私賤則從本主情願) 啓聞受丁錢(正布二十匹) 給度牒(過三朔者 族親隣近 告官還俗當差知 而不告者 幷罪)”

2) 車相瓚, 1947, 「朝鮮僧兵制度」, 『朝鮮史外史』, 明星社; 禹貞相, 1959, 「李朝佛敎의 護國思想에 對하여 - 특히 義僧軍을 中心으로」, 『白性郁博士頌壽記念佛敎學論文集』; 趙明基, 1981, 「朝鮮後期 佛敎」, 『韓國史論』4, 國史編纂委員會; 박용숙, 1981, 「조선조 후기의 僧役에 대한 고찰」, 『釜山大學校 論文集』31;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편, 『曹溪宗史 : 고·중세편』, 2004, 조계종출판사.

3) 呂恩暻, 1987a, 「朝鮮後期 大寺刹의 總攝」, 『嶠南史學』3; 呂恩暻, 1987b, 「朝鮮後期 山城의 僧軍總攝」, 『大邱史學』32; 李逢春, 2000, 「朝鮮佛敎의 都摠攝 제도와 그 성격」, 『사명당 유정: 그 인간과 사상과 활동』, 지식산업사; 손성필, 2013, 『16·17세기 불교정책과 불교계의 동향』,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4) 鄭珖鎬, 1974, 「李朝後期 寺院雜役考」, 『史學論志』2; 박용숙, 1981, 앞의 논문; 呂恩暻, 1983, 「朝鮮後期의 寺院侵奪과 僧契」,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대한불교조계종교육원 편, 2004, 앞의 책; 김상현, 2002, 「朝鮮佛敎史 硏究의 課題와 展望」, 『佛敎學報』39.

5) 승역의 분류에 대한 논문은 吳京厚, 2005, 「朝鮮後期 僧役의 類型과 弊端」, 『國史館論叢』107이 대표적이다. 오경후는 승역을 실제 승려들이 담당하는 일에 따라 분류하였으나 필자는 조발 방식에 따라 분류하였다.

6) 李光隣, 1962, 「李朝後半期의 寺刹製紙業」, 『歷史學報』17·18; 박용숙, 1981, 앞의 논문 ; 河宗睦, 1984, 「朝鮮後期의 寺刹製紙業과 그 生産品의 流通過程」, 경북대학교 석사학위논문.

7) 宋贊植, 1974, 「三南方物紙貢考(上)·(下)」, 『震檀學報』37·38; 金三基, 2003, 『朝鮮後期 製紙手工業 硏究』, 중앙대학교 박사학위논문.

8) 金炯基, 1990, 「朝鮮後期 契房의 설치와 운영」, 한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金三基, 2003, 앞의 논문.

9) 尹用出, 1984, 「朝鮮後期의 赴役僧軍」, 『釜山大學校人文論叢』26; 尹用出, 1989, 「18세기 초 東萊府의 築城役과 賦役勞動」, 『韓國文化硏究』2; 윤용출, 2007, 「조선후기 동래부 읍성의 축성역」, 『지역과 역사』21; 윤용출, 2009,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징발」, 『역사와 경계』73; 윤용출, 2011, 「17세기 후반 산릉역의 승군 부역노동」, 『지역과 역사』28.

10) 李章熙, 2000, 「임진왜란기 義僧軍의 활동에 대하여」, 『사명당 유정: 그 인간과 사상과 활동』, 지식산업사; 貫井正之, 2000, 「壬辰倭亂과 僧義兵將 四溟大師」, 『사명당 유정: 그 인간과 사상과 활동』, 지식산업사; 姜亨光, 2010, 「조선중기 불교계와 義僧軍」,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용태, 2012, 「임진왜란 의승군 활동과 그 불교사적 의미」, 『보조사상』37.

11) 김용태, 2012, 앞의 논문; 이종수, 2013, 「조선후기 승군 제도와 그 활동」, 『한국 호국불교의 재조명』, 불교사회연구소; 손성필, 2013, 앞의 논문.

