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조선전기 불교탄압사

同黎 2012. 7. 27. 01:39

양주 회암사지. 거대한 면적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양주군 회천면에는 거대한 유적이 펼쳐져있습니다. 지금도 수년째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는 이 곳은 대단한 고구려나 백제의 유적도 아니고, 조선 명종 때 사라진 한 절터입니다. 그러나 최근 발굴조사가 진행되고 있는 이 곳은 왠만한 궁궐보다 넓은 면적과 화련한 건축물의 흔적, 궁궐 건축에 쓰이는 기법 등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곳은 태조부터 명종 때 까지 명실상부한 조선 불교의 중심이었던 회암사의 터입니다. 현재 회암사지 발굴 현장에서 1~2km 올라간 곳에는 해방 이후 새로 지은 회암사가 자리잡고 있으며 주변에는 부도와 비석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과거의 영화는 간데 없지만 그래도 흔적은 많이 남아있죠. 지금도 각이 서 있는 장대석들은 회암사의 수준이 그냥 절과는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학대사의 부도(보물 388호). 화려함과 격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회암사의 격을 보여주는 것은 남아 있는 비석과 부도입니다. 현재 회암사에 남아있는 부도는 지공, 나옹, 무학의 것입니다. 지공은 본래 인도의 고승으로 원나라 때 고려에 넘어와 수년간 법을 펴다가 원나라로 돌아갔습니다. 비록 짧은 시간 머물렀으나 그가 미친 영향은 지대했습니다. 고려 말 사실상 불교철학이 정체되어있던 상황에서 그는 신선한 교리를 몰고왔기 때문입니다. 그의 제자가 나옹화상이며, 또한 그 법을 이은 사람이 조선 개국을 도왔던 자초, 무학대사 입니다. 조선불교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3명의 유골이 모두 이 곳에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유교로 치면 조광조, 이황, 이이의 유골이 모여있는 것과 같은 격이라고나 할까요? 최전성기에 회암사에는 266칸의 전각들이 있었고, 왕의 행차가 빈번해 행궁의 역할을 하는 전각도 있었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도 대단히 큰 절로 남아있어 효령대군이나 세조가 이 곳에 남긴 흔적들이 남아있습니다. 회암사지에서 최근 발견된 청동 요령(흔드는 종)에는 왕사묘엄존자 무학, 조선국왕 이성계, 왕현비, 세자 이방석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이 곳이 왕실과도 인연이 깊은 곳이라는 사실을 잘 알려줍니다. 세조 비 정희왕후도 회암사를 중건하였습니다.


무학대사 부도 앞의 석등 (보물 389호) 조선시대의 앙증맞은 석등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큰 절이 왜 지금은 흔적도 남지 않고 폐허가 되어있을까요? 바로 회암사가 극심한 유생들의 불교탄압의 희생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회암사가 유생들의 적이 된 이유는, 명종시기 중종비인 문정왕후의 숭불책의 중심이 회암사였기 때문입니다. 명종 즉위 후, 수렴첨정을 하기 된 문정왕후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했습니다. 그 중심에 서 있는 사람이 보우라는 스님입니다. 보우는 불교계에서는 중시조이자 순교자로, 유교에서는 요승으로 불리는 승려입니다. 보우는 지금 서울 강남의 봉은사에서 주석하였고, 통합되었던 선종과 교종을 분리시켜 부활시켰으며, 도첩제를 부활 시키는 등 불교부흥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습니다. 회암사 역시 보우가 활동했던 중요한 장소 중에 하나인데요, 보우와 문정왕후는 회암사를 중건하고 무차대회(차별이 없이 누구나 참석할 수 있는 법회)를 열고, 중종의 명복을 비는 약사삼존불화 400점을 회암사에서 만들게 됩니다. 당시 불교 양종 부활에 반대하는 상소가 약 350건, 보우를 죽이라는 상소가 75건이 올라오고, 실록에는 보우와 문정왕후에 대한 극악한 평가가 올라갑니다. 결국 문정왕후가 죽자마자, 보우는 귀양을 가고, 귀양갔던 제주에서 재판도 없이 제주목사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나옹화상의 부도. 무학대사의 것보다 시대가 떨어지며, 조각이 딱딱하고 간단합니다.

