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조선초기 세조대 불교적 상서의 정치적 의미

同黎 2012. 7. 23. 14:13

 

조선초기 세조대 불교적 상서의 정치적 의미_2010021390.hwp

 

석사 2학기 레포트, 사총 74호 게재논문의 원형

 

朝鮮初期 世祖代 佛敎的 祥瑞의 政治的 意味

 

 

석사2 박세연

 

1. 머리말

2. 불교적 상서의 정치·사상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2) 사상적 배경

3. 불교적 상서의 발생과 그 의미

4. 불교적 상서가 만드는 이미지의 재생산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세조는 매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건국 이후 세종을 거쳐 국가의 기본 통지체제가 마련되고, 그것의 최종적 완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국대전이 처음 편찬되는 시기가 바로 세조대이다. 이런 면에서 세조대는 조선의 기본적인 틀을 완성하는 경국대전체제가 자리 잡는 시기로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그러나 세조는 유교적 정치체제의 확립과는 반대로 유교적 명분에 어긋나는 즉위 과정을 거쳤으며 왕권이 전제적 모습을 지녔기 때문에 부정적인 평가를 받기도 하였다. 한편으로는 경국대전체의 기반이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둔 연구도 있다. 그러나 세조가 추구했던 전제적인 왕권의 모습은 대간·사관 등 왕권의 견제장치를 무력화 시켰으며 공신·척족·종친의 세력을 키웠기에 성리학적 이상 정치와는 동떨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긍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는 연구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세조대가 지금까지 조선왕조사의 통사를 쓰는데 있어서 가장 곤란한 지점이었던 이유는 조선전기를 설명하는 ‘유교정치의 발전’이라는 모델에 걸맞지 않게 불교가 이상할 정도로 크게 부흥했다는 것이다. 국왕이나 왕실 구성원 개인의 불교 신앙은 태조 이래로 계속 되었으며, 이들의 불교에 대한 개인적인 후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세조대에는 간경도감 설치, 원각사 창건 등 불교 관련 사업이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되었고, 수 만 명이 부역승이라는 명목으로 도첩을 받아 역에서 면제되었다. 공물 대납의 한 축을 간사승이 담당했던 것 또한 세조대였다. 뿐만 아니라 불교적 상서가 자주 발생하고, 상서에는 의례히 백관의 하례와 그에 따른 은전이 베풀어졌다. 이렇듯 불교에 대한 후원이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이성 때문에 세조대 불교정책과 세조의 불교신앙에 대한 연구는 이미 수편의 성과가 있었다. 그 흐름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세조가 유교적 군주의 모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으며 그의 불교 신앙는 개인적 문제라고 한정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세조대를 ‘유교정치의 발전’이라는 틀에 끼워 맞추어 해석하여 자칫 다양한 역사적 해석을 저해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두 번째는 세조를 적극적으로 ‘호불지주’로 파악하고 세조대를 불교 중흥의 시기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 또한 문제점을 가지는데, 조선전기의 왕들을 好佛과 排佛이라는 두 측면으로 양분하고 거기에 내재되어 있는 구조적 문제를 등한시한다는 점이다. 조선의 왕들은 호불 혹은 배불이라는 단편적 관점으로만 나누어서는 안 되며 또 실제로 이렇게 나누어지지도 않는 것이다. 문제는 세조가 유교군주나 불교군주냐가 아니라 왜 세조대에 불교가 이상할 정도로 부흥했는지 그 원인을 찾는 것이다. 마지막 세조 개인의 신앙적 측면을 객관적으로 왕권과 관련된 것으로 해석하는 연구가 있는데, 불교 부흥의 정치적 의미에 주목한 것은 의미가 있지만, 구체적인 분석을 근거로 한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세조가 유교적 정통론에 어긋나는 왕위 계승을 했기 때문에 이에 대한 반경향으로 불교를 선택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 역시 호불과 배불의 이분법적인 관점을 택하고 있다는 점은 마찬가지로 한계를 지닌다.

한 편 본고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세조실록에 나타나는 각종 불교적 상서에 대하여 이를 세조대 왕권과 연관시킨 두 편의 연구가 있었다. 그러나 권연웅은 세조대 불교정책을 나열하는 과정에서 불교적 상서과 은전을 언급하는데 그쳤을 뿐이며 이정주의 연구는 세조실록을 기반으로 불교적 상서의 정치사적 의미를 고찰하고 있지만 이를 세조 8년 이후 세조의 병에 따른·심리적 원인에서 그 배경을 찾고 이를 동시대인 모두가 암묵적으로 인정한 일종의 ‘광기’로 규정하여 결국 구조적인 접근을 포기하고 상서 각각이 가진 의미를 밝히지 않았다는 한계를 지닌다. 또한 두 편의 논문 모두 세조실록만을 전거로 삼아 다른 사료에 등장하는 상서들을 다루지 않았다는 실증적 한계를 가지고 있고, 이에 따른 논리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조선의 국왕은 단순한 개인이 아니라 정치의 시작이자 끝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절대권자인 국왕이 이렇듯 非常한 모습을 보였다면 그 원인을 단순히 개인적·심리적 차원에서 찾기 보다는 이를 좀 더 구조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세조대 이단인 불교에 기반한 상서가 유교적 합리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적 기록인 실록에 실렸다는 사실에 의문을 가지고 출발하였다. 종교적 상서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정치적 권위에 대한 형이상학적 존재의 물질적인 표현과 보증으로 해석되었다. 상징의 실제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단지 상징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현실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그 상징이 실제로 존재했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으며 상징이 존재했던 당대인, 혹은 후대인이 이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가 주요한 분석의 대상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우선 세조대 많은 상서가 나타나야 했던 정치적 배경과 상징을 만들고 해석하는 근거가 되었을 당시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불교적 상서의 발생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며, 또한 상서 각각의 의미와 전거를 분석하여 이것이 당대인에게 어떻게 해석되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서가 만들어낸 이미지가 어떻게 재생산되고 고착화되는지 세조의 불교사업을 통해 고찰할 것이다. 이를 통해 세조의 불교 정책이 단순한 개인적 신앙심에서 발로했거나, 선왕의 사업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도를 지니고 추진된 것임을 증명할 것이다. 이를 통해 실로 이례적이라고 할 수 있는 세조실록의 불교적 상서 기록이 차지하는 정치적 위치를 확인하고 세조대 정치사의 일면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동안 세조의 개인적 신앙, 혹은 막연히 왕권 강화로만 설명되었던 세조대의 불교정책의 성격을 명확히 밝힐 수 있을 것이다.

본고의 기본적인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을 바탕으로 하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불교 관련 기사가 빠진 부분이 많고, 또한 의도적으로 편집된 부분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다른 사료들을 세조실록과 비교 검토하여 세조대 불교의 상황을 보다 명확하여 밝히겠다. 여기에는 다수의 금석문과 문집자료, 그리고 일제시대에 기록된 사료집인 이능화의 『조선불교통사』, 조선총독부의 『조선사찰사료』가 중요한 사료로 사용되었다. 또한 불교적 상서의 원형을 살피기 위하여 佛經類와 佛傳類, 그리고 『삼국유사』와 중국사 사료가 사용되었다. 불경과 불전, 중국사 관련 사료를 선별할 때에는 무엇보다도 세조가 직·간접적으로 접했을 사료가 우선 대상이 되었다. 『대장경』은 당대 지식인들의 불교사상을 집대성한 것이며, 그 재생산에도 중요한 역할을 차지했던 만큼 중요한 사료이다. 세조가 대장경 50부를 간행하기도 한 만큼 불교적 상서의 원형을 찾기 위한 사료로써 활용하였다. 세조의 대군 시절 그가 편집하였던 『석보상절』과 왕위에 오르고 간행하였던 『월인석보』는 세조의 불교관을 밝히는데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그 밖에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여러 불경의 御製序·跋 역시 사료로 활용했음을 밝힌다.

 

2. 불교적 상서의 정치·사상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된 이래, 국가권력과 종교권력의 우위 다툼에서 종교권력이 패배한 후, 불교적 상징은 계속하여 세속적 욕망, 특히 국가권력의 의도에 따라 이용되었다. 불교가 전래된 한반도에서 역시 국가권력이 불교적 상징을 이용하여 자신을 위치를 공고히 하였던 것은 보편적인 세계사 전개와 다르지 않다. 이는 비단 불교만 처했던 특수한 상황은 아니다. 서경 등에 기록된 유교적 상징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힌두교나 기독교 사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세조·예종실록』에 등장하고 있는 각종 불교적 상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세조대 불교의 의미를 명확히 읽기 위해서 우리는 그곳에 포함된 정치적 성격을 읽어야 한다. 이를 위해여 우선 세조가 추구했던 군주의 모습을 추적하여 그가 불교적 상서를 받아들인 정치적 이유를 고찰해 보고자 한다.