12) 禹貞相, 1959, 앞의 논문; 禹貞相, 1963, 「南北漢山城 義僧防番錢에 對하여」, 『佛敎學報』1 ; 金甲周, 1984, 「正祖代 南北漢山城 義僧防番錢의 半減」, 『素軒南都泳博士華甲記念史學論叢』, 태학사; 金甲周, 1989, 「朝鮮後期의 僧軍制度」 『龍巖車文燮敎授華甲記念論叢朝鮮時代史硏究』, 新書院;; 정찬훈, 1998, 「南漢山城 義僧軍制의 成立과 運營」, 한국교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3) 김갑주는 南漢山城이 축성되는 인조 2년을 義僧제도 성립의 시점으로 보고 있으나 정찬훈은 수어청이 성립되는 인조 17년을 그 시점으로 보고 있다.

14) 최근에는 조선후기의 불교는 ‘수탈’과 ‘침체’라는 키워드에서 다르게 보려는 시도들이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주로 불교계 내부를 살펴보는데 초점을 맞추어 제도적 측면을 밝힌다는 면에서는 미진한 점이 있는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대표적으로 吳京厚, 2003, 「朝鮮後期 佛敎界의 變化相」, 『慶州史學』22; 吳京厚, 2011, 「朝鮮後期 佛敎政策과 性格硏究-宣祖의 佛敎政策을 中心으로-」, 『韓國思想과 文化』58 참조.

15) 『宣祖實錄』 권42, 26년 9월 8일 己未  

16) 『承政院日記』 55책, 인조 15년 1월 7일

17) 崔孝軾, 1986, 「仁祖代의 國防 施策」, 『東國史學』19-1.

18) 金友哲, 2001, 『朝鮮後期 地方軍制史』, 景仁文化社, 110~138쪽.

19) 『宣祖實錄』 권46, 26년 12월 3일 壬子

20) 『承政院日記』 229책, 현종 13년 9월 3일; 『承政院日記』 374책, 숙종 23년 11월 6일

21) 『承政院日記』 229책, 현종 13년 9월 3일

22) 인조 17년 赤裳山城을 수리하고 覺性에게 都摠攝을 제수하여 산성에 거주하게 하자는 비변사의 계청에서 笠岩山城의 전례가 나오기 때문에 笠岩山城에도 승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仁祖實錄』 권39, 17년 10월 8일 辛卯). 그 밖에 효종 3년(1652) 작성된 『海南大興寺節目』(현재 담양군 龍興寺 소장,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불교기록유산아카이브 사업단 제공)에도 전라도 삼산성의 승군을 언급하고 있어 17세기 전반 이미 전라도의 삼산성에 승군이 주둔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3) 임진왜란 시기 지리산 화엄사를 중심으로 활동한 浮休係 승군은 義僧軍의 다수를 이루었던 西山係 승군과는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이들 중 다수가 임진왜란부터 수군에 협력했는데 이들이 19세기 초까지 그대로 수군에 소속되어있었다. 그 자세한 내용은 統制營의 경우 『統制營事例』와 『增補文獻備考』에서 전라좌수영의 경우 『軍國總目』과 여수 興國寺에서 발견된 『禪堂修葺上樑記』, 『寂黙堂重創上樑文』, 『尋劍堂重建上樑文』 등에 승군 300여명의 명부를 확인할 수 있다.

24) 『朝鮮佛敎通史』 下篇, 史庫節目

25) 『承政院日記』 4책, 인조 3년 2월 13일 
    다만 함경도 승군이 모두 은광 채굴에 동원된 것은 아닌 것 같다. 상당히 후대의 기록이기는 하지만 『輿地圖書』에 따르면 함경도 端川의 승군은 마천령의 방어에 동원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는 은광 채굴에, 일부는 마천령 같은 주요 관방시설의 방어에 동원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26) 『承政院日記』 21책, 인조 6년 5월 18일 “上曰 僧人入城云 果皆死於賊乎 忠信曰 其半出去 其在者 則僧軍皆先死云矣”

27) 권내현, 2002, 「17세기 전반 對淸 긴장 고조와 平安道 방비」, 『韓國史學報』13,285~286쪽.

