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계 박세당의 역사적 위치
조선후기 석사3
박세연
1. 머리말
양란 이후 국가재조의 과제를 안은 조선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사대와 대명의리라는 이념은 그 어느 때보다 고조되어 국가의 주류·지배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이후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사상사과 정치사의 흐름은 어떻게 하면 더 주자 성리학을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노력으로 압축될 수 있다. 이를 통해 조선성리학은 인식론적 차원에 머물러 있던 유학을 존재론적 차원으로 변모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류에 반발하는 흐름 역시 계속 등장하였다. 주자-퇴계-율곡으로 이어지는 ‘道統’을 지키려했던 서인-노론세력 밖에서 혹은 그 안에서 일관적인 흐름에 대한 반발이 등장했던 것이다. 최명길, 김육, 조익 등 조정 내부에서 뿐만 아니라 윤휴, 윤증, 박세채, 유형원, 남구만 등 숱한 인물들이 “정통성리학”에서 벗어난 사고를 하고 있었다. 18세기이 이르러 이러한 인물들이 더욱 늘어나고 이들을 학계에서 ‘실학자’로 통칭하고 있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의 사상이 과연 저항 이데올로기인가 혹은 비주류-비공식 이데올로기에 그쳤는가 이다. 만약 이들의 사상이 비주류-비공식 이데올로기에 그쳤다는 이는 성리학에 대한 변주에 불과하며, 그 진폭도 역사적 의미를 가지지 못할 정도에 그쳤기 때문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실제로 이들의 사상은 다양하지만 중화의 회복이라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파열구를 내려는 사상은 찾기 어렵다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사상사 연구가 다양한 인물을 내세워 탈성리학·탈유학적 성격을 조선사회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지나치게 다양한 인물이 다소 일관성 없이 주목되고, 지나치게 당시 시대흐름과의 차이점만 부각하면서 그들의 사상이 시대에 용납되는 것인지에 대한 당시대적 시각의 연구는 상대적으로 소흘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을 극복하려면 조선 지식인들의 저항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적출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들의 유학사상 외에도 정치사상과 대외인식에 귀 기울일 수밖에 없다. 조선사회에서 사상과 정치는 일치하는 것이며, 이들의 실제적인 정치활동과 대외인식은 곧바로 이들의 사상적 지향과 연결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반하여 서계 박세당의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려고 한다. 서계가 살았던 사대적 배경과 그의 삶, 그의 경학과 정치사상·대외인식을 종합적으로 보아야 서계의 사상이 저항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는지 혹은 비주류-비공식 이데올로기에 그쳤는지 고찰할 수 있을 것이다.
2. 17세기 후반의 조선사회와 박세당
1) 17세기 후반의 조선사회
서계가 살았던 시대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보는 것은 그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리라 생각한다. 서계가 기사환국의 과정에서 아들 朴泰輔를 잃고, 자신의 노소론의 대립과정에서 정치적 시력을 겪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삶은 당대 정치사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17세기 후반의 조선은 성리학이 국가 통치이념으로 굳건히 뿌리 내린 사회였다. 때문에 성리학적 명분과 의리는 단순한 도덕으로서가 아니라 정권의 향방과 정치 참여자들의 생사를 좌우할 수도 있는 물질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를 가장 적절하게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예송논쟁과 환국정치이다. 예송논쟁은 성리학적 이념이 현실에 적용되는 것을 눈앞에 보여주는 행위인 禮에 정치적 명분을 부여하면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의리 시비는 당쟁의 핵심적 논리로 작용하였고, 이는 숙종대 환국정치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예송논쟁은 분당정치의 파탄, 혹은 사림정치의 전성으로 평가되지만 그 이후 의리와 명분이 정치의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정책적 의견 차이가 아닌 의리시비는 붕당간의 갈등을 봉합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끝없이 다른 의리시비와 이에 따른 분당을 유발했다. 즉 의리의 강화는 사제관계나 지연관계를 강화시켜 같은 師門 혹은 붕당 내에 이견을 존재하게 어렵게 만드는 동시에, 이견이 존재할 경우 이를 곧다로 분당으로 연결시키게 만든 것이다. 회니시비와 노소론분기는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다. 박세당과 박태보의 정치적 시련 역시 이러한 시대적 배경과 연결되어 있다.
