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3일 (천안문광장)

同黎 2015. 8. 31. 21:22



선무문(쉬안우먼)역

동당 바로 앞에 있다. 이제 천안문 광장으로 간다.


무슨 한류 콘서트를 하나보다.

참여가수가 꽤 화려하다.


환승하는 서단(시단)역 도착


여기서 1호선을 타고 천안문동(텐안먼둥)역에서 하차


어제도 왔었던 역이다.

와서 보니 천안문 근처가 공사 중이다.


모택동의 사진은 보이는 것 같은데


그 좌우에 있는 글씨는 안 보인다. 좀 실망이다.


무슨 공사인가 했더니 9월 3일부터 있을 중국의 항일전승절 기념 열병식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유난히 강도 높은 검문은 그것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저 하늘색 국기는 알고 보니 피지 국기였다.

피지 대통령이라도 방중했나보다.


본래 베이징 황궁으로 들어가는 제2문이었지만 (제1문은 사라진 대청문)

지금은 사회주의 공화국의 상징물이 되었다.

그래도 꽤 오래된 건물이다. 본래 명나라의 승천문이었으나 이자성의 난으로 불탄 것을

청 순치제 때 다시 지은 것이다. 300년은 더 된 건물이다.

중화민국 시절에는 마오쩌둥 사진 대신 장개석(장제스)의 사진이 있었다고 하는데,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에는 잘 알 듯이 모주석의 사진으로 교체되었다.


전승절 행사 기념물들이 준비가 되어 있다.


국가박물관을 향한 장사진이 보인다.

역시 국가박물관을 보려면 아침 일찍 한 30분 전에 가서 줄을 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쪽의 줄도 만만치 않다.

역에서 내리자마자 천안문광장으로 가는 길에 1차례 보안검색을 지나고

광장으로 가는 1개 밖에 없는 횡단보도에서 걸려 30분 정도 넘어가지 못한다.


이유는 그 많은 사람을 검색하는 보안검색 때문이다.


아 사람이 이렇게 많으면 2개라도 해놓지 달랑 1개만 설치해 놓아서 이게 뭐냐


계속 조금씩 전진하며 기다리는 중


경찰이 횡단보도를 통제하고 신호와 관계없이

반대편 검색대에서 수용 가능할 정도의 인원만 들여보내고 있다.


어느 정도 횡단보도와 가까워지니 모주석기념당 뒤로 정양문이 보인다.

정양문은 북경성의 남쪽 정문으로 문 자체와 앞의 전루(방어용 망루)로 구성되어 있다.

흔히 전문(前門)으로 더 많이 불리는 문이다.

1900년 의화단 운동 당시 전투로 문루가 소실되었고 1914년 문루를 재건하였다.

이자성의 난에서 불타지 않았던 것인데 안타깝다.

원래 저 정양문에서 천안문 광장까지 걸어보려고 한 것인데 거의 불가능했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다가온다.


보이는가 이 사람들을

이런 상태이다. 이렇게 더운 날씨에 많은 사람과 함께 30분 이상을 서 있었다.


건너편으로 보이는 모주석기념당

저기도 가볼까 했는데 인원을 보고 포기했다.

모택동의 시신이 엠버밍 처리 되서 영구보존되고 있는 곳이다.


인민영웅기념비가 보인다.

저기에도 근처까지만 접근이 가능할 뿐 가까이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유는 아래에 설명하겠다.



계속 기다리며 사진만 찍는 수 밖에


국가박물관 전경

어제는 저기, 오늘은 여기서 줄을 서는구나


이렇게 한꺼번에 건넌다.

우리 차례가 거의 다 되었다.


드디어 길을 건넜다.


이번에는 보안 검색대가 기다리고 있다.

한 10분을 기다려서


드디어 천안문 광장 진입 성공

이것이 거의 1시간을 잡아먹을 줄은 몰랐다.


모주석기념당


여기서 보이듯이 인민영웅기념비 근처에는 철책이 쳐져있다.

1989년 2차 천안문 사태(천안문 6.4 항쟁) 당시 항쟁파의 주요 거점이며 상징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1차 천안문 사태 때도 마찬가지였는데, 좌파와 주자파를 막론하고 존경받는 주은래(저우언라이)의 글이 새겨져 있는 곳이며, 여기 기록된 8가지 항쟁은 대부분 중국 인민의 존중을 받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1989년 이후 인민영웅기념비 근처로는 접근이 불가능해졌고, 아직도 항쟁 당시의 총흔이 남아있다고 한다.



인민영웅기념비에 새겨진 8가지 사건은 다음과 같다.

1. 1838년 1차 아편 전쟁

2. 1851년 태평천국운동

3. 1911년 신해혁명의 우창봉기

4. 1919년 5.4운동

5. 1925년 5.30 사건 (상해에서 일어난 반일반제운동)

6. 1927년 난창봉기

(남창봉기. 중국 인민해방군의 창립으로 여겨지는 1차 국공내전으로 이어지는 공산주의자들의 봉기)

7. 1931년 항일전쟁(중일전쟁)

8. 1949년 장강도하 (홍군이 양자강을 건너 국민당군을 이긴 사건)


앞면에는 모택동(마오쩌둥)의 친필로 인민영후 영수불후라고 써 있고

뒷면, 즉 천안문을 바라보는 면에는 주은래(저우언라이)의 친필로 아래와 같이 써 있다.


