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경주 시가지는 과거 조선시대의 읍치와 일치하고 있습니다. 지금 경주시내인 황남동, 노동동, 노서동, 구황동, 인왕동, 계림로 등 일대에는 무덤과 절터가 즐비한데, 조선시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비록 망한 나라의 무덤이기는 하지만 성리학에서 선조의 무덤을 훼손한다는 것은 최고의 불효이자 터부였기 때문에 본래 조선에는 도굴이 없었습니다. 중국과 대비하면 신기할 정도의 일이지요. 물론 조선시대에는 부장품을 많이 넣지 않는 박장의 풍습이 있었기 때문에 무덤을 파도 재화가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치 못했을 것 같습니다. 경주에는 이 외에도 신라의 3성 시조를 제사지내기 위한 사당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세종 때 박혁거세를 제사지내기 위해 나라에서 짓고, 경주부윤이 제사를 지내던 숭덕전이 대표적인 사당입니다.
비석의 존재로 주인이 확실한 무열왕릉
그렇다가 경주의 여러 무덤들이 갑자기 경주에 살던 여러 가문들이 이 신라의 고분들을 눈여겨보게 된 것은 바로 18세기에 이르러서 입니다. 이 시기에는 경주 김씨와 경주(월성) 박씨의 족보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경주부윤이 관리하던 숭덕전이 경주(월성)박씨가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변경되고, 경주 김씨는 김알지를 제사지내기 위한 숭혜전을, 경주 석씨는 석탈해를 제사지내기 위한 숭신전을 경쟁적으로 건립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인 신라 왕들의 무덤을 정확히 고증하여 찾아내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가문을 더욱 공고히 만들려고 합니다.
본래 경주에 위치한 고분 중에 그 주인이 알려져 있던 것은 조서 전기까지만 해도 11릉 1묘(김유신묘)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이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닌데요, 김유신묘만 해도 지금은 왕릉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주인이 명확한 무덤은 5릉 1묘에 불과합니다. 선덕여왕릉이나 원성왕릉(괘릉) 처럼 장사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여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나 무열왕릉이나 김인문묘처럼 비석이 발견된 무덤만이 정확한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18세기 갑자기 왕릉이 불어나 31릉 2묘로 주인을 찾은 무덤이 늘어났고, 19세기에는 36릉 9묘로 늘어납니다. 이 중에는 추사가 비석을 발견하고 실증작업을 가쳐 확정한 무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제 경주 김씨와 박씨 가문의 왕릉 나눠먹기를 적나라 하게 보게 됩니다.
경주 김씨와 박씨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장지 기록을 바탕으로 경쟁적으로 무덤을 자신의 조상 것으로 비정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런 문제가 두 가문 간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자 1730년 경주부윤 김시형이 박씨 가문과 타협하여 오릉을 기준으로 경주 남산 동남방면을 모두 김씨 왕릉으로, 서남방면을 박씨 왕릉으로 비정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아무런 기준 없이 편의적으로 무덤의 주인을 가른 것이지요. 사실 경주 남산에 있는 무덤들은 대부분 통일신라 후기의 것들입니다. 그러나 무덤을 평지에 쓰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 무덤 주인을 정했기에 산에 있는 무덤들만 주인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경주 김씨는 삼국사기에 장지 기록이 없는 10여왕의 왕릉은 비정하지 않았지만 박씨는 그에 상관없이 박씨 10왕의 무덤을 모두 비정합니다. 경주 석씨는 19세기 무덤 하나를 탈해왕릉으로 비정하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고학적으로 과연 맞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신라의 묘제를 살펴보면 1~3세기는 토광묘(시체를 그냥 흙 구덩이에 묻는 무덤. 봉분이 작음), 4~6세기 통일 전까지는 돌무지덧널무덤(경주 시내에 많이 있는 거대한 무덤들), 6세기 중반 부터는 산에 있는 석실분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라 왕릉으로 알려져 있는 것들은 대부분 석실분일 경우가 많아서 고고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토광묘 시대의 왕들도 돌무지덧벌무덤의 주인으로 비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죠.