다만 이 시기 정책결정에 있어서 붕당이 얼마만큼의 역할을 했는지는 미지수이다. 박세당의 젊은 시절에 해당하는 인조-현종대의 정책결정과정을 대동법을 중심으로 살펴본 연구에서 정책결정과 붕당의 직접적 상관관계는 없다는 의견이 제출되었다. 숙종대 정국운영에 관해서는 붕당과 왕권의 시각으로 본 연구가 있었으나, 숙종대 정책결정과정 자체에 주목한 연구는 없으며, 붕단 간의 대립이 이전 보다 격화되는 등 다소 다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붕당의 역할에 대하여 단언하기는 어렵다.
한 가지 더 생각해야할 부분은 당시의 대청인식이다. 조선의 대명의리는 임진왜란 이후 강화되었으나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공식적으로 청에 사대하여야 했으며, 수 년 후 명이 멸망하면서 명에 대한 사대는 영영 불가능한 것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의 대명의리는 곧 중화회복의식으로 전환되었고, 청이 멸망하고 곧 한족의 나라가 다시 세워질 것이라는 영고탑회귀설은 영조대까지 남아 조선의 북방정책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중화가 재건될 것이라는 믿음이 약해졌고, 조정에서는 청에 사대하는 현실적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조야에서는 여러 논쟁이 지속되고 있었다. 청의 연호를 사용하는 문제, 청이 내려준 시호를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그것이다. 박세당은 청의 연호를 사용해야 한다는 현실적 주장을 펼쳤다.
2) 박세당의 일생
박세당의 본관은 반남으로 1629년(인조 7) 아버지 박정과 어머니 양주윤씨 사이에서 4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병자호란의 와중에 갖은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박세당은 거듭되는 상화와 전란으로 10여 세에 이르러 비로소 둘째 형인 박세견에게 공부를 배우고 14살에는 고모부인 정사무에게의 밑에서 수학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세당은 특정한 어느 학파의 영향을 받기 보다는 가학에 기초하여 독자적인 학문세계를 형성해나갈 수 있었다.
서계는 17세에 의령남씨와 혼인한다. 이후 처남인 남구만, 처숙부인 남이성과 활발한 교류를 하게 되었다. 이후 박세당은 서인 경화사족들에게 많은 정치적 영향을 끼쳐서 노소론 분기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32세(현종 1)에 증광문과에 장원 급제한 박세당은 이후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병조정랑,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함경북도병마평사를 거쳤으며 서장관으로 연행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곧 현실정치에서 물러나 양주 수락산 석천동으로 물러나 저술활동에 매진하였다.
잠시 벼슬에 나오기도 하였지만 환국의 과정에서 두 아들인 박태유와 박태보가 목숨을 잃게 되면서 이후 서인이 재집권하지만 두문불출하였다. 이후 집의, 사간, 홍문관부제학, 이조참의, 호조참판, 공조판서, 이조판서, 우참찬, 대사헌, 한성판윤 등의 벼슬이 주어지지만 모두 거절하며 석천동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현실정치에 완전히 무심하였던 것은 아니어서 제2차 예송논쟁때는 송시열의 재최기년설에 반대하여 대공설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석천동에서 그는 다양한 학문적 영역을 탐구하였다. 사서와 삼경을 대상으로 한 사변록은 당시 교조화되던 주자의 학설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원시유학을 지향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노장학에 대한 관심도 드러내어 신주도덕경과 남화경주해산보와 같은 저술을 남겼다. 농업에 관심을 기울여 旱田農業 중심의 색경을 저술하기도 하였다.
이후 그가 백헌 이경석의 신도비명을 지었을 때 송시열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노론으로부터 배격을 받았다. 그의 사변록 역시 사문난적으로 몰렸다. 결국 이 때문에 김창협, 김창흡과 성균관 유생들의 연명상소를 삭직당하고 전라도 옥과로 유배가지만 문인들의 상소로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3개월 후 석천동에서 사망하고 만다.