28) 『宣祖實錄』 권46, 38년 2월 23일 丁卯

29) 『承政院日記』 14책, 인조 4년 7월 22일

30) 전쟁 중에 승군이 수축한 婆娑山城에도 승군이 머물러 있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 곧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光海君日記』 重草本 권24, 2년 1월 11일 壬子의 기사에 무너진 성을 다시 수축하고 장수를 보내라는 명이 있었으나 이후 연대기 자료에서 婆娑山城에 관한 내용을 찾을 수 없다.

31) 羅庚峻, 2012, 『朝鮮 肅宗代 關防施設 硏究』, 단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2~23쪽.

32) 본래 都摠攝과 摠攝은 고려시대부터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는 고승들에게 부여하던 일종의 명예직함이며, 조선초기까지 지속되었다. 『朝鮮佛敎通史』에 기재된 조선초기의 고승 비문을 살펴보면 이미 총섭이라는 단어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의 총섭은 군사적 기능을 가진 이들이 아니라 여러 승려집단을 신앙적으로 이끌어 가는 명예직으로서의 총섭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로는 승려를 동원하고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치되어 그 성격이 완전히 변하였다. 呂恩暻, 1987b, 앞의 논문, 51~56쪽 참조.

33) 총섭의 권한에 대해서는 呂恩暻, 1987b, 앞의 논문 참조. 비록 18세기의 자료기는 하지만 필자가 확인한 『龍門寺除役勿侵完文』(규장각 소장, 奎18943)에는 南漢山城의 도총섭이 사찰의 승역을 면하도록 해주는 완문을 발급해주었다는 내용이 있어 도총섭이 불교계 내부에서 실질적인 권한을 가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朝鮮佛敎通史』에서의 이능화의 지적처럼 지나치게 도총섭 등의 승직이 남발되어 후대에는 그 권한이 약해졌다.

34) 양은용, 2003, 「임진왜란 이후 佛敎義僧軍의 동향: 全州 松廣寺의 開創碑 및 新出 腹藏記를 중심으로」, 『열린정신 인문학연구』4; 김용태, 2009, 「조선후기 華嚴寺의 역사와 浮休系 전통」, 『지방사와 지방문화』12-1.

35) 『宣祖實錄』 권71, 29년 1월 28일 乙未

36) 『承政院日記』 178책, 인조 3년 2월 2일

37) 지방의 산성이나 鎭의 승장을 차출할 때는 營이 관여하기 마련이었는데, 이것이 폐단을 많이 일으킨다 하여 직접 차출하여 備邊司에 보고하도록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備邊司謄錄』 4集, 숙종 17년 5월 3일 格浦僉使節目 “行殿 曾有守護僧將是白去乎 僧將若不擇人 必有侵虐僧徒之患 巡營 差定僧將之際 其弊不貲 自本鎭 擇其良善解事之僧 報備局 差定以爲句管山內寺刹之地爲白齊”)

38) 『備邊司謄錄』 4집, 숙종 21년 6월 23일

39) 『仁祖實錄』, 권39, 17년 10월 8일 辛卯

40) 『承政院日記』 55책, 인조 15년 1월 7일
    이 기사에서는 각성을 笠岩山城의 예에 따라 적상산성에 승군을 모집하게 하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이를 보아 이미 입암산성에서도 모집의 방식으로 승군을 조발했음을 알 수 있다.

41) 『承政院日記』 178책, 현종 4년 4월 16일 “備邊司啓曰, 仁川紫燕島設鎭處, 往來船隻 例泊於太平岩 自此下船 由一條細路 入往本島 而其路一日之內 僅得兩度相通 人馬不得竝行 蓋潮滿則不通而然也 此路石築而稍使高廣 然後可免緩急軍馬阻絶之患 招問本島萬戶南得華 則若得役丁二百餘名 赴役四五日 可以完了云 此時民丁 決不可調用 畿甸僧軍  准此數 趁五月初旬前 調發赴役 似爲便順 以此意分付道臣 使之及期分定以送 且僧人文哲 鳩集財力 官廨五十餘間 一時丹靑 其勞不可不償 故曾於己丑年 啓稟此意 已給通政空名帖 使之仍令守護其寺 而若不重其事 則僧徒必不肯募入於絶島生利艱窘之處文哲 稱以僧將 仍給僧將輩所用長印 以爲終始守寺之募僧之地 何如 答曰 允”

