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유학사 제11장 퇴계·율곡과 동시대의 성리학
석사4 박세연
명종, 선조 시대에는 많은 학자들이 이기와 심성의 학문을 발달시켜 유학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 중에서도 으뜸은 李滉과 李珥였다. 이황(1501~1570)은 경상도 예안 출신으로 29세인 중종 24년(1529년) 문과 급제 이후 여러 직을 거쳤으나 전원을 동경하고 학문에 충실하기 위해 진퇴를 거듭하였다. 만년에 도산에 서당을 세우고 공부하니 여러 학인들이 모여들었는데 이이 역시 23세에 퇴계에게 도를 물은 바 있다.
이황의 근본사상은 程朱를 철저히 따르는 것이었는데, 특히 이기이원론은 주희의 해석을 그대로 따른 것이다. 주희는 이기 양자의 불잡성과 불리성을 동시에 말했으나 이기를 二物로 보았다. 이황은 형이상적인 理와 형이하적인 氣가 하나일 수 없으며 이기가 一物이라면 태극과 양의가 같은 것이 되어 생하는 것이 없을 것이라 하였다. 이황은 이러한 시각으로 이기의 작용을 설명하는데 이는 주희와는 조금 달랐다. 주희는 이 스스로의 작용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이황은 이를 추상적·형식적·무위적인 것으로만 보지 않아 스스로 동정하고 유행한다고 보았다.
이황의 이원론적 해석은 기대승(1527~1572)과의 사단칠정논변을 낳았다. 퇴계는 道는 순선무악한 理이며, 器는 가선가악한 氣라고 보았으며 이를 심성 문제에도 연결시켜 性의 發인 精을 본연의 성인 사단과 기질의 성인 칠정으로 나누어 보았다. 그리하여 사단은 순선무악한 理의 체용(理之發)으로 칠정은 가선가악한 氣의 작용(氣之發)으로 보았으며, 道心은 사단이고 人心은 칠정으로 나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황의 이러한 시각은 권근(1352~1409)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기대승은 이황의 理氣互發설을 비판하였다. 첫째, 사단과 칠정은 하나의 정이며, 칠정 밖에 사단이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 사단과 칠정을 이기에 분속시키면 이기가 독립된 것이 되어 사단에는 기가, 칠정에는 이가 없는 것이 된다. 셋째, 사단·칠정과 도심·인심의 문제는 달른 것으로 도심과 인심을 이기로 분대헤 발할 수는 있으나 사단·칠정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이황은 기대승에게 이기의 구별이 없을 수 없으며, 性에 있어서 본연과 기질의 차이가 있어 이기로 나누어 말했기 때문에 情 역시 구별이 없을 수 없으므로 사단과 칠정은 모두 정이지만 所從來·所主에 따라 이기로 나눌 수 있다고 답하였다. 그러면서 주희 역시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이라고 언급했음을 지적하였다. 이 논쟁에서 기대승은 끝내 이항의 설에 회의를 가졌으며, 이황은 『聖學十圖』에서 四端理發而氣隨之 七情氣發而理乘之라고 하여 자신의 설을 일부 수정했지만 理氣互發과 四七分對의 논지는 그대로 지켰다. 이황은 理의 우위성을 확고하게 지킨 것이다.