세조대 왕권이 과연 취약했는지 여부는 여러모로 많은 고민이 필요하겠지만 세조가 왕의 말은 곧 법이라고 선언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세조가 전제적인 국왕을 꿈꾸었음은 분명하다. 세조는 왕을 제도와 법칙에서 벗어난 초월적 존재로 라고 선언한 것이다. 그가 조하 등 의례를 재정비한 것이나, 환구제를 복설한 것 역시 모두 자신의 왕권을 형상화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하들은 왕에 절대적으로 복종해야 했는데 그 대상은 오직 왕만이 허용되었다. 두려워하고 복종하는 대상이 세자이거나, 주자와 같은 성현에 대한 공론일지라도 이는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세조가 전제적인 왕권을 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조 재위 초반에는 여기에 반대하는 세력들이 등장하였다. 이들과 세조의 갈등은 『세조실록』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육조직계제의 재개를 둘러싼 세조와 하위지의 갈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육조에서 공사를 의정부를 거치지 않고 왕에게 직접 올릴 것은 전지한 세조에게 하위지는 총재가 삼공과 삼고를 겸임해 직사를 다스린 周制를 따를 것을 청하였고, 이에 분노한 세조는 하위지를 의금부에 가두는 등 강력한 조처를 취하였으며, 같은 내용을 계달한 이계전에게는 강력하게 경고하였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세조는 周制로 대표되는 성리학적 정치운영론과 갈등을 빚고 있었다. 총재가 공사를 사실상 집행하는 성리학적 정치운영론을 세조는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중단하는 것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일인데, 이는 이른바 ‘사육신’사건이 벌어진 이후 취해진 일련의 조처였다. 주요 주모자가 집현전에서 高論하던 유자들이었던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유자들이 모였을 때 생기는 공론과 고준담론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유자들의 고론이 임금을 약하게 하고 신하를 강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세조의 치세 말년인 세조 14년에 이르기까지도 신숙주와 최항이 문장에 능한 자를 가려 국가의 製述을 이들에게 주자고 청했을 때, 이것이 집현전과 다르지 않다는 이유로 거부했던 것이다.

세조의 유학자들에 대한 불신은 다른 곳에서도 드러난다. 성균관을 썩은 선비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말하거나, 儒臣들을 구변만을 일삼는 俗儒라고 폄하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특히 김종련이 주자의 말이 틀린 것이 많으나 공론이 두려워 비난하지 못한다는 말에 세조는 민감하게 반응하며 그대가 두려워하는 사람이 누구냐고 힐문하는데 여기에서는 세조가 공론을 부정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물론 세조가 완전히 反 유학적인 모습을 띄고 있는 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자신의 유학적 학식이 신하들보다 뛰어남을 드러내며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지도하려 하는 모습은 여러 번 보인다. 왕권의 초월성을 설명할 때 주자학적 수사를 사용하기도 하였다. 예를 들어 자신에 대해서 하늘을 몸 받은(體天) 군주라고 표현하는 것은 하늘은 대신하여 다스린다는 유교적 수사이다. 그러나 이는 왕권신수로도 해석될 수 있는 부분에 그칠 뿐 세조는 주자학의 왕도와는 다른 국왕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재상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정치운영론은 세조의 국왕관과는 배치되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세조는 단지 정주학만을 정통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자도 틀린 것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노장학이나 열자·오자 같은 여타 제자백가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유신들로 하여금 이를 공부하도록 하였다. 때문에 성리학은 세조 자신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기에는 매우 부족한 사상이었다.

더군다나 세조는 국가권력을 민간의 가장 깊숙한 곳에까지 침투시켜 인민의 인신과 생산을 완전히 지배하여 이를 통해 국가 재정과 병력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세조대 전반에 걸쳐 시행된 호패법과 호적·군적 작성, 보법으로 대표되는 군제 개편, 북방 사민 정책등은 모두 이러한 의도가 반영된 정책이다. 그러나 위의 정책들은 민의 강력한 저항을 받았고, 또 실제 당시 국가의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부분이 세조 사후 곧 포기되었다. 호패법 등의 시행을 피하기 위하여 유이민이 급증하고 도적 역시 심각할 정도로 증가하는 등 백성의 민심 이반이 심각했기 때문에 세조는 이들에게 역시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왕을 부각시킬 필요가 있었다.

때문에 세조는 그의 권위를 받쳐주기 위해 다른 사상적 기반을 찾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세조가 가장 쉽게 접하고, 또 잘알았던 사상은 불교였다. 불교는 그가 젊었을 때부터 익숙하게 접해온 것이기 때문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파된 이후로 국가권력에 이용되어왔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연구에서 주목한 바이다. 특히 『妙法蓮華經(以下 法華經)』, 『仁王護國般若波羅蜜經(以下 仁王經)』,『金光明最勝王經(以下 金光明經)』등에서 묘사하는 국왕은 부처를 대신하여 만인을 다스리는 자이고, 불법을 수호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 위의 권위를 가지며, 우선적으로 보호해야 하는 자이다. 또한 불교적 聖王은 부처가 오면 바로 성불할 수 있는 초월적 존재이다. 때문에 세조는 불교가 설명하고 있는 왕권의 틀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자신의 이미지를 전제적이고 초월적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많은 상징들이 동원되었다. 이러한 면이 세조실록에 등장하는 많은 불교적 상서, 그리고 그에 따른 사유와 은전의 정치적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세조대 사료에서는 왕의 모습을 삼계를 훤히 내다보며 사방으로 금륜을 날리는 자로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모두 불경에서 정치적 절대자 즉 전륜성왕·금륜왕 나타내는 표현과 동일한 것이다. 심지어 삼계의 스승인 부처와 만민을 제도하는 왕을 하나라고까지 하거나 왕이 부처와 비슷한 수준의 성인으로 묘사되고 있다. 불교적 표현 안에서 세조는 부처와 거의 동일한 존재까지 승격되는 초월적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조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적 상서를 해석(혹은 창작)하였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다음 절에서 세조가 접했던 佛經·佛傳류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2) 사상적 배경

상서는 세조가 집적 겪었던 것이거나, 혹은 세조에게 해석이 달려있기 때문에 세조 자신이 어떠한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세조는 대군 시절부터 불경을 즐겨 읽었을 뿐만 아니라 유학보다 낫다는 평가를 내리기도 하였다. 또한 부왕인 세종의 명을 받들어 『釋譜詳節』을 편찬하는데 이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없는 다양한 경전을 접하면서 불교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을 것이다. 또한 그는 불경을 직접 언해하거나, 구결을 다는 등 불교사상 자체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직접 언해거나 구결한 불교관련 서적은『월인석보』,『법화경』,『선종영가집』,『능엄경』,『원각경』,『금강경육조해』.『금강경삼가해』,『아미타경』,『증도가남명천화상계송』등이다. 이중에서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법화경』과 『월인석보』이다.

