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3일차 아침
자전거로 출근하는 사람들
택시를 타고 남당으로 향한다.
베이징에서 택시는 꽤 매력적인 교통수단이다. 일단 버스는 엄두가 안 나고...
(나중에는 시도해 볼 생각이 있긴 하지만)
지하철은 힘들다. 택시는 기본요금이 우리 돈으로 2천 원이 안 되는데 뭐 메타기 올라가는 속도도 적절해서
자금성 뒤쪽에서 타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바가지만 안 씌운다면 꽤 탈 만한 것 같다.
가는 중간에 5.4운동 기념비가 보인다.
5.4 운동이야 워낙 중요한 것이니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뭐 후에 다시 언급하겠다.
천안문 광장을 지나간다.
천안문은 이따가 볼 것이고
드디어 남당 도착
남당에 들어가는 문
왼쪽은 마테오 리치, 오른쪽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참고로 이전 여행기나 가이드북을 보면 이 동상들이 성당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리가 갔을 때는 이렇게 문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 사이 정비사업이 있었던 듯하다.
마테오 리치의 모습
이탈리아 출신의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는 천주교 동양 선교의 알파요 오메가 같은 인물이다.
1552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마테로 리치는 예수회에 입회하고 해외 선교를 위해 인도에 가 있다가
이후 중국 선교의 명을 받고 마카오로 간다. 언어 천재였던 마테오 리치는 마카오에서 중국어와 한문을
습득하고 최초로 중국에 로마 가톨릭을 전교하고 천주교라는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1601년 북경에 온 마테오 리치는 만력제를 만나 천주교회 설립 허가를 받고
1605년 최초의 성당을 세우는데 그것이 바로 남당이다. 공식명칭은 선무문천주당.
서광계 등과 교류했던 마태오 리치는 천주실의를 저술하고 곤여만국전도와 서양식 역법,
유클리드 기하학 등 많은 서양 과학기술을 중국에 전수한다. 그 후 지도와 역법은 조선에도 건너간다.
그러나 숙원이던 천주교 전파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결국 마테오 리치는 죽어 북경에 묻힌다.
그래도 그가 뿌린 씨앗은 후배 예수회 선교사들의 바탕이 되었다.
덕분에 조선에는 북학이 있게 되었다.
반대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의 동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동양 선교자들의 대명사이자 이들의 수호성인이다. 성 이냐시오 로욜라와
함께 예수회의 창립멤버이기도 한 그는 그를 포함한 6인의 사제와 함께 동양 선교에 나선다.
바스크 출신인 그는 인도 고아에서 선교를 하다가 일본 선교에 나선다. 가고시마와 야마구치 지역에서 선교하던 그는 이후 수많은 일본인들을 천주교로 전도했다. 이후 중국 선교를 위해 중국 입국을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광동성 앞 한 섬에서 열병으로 사망한다. 동양의 천주교인들에게는 상징적인 성인이다.
북경시중점문물보호단위 남당이라는 현판
현재는 우리의 사적 격인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로 승격되었다.
성당의 원래 문으로 보이는 문이 보인다.
이제 들어간다.
다른 성당에서도 흔히 보이는 성모동산이 보인다.
루르드 성모상이다.
바로 옆에 남당이 보인다.
마테오 리치가 만력제에게 허락을 구해 1605년 세웠던 그 남당이다.
공식명칭은 선무문 천주당(쉬안우먼 천주당). 북경교구의 주교좌 성당이다. 그러나 지금은
사실상 행정적 기구의 역할만 하고 있다. 우리에겐 남천주당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605년 완공되어 황제의 사액까지 받은 남당은 청의 입관과 북경 점령 이후에도 큰 관심을 받았다.
성당뿐만 아니라 도서관과 천문대까지 갖춘 남당(난탕)은 당시 중국에 들어왔던 서양 문물의 집결지였다.
순치제는 24번이나 남당에 친림하였으며 강희제, 옹정제, 그리고 천주교 포교를 금지했던 건륭제도
남당에 대해서는 재정적 후원을 계속하였다.
프랑스 루르드를 순례한 사진
루르드 성모 신심이 강한 것 같다.
입구 모습
전면
1605년 마테오 리치가 지은 남당은 작은 규모의 중국식 건물로 십자가 하나가 걸려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650년 독일인 선교사 아담 샬이 순치제의 후원을 얻어 대규모 재건축을 하였고,
1703년 강희제의 후원으로 완전한 유럽식 건물이 되었다. 그 후 북경의 대지진으로 붕괴되었다가
1730년 옹정제의 후원으로 더욱 크게 재건되었다. 1775년 화재로 파괴되었으나 건륭제가 은 1만 냥을
하사해 재건하였다. 그러나 아편전쟁의 와중에는 도광제에 의해 몰수되기도 했고 급기야 1900년에는
의화단 운동으로 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가 1904년 재건되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건물은 1904년의 건물로 아쉽게 북학자들이 보았던 그 당시의 건물은 아니다.
