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2일 (중국국가박물관3:삼국양진, 수당오대, 요송하금원, 명청시대)

同黎 2015. 8. 28. 19:09



이제 삼국, 양진, 남북조시대관이다.

본격적으로 한족과 북방 민족의 혼합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남북조시대의 병마용

더 작고 귀여워졌다.


특이한 것은 한나라 이후로는 전시실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순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

위 사진은 남북조 시대에 발명된 일종의 컨베이너 벨트를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수력으로 움직였다고. 

물건을 옮기기보다는 물을 공급하는데 쓰였던 것으로 보인다.


집 모양 토기

이 시기부터 불교가 보급되면서 화장이 유행한다.


서역인들의 모습이 그려진 유약도기


관인의 모습을 한 도용

이 시기부터 선비족 등 북방민족의 유입이 본격화된다.



이 두 불상은 산동선 용흥사 터에서 발견된 남북조시대의 불상이다.

용흥사에서는 수백 개의 석불, 소조불이 발견되었는데 중국 초기 불상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원오리 불상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남북조시대의 불상은

잘 보면 삼국시대의 불상들과 참 닮았다.


무덤의 석실 입구 장식

한나라 때부터 무덤에 석실을 설치하고 벽돌이나 돌에 여러 그림을 새긴 화상전 문화가 발달하기도 했다.


드디어 혼란한 남북조가 끝나고 진정한 제국인 수당시대로 넘어간다.


수당시대관 맨 앞에 있는 것은



바로 소릉육준이라고 불리는 당태종 무덤의 장식석이다.

소릉은 당태종의 무덤이고 이곳에 당태종이 생전에 애용했던 명마 6구를 조각해 놓았다.

그러나 청말 민국초 시기 원세개의 아들놈이 미국 골동품상과 짜고

이것을 도굴했는데 운반하기 어려워 산산조각을 내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들켜 4구는 건졌고 2구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여튼 이 대단한 유물도 보고 좋다.


수양제의 초상과


당태종의 초상


당삼채로 유명한 당나라 시기의 도기

더불어 당이 당시 국제 무역의 중심에 있었다는 사실도 알려준다.


단서철권이다. 철로 만든 기와에 금으로 글을 써서 공신에게 주는 것으로

보통 무슨 죄를 지어도 목숨만은 살려준다는 특권이 적혀있다.

누구에게 내린 것인지 좀 보려고 했는데 사람이 너무 많이 몰려있어 자세한 내용을 보지 못했다.



청동거울

나전이나 금은을 얇게 붙여 놓았다.

비슷한 유물이 한국과 일본에 꽤 있다.


은제 경통


당시의 문학작품

 

고분 벽화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복제품

진품은 대만에 있다.

현존하는 유일한 왕희지의 진품 글씨라고 여겨진다. 건륭제의 수집품이었다.



중국화되면서 한층 화려해진 당나라의 불상들

이제 서역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났다.


석관


오 교과서에서만 보던 발해의 녹유기와가 진짜로 있다.



이것은 발해 상경터에서 발견된 '상경'명 기와와


전돌

동북공정의 흔적들이 보인다.


당나라 당시의 불경. 현장의 친필이라고 한다. 대단하다.

당나라는 현장이 인도에서 불경을 대량으로 가져오고 이를 번역하면서 불교철학의 새 시대를 열었다.


현장의 이름이 들어가 있는 석불좌상의 대좌

현장의 번역에 오역이 많다고 하여 지금은 욕도 많이 먹는다.


대진경교유행중국비

시리아의 네스토리우스타가 경교라는 이름으로 장안에 교회까지 세웠음을 증거하는 자료이다.

여기저기 시리아어도 써 있다.


이게 그 다음시기로 들어가는데 이름이 웃기다.

보통 당 다음으로 송을 생각하는데 과감히 요를 먼저 넣고, 송과 금에 원 서하까지 은근슬쩍 끼워 넣었다.


다민족 정체성의 성립과 통일이라는 서명에서 목적이 잘 드러난다.



금나라 유물들



그 유명한 진회의 상

송나라 멸망을 가져오고 명장 악비를 모함한 간신의 대명사 진회의 동상으로

악비의 무덤 앞에 서 있는 것은 복제품이다.

그 복제품은 지금도 악비묘 앞에서 침과 오물을 맞고 있다...

이로써 송이 금에게 망하는데 중국의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정체성으로는 이제 진회를 욕하면 안된다.

악비도 영웅이 아니고... 여러모로 한족 중심으로는 가야겠고 다민족국가도 흡수해야겠고...