법화경은 흔히 불경 중의 으뜸으로 묘사된다. 법화경은 애초에 대승불교와 소승불교의 갈등을 대승불교적 입장에서 통합하기 위하여 편찬되었다. 때문에 경 전반에 걸쳐 一乘을 강조하였고, 이런 성격 때문에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려하는 천태종의 소의경전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화경은 단지 천태종에서만 신앙된 것은 아니었고 선종을 비롯한 불교 각 종파 전반에 널리 읽혀졌다. 또한 법화경에 등장하는 영축산이 수륙재, 혹은 영산재의 배경이 되었기 때문에 조선 전기에 100회가 넘게 간행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법화경』의 慰靈的 성격만이 아니다. 앞서 간략하게 밝혔듯이 법화경은 호국 삼부경으로 정치적 성격이 강한 경전이었다. 또한 법화경은 미륵신앙·관음신앙·문수신앙·사천왕신앙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었으며, 전륜성왕에 대한 설명이 곳곳에 등장하기도 한다. 법화경의 일승적 성격과 더불어 전술한 특징 때문에 한국 고대사에서는 법화 신앙을 흔히 왕권강화와 연결시켜 해석해왔다. 고려시대에 있어서도 ‘법화경에 나오는 會三歸一의 大意가 東土(고려)에 합하여져 삼한을 통일하여 하나로 응하였으니 숭배하는 뜻이 더하여 진다’고 하여 법화경이 삼한일통 사상에 관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세조 역시 법화경과 익숙하게 접했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세조가 대군 시절 저술한『석보상절』은 가장 일반적인 석가모니의 일대기인 『석가보』외에 절반 정도를 다른 경전으로 채우고 있는데, 그 중 법화경은 압도적인 비율을 차지한다. 『석보상절』의 1/3 정도는 아예 법화경을 그대로 싣고 있다. 또한 『법화경』간경도감이 세워지기 이전에 이미 가장 먼저 언해되어 활자로 간행되었다. 법화경이 세조대에 가장 중요한 불경으로 취급되고 있음은 이로써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법화경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용되었을까? 3장에서 상술하겠지만, 세조대 현상했다고 하는 관음보살, 문수보살은 모두 법화경에 그 신앙의 근거를 두고 있다. 또한 세조대 발생한 불교적 상서 역시 전거를 법화경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세조가 불교를 통해 국왕의 초월적 면모를 과시할 때 그 근거를 많은 부분 법화경에서 찾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불교적 상서의 상당 부분은 『법화경』이나 『법화영험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또한 상서의 발생 이후 신하들이 올린 箋文 등에서 법화경을 언급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세조 10년의 온양 행행에서 샘이 솟아오르는 상서가 나타나자 신숙주 등이 올린 전문에서 법화경이 언급되었으며, 역시 세조 10년 있었던 석가여래의 현상에 대하여 김수온이 쓴 기문에 왕을 찬양하는 데에 법화경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월인석보』는 세조가 대군 시절 편찬한 석보상절과, 이를 보고 세종이 부처를 찬양한 월인천강지곡을 수정·합본한 책이다. 월인석보에는 부처가 태어나서 성불하고 죽은 이후의 일까지 25권에 걸쳐 서술되고 있는데 1/2 정도는 『석가보』의 내용을, 1/3 정도는 『법화경』의 내용을 저본으로 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기타 경전을 저본으로 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대장경에 수록된 경전 중 가장 석가모니의 생존 시기와 가까울 것으로 보이는 아함부의 경전들이 인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함부의 경전들은 중국을 비롯한 동북아시아에 전래되긴 했지만 그 내용이 소승불교에 가까워서 북방불교에서는 잘 읽히지 않는 경전이다. 물론 석가모니의 생애 같은 역사적 사건을 다룬 경전이 있기 때문에 간혹 인용되기는 하지만 대중에게 생소한 경전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그렇다면 월인석보 중 어느 부분에 아함부의 경전이 활용되었는지 살펴보자. 아함부의 경전들은 권1, 23, 25에 인용되었다. 권1의 경우 석가모니의 전생담과 출생에 관한 이야기기 때문에 초기 경전인 아함부의 경전들이 많이 인용된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권 23의 경우 傳法과 열반에 관한 내용인데, 대장경에 포함되지 않은 僞經인 『목련경』, 미륵을 법통으로 삼고 있는『佛說彌勒大成佛經』, 그리고 『잡아함경』이 일부 인용되었다. 아함부 경전이 대대적으로 포함된 것은 권 25이다. 특히 권 25의 下에 해당하는 부분은 거의 전체가 아함부의 경전을 저본으로 삼고 있다. 이 부분의 내용은 주로 아육왕의 공덕과 아육왕이 불교를 믿게 된 계기, 아육왕의 순행과 성리 순례, 아육왕이 부처의 사리를 나눠 8만 4천개의 탑을 세웠다는 내용 등이다. 여기에는 『出雜阿含經』, 『出雜離牢獄』,『增壹阿含經』 등이 인용되었다. 특히 권 25는 전륜성왕인 아육왕에 대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으며, 아육왕과 직접적인 상관이 없이 인용된 『증일아함경』聽法品은 석가모니가 목련존자를 시켜 악한 용왕으로부터 두 왕을 지켜주고, 칠보를 내려주며, 직접 5명의 왕을 만나 전륜성왕이 되는 業을 가르쳐주는 내용이 들어있다. 즉 『월인석보』의 마지막은 잘 쓰이지 않은 경전을 인용하여 전륜성왕에 대한 이미지를 가득 보여주고, 『석보상절』을 직접 만들고 『월인석보』를 국역한 세조의 의지가 반영된 부분이라고 보여진다.

또 한가지 재미있는 점은 아육왕이 세운 8만 4천개의 탑을 설명하면서 그 註에 19개의 탑이 東土에 있으며 강원도 금강산과 전라도 천관산에 아육왕의 탑이 각각 있다고 한 점이다. 이는 금강산·오대산·낙산 등이 불·보살이 깃든 불국토라고 인식하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월인석보』의 註와 같이 아육왕의 탑이 자신의 국토에 있다는 인식은 이미 고대사에서 동일하게 보인다. 즉 『삼국유사』의 요동성육왕탑조에 고구려의 왕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아육왕이 세운 탑을 발견하고 이를 중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이를 통해 자국의 국토를 불국토로, 왕을 전륜성왕으로 이미지화하며 왕권 강화를 꾀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아육왕의 탑에 대한 위치 비정은 다르지만 거의 동일한 이야기가 월인석보에 실려 있는 것이다. 결국 『월인석보』는 그 내용에 있어 불교적 표현과 상징을 이용해 왕을 초월적으로 묘사하려는 수양대군의 의도가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3. 불교적 상서의 발생과 그 의미

그렇다면 불교적 상서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그 전거는 어디에 두고 있는가? 본장에서는 이에 대하여 고찰하도록 하겠다.

아래 <표1>은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에 나타는 불교적 상서를 정리한 것이고, <표2>는 실록 밖에서 찾을 수 있는 불교적 상서를 정리한 것으로 세조 8년부터 14년까지를 범위로 설정하였다.

 

연/월/일

상서의 내용

장소

진하

사유·은전

세조 5/5/7(무자)

감로

후원

-

-

세조 8/4/29(갑오)

감로가 나뭇잎에 내림

후원

-

-

세조 8/11/5(을미)

관음보살 현상

용문산

상원사

세조 9/6/15(계유)

사리 분신

통도사

세조 9/6/18(병자)

사리 분신

정업원

세조 9/7/2(기축)

사리 분신, 오색운

장의사

세조 10/4/19(신축)

감로

 

-

세조 10/5/2(경인)

여래 현상, 감로, 방광, 채색안개, 사리 분신. 분신한 사리가 함원전에서 다시 분신. 원각사 창건 계기.

회암사

함원전

세조 10/6/13(을미)

黃雲, 우화, 이향, 서기.

원각사

회암사

세조 10/9/11(신유)

서기

원각사

-

세조 10/9/25(을해)

서기

원각사

세조 10/9/30(경진)

효령대군이 불상의 분신 사리를 바침

원각사

-

-

세조 10/10/1(신사)

무지개빛 서기, 사리 분신과 오색 서기

경복궁

원각사

세조 10/12/23(임인)

이향, 서기

원각사

-

세조 11/3/1(무신)

나한의 사리 분신

원각사

-

-

세조 11/4/4(경진)

서기, 사리 분신

-

세조 11/4/8(갑신)

서운, 우화, 감로

원각사

(추정)

세조 11/4/15(을유)

수타미

-

 

세조 11/5/6(임자)

사리의 서기, 우화

원각사

세조 11/7/26(신미)

사리의 서기

장의사

 

세조 11/12/24(정유)

서기, 상운, 사리 분신

원각사

 

세조 12/1/25(무진)

사리 분신

-

세조 12/3/21(임술)

감로, 우화, 서기, 이향, 쌍학, 방광, 지동, 사리 분신

금강산

세조 12/3/29(경오)

효령대군이 사리 분신, 상운 ,서기, 우화, 현상

표훈사

 

세조 12/윤3/17(무자)

사리 분신

오대산

상원사

 

세조 12/윤3/28(기해)

담무갈보살 현상

금강산

 

 

세조 12/4/12(임자)

수타미, 감로, 사리의 기이함

원각사

 

세조 12/7/17(병술)

법회날 서기, 방광, 우화, 사리의 기이함

함원전

(추정)

 

세조 12/10/16(갑인)

사리 분신, 오채 서기

원각사

 

세조 13/4/7(임인)

사리 분신, 감로

원각사

경복궁

세조 13/4/11

우화, 사리의 서기

원각사

세조 14/1/24(을유)

사리 분신

 

세조 14/5/14(계유)

사리 분신

함원전

세조 14/5/16(을해)

감로가 후원에 내림. 수타미를 여러 산에서 채취하게 함

후원

예종 즉위/10/9(을미)

사리 분신 207매

빈전

-

예종 즉위/10/23(기유)

여래 현상

빈전

예종 1/윤2/29(갑신)

사리 분신 245매

원각사

-

예종 1/6/6/(무오)

靑玉 불상을 궐내로 받아들이니 사리 분신

창덕궁

예종 1/8/13

불상을 맞아들이니 사리 분신

-

*세조 5년 5월 7일과 同王 8년 4월 29일에도 甘露가 내렸으나, 이 때의 감로의 불교적 상서 여부가 명확하지 않으므로 표에서 제외하였다.

