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부석사의 미투리 생산

同黎 2012. 7. 27. 02:03

조선시대 승려들은 왕실과 연결된 사찰을 제외하고는 (혹은 왕실과 연결된 절이라고 할 지라도) 대부분 자급자족하여야 했기 때문에 농업은 물론이고 수공업과 상업에도 종사하여야 했습니다. 농업은 조선시대의 가장 기본적인 산업이기 때문에 승려들 역시 당연히 농업에 종사했지만, 수공업과 상업도 이루어졌다는 것이 특이합니다.

조선시대 사원은 대부분 국가에 공물을 부담하여야 했습니다. 지리지 등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사원 부담의 공물은 종이, 미투리, 고사리, 도라지, 잣, 밤, 화살대용 대나무, 목기, 버섯, 머루, 홍시, 으름 등입니다. 그 중에서도 종이는 국가와 지방관청이 사원이 부담시키는 가장 보편적인 물건이었습니다. 대부분의 큰 사찰에서는 종이를 만들어 중앙 관청이나 지방 관청에 납부하였습니다.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사찰이 많은데 소위 “비사리구시”라고 불리는 나무로 만든 대형 수조가 바로 그것입니다. 법주사에는 큰 철제 솥도 남아 있는데, 이런 것들을 현재 사찰에서는 주로 스님들의 밥을 하던 도구로 설명하며, 사원이 과거 번성했음을 증명하는 증거로 삼지만, 제가 보기엔 영락없이 종이 제조를 위한 도구들입니다. 종이 외에 미투리 역시 사원의 주요 공납품 중 하나입니다. (이 때의 미투리는 麻鞋, 芒鞋 등을 통칭합니다. )


순천 송광사의 비사리구시

재미있는 것은 이러한 진상, 공납품들을 바탕으로 승려들이 상업에 나선다는 것입니다. 비변사등록 정조 12년 기사에 보면 승려들이 방물(청에 사신갈 때 바치는 물건들)로 진상해야 할 종이 중 최상품을 골라서 몰래 상인들에게 팔고 상인들은 이것을 가지고 몰래 만주로 들어가 시장을 열었다 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영조실록에는 승려가 몰래 돈(錢)과 비단(帛)을 소에 싣고 압록강을 건너 가다가 물에 빠진 것을 청인들이 구해주었다라는 기사가 나옵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절에서 어떤 물건으로 상업활동을 했는지 모른다는 것인데, 다행히 임진왜란 시기 한 선비의 일기를 통해 부석사의 미투리 생산과 판매에 관하여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쇄미록은 선조 때의 양반 오희문이 쓴 일기입니다. 오희문은 양반이면서도 자신의 노비를 통해서 많은 상업활동을 하였습니다. 번동(反同)이라고 하는 이 상업 활동은, 직접 상업에 종사할 수 없는 양반들이 많이 택하는 방식입니다. 그는 억수와 덕노라는 노비를 시켜 한 곳에서 물건을 사고, 다른 곳에서 물건을 팔아 그 시세 차익을 노리를 방식으로 이득을 얻었습니다. 그는 1600년 덕노를 부석사로 보내 무명 5필과 미투리 485개를 거래합니다. 그리고 덕노는 그 것을 서울에서 판매해 무명 10필을 벌어옵니다. (참고로 조선시대 무명은 쌀, 콩과 함께 화폐의 역할을 대신 하는 주요한 현물입니다.) 꼭 2배의 이득을 얻음 셈이죠. 1600년은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은 해로, 당시 서울의 물가가 폭등하였고, 덩달아 미투리의 물가도 몇 배로 뛰어올랐었다고 합니다.

오희문은 이에 다시 무명 4필을 부석사로 미리 보내고, 미투리를 주문합니다. 즉 선불제의 형태로 미투리를 주문했던 것이죠. 그런데 뜻밖에 억수가 돌아오는 길에 부석사에서 지난 번에 보냈던 무명 4필을 도로 가지고 돌아옵니다. 미투리를 팔아 서울에 다녀올 밑천을 마련하려 했던 오희문의 입장에서는 대단히 당혹스러웠다고 일기에 쓰고 있습니다. 기실 부석사와 오희문은 이전부터 여러 번 미투리를 주문하고 거래한 적이 있었는데, 이러한 경우는 처음이었던 것이죠. 며칠 후 덕노가 돌아오자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됩니다. 즉 부석사에 아예 미투리 상인들이 여럿 자리를 잡고 앉아서 만드는 족족 미투리를 좋은 가격에 사갔던 것이죠. 즉 부석사는 직접 상인들과 거래하면서 더 많은 이득을 챙겨야했기 때문에 부득이 오희문의 청의 거절했던 것이죠. 즉 승려들은 좀 더 많은 이득을 얻기 위해 시장에서 직접 주문을 받아 판매하는 것으로 미투리 생산의 방향을 바꾼 것입니다.

이를 통해 승려의 상업 활동에 대한 일면모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렇게 얻은 이득이 얼마나 많았고, 또 어떻게 썼는지, 그리고 사원은 운영하기에 충분했는지는 알기 어렵습니다. 다만 승려들이 부담해야 했던 공물이 상품으로 변해갔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이 부석사 미투리 생산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역사적 의의가 아닌가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