42) 『承政院日記』 324책, 숙종 13년 9월 22일

43) 후대의 일이기는 하지만 華城 축조 이후 배치된 용주사의 승군도 南·北漢山城의 義僧과 같은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承政院日記』 1799책, 정조 22년 10월 19일 기유 “龍珠寺 旣置摠攝 團束僧徒 付之外營 間試砲放 此與南北漢僧卒無異 從附近使之協守於禿城 以爲計垜加派之地是白乎旀”

44) 義僧役이 성립한 후 輪回立番하는 南·北漢山城의 義僧 외에 義僧이라는 명칭이 보이는 경우는 단 한가지로 사고를 지키는 승군의 거처를 義僧廳이라는 부르는 것이다. 사고의 승군들은 『實錄』과 『璿源錄』 등의 중요한 서책을 수호하는 역할을 하는데 그 성격상 南·北漢山城의 義僧과 마찬가지로 국가 및 국왕과 관련된 것을 수호한다는 의미에서 특별히 義僧廳이라는 명칭을 붙인 것이라고 생각된다.

45) 『承政院日記』 324책, 숙종 13년 9월 22일 “李師命啓曰 上年秋 江華留守申晸 以江華義僧事 陳達於筵中 其時領敦寧金壽恒 以爲當初南漢築城時 以僧徒赴役 故仍爲設置七寺 以諸道僧人 分定入番 而今此江都形勢 與南漢有異 外方義僧入番之際 其弊不貲 姑以京畿屬邑及 …… 以此意馳報備局 而群議皆以爲 南漢義僧 爲弊已極 今又設置於江都 無益守護 而反有其害云大臣今方入侍 更爲定奪分付 何如 上曰 此事 如何 南九萬曰 小臣 亦見其公事 而南漢義僧 雖分定八路 貽弊猶多 今此延白及南陽豐德等 皆是野邑 僧徒本小 以數小僧人 輪回入番 必不得力 而徒爲貽弊之歸 臣意則決不可爲矣”

46) 『承政院日記』 346책, 숙종 17년 윤7월 7일

47) 지금까지 南·北漢山城의 義僧役은 주로 숙종 40년(1714)에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왔다. 즉 승군 자체가 제도화 된 것은 南漢山城이 완성된 인조 2년(1624) 이후이며 그 후 原居僧을 중심으로 운영되다가 六道의 군현과 사찰에 상경 立番할 승려를 분정한 것은 北漢山城이 완성된 숙종 40년(1714)이라는 것이다.(金甲周, 1989, 앞의 논문) 이러한 주장은 義僧役의 시작에 관한 사료가 없는 상태에서 『정조실록』 등 18~19세기의 여러 사료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기사를 토대로 한 것이다. 이 사료들에서는 南漢山城의 축조 당시 동원된 승군과 南漢山城의 義僧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현실을 살펴보면 사실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서 이미 언급했지만 즉 義僧役은 南漢山城 築城役과는 관계없는 별개의 역으로 시행되었으며, 또한 北漢山城 義僧役이 성립되는 숙종 40년(1714)보다 훨씬 이전에 이미 정착하였던 것이다.

48) 車文燮, 1976, 「守禦廳硏究(上)」, 『東洋學』6, 70~73쪽.

49) 『仁祖實錄』 권39, 17년 12월 10일 壬辰

50) 『仁祖實錄』 권43, 20년 3월 13일 壬午

51) 『承政院日記』 144책, 효종 8년 1월 9일 “泰淵曰 水原事 小臣到任之後 庶可周旋爲之 而臣曾爲守禦使從事官時見之 則前者義僧之聚集於城內者 爲其南漢之守護 而近來義僧之自鄕聚會之事 不如往日 故將無以守護云 是可慮也外方諸事 以僧爲軍者 其數甚多云 以此充定於義僧 則似爲便當矣 臣欲言此意于守禦使處矣 上曰 義僧事 亦有貽弊者 甚多 卿其往見守禦使 相議爲之 可也”

52) 『仁祖實錄』 권46, 23년 9월 6일 甲寅

53) 송양섭, 2007, 「효종의 북벌구상과 군비증강책」, 『韓國人物史硏究』7.