보우 사후, 유생들에 의한 극심한 불교탄압이 일어나는 데, 회암사의 소실도 그러한 차원에서 이루어졌다고 생각됩니다. 이미 한차례 의도적인 방화로 사우가 불타고, 화려하게 조각된 부도와 비가 넘어갑니다. 지금 남아잇는 부도를 보면 무학대사의 부도는 매우 화려한데 비해, 지공, 나옹 두 선사의 부도는 초라하고 비석도 없습니다. 이는 유생들에 의해 부도가 파괴되고, 조선 후기에 다시 만들면서 벌어진 현상입니다. 아마 무학은 조선 개국의 공이 있기때문에 함부로 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정왕후 사후 회암사에 대한 기록은 크게 3번 언급됩니다. 먼저 명종 21년에는 "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말도 있고... " 라는 이야기가 있어, 문정왕후 사후 부터 회암사에 대한 보복이 시작됨을 알 수 있습니다. 선조 28년에는 " 화포를 주조할 일에 대하여 ....(중략) 회암사 옛터에 큰 절이 있으니 ...(중략) ... 그것을 가져다 쓰는 데에 별로 구애될 것이 없습니다." 라고 적혀있어 이미 회암사가 불탔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순조 21년에는 광주의 유학이 회암사의 부도를 무너트리고 무덤을 썼으니 벌을 내려야 한다는 주청이 올라옵니다.


회암사지 출토유물. 위쪽의 왼쪽의 사진은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잡상입니다. 잡상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건물의 격이 궁궐만큼 높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보우가 주석했던 봉은사가 아니라 회암사를 불태웠을까요? 조선 정부의 입장에서 봉은사를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봉은사는 성종의 능인 선릉과 중종이 잠들어있는 정릉의 원찰입니다. 원찰은 릉을 관리하는 동시에 왕실 인물들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불교식)를 지내기도 합니다. 국가가 지정한 사찰이기 때문에 유생들로서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지요. 때문에 왕실 원찰이 아닌 회암사, 그리고 행궁으로 쓸 정도로 대단힌 규모를 자랑했던 회암사가 희생양이 된 것이지요.


단속사지 서 삼층석탑(보물 73호) 통일신라 후기의 석탑입니다. 현재는 절은 타고 석탑 두기와 당간지주만 남았습니다.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유생의 탄압은 다른 사찰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경남 산청의 단속사나, 경주 남산의 목 잘린 불상들도 불교에 대한 탄압 증거입니다. 단속사는 본래 통일신라시대부터 이어져온 선종사찰입니다. 단속사는 산청에 있는데, 바로 남명 조식이 공부하던 곧 바로 지척입니다. 지금도 고시공부하는 사람들이 종종 절에 들어가는 일이 있듯이, 당시 사찰은 유생들이 많이 모여 공부하던 곳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에는 종이를 거의 절에서 만들었고, 목판본 간행이 절에서 많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유생들의 출입이 더욱 빈번했습니다. 그러나 유생들은 절에 와서 술과 고기를 즐기고 스님들을 하인 부리듯이 해 폐해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찰들은 왕의 위패를 모시기를 원했습니다. 왕실 위패가 있는 곳에는 유생들의 출입이 금해지거든요. 여튼 단속사에는 남명의 제자들이 많이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삼가귀감>이르는 책이었습니다. 삼가귀감은 불, 유, 도 삼교의 교훈점을 모아 정리해놓은 책인데, 조식의 제자 중 성여신이라는 자가 이 책의 내용이 불순하며, 가장 뛰어난 유가의 내용이 마지막에 실려있다며 삼가귀감의 목판과 사천왕상을 불지리는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를 두고 조식은 광간(狂簡)하다라고 평할 정도였습니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187호) 통일신라 시기의 매우 특이하고 잘 만든 불상이지만, 불두가 누군가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절단되었습니다. 경주 남산에는 이런 불상들이 즐비합니다.

경주에는 수 많은 불상들이 있는데, 목이 잘린 경우가 많습니다. 그리고 조사 결과 경주 지역에 우물들 여러 곳에서 잘린 불두(佛頭)가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분황사 우물에서 나온 목잘린 불상들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습니다. 목을 자르고 이를 우물에 버린다는 것은 불상의 훼손이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의식적이고 고의적으로 행해졌으며, 일종의 보여주기식 퍼포먼스라는 것입니다. 공개적인 경고의 의미도 되는 것이죠. 부처에 대한 효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집단 광기를 보여주는 것 같은 이런 일들이 경주와 안동에서는 특히 많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 지방에서는 절을 허물고 서원, 집이나 무덤을 세우거나, 탑신석이 건물의 주춧돌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이 목격되고 있습니다.

사실 조선시대 불교의 역할을 아직 연구될 부분이 많은 곳입니다. 승병과 승역의 문제라던가, 원찰, 사원경제, 사상사적 흐름, 미술사는 모두 아직 연구 미개척지입니다. 다만 이렇게 심한 탄압 속에서도 승려의 수는 줄지 않았고, 갑오개혁으로 불교에 대한 공식적 탄압이 끝나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세력을 확장시키는 것을 보면 이념이나 종교는 강제로 누를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강의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