중국 정부의 고심이 느껴진다.


중흥사장도

송의 완벽한 멸망을 막고 남송을 수립하는데 공을 세운 네 명의 장군들


원에서 티벳의 고승에게 내린 국사 옥보이다.

귀한 자료다.


원의 제후왕에게 내린 금인


송의 청자

송휘종의 명령으로 관요에서 제작된 이 청자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청자의 비취색과는 달리

'우과청천(雨過晴天)', 즉 비가 지나간 다음의 하늘색을 띄고 있다.


좀 더 비취색을 띄고 있는 남송의 용천청자


원나라의 청화백자


송의 균요에서 나온 청자

아름다운 보라색이 매력적인 아주 귀한 물건이다.

이 정도면 수백억은 가볍게 나갈거다.


당시 목탑의 모형


원나라 대도 궁전의 답도석

원 멸망 이후 대도는 찾아보기 어려워졌지만 이런 귀한 물건이 남았다.


송대의 목제 관음상

2미터가 넘는 미인이다.

한국의 중앙박물관에서 송대 목조불상이 발견돼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동인

한의학에서 사람의 맥을 재현해 놓은 것이다. 이게 송대의 것일려나...


혼천의 모형


물시계

자격루와 비슷하다.

눈금자까지 있는 것을 보아 자격루와 작동원리도 비슷할 것 같다.


허허

이렇다면 세종대왕님이 한 것은 허탕...

뭐 자격루야 인형이 튀어나오는 기계장치도 있는 것이 특징이긴 하지만...



마지막 명청시대

국가박물관은 명청시대 유물이 가장 적다.

미국이나 일본 학계에서는 청나라의 제국적 면모나 독자성을 강조해 명과 청을 분리해 보고 있는데 비해

중국에서는 두 나라의 연속성을 강조하기 위해 명청시대라는 명칭을 많이 쓴다.


영락제 시기의 청화백자


명나라 시대의 호적이다.

일종의 호구단자인 듯


당시의 소송장

우리로 치면 소지가 되겠다. 관리의 판결 결과도 써 있다.


청나라의 법랑기

청의 법랑기는 금속 위에 백자를 입히는 독특한 유물이다.

지금은 냄비로 많이 쓰지

내구성 때문에 대 유행을 했다.



명나라 만력제의 무덤인 정릉에서 발견된 황후의 봉황관


역시 인기가 제일 많다.


명나라 당시 수도 북경의 전경


청나라 때의 병부

두 개로 나뉘어진 병부를 맞춰 병사를 발동시켰다.


청나라 옥새의 하나인 대정전보



강희제의 초상

61년을 해먹은 대단한 왕이다.



건륭제 초상

역시 60년을 해드셨다.


강희제가 북방 몽골을 정벌했을 때의 광경을 그린 그림


5대 달라이라마에게 청이 내린 금책과 인장

이것을 통해 중국의 티벳 점유가 정당함을 알리고 있다.


5대 달라이라마의 동상


건륭제가 8대 달라이라마를 책봉할 때 내린 옥책이라고 한다.

이것도 오해하면 안되는 것이 티벳에서 자체적으로 뽑은 달라이라마를 형식상 책봉한 것이지,

진짜 청 황제가 임명한 것은 아니다.




당시 옥새인 황제지보



명나라 만력제 당시 조선이 예부에 올린 외교문서인 자문이다.

대조선, 일본 관계를 이렇게 간략하게 한 코너에 몰아 넣었다.



명나라 때 명 사신과 조선인들이 나눈 시을 엮은 책




항왜도권

일본과의 관계는 견당사 폐지 이후 직접적 국교관계가 없었으며 주로 왜구문제가 대부분이었다.

명나라 당시 이 그림도 왜구를 토벌한 그림이다.




일본에서 만들어져 중국에 전해진 거울


건륭제 당시의 청화백자

이것도 수십억을 호가한다.


황무지 개척권 증명서 같은 것

황무지를 개척하면 자신의 소유권을 발휘할 수 있었다.



당시 발달한 강남의 모습


강남지역 미곡상의 항해 허가증




건륭남순도

건륭제는 강희제의 강남 순행을 본따 여러 번 남순을 단행한다.

비용은 많이 들었지만 이로 인해 강남문화가 북쪽에 퍼지는 순환의 역할이 발생했다.



청나라 궁정의 옥기

이로써 고대중국기본진열은 끝이다. 대충 보는데도 2시간이 넘게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