54) 송양섭, 2007, 앞의 논문, 177~178쪽.

55) 송양섭, 2007, 앞의 논문, 182쪽.

56) 『承政院日記』 244책, 숙종 원년 1월 19일

57) 『備邊司謄錄』 6집, 숙종 40년 9월 27일
    이 기사에서 南漢山城의 義僧 수는 400여명 정도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수는 北漢山城에도 義僧이 立番하게 됨에 따라 약간 조정되었다. 『重訂南漢誌』와 『北漢誌』의 기록에 따르면 숙종 40년 이후 南漢山城의 義僧은 356명, 北漢山城의 義僧은 350명으로 南漢山城의 義僧은 40~50명 정도가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南漢山城의 경우 원거승 138명이 있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감액은 감당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58) 元居僧이라는 표기도 존재한다.

59) 『承政院日記』 244책, 숙종 원년 1월 19일

60) 『承政院日記』 168책, 현종 2년 6월 17일

61) 『承政院日記』 244책, 숙종 원년 1월 19일 무인 “錫胄曰 ㉠南漢城七寺 各分屬八道 先臣 爲守禦使時 加一寺爲八寺 ㉡使各道義僧 自備糧立番于山城之寺 其役甚苦 ㉢而湖南義僧 分爲六番 某月立某寺 一年一寺所立之僧 常不下百餘名 ㉣一如軍士上番之例 而上番義僧之來也 受其道各寺之資 送義僧之役 其實 一道之僧 皆當之也” (밑줄은 필자)

62) 『承政院日記』 322책, 숙종 13년 5월 16일

63) 呂恩暻, 1987b, 앞의 논문, 79~83쪽.

64) 실제 각 지역의 읍사례 호적색조에도 구호구 총수에 승호구를 따로 파악하는 경우가 자주 등장한다. 예컨대

65) 『英祖實錄』 권81, 30년 4월 29일 戊申 “湖南釐正使李成中復命 書啓 略曰 ... 異端吾儒之所深斥 而我國僧徒不然 不過如應役之平民 編伍之軍卒耳 其所愛護亦宜如平民軍卒 而南漢義僧上番 爲僧徒苦弊 本道則大寺四五名 小寺亦一二名 而一名資送幾至百金 以一寺而每年責四五百金之費 彼草衣木食之類 安得不擔鉢離散乎 南漢守臣 必以八道義僧之上番保障 意有所在云 而兩廳軍官卒隷 皆以各邑鄕居者收米布 以居在城內者代立 則何獨於義僧而不可用此例耶 自今定式 義僧勿爲上番 每名代送錢十六兩 名以義僧防番錢 令各邑收合一如軍布之規 則可除僧徒之大弊”

66) 『備邊司謄錄』 12집, 영조 32년 1월 12일 南北漢山城義僧防番錢摩鍊別單

67) 『備邊司謄錄』 12집, 영조 27년 2월 26일

68) 『備邊司謄錄』 7집 , 경종 3년 9월 11일

69) 조선후기 승려의 토지 소유에 대해서는 金甲周, 1981, 「朝鮮後期 僧侶의 私有田畓」, 『東國史學』15·16을 참조.

70) 국가에서도 승역을 이유로 사찰의 토지 소유를 인정하였다. 본래 승려 간의 재산 상속은 금지되었으나 현종은 승려의 혈족뿐 아니라 승려 간의 재산 상속 역시 인정해 주었으며 더불어 상속자가 없을 경우 그 재산을 사찰에 주어 역에 이바지하도록 하였다. 
     『新補受敎輯錄』 권1, 戶典 雜令 “僧人田畓 有四寸以上親 則與其上佐 折半分給 無上左無四寸者 則屬公其田畓 仍給本寺 以助僧役 (康熙甲寅承傳)”

71) 洪鐘佖, 1977, 「三藩亂을 前後한 顯宗 肅宗年間의 北伐論 - 特히 儒林과 尹鑴를 中心으로」, 『史學硏究』27, 91~96쪽.