세조 10/4/6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사리 분신 목격

회암사

-

-

세조 10/4/28

원각도량을 설치하니 2경에 방광, 山木이 搖變, 4경에 이향, 감로, 삼화상의 石鐘 위에 신승 5~6인이 나타남, 사리 분신 850매. 다음날 금색 장육의 석가모니가 현상. 계속하여 사리 분신

회암사

세조 10/9/14(갑자)

원각사에서 서기가 하늘을 덮고 함원전으로 이어 짐

원각사

세조 11/6/미상

사리 분신

원각사

세조 12/3/미상

관음보살상을 친견하니 사리 분신

낙산사

-

-

세조 13/4/8(계묘)

원각사 탑이 완성되자 우화, 서기, 사리의 기이함이 일어나고 흰 기운이 수레바퀴 모양이 되고, 일광이 노랗게 변함

원각사

-

*<표2>의 전거는 각주 번~ 번에 걸쳐 밝혔다.

**<표2>의 전거는 실록과 성격이 다른 사료를 사용했으므로 은전과 사유에 대한 통계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자 한다.

 

『세조실록』에는 불교적 상서가 32회, 예종실록에는 5회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다른 사료에서 5~6회의 불교적 상서가 더 밝생한 것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세조대에는 대략 40번 내외의 불교적 상서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세조실록』에서 불교적 상서가 등장하는 것은 세조 8년 이후이고 이는 세조 말년까지 지속된다. 특히 세조 10~12년에는 집중적으로 상서가 발생하였다. 상서의 종류는 대략 ①여래·보살의 현상, ②사리의 분신과 기이함, ③우화·천우 ④감로와 수타미, ⑤방광, ⑥오색 구름·안개 등의 기상현상, ⑦쌍학 동물을 통한 길조, ⑧땅의 움직임, ⑨구체적 설명이 없는 瑞氣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예종실록의 기록은 대체적으로 세조실록의 내용을 계승하고 있으며, 또한 세조와 관련된 장소에서 혹은 세조와 관련된 일에서 불교적 상서가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불교적 상서에 대한 의미부여는 세조대와 비슷하게 이루어지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상서에는 주로 효령대군이 관여되고 있으며 信眉·학열·학조 등의 승려들 역시 관여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효령대군이 불교의 어느 종파와 친화력을 가지는 가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세조대 삼화상이라고도 불리는 신미·학열·학조 등은 선종계 승려로 세조의 불교 신앙이 주로 선종과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간경도감에서 주로 선종계열 불경들이 많이 언해·간행되었다는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는 바이다.

이렇게 많은 상서는 세조 이전의 상황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실록』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불교적 이적은 정종 2년의 일로 태상왕이 된 태조가 貞陵社에서 4매의 분신 사리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사리분신은 儒者나 왕에 의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정도전은 『書佛氏雜辯後』에서 生意가 있는 곳에 번식이 불어나는 것을 자연스러운 이치이며, 사리가 분신한다면 왜 모발과 치골은 번식하지 않는가 반문하며 사리 분신을 부정하였다. 태종은 불교의 허실을 시험하여 흥천사 사리각에서 바친 분신 사리가 가루처럼 부서지자 이를 바친 자들을 가두기도 하였다. 문종 때 왕실의 수륙사 중 하나인 대자암에서 수양대군의 청에 의해 精勤하고 사리가 분신하는 일 등이 있었으나 이는 정인지·이효첨·김문기 등에 의하여 통렬히 비판되었다. 즉 불교적 상서는 세조대에 이르러 드디어 ‘상서’로써의 지위를 얻게 되었다.

그렇다면 각각의 상서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었을까? 이를 분석하면 불교적 상서를 통해 세조가 말하려고 했던 의미들을 좀 더 섬세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표1>과 <표2>에서 알 수 있는 불교적 상서들을 나누어 보고 그 의미와 전거를 살펴보겠다.

먼저 여래와 보살의 현신에 대하여 살펴보자. 여래와 보살의 현신은 세조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상서이며, 그 전거 또한 매우 풍부하다. 세조는 8년 11월에 효령대군의 원찰인 上元寺에서 관음보살이 현상하자 최항에게 『관음현상기』를 찬하도록 하였으며, 세조 10년에 회암사에서 석가모니의 현상이 일어나자 김수온에게 『여래현상기』를 짓도록 하였다. 그리고 세조 12년의 금강산 순행에서는 직접 담무갈보살을 보았다고 주장하였고, 역시 같은 달 上院寺에서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전설이 남아 있다.

먼저 관음보살의 현상에 대하여 살펴보자. 관음보살은 잘 알려져 있듯이 자비의 화신이며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중생을 극락으로 인도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관음보살이 나타난 다는 것은 그 땅에 자비의 정치가 실현되고 있으며, 이는 곧 태평성대를 의미한다. 세조가 역대 중국의 군주 중 한고조와 더불어 높이 평가했던 당태종 역시 재위기간 동안 2번 관음보살을 목격하였다. 즉 관음보살의 등장은 세조가 당태종과 같은 상서를 겪음으로써 신하들로부터 받던 ‘태평성대’의 칭송을 뒷받침 하는 것이었다. 또한 세종 이래로 불사를 벌일 때마다 항상 항상 되풀이했던 왕의 대응인 “역대 중국의 현군들도 불교를 믿었다.”는 논리를 가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세조와 관음보살의 인연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세조가 낙산사에 갔을 때 관음보살상에서 사리가 분신한 것이다. 낙산사는 오래된 관음성지로, 의상이 관음보살을 친견한 곳이다. 관음신앙은 그 기반을 『법화경』에 두고 있다. 관음신앙의 소의경전인 『관음경』 자체가 『법화경』의 일부, 즉 『법화경』 제25품 관세음보살보문품이기 때문이다. 즉 앞서 살펴보았던『법화경』신앙이 관음 현상에 큰 영향을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담무갈보살은 法起菩薩이라고도 하며, 『화엄경』에서 금강산이라는 산에 1만 2천의 보살과 권속을 거느리고 있다고 한다. 사료에서 확인되는 바에 따르면 고려와 조선인들은 화엄경의 금강산을 해동의 금강산에 그대로 대입하여 여기에 담무갈보살의 화신이 머무르고 있다고 믿었다. 전설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금강산을 유람했을 때 여기서 담무갈보살을 친견했다고 하는데, 이곡(1298~1361)이 지은 「東遊記」에 정양암에 태조가 만든 법기보살상이 전한다고 하였으며, 충렬왕 33년(1307) 노영이 그린 <담무갈보살예배도>가 전해지고 있어, 고려 태조가 담무갈보살을 친견했다는 인식은 이미 고려 때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세조가 담무갈보살을 친견했다고 스스로 이야기 한 것은 이러한 전설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담무갈보살의 현상 역시 관음보살과 마찬가지로 역대 성군의 상서를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사실은 당대 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으며, 전설로 남아 있어 당대에 상서로 여겨졌는지 여부를 확인하기 어렵다. 다만 세조가 상원사중창권선문을 내려 직접 상원사 중창에 개입하였고, 여기에 많은 종친과 관리 그리고 전국의 모든 지방관이 시주자로 동참하고 있어 문수신앙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국보 221호)에서 의숙공주와 하성위 정현조의 발원문이 발견되어 세조 12년 세조의 순행 시에 상원사 목조문수동자상과 문수보살상이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대산은 본래 문수보살이 거처하고 있으며, 진표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세조가 상원사 중건을 후원하고 문수보살상을 조성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세조가 문수보살을 친견했다는 전설도 나타났을 것이다. 문수신앙 역시 『법화경』에 기반을 두고 있다. 『법화경』안에서 문수보살은 석가모니불에게 불법전수를 咐囑받고, 불법을 대신 전하기도 하는 지혜제일의 보살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3가지 전설은 모두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불보살이 해동에 거하고 있다는 불국토 인식과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세조 스스로도 금강산이 부처가 머무르는 불국토임을 말하고 있다. 결국 세조가 자신을 당태종과 고려 태조 같은 역대 현군과 동일시하며, 불교 관련 전승까지 폭 넓게 활용하여 자신을 불국토에서 직접 불보살을 만나는 신화적 존재로 이미지화 시켜내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에는 법화경이 충분히 활용되었다.