3. 서계 경학의 탈주자학·양명학적 성격
1) 서계 경학과 주자와의 견해차이
본장에서는 박세당의 사변록에 나타나는 주자와의 견해차이와 양명학적 성격을 살펴보기로 한다. 박세당은 소론으로 정계에서 남인이 제거된 이후 이조판서에 제수되기도 하였으나 노론과의 대립이 계속되자 양주 수락산 석천동으로 물러나 저술활동에 매진하였다. 저술시기의 차이는 있지만 대학사변론, 사서사변론, 서경사변록 그리고 완성되지 못한 시경사변론은 서계 사상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사변록은 그가 이경석 신도비를 찬하면서 송시열을 깍아내렸을 때, 주자의 설을 고쳤다고 하여 그를 사문난적으로 낙인찍고 귀양하게 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후 사변록은 숙종의 명으로 불태워진다.
① 天과 理, 理와 性
주자성리학이 한당유학과 다른 점은 天의 의미에 理를 첨가한 것이다. 본래 천은 자연물로서 창공과 인격신인 상제의 의미를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정주학자들은 天卽理라는 명제를 제창하여 천을 ‘일체를 주장하는 所以然, 所當然의 의미를 지닌 것’으로 이해하였다. 따라서 천은 太極을 의미하고 상제로서의 의미는 퇴색되게 된 것이다. 이른바 義理天觀, 理法天觀이 이것이다. 이에 따르면 천명은 천도의 유행으로 物에 부여된 것이 사물의 당여한 소이가 된다.
그러나 서계는 천의 의미를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즉 이를 氣의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여기서의 기는 공기와 같은 것으로 땅을 흙이라고 보는 것과 같다.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할 때 천즉리라는 명제도 수정하게 된다. 서계를 理는 천이 천이 되게끔 하는 소이일 뿐이라 하여, 천과 리의 연관성은 인정하지만 천은 곧 리가 된다는 사고에는 동의하지 않고 있다. 천은 말없이 있을 뿐이며, 道=理는 그 변화생성 속에 있는 것이다. 이는 이법천관을 부정하는 것이다.
천즉리라는 성리학적 명제를 바탕으로 하면 天命을 이르는 말인 性은 곧 理가 된다. 따라서 性卽理가 되는 것이다. 또한 리는 우주의 근원인 태극의 실제이기 때문에 만물에 두루 존재하게 된다. 이른바 理一分殊가 이것이다. 따라서 기의 측면을 고려치 않는다면 인성과 물성이 같게 된다.
서계는 천즉리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중용 朱子註의 性卽理를 부정한다. 그가 생각하기에 성과 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을 뿐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성은 상제가 부여한 리, 즉 智의 분성으로 보는 것이다. 나아가 서계는 性·理·道·敎를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하였다. 리와 성은 각각 天과 人에 해당하는 것으로 사용되는 차원과 의미 내용이 달라 혼용하면 혼란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서계는 인성과 물성이 같다는 이일분수까지 부정한다. 리로 인하여 생긴 성은 인간에게만 있으며 타물에게도 성이 있지만 그 類가 인간과 다르고 오상의 덕이 없어 겸할 수 없는 것이다.
서계가 성과 리를 동일시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주자와는 달리 성을 형이하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성즉리에 따르면 성은 리와 같은 형이상의 것이고 기는 형이하지만 이를 서계는 반대하였다. 그는 성을 각 形이 리를 함유하여 이룬 才로 보고 있다. 재는 인간과 타물을 막록하고 器에 내재되어 있기에 형이하의 영역인 것이며 오히려 氣와 가까운 것이다. 이는 맹자의 설과 유사하며 서계가 원시유학을 회복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② 下學과 上達, 已發과 未發의 공부론
大學의 格物致知章은 전문이 사라진 것을 주자가 채워 넣은 것이다. 여기서 주자는 下學而上達의 공부 중 상달의 마지막 단계인 豁然貫通을 설명하였다. 물리의 극처에 이르지 않은 바가 없는 격물과 내 마음의 아는 바가 다자히 않음이 없는 至知에 이르면 사물의 온전한 모습이 드러나 격물의 순간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식의 정도가 이 경지에 다다라야 意가 實해지는 것이다.