72) 홍성욱, 2010, 「조선 肅宗대 南漢山城 정비와 外城 築造의 의미」, 『東學硏究』29, 52~55쪽.

73) 배우성, 1998, 『조선후기 국토관과 천하관의 변화』, 一志社 64~70쪽.

74) 이상의 내용은 이근호, 1998 「18세기 전반의 首都防衛論」, 『군사』37; 이근호, 2012, 「도성수비체제의 확립과 지취체계의 조정」, 『한국군사사』7, 육군본부 ; 羅庚峻, 2012, 앞의 논문 참조.

75) 숙종대 수축된 산성을 살펴보면 서북방선상에서 황해도의 平山 太白山城, 海州 首陽山城, 殷栗 九月山城, 載寧 長壽山城, 瑞興 大峴山城 등 海西 五山城이, 평안도 龍岡 黃龍山城, 寧邊 鐵甕山城, 鐵山 雲暗山城, 龍川 龍骨山城, 慈山 慈母山城, 昌城 當峨山城이 축성되었다. 남방 방어선의 경우 숙종 원년(1675)의 全州 威鳳山城과 星州 禿用山城 축성을 시작으로, 숙종 12년(1686)의 公州 雙樹山城이 수축되었고, 숙종대 후반에는 東萊 金井山城, 南原 蛟龍山城, 聞慶 鳥嶺山城, 淸州 上黨山城이 축성·정비되었다.

76) 徐台源, 1999, 『朝鮮後期 地方軍制硏究 - 營將制를 중심으로』, 혜안, 215~216쪽.

77) 유재춘, 2012, 「조선후기의 축성」, 『한국군사사』14, 436쪽.

78) 『續大典』 권4, 兵典 外官職

79) 『肅宗實錄』 권54, 39년 8월 11일 丙戌

80) 『增補文獻備考』 권118·119, 兵考10·11 州郡兵 1·2

81) 『承政院日記』 322책, 숙종 13년 5월 16일 “趾善曰 ... 慶尙全羅兩道 分殘盛元定南漢義僧 而且以各邑僧徒 守直於道內山城 亦如南漢義僧之例 公洪黃海京畿等道 則雖有山城 勿定守直之軍 而南漢義僧 與造紙署擣砧軍 磨鍊分定 當初均役之意 實非偶然 若以有山城而許減義僧 則各道有山城之邑 擧將紛紜爭請 朝家 將何以防塞其路耶” (밑줄은 필자)

82) 『南原縣牒報移文成冊』 丙辰年 9月 初3日 報巡營 (『韓國地方史資料叢書』1, 여강출판사,  471~472쪽) “爲相考事 本城重修之初 儀僧四十名 定額分排於各邑 而中年減十名 以餘存三十名 每朔三名式輪回立番是如乎 年前因僧統所告 自官門又減十名爲乎矣 本懸十名內一名 光州九名內三名 和順三名內一名 光陽五名內二名 谷城三名內一名除減 求禮一名專減 而每朔二名立番 則番役苦重 儀僧輩難堪稱寃是如爲去乙 詳問其物情 則僧將代將所供鹽醬菜蔬茸藿等種雜費 自各其寺備納於儀僧 使之立番責應 而在前段三四人合力之 故番中應役不甚偏重是遣 醬庫軍器庫守直 及城內禁伐等事 分力擔當是如可 今則僧小役煩 晝夜長立 其爲勞苦無異於南北漢立番” (밑줄은 필자)

83) <사료 E>에 나오는 각 고을의 義僧 정액수를 「南北漢山城義僧防番錢摩鍊別單」과 비교해보면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84) 『承政院日記』 425책, 숙종 31년 6월 9일

85) 『備邊司謄錄』 8집, 영조 5년 4월 19일 邊山摘奸手本單 啓目 “所謂僧將 定給義僧 每朔義僧 二名 邊山四寺 輪回定送 僧將無料米 故四寺諸僧每 年收給四十斗米 以成規例 以此僧徒 尤爲難支”