박혁거세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오릉. 고고학적으로는 이도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오릉은 말 그대로 5개의 능이 모여있는 곳으로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의 5조각으로 잘려서(;) 묻혀있는 곳으로,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의 묘역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5릉 중 하나가 박혁거세의 무덤이라고 보고, 그 능역에 후손들이 묘를 썻을 것으로면 추정하고 있죠. 그러나 박씨 가문을 이를 각각 혁거세와 알영부인, 남해, 유리, 파사왕의 무덤으로 아예 정해버렸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삼릉입니다. 박씨 가문은 이 무덤을 위에서 부터 차례로 아달라, 신덕, 경명왕의 무덤으로 비정하였죠. 그런데 문제는 아래로 갈 수록 무덤이 커져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아래 무덤이 가장 크다는 것이며, (후손이 선조보다 더 큰 무덤을 썻다는 것...) 또한 아달라왕와 신덕왕 사이에는 무려 700년이라는 세월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700년 전의 조상 무덤을 찾아서 후손이 무덤을 썼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죠. 또한 신라의 묘제는 선조가 아래에 무덤을 쓰고, 후인들이 위로 올라가면서 무덤을 쓰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를 무시하고 조선 후기 식으로 이해하고 무조건 무덤의 주인을 비정하려고 하니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경명왕은 화장을 하고 뼈를 뿌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왕릉이 없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러한 왕릉 주인 비정에 대하여 이미 당대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경주의 선비인 유의건의 문집, <화계집>에는 <라릉진안설>이라는 글에서 박씨와 김씨 가문의 형태를 비판하고 있는데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 신라시대 55명의 왕들 가운데 姓氏를 朴氏로 하는 왕은 10명, 昔氏로 하는 왕은 8명, 金氏로 하는 왕은 37명이다. 그 가운데 火葬으로 장례를 시행한 왕은 3명이며, 나머지 왕릉을 조영한 왕은 52명으로 왕비릉의 숫자와 합하면 104기의 王(妃)陵이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여왕으로 재위한 3명은 왕비가 없으나 다른 왕들은 혹 왕비를 2명 또는 3명으로 하였으므로 모두 합하면 100여기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지 등을 살펴보면, 왕릉의 위치에 대하여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만 11기의 왕릉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영조 6년 경술년(1730년)이후에 더하여 28기의 왕릉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17기는 以前에 모르는 바였으나 지금 비로소 알게 된 것 들이다. 대체로 천년 후에 이르러서 천년 이전의 일에 대한 자취를 살피건대 문자의 기록에 의하지 않고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비록 신라 사람으로써 죽지 않고 지금 살아있다 해도 상세하게 알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의 王陵이 어느 곳에 있다함이, 하물며 당시의 무지한 촌사람의 말한 바에 따름에랴.
지금 선도산 아래와 慶州邑이 관할하는 10里 안에는 고분이 첩첩이 쌓여 무수히 많은데 왕릉과 같은 것은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 어찌하여 왕릉이 이 곳에 없음을 알겠는가. 또한 당시 훈구대신의 장례로 인한 墓는 각간 金陽과 金后稷의 墓와 더불어 왕릉 일반과 같다. 즉, 경술년 이후의 새로이 지정된 바의 17기 왕릉은 훈구대신의 墓가 아니며, 고분군이 무수히 많은 그곳에 혼재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 중략
지난 날에 김씨 족보를 보았는데 모두 경순왕을 始祖로 하고 있었다. 대저 김씨 30餘王 등이 어찌 모두 후손이 없이 혼자이며, 경순왕만 자손들이 많이 있겠는가. 하물며 경순왕이 東都(慶州)에 있을 때 한 아들은 금강산으로 들어 갔으며, 한 아들은 해인사로 들어 갔다. 오랫동안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개경으로 가서 高麗 王의 駙馬가 되어 아들 殷說을 낳고, 은설은 4명의 아들을 낳아 나누어 각처에 봉하였는데, (慶州金氏 始祖는) 容이다. 그러나 혹 경주에 와서 거주하는 자가 있으면 경주김씨인데, 어찌 모두 그 자손인가. 이것은 왕릉의 일컬음이 혼동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같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같이 논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
서역사람의 모습을 한 무인석으로 유명한 괘릉. 위치상으로 원성왕의 무덤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
18~19세기에 걸쳐 비정된 신라 왕릉들은 지금 전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적을 지정할 60~70년대에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도 지금에 비할 수 없고, 마땅히 반박할 자료도 부족했기에 그냥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신라 왕릉 앞에 사실성이 의심된느 경우 붙이는 "전칭" 이라는 글자가 붙으며, 심지어 공식 안내판에도 지정명칭에서 부르고 있는 왕의 무덤이 아닐 것이라는 설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는 경주 3가문의 노력이 천년 전 신라의 역사를 수정하게 만들고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비석의 존재로 주인이 확실한 무열왕릉
그렇다가 경주의 여러 무덤들이 갑자기 경주에 살던 여러 가문들이 이 신라의 고분들을 눈여겨보게 된 것은 바로 18세기에 이르러서 입니다. 이 시기에는 경주 김씨와 경주(월성) 박씨의 족보가 만들어집니다. 그리고 경주부윤이 관리하던 숭덕전이 경주(월성)박씨가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변경되고, 경주 김씨는 김알지를 제사지내기 위한 숭혜전을, 경주 석씨는 석탈해를 제사지내기 위한 숭신전을 경쟁적으로 건립합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자신들의 조상인 신라 왕들의 무덤을 정확히 고증하여 찾아내고, 제사를 지냄으로써 가문을 더욱 공고히 만들려고 합니다.