인민영웅기념비
3년 동안 일어난 인민 해방 전쟁과 인민 혁명 때 희생된 인민 영웅들은 영원히 잠들어도 불후하리라.
30년 동안 일어난 인민 해방 전쟁과 인민 혁명 때 희생된 인민 영웅들은 영원히 잠들어도 불후하리라.
1840년부터 내외의 적에 대항하고 민족의 독립과 인민의 자유와 행복을 위해 희생된 인민 영웅들은 영원히 잠들어도 불후하리라.

1949년 9월 30일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전체 회의 건립.


너머로 모주석기념당도 보인다.

광장에서 접근은 어려운 듯하다.


엄청난 크기와 수를 자랑하는 감시카메라들

천안문 광장에서 티벳이나 위구르의 독립을 요구하는 분신, 테러 등이 이어져 감시가 삼엄하다.


드디어 천안문을 정면에서 본다.


국기게양대와 함께 보이는 천안문

마오의 중국혁명은 누군가에겐 지옥이었고 누군가에겐 희망이었다.

중국어조차 할 줄 몰랐던 60년대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은

스탈린 대신 마오에게서 희망과 아이디어를 받기도 하였다.

중국 혁명은 참 여러가지 생각을 가지게 해준다.


천안문 광장을 이야기할 때는 2번의 천안문 사태를 꼭 함께 봐야 한다.

1차 천안문 사태는 1976년 마오쩌둥 체제 말기의 사건으로 정권의 말기적 상황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주은래(저우언라이) 총리의 사망으로 이를 추모하는 시민들이 천안문 광장의 인민영웅기념비로

몰려가 행진을 하고 헌화를 하였는데, 당국이 이를 가로막고 반발하는 시민들을 반혁명세력으로

규정한 뒤 당시 부주석이었던 덩샤오핑(등소평)에게 책임을 물어 그를 실각시킨다.

후일 이 사건은 재평가되고 이른바 사인방의 횡포를 잘 보여주는 사건이 되었다.

그러나 권력을 잡은 등소평(덩사오핑)은 같은 장소에서 더 심한 행태를 보여준다.


제2차 천안문 사태는 6.4 항쟁이라고도 불린다.

물론 중국 공산당 정부가 이를 항쟁으로 인정할 기미는 적어도 30년간은 없을 것이다. 

1976년 마오의 사망 이후 권력을 주자파인 덩샤오핑(등소평)에게 넘어간다. 그의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의 빠른 경제성장을 가져왔지만 동시에 지역간, 계급간 불균형을 심화시켰고

80년대 중국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주자파 정권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게다가 소련에서 고르바초프의 일련의 정책들이 시행되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당시 심각한 사회 불균형은 주자파 내부에서도 인정되었는데 순서대로 당 총서기를

지냈던 후야오방(호요방)과 자오쯔양(조자양)도 이러한 인식을 같이 하게 되었다. 

1989년 후야오방이 급작스럽게 사망하고 자오쯔양이 실각하자 후야오방을 추모하는 대학생과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4월부터 전국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난다. 특히 북경에서는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수만 명이 참여한 가두 시위도 이어졌다. 5월 13일부터 수천 명이 광장에 모여 농성을 시작했고 5월 20일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으나 학생과 노동자들은 6월 3일 천안문 앞에 모여 시위와 농성을 계속했다. 6월 3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긴급 통고가 내려졌으나 끝까지 광장을 떠나지 않은 수천 명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해산을 거부하자 결국 새벽 4일 중국 정부가 강제진압하면서 광장과 북경대, 청화대, 북경사범대 일대에서 적게는 천 명에서 많게는 만 명으로 추산되는 이들이 죽음을 당했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이들이 원했던 것이 '미국식 자유주의 체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물론 이 때 중국을 빠져나가 대만이나 미국으로 피해 중국체제를 적극 비판하고 더불어 자유주의의 길을 선택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제대로 된 공산주의'에 대한 열망 역시 강화되었으며 이는 항쟁 당시의 참여자들이 인민영웅기념비로 행진하거나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현재 중국에서 마오를 다시 불러내는 것이나 이른바 '신좌파'들이 등장하는 것은 천안문 사건이 단순히 자유주의로의 갈망만을 요구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한국이나 서방에는 공산국가의 폭력성이라는 면만 강조되어서 퍼져있기에 한 글자 적는다.


여튼 기념사진 시작



나도 초등학교 때 이후 처음 오는 천안문이다.


초딩 때니 뭐 기억도 나지 않고




이종욱도



정광조도


인민대회당


인민영웅기념비


국기게양대



일몰 때 하는 국기하강식은 중국인들에게 큰 구경거리라고 한다.

최근 중국의 국가주의가 날로 심해지고 있어 걱정이다.


여기서 자금성 방향으로 가는 지하도로 들어간다.


지하도 내부


옆에는 우리처럼 광장을 거쳐온 것이 아니라

지하철역에서 자금성 방면으로 바로 가는 사람들이 검색대를 통과하고 있다.



드디어 천안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