이황의 수양론은 敬으로 집약된다. 경은 인간의 성장과 성숙을 가능케 하는 힘이고 仁을 실현하는 길잡이이다. 이황은 경을 聖學始終의 要라고 하여 강조하였다. 즉 본연의 성에서 유래하는 도심(사단)을 확충하고 기질의 성에서 연유하는 인심(칠정)을 한계지어 인욕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존양과 성찰이 필요한데, 그 바탕이 경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퇴계는 居敬에 바탕한 窮理를 강조한다. 경을 위주로 점진적 궁리를 통해 노력하며 활연관통하여 온전한 知, 참된 知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황의 학문은 영남학파에 깊은 영향을 끼치고 일본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황과 동시대 학자로는 李恒(1499~1576), 曺植(1501~1572), 鄭之雲(1509~1561), 金麟厚(1510~1560), 李中虎(1489~1546), 기대승이 있다. 이항은 이기일원론을 주장하여 서경덕의 주기론과 같은 견해를 보였다. 조식은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으며 산림처사로써 행동하였으나 정치를 도외시 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학문은 敬義로 집약될 수 있는데, 내적 수양에는 경을 외적 행위에는 의를 말하였다. 때문에 그는 실천궁행을 강조하여 이황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의 실천 없음을 질책하였다. 정지운은 金安國(1478~1543), 金正國(1485~1541)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다. 그의 천명도는 권근의 영향을 받았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다시 사단칠정을 이기에 분속시키는 이황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김인후는 인종 사후 산림에 은거하였는데, 태학에 있었을 때 이황과 깊이 교유하였다. 그의 학문은 잘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퇴계와 마찬가지로 이기이물을 주장하였고 이기일물설을 비판하였다. 특이한 점은 그는 천도를 誠으로, 인성을 中으로 파악하고 이것이 和한 것은 善으로 過·不及한 것은 惡으로 파악하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의 사상이 중용을 기본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중호 역시 권근의 설에 근거하여 학문한 것으로 보인다. 유희춘은 벼슬에 나가서 임금을 경연에서 오래 모셨고 이이와 더불어 『經書口訣及諺解』를 찬정하였다. 그러나 이이로부터 바른말하는 절조가 모자르다는 평가를 받았다. 노수신은 선조 빼 벼슬이 영의정이 올랐다. 일찍이 을사사화로 귀양살이를 할 때 이황, 김인후와 왕복 논변을 벌였는데 禪家의 용어를 많이 썼다. 그는 나흠순의 설을 받아들여 인심과 도심이 실상 하나라고 보았으며, 기대승의 사칠론에 공감하였다.
이이는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12세에 진사 초시에 입격하였다. 모친의 사후 잠시 불교에 입문하였으나 29세에 대과에 장원하여 이후로 벼슬하였다. 그는 형이상적인 성리철학뿐만 아니라 형이하적인 실용의 문제에도 관심을 기울여 도학자와 경세가로서 뛰어난 모습을 보였다. 정치가로서는 조광조를, 학자로서는 이황을 숭배했는데, 나흠순과 서경덕의 영향도 받았다.
이이는 태극을 음양의 근거로 보고 이를 理로 규정하는 동시에 그것을 항상 음양 가운데 있는 존재로 해석하였다. 음과 양이 반복되는 까닭은 태극으로서 음양은 始終이 없기 때문에 태극과 음양을 분리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이는 박순과의 왕복 논변에서 나온 것으로 박순은 先天은 아무런 물건이나 조짐이 없는(충막무짐) 陰氣인데 그 가운데 湛一淸虛가 氣의 시초로 음양을 생한다고 보았다. 이에 이이는 충막무짐은 理로 이를 음기로 규정하면 안된다고 하였다. 태극은 음양 이전에 독립해 있는 것이 아니지만 다만 본원을 표현하기 위해 태극은 음양의 근본이 된다고 한 것이다. 박순이 화담의 설을 사승하여 주기론적 존재론을 채택한데 비하여 이이는 태극은 理라는 주리론적 입장을 표방한 것이다.
이이는 이와 기를 이체이물로 규정하는 이황의 순수이원론에 반대하였다. 이이는 이는 한가지이나 기를 타서 나뉨은 다르게 된다고 하여 이를 형이상·무위의 것으로 기를 형이하·유위의 것으로 인식하여 모든 동적 현상의 총화를 기로 보는 동시에 기 자체에 내재한 주재적인 원리를 리라고 규정하였다. 즉 이는 기라는 활동체에 의하여 개별성과 차별성을 낳게 되고 기는 내재적이고 주재적인 이가 아니면 현상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理通氣局이라는 용어를 제시하는데, 이는 구애됨이 없이 통하여 어디서나 그 본연의 모습을 보이지만 기는 그렇지 못하여 차별상을 그러낸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불교철학과 화담학파의 영향을 받은 것인데, 특히 서경덕과 機自爾라는 용어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서경덕의 기불멸설에는 동의하지 않아 기의 본연은 순수하지만 기의 작용에 의하여 차별성을 나타내므로 이와 같은 보편성은 지니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이는 주리·주기의 양파를 절충, 조화시키려고 한 것이다.