사리 분신과 이적은 가장 많이 일어나고 있는 불교적 상서이다. 사리분신은 부처나 승려의 사리가 저절로 생겨나거나 나누어지는 것으로 부처가 감응하여 佛寶이자 주요 신앙대상인 사리를 많은 사람이 모실 수 있도록 이를 나누어주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의미는 부처의 현상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사리 분신은 세조 이전에도 기록을 찾을 수 있는데, 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세조는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사리의 이적 역시 중국의 고사들을 전거로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리의 이적으로 대표적인 것은 후한 명제 때의 이적으로 사리가 오백 광명을 내었다고 한다. 수문제 역시 직접 사리의 분신을 목격하며 이를 통해 하례를 받고 은전을 베풀었다. 또한 새로운 절이나 탑을 세우려 하거나 세우는 도중에 수를 다 세기 어려울 정도로 빈번하게 사리 분신이 일어나고 있다.

수타미는 하늘의 음식이다. 『기세경』에 따르면 수타미는 사천왕천 이상의 하늘에 사는 천인들이 먹는 음식이다. 수타미는 하늘에서 저절로 내리는 것으로 그 색깔은 조금씩 다른데 희고 깨끗할수록 이를 먹는 이의 복덕이 높은 것이다. 甘露는 역시 사천왕천 이상의 하늘에서 먹는 음식으로, 아귀도에 빠진 귀신들은 감로를 먹어야만 극락왕생할 수 있다. 하늘의 음식이 직접 내린다는 것은 그만큼 적합한 정치가 지상에 펼쳐지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세조를 이를 산에서 채취하기도 하였으며 유구나 일본의 사자들에게 먹이기도 하였다.

땅을 진동하는 현상은 본래 재이에 해당하지만 불교경전에서는 상서로 해석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태어나거나 성불하는 순간 地神들이 땅을 움직여 경탄하는 것이다. 방광은 백호방광의 줄인 말로 부처의 몸과 백호에서 빛이 나오는 것을 의미한다. 역시 불경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서이다. 고려시대에는 신돈이 연복사에 나타난 서기를 부처의 방광이라고 하여 상서로 해석한 기록이 눈에 띈다. 雨花·天雨·異香 역시 불경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상서인데, 그 해석은 법화경에 등장한다. 즉 하늘의 제석천·범천 등이 탄복하여 만다라꽃·마하만다라꽃 등 여섯 가지 꽃과 전단나무 향 등 여러 가지 향을 지상에 뿌리는 것이다. 이러한 이적들은 현실세계에서 반복되는데, 이는 법화경과 관련되 이적들을 모아 놓은 책인 『법화영험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세조는 각종 불교적 상서를 통해 역대 현군에 겪었던 상서를 자신이 재현하고 있음을 보였이면서 자신의 치세를 태평성대에 비견하고, 또한 불보살과 직접 통하는 모습을 재현함으로써 국왕을 초월적 위치로 이미지화 한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법화경』이 빈번하게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조는 불교적 상서를 통해서만 군주를 초월적 존재를 형상화하고 있는가? 이를 명확히 밝혀내면 불교적 상서의 의미를 더욱 정확히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아래 <표3>은 불교적 상서 이외에 유교적 가치관에 기반했다고 볼 수 있는 상서들과 그에 대한 신하와 세조의 반응을 정리한 것이다. 전거는 『세조실록』을 기본으로 하였고, 『국조보감』등으로 보충하였다.

일시

상서의 내용

하례

사유·은전

세조 2/9/미상

경상도관찰사가 이삭이 2~3개인 벼를 바쳤으나 받지 않음

-

-

세조 3/9/7(무진)

경상도관찰사가 嘉禾를 바쳤으나 가소롭다고 함

×

-

세조 4/9/11(을미)

강령현에서 백록을 올림

-

-

세조 5/10/미상

강령현에서 백록을 올림

-

세조 5/5/18(기해)

경상도관찰사가 嘉禾를 바침

-

-

세조 5/5/28(기유)

경기도관찰사가 嘉禾를 바침

-

-

세조 5/5/29(경술)

충청도관찰사가 嘉禾를 바침

-

-

세조 6/1/24(임인)

개성부에서 白雉를 바침

-

-

세조 6/8/18(신유)

평안도관찰사가 白雉를 바치고 하례함

-

세조 7/2/22(계사)

황해도 평산부사가 白鹿을 바침

-

-

세조 7/4/미상

후원에 감로가 내림**

-

-

세조 7/9/17(무신)

白鹿이 나타나 백관이 하례하였으나 받지 않음

×

-

세조 8/6/16(기묘)

白鹿을 서산에서 잡다

-

-

세조 8/9/18(기유)

백관이 백록의 일로 하례하나 받지 않음

×

-

세조 9/6/15(계유)

충청도 태안군에서 嘉禾를 바침

-

-

세조 9/7/18(을사)

행사직 노삼이 嘉禾를 바침

-

-

세조 10/2/2

제주에서 白鹿을 바침

-

-

세조 10/3/5(무오)

온양행궁에 醴川 하므로 주필신정이라 이름하고 하례

-

세조 10/6/7(기축)

전라도 곡성이 白鵲이 나타나니 관찰사가 전문을 올려 하례

-

세조 12/1/21(갑자)

경기도 양주 백성이 嘉禾를 바침

-

-

세조 12/5/12(임오)

경상도관찰사가 白鹿을 바치나 임금이 아니라고 여김

×

-

세조 12/11/10(무인)

평안도관찰사가 白雉를 바침

-

-

세조 12/11/20(무자)

황해도관찰사가 白鹿의 가죽을 바침

-

-

세조 12/12/22(임오)

경상도관찰사가 白雉를 바침

-

-

*‘-’는 하례를 하지 않은 것, ‘×’는 하례를 거부하거나 상서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반응한 것을 의미한다.

**감로는 불교적 상서로도 유교적 상서로도 이해할 수 있는데, 『국조보감』世祖條에 불교적 상서가 전혀 보이지 않으나 세조 7년 4월의 상서는 기록된 것으로 보아 일단 유교적 상서로 분류하였다.

 

<표3>에서 알 수 있듯이 세조대 유교적 상서는 총 24회로 적지 않은 숫자이며 세조대 전반에 걸쳐 고른 분포를 보이며 발생하였다. 그러나 이를 통해 세조가 하례를 받은 것은 4회에 불과하며 그나마 관찰사가 전문을 올린 것을 제외하고 백관이 하례를 바친 것은 2회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몇몇 상서에 대하여 세조는 상서 자체에 대하여 부정하거나 하례를 거부하고 있다. 하례를 거부하는 것은 군주의 겸양의 표시로 흔히 있어왔던 일이다. 그러나 상서 자체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반응하고 있는 것은 이례적이다. 더군다나 세조 8년 9월 18일에 백관이 하례를 청하자 거부하던 세조가 2달도 지나지 않은 동년 11월 5일에는 관음보살의 현상에 매우 기뻐하며 하례를 받고 사유와 은전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또한 <표3>에서 보이듯이 유교적 상서를 통해 하례를 받는다고 해도 이에 대한 사유와 은전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즉 세조는 불교적 상서와 유교적 상서를 전혀 다른 의미로 생각했던 것이다.

각각의 상서에 대한 해석과 의미부여가 다르다는 것은 김수온이 지은 「여래현상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신이 듣건데, 자고로 상서의 응함이 하늘에 있으면 곧 慶雲이 나타나고, 景星이 나타나고, 감로비가 내리며, 땅에 있으면 즉 龍鳳이 나타나고, 麒麟이 나타나고 嘉禾와 芝草가 나타나는데 지금 우리 聖祖의 상서는 하늘에 상서로움도 아니고, 땅에 상서로움도 아닙니다. 광명이 두루 밝아 오직 상주하시는 진신(부처)가 나타나시며 사리가 생산되며 靈花의 비가 내리어 밝은 세상의 희귀한 상서가 일시에 나란히 있으니, 어찌 우리 성상이 여러 부처의 덕을 지내시었기 때문에 여러 부처님이 성상의 상서로움에 응하시어 이와 같이 특이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법화>경에서 말하길 오직 부처만 부처와 같다(통한다)고 하였으니 마침내 능히 알 수 있게 되었고, 신은 이에 더욱 믿게 되었습니다.