86)  『備邊司謄錄』 11집, 영조 18년 7월 6일 “又所啓 頃者翰林趙明鼎 以東萊赤裳山城,璿史藏護重地 僧徒凋殘 義僧復舊事陳達 又以各邑 僧刷還之弊 請嚴飭禁斷矣 義僧革罷屬耳 朝令不可顚倒 今姑置之 各邑僧徒刷還事 別爲嚴飭何如 上曰 依爲之 而山城事體尤重 毋得侵漁僧徒之意 亦爲申飭可也”

87) 『南原縣公事』 4책, 丁巳年 4월 6일

88) 『備邊司謄錄』 4집, 숙종 13년 5월 17일

89) 『備邊司謄錄』 5집, 숙종 31년 6월 10일

90)  『承政院日記』 510책, 숙종 44년 윤8월 5일 “行判中樞府事李濡上書曰 … 所謂義僧三百五十名 各各立役 徵以除番之錢云者 臣曾爲守禦使時 已知南漢義僧上番 爲外方莫大之弊 每欲變通而未果矣 … 各除其立番之規 參酌折定代錢 問其便否於外方 則僧徒擧皆稱便 守令監司皆以爲可行 少無驛騷之事“

91) 『備邊司謄錄』 7집, 경종 3년 8월 4일; 『備邊司謄錄』 5집, 경종 3년 8월 10일; 『備邊司謄錄』 5집, 경종 3년 9월 11일

92) 『備邊司謄錄』 8집, 영조 5년 10월 26일 “副提調趙顯 命所啓 北漢義僧有弊 判府事閔陳達變通 捧錢雇立矣 近者槐山幼學成重殷 以捧錢有弊 上疏請復義僧 廟堂覆啓許施 而臣意則旣罷之義僧 不可復古 自各其官捧納 多有弊端 此則防塞 令僧將·住將等 每年次知捧納 則似爲便好矣 提調尹淳曰 僧徒異於平民 斂錢之政 至及於緇流 殊涉未安 且義僧之設 本爲防守山城,則捧價雇立 亦涉疎虞矣 上曰 重臣之言是矣 依成 重殷疏 回啓分付可也                     ”

93) 『備邊司謄錄』 9집, 영조 8년 5월 28일

94) 『備邊司謄錄』 12집, 영조 27년 2월 26일 “又所啓 … 而其捧紙之際 不以束數 而以紙重作斤捧用 故其間情債所費甚多 不獨兵水營如此 各邑亦不無其弊 此不可不變通者 而雖以義僧言之 防番則爲十 五兩 而近年以來 南北漢僧人 其寺中酬應接對等事 皆令義僧擔當 故義僧一次上番 所費至於三十兩之多 以此僧怨朋興 皆願納防番錢 其難堪呼冤之狀 於此可知 此則分付南北漢 各別善處 俾無各 道僧怨之弊宜矣 敢此仰達 上曰 依爲之 義僧之弊熟知 其令備局稟處 至於各營紙役事 尤爲無據 日後御史廉問時 復有此事 當該兵水使 施以贓律 以此嚴飭

95) 『備邊司謄錄』 12집, 영조 27년 8월 1일  

96) 『備邊司謄錄』 12집, 영조 31년 8월 17일

97) 『備邊司謄錄』 12집, 영조 32년 1월 12일

98) 윤용출, 1998, 『조선후기의 요역제와 고용노동』, 서울대학교 출판부, 169쪽.

99) 鄭演植, 1982, 「17·8世紀 良役均一化 政策의 推移」,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00) 李  旭, 2002, 『朝鮮後期 魚鹽政策 硏究』,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9~211쪽.

101) 鄭演植, 1989, 「均役法 施行 이후의 지방재정의 변화」, 『震檀學報』67, 34~36쪽.

102) 金友哲, 1990, 「18세기 前半 私募屬의 實態와 그 性格」,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9~32쪽.

103) 『備邊司謄錄』 12집, 영조 33년 5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