율곡은 사람의 心을 이기의 합성으로 보되, 미발인 상태를 性이라 하고 이발인 상태를 情이라 하여서 주희 및 이황과 의견을 같이 하였다. 또한 形氣의 사사로움에서 발생한 것은 인심, 性命의 바름에서 발생한 것을 도심이라고 규정한 견해에 대해서도 동의한다. 그러나 사단칠정을 이기에 분대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그는 사단칠정론과 도심인심론은 다른 것이라 하여 칠정은 사단을 겸할 수 없으나 칠정은 사단을 겸할 수 있는데, 인심과 도심은 사로 상치되어 서로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으니 완전히 다른 논의라고 보았다. 또한 이이는 사단은 순선하고 칠정은 가선가악하다는 이황의 말을 비판하며 사단에 이미 선한 전이 이 있는데 칠정에 또 선한 정이 있으며 마음에 두 가지 근본이 있는 것이라며 이황의 모순적인 부분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사단은 도심만을, 칠정은 인심과 도심을 합하여 말한 것이니 인심과 도심이 양변으로 분대된 것과는 다르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사단과 칠정은 모두 기가 발하여 이가 탄다가 보고 천지의 조화도 이것이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이이 당시의 상황은 수기와 치인, 학문과 정치를 별도로 보는 경향이 농후하였다. 이에 이이는 학문과 경세를 겸하지 않으면 眞儒가 아니라고 하여 두가지를 강조하였다. 이이의 이상은 인의를 중심으로 군주를 철인으로 인도해 권력을 이성으로 제한하는 철인정치·왕도정치였다. 철인정치론은 왕이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민본주의적 정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백성의 힘을 펴주고 산업을 넉넉케 하여 본연의 선심을 보존해주는 것이 중요한 문제였다.
때문에 이이는 개인이나 국가가 어느 정도의 富力을 확보해야 한다는 경제론적 원칙을 견지했으며, 동시에 각 시대에는 거기에 걸맞는 이념과 가치관이 있으므로 구법을 변통해야 한다는 개혁주의적 원칙을 견지하였다. 그는 이러한 원칙에 의거하여 여러 시무책을 왕에게 건의했는데 특히 공물방납과 일족전리의 폐를 심각하게 지적하였다. 그 대책으로 해주에서 행해지던 미대납법(수미법)을 실시할 것을 건의하였다.
이같이 민생을 해치는 폐단에 대하여 변통을 주장함과 동시에 국방과 재정문제에 대해서는 적극 의견을 개진하였다. 먼저 양병을 하기 위해 양민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역을 균일하게 하고 도망한 군사는 한정을 뽑아 보충하며 군사에게는 반드시 보인을 주어 족징의 근심을 없애자고 하였다. 또한 재정을 건강하게 하기 위해 양입위출의 원칙을 지키고 공안을 개정해 국용을 풍족하게 하며 번잡한 제사를 줄이자고 하였다. 지방을 안정케 하기 위하여 소읍을 합쳐 대읍으로 만들어 민력을 기르고 감사를 구임토록 하게 하고자 하였다. 마지막으로 전마를 양성하고 馬籍을 정비하여 전시에 대비하자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동료와 왕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이이의 벗으로는 成渾(1535~1598)이 있는데, 그는 이황을 존숭하였으나 그의 이기호발설에 관해서는 회의를 품고 있다가 중용의 서를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와 논변을 벌였다. 宋翼弼(1534~1599)는 보다 이이의 입장에 가까워 이기일물을 주장하였으며 사단과 칠정을 한 가지 정으로 보았다. 이이의 문인으로는 金長生(1548∼1631), 趙憲(1544 ~ 1592), 李貴(1557 ~ 1633), 黃愼(1560 ~ 161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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