 

慶雲·景星·龍鳳·麒麟·芝草 등은 모두 『당육전』에서 명시하고 있는 상서들이다. 특히 경운·경성 같은 것은 대·상·중·하의 4등급의 상서 중에서도 大瑞에 속하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사리가 분신하고 부처가 현상하는 불교적 상서들은 오히려 대서와도 구분되어 더욱 상서로운 징조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세조는 부처의 덕을 지니어 부처와 통하는 지극히 초월적인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이렇듯 세조는 종교적 성격이 한층 더 강한 불교적 상서에 더 관심을 기울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초월적 위치를 강화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면은 다른 사료에서도 확인되어 급기야 ‘왕과 부처님은 하나다.(王與佛一者也)’라는 표현까지 나왔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세조가 불교적 상서를 유교적 상서보다 우위에 두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조대 이를 위해 세조 연간 연도별 불교적 상서와 그에 따른 사유·은전의 횟수는 연도별로 어떠한 특징을 지니는가? 아래 <표4>는 이를 정리한 것이다.

 

 

세조 8년

세조 9년

세조 10년

세조 11년

세조 12년

세조 13년

세조 14년

상서

1

3

8

7

8

2

3

사유·은전

1

3

4

2

4

2

3

 

실록에서 찾을 수 있는 불교적 상서는 세조 8년 11월 이후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세조 10년부터 12년까지는 상서가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는 무엇인가? 먼저 상서가 발생하는 배경에서 국왕이 직접 관여하는 대규모 인원 동원의 행사가 동반됨을 알 수 있다. 예컨대 세조 12년의 3월~윤 3월의 보살 현상이나 사리 분신 등의 상서는 세조의 금강산 행행과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이 행행에서 세조는 여러 번의 상서를 겪었고, 이를 일본에 자랑하기도 하였다. 세조 10년 6월부터 세조 13년까지 빈번하게 이어지는 원각사에서의 상서는 계속되는 원각사 공사를 동반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서 뒤에는 의례히 은전과 사유가 베풀어졌다. 그렇다면 상서는 일정한 목적, 즉 많은 비용과 동원이 필요한 사업을 합리화하는 동시에 사업의 의미를 신성함으로 부각시키는 근거로 작동하고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또한 호패법 시행, 군적·호적 작성 등 백성을 죄인으로 만들 수 있는 정책을 과감하게 펼쳐 도적과 유이민이 급증하고, 행행의 과정에서 소홀히 한 관리, 난신에 연좌된 이들 같이 죄인의 수가 비교적 많아지면서 죄의 무게는 덜한 ‘죄인’에 대한 일정한 처리가 필요했기 때문에 세조는 많은 은전을 베풀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세조는 호패·군적·호적·사민·오가작통 등의 인민의 인신을 구속하는 사업을 한꺼번에 진행하였기 때문에 백성을 달래줄 필요가 있었다. 농민에게 부채 상환을 연기해 주거나 세를 감면해주는 것은 대규모 사업이나 정책 시행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러한 은전과 사유가 병에 걸려 죽음이 임박했다는 것을 인지한 세조가 和氣를 만들기 위해 벌이고 신하들은 암묵적으로 동의한 일종의 ‘축제’일까? 우리는 은전과 사유 중에서도 일정한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은전은 많은 관리들에게 베풀어졌으나 도적·남형을 가한 관리·난언한 자·난신 등은 사유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은 모두 세조가 엄히 단속한 이들이다. 예를 들어 세조 10년 상서가 남발되는 과정에서도 세조는 각도의 관찰사들에게 수령으로 남형을 가한자 등 죄가 있는 자를 아뢰게 하여 수 십 명의 수령이 파직되었다. 그리고 남형한 관리는 사유에서 제외되었다. 가장 많은 상서와 그에 따른 은전이 베풀어진 세조 12년에도 문폐사가 보고한 수령 30인이 파직되었다. 더욱이 유형 이상은 사유의 대상에서도 제외된 것으로 세조가 和氣를 퍼트리기 위해 상서를 조작했다고 하기에는 그 사유의 조건에 일정한 제한이 있었던 것이다. 세조가 병으로 인해 위기감을 느껴 시혜를 베풀려고 했다는 것은 적절한 근거가 없는 막연한 추측일 뿐이다. 더군다나 세조 재위 후반기 그가 정신적 불안정 증세를 보인다는 연구는 역시 사료의 단편만을 읽은 결과인 것이다.

오히려 세조는 예상되는 반발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계획한 정책을 계속하여 추진하였다. 세조가 죽음을 한 달도 남겨두지 않은 세조 14년 8월 23일에 군적사를 임명했다는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상서가 집중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세조 9~12년은 아픈 세조가 다음을 준비하는 시기가 아니라, 군적 작성을 위해 군적사가 파견되고, 군적 사목이 내려지며, 호패 분대를 파견하며, 횡간의 마감과 교정이 이루어지고, 공물을 상정하고, 대전을 만드는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그리고 이 작업들은 세조가 직접 진두지휘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 많은 작업들을 한꺼번에 추진하고 여기서 발생하는 반발들을 무마하기 위하여 강력한 상징이 필요할 것이고, 왕의 초월성을 표현하는 더욱더 많은 상서가 필요했을 것이다. 40회에 이르는 불교적 상서는 이러한 필요성에 기반하여 발생(혹은 조작)된 것이다.

따라서 불교적 상서는 세조 8년부터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이전부터 필요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세조 8년 이전과 이후의 정책적 방향은 연속되고 있고, 세조의 군주관도 변화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실록 이외의 사료에서는 세조 8년 이전의 불교적 상서가 나타나고 있다. 아래의 <표5>는 실록 외에서 찾을 수 있는 세조대 불교적 상서와 그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일시

상서의 내용

장소

하례

사유·은전

세종 30/7/미상

수양대군이 소헌왕후의 명복을 빌며 법회를 열고 기도하자 사리 분신, 방광

용문사

-

-

세조 6/5/미상

효령대군이 가지온 석가모니의 사리가 100매로 분신.

 

?

?

세조 7/4/ 미상

후원에 감로가 내림

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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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7/5/13(임자)

회암사에서 사리 분신. 효령대군이 이를 가져오자 함원전에 다시 사리 분신. 총 102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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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7/5/13(임자)

광덕사에서 석가모니 진신 사리가 분신하고 이향, 서기

광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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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7/5/17

함원전에 보관한 광덕사의 사리가 다시 분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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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5>의 전거는 각주 113번~ 118번에 걸쳐 밝혔다.

**<표5>의 전거는 실록과 성격이 다른 사료를 사용했으므로 은전과 사유에 대한 통계적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자 한다.

 

비록 사료가 파편적으로 남아 있기에 완벽한 분석이 불가능하며 따라서 <표5>에 통계적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 표를 보면『세조실록』상에 불교적 상서가 본격적으로 등장하여 은전·사유와 연결되기 시작하는 8년 11월 이전에 이미 불교적 상서에 의미가 부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세조 4년 작성된『용문사기』에 의하면 세조는 이미 대군 시절부터 불교적 이적을 경험하고 있었으며, 설령 이 사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하더라도 세조 4년에 이미 불교적 상서에 대하여 의미 부여가 되고 이것이 佛事 등 관련 사업의 명분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적어도 세조 7년에는 이미 불교적 상서가 등장하고 여기에 대하여 세조 8년 11월 이후와 같은 패턴의 사유와 은전이 베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조 8년 11월에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긴다. 왜 실록에는 세조 8년 이후의 상서만이 집중적으로 등장할까? 세조실록은 편집된 사료이기 때문에 편찬자의 의도가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따라서 비록 가설일 뿐이지만 세조실록의 불교적 상서에 대한 기록에도 편찬자의 의도가 강하게 들어갔을 것이다. 세조실록의 찬수관 중 領館事는 신숙주와 한명회이고, 監館事는 양성지·최항·강희맹·정난종·이승소·이극돈·김수령·예승석 이었다. 결국 세조실록의 편찬에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신숙주와 한명회이다. 신숙주와 한명회는 계유정난부터 세조를 보필한 가장 큰 공신이지만, 세조와 완전히 입장을 같이하지는 않았다. 세조 말년에는 적기공신으로 대표되는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였다. 구성군 이준·남이·강순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로 세조는 이들에게 정승이나 판서에 해당하는 중요한 직책을 맡겼다. 반면 이시애의 난 도중 신숙주와 한명회는 의심을 받고 하옥되기도 한다. 세조의 사후 적기공신으로 대표되는 인물들은 여러 차례에 걸쳐 제거되고, 세조의 구신과 이들과 친밀한 인물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세조 사후 바로 세조의 구신들에 의하여 세조가 추진한 여러 정책들, 공물 대납제와 경국대전, 호패법, 동국통감의 편찬 등이 포기되거나 수정된다.