본래 경주에 위치한 고분 중에 그 주인이 알려져 있던 것은 조서 전기까지만 해도 11릉 1묘(김유신묘)에 불과했습니다. 물론 이 것도 정확한 것은 아닌데요, 김유신묘만 해도 지금은 왕릉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주인이 명확한 무덤은 5릉 1묘에 불과합니다. 선덕여왕릉이나 원성왕릉(괘릉) 처럼 장사 기록이 비교적 자세하여 위치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나 무열왕릉이나 김인문묘처럼 비석이 발견된 무덤만이 정확한 주인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18세기 갑자기 왕릉이 불어나 31릉 2묘로 주인을 찾은 무덤이 늘어났고, 19세기에는 36릉 9묘로 늘어납니다. 이 중에는 추사가 비석을 발견하고 실증작업을 가쳐 확정한 무덤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제 경주 김씨와 박씨 가문의 왕릉 나눠먹기를 적나라 하게 보게 됩니다.
경주 김씨와 박씨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장지 기록을 바탕으로 경쟁적으로 무덤을 자신의 조상 것으로 비정하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런 문제가 두 가문 간의 싸움으로 번지게 되자 1730년 경주부윤 김시형이 박씨 가문과 타협하여 오릉을 기준으로 경주 남산 동남방면을 모두 김씨 왕릉으로, 서남방면을 박씨 왕릉으로 비정하게 됩니다. 한 마디로 아무런 기준 없이 편의적으로 무덤의 주인을 가른 것이지요. 사실 경주 남산에 있는 무덤들은 대부분 통일신라 후기의 것들입니다. 그러나 무덤을 평지에 쓰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던 조선시대에 무덤 주인을 정했기에 산에 있는 무덤들만 주인을 정하게 된 것입니다. 그나마 경주 김씨는 삼국사기에 장지 기록이 없는 10여왕의 왕릉은 비정하지 않았지만 박씨는 그에 상관없이 박씨 10왕의 무덤을 모두 비정합니다. 경주 석씨는 19세기 무덤 하나를 탈해왕릉으로 비정하고 지금까지 제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고고학적으로 과연 맞을까요? 전혀 아닙니다. 신라의 묘제를 살펴보면 1~3세기는 토광묘(시체를 그냥 흙 구덩이에 묻는 무덤. 봉분이 작음), 4~6세기 통일 전까지는 돌무지덧널무덤(경주 시내에 많이 있는 거대한 무덤들), 6세기 중반 부터는 산에 있는 석실분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신라 왕릉으로 알려져 있는 것들은 대부분 석실분일 경우가 많아서 고고학적으로 전혀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토광묘 시대의 왕들도 돌무지덧벌무덤의 주인으로 비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죠.