문화혁명 이후로는 성당으로서의 기능이 완전히 사라져 공장으로 사용되다가
1980년대에 들어 비로소 성당으로의 기능을 회복하였다.
바로크풍의 건물로 벽돌건물이다.
남당 정면
청의 북경 점령 이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효종)도 북경에 들어오는데
이 때 소현세자가 여기서 아담 샬을 만난다.
그 떡밥으로 소현세자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려고 해 인조에게 미움을 받고
암살당했다거나, 심지어는 세례를 받았다는 이야기까지 있는데 사실무근이다.
소현세자가 남당을 찾은 건 사실이나 그가 북경에 머문 것은 채 1달이 되지 않는다.
청 조정이 과시용으로 조선의 포로들에게 북경을 잠시 보여준 후, 명이 멸망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시켰다고 생각해 금방 조선으로 되돌려 보냈던 것이다.
순치제가 24번이나 왔을 정도로 관심을 가졌으니 소현세자도 관심을 가졌을 법하지만 그가 여기 온 횟수나 머문 기간으로 보아 서양 학문을 완전히 받아들이기엔 어림없이 부족하다. 선물을 받아 온 정도겠지.
무엇보다도 서양의 근대화가 종교의 극복을 전제로 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된다. 소현세자가 본 건
계몽주의자들이 타도한 천주교인들이지 서양 근대화에 앞장선 합리주의자들이 아니다.
여튼 남당(난탕), 남천주당은 조선과 관련이 깊은 곳이다. 홍대용이 북경에 사신 일행으로 왔을 때
여기서 서양 문물을 접한 것이 그의 을병사행록에 나온다. 여기서 홍대용은 할렐슈타인이라는
독일인 선교사를 만나고 파이프 오르간도 접해 보는 등 특별한 경험을 하고 돌아간다.
그 후 이덕무, 박지원 등 북학파라고 분류되는 이들은 모두 이 남천주당을 거쳐갔다.
그런데 모든 조선인들이 호의적이진 않았던 것 같다. 홍대용이 남천주당을 방문하기 전에
여길 왔었던 조선인들은 이단이라고 침을 뱉는 등 횡포를 부렸다고 한다.(...)
조선인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인 이승훈이 몰래 북경에 와 세례를 받은 곳도 바로 이 곳이다.
비록 그는 배교 혐의 때문에 시복시성의 대상에서 제외되고 있지만...
성당 전면의 상부
맨 위에 기적패에 나오는 마리아 십자가가 보이고 아래에 교황의 삼중관이 들어간 화려한 문장이 보인다.
가운데 사제들의 출입구 부분
화려한 조각이 보인다.
용케 지금까지 버텼다.
입구의 안내 문구
북경 시내에서 유일하게 라틴어와 영어 미사를 보는 곳이 이곳이다.
성당 입구 좌우에는 비석이 각각 서 있는데
안내판도 없고 훼손도 심해 알아볼 수가 없다.
설명문 좀 써 놓지...
이수에 용 무늬가 보인다.
한백옥으로 만들었는데... 황실과 관련된 건 분명해 보이는데 뭔지 알 수가 없어 답답하다.
반대편 비석
마찬가지다.
성당 내부로 보인다.
성수통이 보인다. 뭐 사도좌의 사도전승을 받지 못한 주교나 사제가 축성권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쪽의 성수반
고해소
있을 건 다 있다.
성당 내부
일반적 성당과 비슷하다.
신도 몇몇이 기도를 하고 있다.
약간 측면에서 찍은 사진
측면 회랑 부분
기둥의 아치 부분
14처도 있다.
제대 부분
십자고상과 감실 위에는 성모 성화가
좌우로는 천사성화가 걸려있다.
신기하게 50년대 이후 교황청과 교류가 끊겼는데 제대의 위치 같은 걸 보면 트리엔트 미사가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현행 미사 방식을 따르는 것 같다.
제대 전경
오른쪽의 제대
예수성시상이 서 있다.
야소라는 글자가 보이는 게 재밌다.
반대편 소제대에는 성 요셉상이 있다.
동당에서도 그렇고 성 요셉에 대한 신심이 꽤 있나보다.
신자들의 자리
회랑
출구 방향
보통 성당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은 안 보이고 현대적 악기만 보인다.
2층 부분
나름의 스테인드글라스도 있다.
반대편
아래에서부터 몇 개를 살펴보면
수태고지
성모자
성탄
성모몽소승천
예수의 죽음
성모의 탄생
성당을 나왔다.
밖에 십자가와 M자를 겹쳐 놓은 마리아 십자가가 보인다.
돔 부분
여기도 성물방이 있다.
진짜 있을 건 다 있다.
하긴 우리가 쓰는 성물의 상당 부분이 메이드 인 차이나인 걸 생각해보면
중국인 복장을 한 성모자상이 특이했다.
한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남천주당 답사가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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