그렇다면『세조실록』의 후반 기록은 신숙주·한명회 등이 왜 자신들이 세조 말년에 의심을 받았으며, 만든 세조 정권에서 추진된 정책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변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실제로 세조실록에 보이는 세조는 대단히 자의적이고 즉흥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경국대전의 편찬을 비롯하여 관제, 군제, 수취제도 등 국가운영에 필요한 전반적인 제도를 정비하는 왕으로 이는 자의적이고 즉흥적인 판단의 결과는 아니었다. 하지만 세조가 의도한 제도의 정비는 당시 국가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예종대·성종대 초반의 정책 담당자로 활동한 한명회와 신숙주 등은 세조의 자의적이고 즉흥적인 모습을 강조함으로써 이런 제도가 애초에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음을 부각함으로써 이를 포기하기 위한 근거를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가설일 뿐이지만 이러한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불교적 상서가 일어난 다음에 올리는 하례에서 전문을 쓴 주체가 누구인지 실록에 전혀 나타나지 않는 다는 점도 이러한 가설을 뒷받침한다. 상서 발생 후 진하하여 전문을 바친 기록은 여러 번 확인할 수 있지만, 다른 경우와는 달리 전문의 주체가 누구인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세조가 불보살을 현상한 후 작성케 하였던 「관음현상기」와 「여래현상기」가 지금도 전해지지만, 정작 실록에는 이에 대한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단 한번 금강산 서기송을 강희맹이 올린 기록이 등장할 뿐이다. 결국 불교적 상서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으면서도 전문은 기재하지 않는 등 신료들 자신의 책임은 회피하고 있는 것이다.

 

4. 불교적 상서가 만드는 이미지의 재생산

상징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온전히 정치적 생명력을 지닐 수 없다. 특히 세조와 같이 왕의 초월성을 강조하고, 인민을 통제하는 정책을 과감히 펼치고 있는 군주일수록 상서의 이미지는 곳곳에 확산되어 재생산되어야 할 필요성이 강하였으며, 상서가 존재함을 보여주는 상징물을 필요로 하였다. 때문에 상서 자체 보다는 상서에서 발생한 이미지를 어떤 식으로 재생산하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일 수 있다. 세조가 어떠한 방법으로 불교적 상서의 이미지를 보급하고 재생산하고 있으며 또 그 대상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를 해명하는 것은 불교적 상서의 목적을 밝히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상서가 모두에게 상서로운 일로 기억되려면 그 자체로 ‘모두에게 기쁜 일’이 될 필요가 있었다. <표1>에서 보이듯이 상서와 이에 따른 하례·진하에는 매우 많은 경우 죄를 사하여주거나 백관의 자급을 올려주는 은전 등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세조실록에 기록된 불교적 상서로 인한 은전과 사유는 세조 9년부터 10년까지 20회에 이른다. 은전과 사유를 통해 세조가 겪은 불교적 상서는 국왕뿐만이 아니라 신료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상서로운 일로 각인될 수 있었다.

특히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하례에 뒤따르는 은전 중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것들이다. 그 사유와 은전의 내용이 가장 잘 나타나는 『세조실록』권38, 세조 12년 3월 30일의 기사를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으로 백성에게 어떠한 혜택을 주려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百官이 陳賀하였다. 전교를 내려 살인 및 도둑과 형벌을 함부로 한 관리 외에 流刑 이하의 죄를 赦宥하고, 義倉의 곡식이 未收된 것은 5년 이상은 전부 면제하고, 3년, 4년은 반을 면제하되, 강원도는 전부 면제하며, 公處의 官物을 사사로이 소비한 것은 3분의 1을 감하고 田稅 및 漕運의 부족된 것은 반으로 감하며, 奴婢의 身貢이 미수된 자는 5년 이상을 면제하게 하였다. 강원도는 지난해부터 3년을 한정하여 歲貢軍器를 면제하고 금년 田稅의 반을 면제하며, 금년 神稅布를 면제하게 하였다. 扈駕하는 백관과 군사들은 각각 1자급을 더하고 資窮인 자는 대신 加資하게 하며, 加資할 수 없는 자에게는 1년을 給復하게 하였다. 경기·강원도의 노인 70세 이상은 1자급을 가하고 80세 이상은 2자급을 가하며, 資窮인 자는 대신 가자하게 하였다.

 

위의 사료는 강원도에서 관음현상 등의 이적을 겪고 난 후에 내리 사유와 은전의 내용이다. 여기서 세조는 유형 이하의 죄를 사유했을 뿐만 아니라 의창의 미수된 곡식에 대하여 감면해주고, 전세·조운의 미납분과 노비 신공의 미수분을 면제해주었다. 이는 백성들의 부담을 파격적으로 덜어주는 것이다. 특히 행행의 목적지인 강원도는 의창 미수분·세공군기·전세·신세포 등에 대하여 파격젹일 정도로 은전을 베풀고 있다. 즉 불교적 상서에 따르는 은전과 사유는 호패·군적·호적·사민·군제 개편 등의 정책으로 유이민과 도적이 대거 발생하고 있던 시점에서 백성들의 불만을 어느 정도 해소시키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유와 은전의 이유가 불교적 상서이고, 이미 지역에서 오랫동안 이어지던 전설 등을 이용한 것은 백성들과 가장 친숙한 이미지를 이용하려는 세조의 의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즉 불교적 상서에 따르는 은전들은 일종의 對民施策의 의미에서 시행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유와 은전은 일시적인 것이었다. 부처와 직접 만나고 상서를 계속 일으키는 왕의 신성한 모습을 좀 더 오래 기억시키기 위해서는 물질적인 기념비가 필요했다. 세조대에 계속되었던 많은 佛事는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기념비’로써의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내는 佛事는 원각사의 창건이다. 원각사의 창건은 효령대군이 세조 10년 4월, 혹은 5월에 회암사에서 원각도량을 베풀던 중, 여래가 현신하고 사리가 수 백 매 분신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세조가 흥복사 자리에 세운 것이다.

원각사의 위치를 보면 원각사의 상징적 의미를 더욱 잘 알 수 있다. 흥복사는 선종 즉 조계종의 중심 사찰이었다. 그러나 이미 세종 때에는 승려가 10여 인에 불과하게 되었고, 이렇게 쇠락한 절은 각사의 차지가 되었다. 그런데 흥복사 자리에 이렇게 각사가 들어오게 된 것은 여기가 도성의 가운데이면서 시장이 들어서 있는 곳이었기 때문인 듯하다. 세조는 원각사 조성도감을 설치하고, 굳이 도성의 한가운데 인가 2백여 채와 경시서를 철거하면서까지 도성 가운데에 이적을 증명하는 사찰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원각사에는 이 때 분신한 사리를 모시는 탑이 세워졌다. 원각사는 그 화려함이 외국에까지 알려진 듯하다. 일본의 사신이 원각사 탑을 구경하길 청하여 들어주었으며, 명의 사신들도 빈번하게 찾는 곳이 되었다. 원각사가 세워지기로 결정 된 이후 원각사에서는 상서가 계속하여 일어나기도 하였다. 즉 원각사는 단순한 불교중흥의 결과가 아니라 불교적 상서를 기념하며 이를 국내외로 알리는 상징물일 뿐만 아니라 상서 자체를 재생산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세조 12년의 금강산 행행 이후 진행된 유점사·상원사·낙산사 등의 중건과 세조 7년의 온양 행행 이후 진행된 광덕사 중건 역시 이와 같은 의미를 지닐 것이다. 세조가 겪은 상서를 증명하기 위하여 대대적으로 사원을 중수하고 불상·탑·종을 조성하였던 것이다.