박혁거세의 무덤으로 알려진 경주 오릉. 고고학적으로는 이도 맞지 않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오릉은 말 그대로 5개의 능이 모여있는 곳으로 삼국유사에는 박혁거세의 5조각으로 잘려서(;) 묻혀있는 곳으로, 삼국사기에는 박혁거세의 묘역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5릉 중 하나가 박혁거세의 무덤이라고 보고, 그 능역에 후손들이 묘를 썻을 것으로면 추정하고 있죠. 그러나 박씨 가문을 이를 각각 혁거세와 알영부인, 남해, 유리, 파사왕의 무덤으로 아예 정해버렸습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삼릉입니다. 박씨 가문은 이 무덤을 위에서 부터 차례로 아달라, 신덕, 경명왕의 무덤으로 비정하였죠. 그런데 문제는 아래로 갈 수록 무덤이 커져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아래 무덤이 가장 크다는 것이며, (후손이 선조보다 더 큰 무덤을 썻다는 것...) 또한 아달라왕와 신덕왕 사이에는 무려 700년이라는 세월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700년 전의 조상 무덤을 찾아서 후손이 무덤을 썼다는 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죠. 또한 신라의 묘제는 선조가 아래에 무덤을 쓰고, 후인들이 위로 올라가면서 무덤을 쓰는 것이 관례입니다. 이를 무시하고 조선 후기 식으로 이해하고 무조건 무덤의 주인을 비정하려고 하니 이러한 사태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더군다나 경명왕은 화장을 하고 뼈를 뿌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왕릉이 없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이러한 왕릉 주인 비정에 대하여 이미 당대에도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습니다. 경주의 선비인 유의건의 문집, <화계집>에는 <라릉진안설>이라는 글에서 박씨와 김씨 가문의 형태를 비판하고 있는데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
" 신라시대 55명의 왕들 가운데 姓氏를 朴氏로 하는 왕은 10명, 昔氏로 하는 왕은 8명, 金氏로 하는 왕은 37명이다. 그 가운데 火葬으로 장례를 시행한 왕은 3명이며, 나머지 왕릉을 조영한 왕은 52명으로 왕비릉의 숫자와 합하면 104기의 王(妃)陵이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여왕으로 재위한 3명은 왕비가 없으나 다른 왕들은 혹 왕비를 2명 또는 3명으로 하였으므로 모두 합하면 100여기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는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지 등을 살펴보면, 왕릉의 위치에 대하여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는 것은 다만 11기의 왕릉에 그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영조 6년 경술년(1730년)이후에 더하여 28기의 왕릉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17기는 以前에 모르는 바였으나 지금 비로소 알게 된 것 들이다. 대체로 천년 후에 이르러서 천년 이전의 일에 대한 자취를 살피건대 문자의 기록에 의하지 않고서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비록 신라 사람으로써 죽지 않고 지금 살아있다 해도 상세하게 알지는 못할 것이다. 누구의 王陵이 어느 곳에 있다함이, 하물며 당시의 무지한 촌사람의 말한 바에 따름에랴.
지금 선도산 아래와 慶州邑이 관할하는 10里 안에는 고분이 첩첩이 쌓여 무수히 많은데 왕릉과 같은 것은 헤아릴 수가 없이 많다. 어찌하여 왕릉이 이 곳에 없음을 알겠는가. 또한 당시 훈구대신의 장례로 인한 墓는 각간 金陽과 金后稷의 墓와 더불어 왕릉 일반과 같다. 즉, 경술년 이후의 새로이 지정된 바의 17기 왕릉은 훈구대신의 墓가 아니며, 고분군이 무수히 많은 그곳에 혼재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 중략
지난 날에 김씨 족보를 보았는데 모두 경순왕을 始祖로 하고 있었다. 대저 김씨 30餘王 등이 어찌 모두 후손이 없이 혼자이며, 경순왕만 자손들이 많이 있겠는가. 하물며 경순왕이 東都(慶州)에 있을 때 한 아들은 금강산으로 들어 갔으며, 한 아들은 해인사로 들어 갔다. 오랫동안 가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개경으로 가서 高麗 王의 駙馬가 되어 아들 殷說을 낳고, 은설은 4명의 아들을 낳아 나누어 각처에 봉하였는데, (慶州金氏 始祖는) 容이다. 그러나 혹 경주에 와서 거주하는 자가 있으면 경주김씨인데, 어찌 모두 그 자손인가. 이것은 왕릉의 일컬음이 혼동하고 있는 것과 더불어 같은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같이 논하여 그 잘못을 바로잡고자 하는 것이다. "
서역사람의 모습을 한 무인석으로 유명한 괘릉. 위치상으로 원성왕의 무덤임이 거의 확실시 되고 있습니다.
18~19세기에 걸쳐 비정된 신라 왕릉들은 지금 전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사적을 지정할 60~70년대에는 고고학적 발굴 성과도 지금에 비할 수 없고, 마땅히 반박할 자료도 부족했기에 그냥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지만 현재는 대부분의 신라 왕릉 앞에 사실성이 의심된느 경우 붙이는 "전칭" 이라는 글자가 붙으며, 심지어 공식 안내판에도 지정명칭에서 부르고 있는 왕의 무덤이 아닐 것이라는 설명이 들어가 있습니다. 조선 후기 가문의 위상을 높이려는 경주 3가문의 노력이 천년 전 신라의 역사를 수정하게 만들고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지금 우리는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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