간경도감에서의 불경 언해와 간행 또한 세조의 권위를 드러내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세조대 간경도감 언해본의 간행 목적과 세조 즉위 전, 세조 사후의 간행 목적과 비교해보면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세조대 이전과 이후의 간경목적은 주로 죽은 이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간경도감 언해본의 간경목적은 모두 백성들에게 불도의 참된 진리를 알게 하여 왕의 교화를 펼치기 위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특히 간경도감본 중 능엄경의 경우 세조가 겪은 불교적 상서 때문에 이 책을 언해하기로 결심했다고 밝히고 있어, 불교적 상서와 불경 간행의 상관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언해 불경이 불교적 상서와 관련되며 동시에 一乘의 법문을 담고 있는 법화경·원각경·월인석보, 역시 세조의 불교적 상서와 관련된 상원사·원각사·낙산사 등을 관리하는 신미·학열·학조 등이 소속된 선종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금강경·능엄경·선종연가집·반야경이라는 것 또한 간접적으로 간경도감의 성격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세조의 이미지 재생산은 국내에만 그치지 않았다. 세조는 금강산 행행 이후 금강산을 화엄경에 나오는 보살주처라고 소개하며 담무갈보살을 친견한 자신의 경험을 국서로 보내었다. 일본의 사신에게는 자신이 경험했던 두 번의 현상을 그린 그림을 주어 보내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에게 수타미를 본 적 있는지 물어보고 수타미를 내어 주며 맛보게 하였으며 이를 일본이나 유구의 군주에게 전해주도록 하였다. 이러한 행동들은 불교적 상서를 대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것이다. 『해동제국기』에 의하면 일본에서 불교적 상서를 이유로 진하하며 통교한 일본 내의 세력은 아래 <표6>과 같다.

 

지역

이름

연도

치하의 이유

幡摩州

吉家

세조 13년

上院寺에서 관음보살 현상

盛久

세조 14년

관음보살 현상

備前州

貞吉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廣家

세조 14년

관음보살 현상

備後州

吉安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安藝州

公家

세조 14년

관음보살 현상

周防州

藝秀

세조 13년

사리 분신

義就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正吉

세조 14년

관음보살 현상

盛祥

세조 14년

관음보살 현상

長門州

弘氏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忠秀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忠重

세조 13년

사리 분신

義長

세조 14년

관음보살 현상

國茂

세조 14년

관음보살 현상

阿波州

義直

세조 14년

관음보살 현상

但馬州

源國吉

세조 13년

사리 분신

出雲州

公順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筑前州

親慶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氏俊

세조 13년

사리 분신

信歲

세조 12년

관음보살 현상

肥前州

源貞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源義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源茂

세조 13년

불사리 雨花

源貞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源重俊

세조 13년

사리 분신

源信吉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肥後州

政重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武敎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薩摩州

源忠國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藤原忠滿

세조 13년

관음보살 현상

<표6>에서 알 수 있듯이 세조 12년~14년 사이에 불교적 상서를 치하하며 통교한 왜인 세력은 31개에 이른다. 그러나 『해동제국기』에는 본래부터 빈번한 교류가 있었던 대마도 등의 왜인이나 유구의 사신 파견 기록은 나와 있지 않기 때문에 하례하는 倭使의 실제 숫자는 훨씬 더 많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즉 불교적 상서를 통해 세조를 초월적 존재로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대외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대외관계에 불교적 상서를 이용한 이유는 일본이나 유구가 불교를 신앙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일본의 사신은 승려가 많았고, 대장경이나 불경을 요구하는 경우도 빈번했다. 세조가 이들을 종적 질서에 포섭하고 조선의 권위를 드러내는데 있어서 불교적 상징을 이용하는 것은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유구국에서 세조를 生佛이라고 칭송하는데에서 세조가 불교적 상서를 이용하여 만들고자 했던 이미지가 실제로 생겨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표6>에서도 볼 수 있듯이 불교적 상서를 통해 세조는 30여명이 넘는 새로운 倭의 세력과 통교할 수 있었고, 이는 조선과 일본의 관계를 대국과 번방의 종적 관계로 만드는데 불교적 상서를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불교적 상서에 동반되는 상서와 은전, 원각사 창건을 비롯한 각종 불사, 간경도감의 불경 언해와 간행, 대외적인 불교 상서의 홍보는 모두 국왕을 초월적 존재로 형상화하기 위한 정치적 의미를 위해 시행되고 이를 통해 이미지를 재생산하였던 것이다.

 

5. 맺음말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세조는 周制로 대표되는 성리학적 정치운영론과 마찰을 빚고 있었다. 때문에 세조는 자신의 권위를 전제적이고 초월적으로 높여줄 수 있는 다른 사상적 기반을 필요로 하였고, 불교는 이러한 세조의 의도와 부합하는 종교였다. 세조가 불교의 정치적인 면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은 세조가 중요하게 생각했던 불경인 『법화경』과 그가 직접 편찬한 『월인석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세조실록』에 등장하는 불교적 상서는 당태종·고려 태조 같은 역대 현군들이 경험했거나 『법화경』에 등장하여 역사적으로 재현되었던 것들이었다. 이를 통해 세조는 자신의 권위를 초월적으로 이미지화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역대 현군에 비유함으로써 자신의 치세를 태평성대로 주장할 수 있었다. 반면 유교적 상서에 대해서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 하례를 받는 빈도는 상대적으로 현저히 적었으며 이에 따른 사유나 은전은 아예 한 번도 있지 않았다. 그러나 불교적 상서는 그의 병과 심리적 불안정 때문은 아니었으며 오히려 정력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정책을 추진하던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었다. 『세조실록』에 불교적 상서가 세조 8년 11월 이후에만 등장하는 것은 다른 사료를 통해 실록 편찬자의 이도적 배치임을 알 수 있었으며, 이는 신숙주·한명회 등이 세조대의 정책을 포기하는 것에 대하여 세조를 즉흥적인 군주로 만듦으로써 일종의 변명을 하고 있다고 추측해볼 수 있다.

불교적 상서는 그 자체로 온전한 의미를 가질 수 없고, 여기서 발생한 이미지를 확대·재생산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사유와 은전은 강력한 인신지배 정책의 불만이 터져나오는 상황에서 백성들에게까지 세조의 권위를 알리는 동시에 불만을 누그러트리는 대민시책으로 작동하였다. 원각사를 비롯한 각종 불사는 불교적 상서를 영원히 증명하는 기념비였다. 간경도감의 불경 언해와 간행 역시 이러한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불교적 상서를 통한 이미지 재생산은 대외관계에까지 영향을 미쳐, 관음보살 현상·사리 분신 등을 통해 세조는 生佛의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고, 기존에 입조하지 않던 30곳이 넘는 倭 세력과 새로 통교할 수 있었다. 대외관계에 불교적 상서가 이용된 것은 일본이 불교를 신앙하는 국가라는 것을 이용한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세조는 간단하게 유교군주와 불교군주로 표현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모든 사상을 자신의 정치적 의도에 맞게 실용적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예컨대 그가 주역에 깊이 침잠하고 『어정주역구결』을 간행한 것은 주역의 천명사상에 깊이 동의하면 한편 경서의 해석을 왕의 권위로 독점하려고 한 결과였다. 불교는 세조가 원하는 초월적 존재로서의 왕의 모습을 가장 손쉽게 제공해주는 사상·종교였고, 때문에 불교적 상서의 발생과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미지의 재생산으로 세조 자신의 권위를 높이려 했던 것이다.

세조의 실용적 모습은 정치사상적 모습에서 뿐만이 아니라 불교사업에 필요한 재정을 마련하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다. 간경도감 등 각종 불교행사에 드는 비용은 기존의 재정의 일부분을 때어 사용했던 것이 아니라 공물대납이라는 기존의 음지에 있었던 收入 분야를 양성화하여 전혀 새로운 재원을 통해 마련했던 것이다. 세조가 후원한 각 사원에 각각 일정한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기는 하였지만 태종과 세종대에 걸쳐 혁파한 사사전과 사사노비를 원점으로 되돌리려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던 것 역시 세조의 불교진흥책이 불교를 고려와 같은 위상으로 부활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활용하려 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다.

세조대의 對佛敎施策은 많은 부분 위와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때문에 세조대 對佛敎施策은 중앙정치와 전혀 관계없는 독자적인 부분도, 세조 개인의 신앙심에서만 발로한 것도 아니요, 세조의 정치적 의도와 긴밀하게 연결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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