박세당은 이 점에서부터 문제를 제기한다. 즉 대학원 초학자의 책으로 誠意章에서 보아도 공부를 비근한 것에 빗대어 논하고 있는데, 그 전단계인 격물설에서 공부의 가장 깊은 단계에 이르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는 주자의 활연관통설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었다. 서계는 격물과 치지를 한가지라고 하며, 사실상 불가능한 활연관통의 경지 대신 일상에서의 앎, 즉 하학을 치지라고 하였다. 이는 格物과 物格을 동일선상에서 논의하는 성리학적 공부론을 문제시하는 것이었으며, 지와 행의 간격을 허물로 실천지향적 공부를 지향하는 것이다. 17세기 이후 부각된 상달에 관한 성리학의 無實性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공부론을 제시한 것이다.
하학과 상달 공부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논쟁은 남명과 퇴계 사이에서도 있었다. 남명은 퇴계에게 일상생활과 공부의 괴리를 지적하였지만 퇴계는 항상 하학공부에 힘썼다. 그러나 퇴계가 형이상과 형이하의 세계를 가치론적으로 엄격히 구분한데 비하여 서계는 가치론적 분리를 부정하고 격물치지를 형이하적 경험의 차원으로 전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격물의 대상을 하학에 두고자 하는 생각은 순암이나 다산 등에게도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다만 순암과 다산의 단계에 들어서면 하학의 실체를 구체화하고 있는데 비하여 서계는 아직 하학과 상달의 가치론적 차이를 불식시키는데 그치고 있다.
형이하를 중요시여기는 서계는 생각은 이발과 미발의 공부론에서 영향을 끼쳤다. 주자의 경우 본래 사람의 마음은 항상 이발의 상태에 있고, 미발은 이발의 마음속에 내재해있는 본체인 性으로 보는 중화구설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따르면 미발은 공부가 불가능한 암흑의 세계이다. 그러나 이의 수정인 중화신설에 따르면 미발의 상태는 지각이 살아 움직이는 상태로 모든 사람의 마음에 已發之時와 未發之時가 동시에 존재하며 미발에 대한 존양공부를 다시 해야 한다. 그리고 미발시의 존양공부는 刷掃應待進退之節의 소학 공부로 보았다. 중화신설은 미발과 이발을 모두 형이하의 세계로 보고 靜과 動 양자의 영역에서 각각 戒愼恐懼와 謹篤의 공부를 설정한 것이다.
그러나 서계는 미발에 대한 중화신설의 설명을 인정하지 않고, 미발을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상태라고 비판하였다. 이미 사려가 있다면 이는 미발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체가 없는 미발의 상태에서 계신공구하여 적연부동한 상태에서 존양해야 희로애락이 미발의 의식의 전 상태로 돌아가는 공부를 한다면 이는 불교의 禪定과 같은 것으로 허깨비 공부라는 것이라 하였다. 즉 미발을 강조하며 일상의 실천을 등한시하는 성리학적 공부론을 비판한 것이다. 서계의 이러한 주장은 인성과 물성을 구별해야 한다는 주장과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양명학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③ 고전의 해석 - 詩經論을 중심으로
시경에는 음란하다고 볼만한 시가 많이 있으나 공자가 시 삼백편은 思無邪이라 평가하고 이를 주자가 도덕적으로 해석한 이후 대부분의 유학자들이 이 견해를 따랐다. 결과적으로 현재와 과거의 해석 차이가 가장 큰 경전이 되었다. 따라서 시경을 중심으로 하는 서계의 고전 해석을 기존의 성리학적 해석과 비교하려는 시도는 적합하다.
서계의 시경 해석은 성인의 학설도 결함이 있을 수 있다는 태도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思無邪에 대한 해석이다. 주자는 이를 사람이 시를 읽고 시를 읽고 선악을 구분하게 될 수 있다는 결과론으로 해석한데 비하여, 서계는 이를 시가 精에 기반한 것으로 허위가 없기 때문에 사무사라고 했다고 해석하고 있다. 주자가 위작이라 생각하여 비판하고 詩傳에서 제외한 大序 등의 주자의 글과 함께 再錄하고 여기에 대한 재평가를 시도한 것 역시 주자의 해석을 극복하려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시경사변록에서 다루어진 가장 큰 쟁점은 시 발생에 관한 심성론적 논란이다. 즉 시라는 것이 인간 심성의 어떤 부분에 근거를 둔는가 하는 문제이다. 주자에 따르면 하늘이 부여한 性은 고요한 것이며, 성이 사물에 감응해 발한 性之欲이 정이기 때문에 시는 성에 본원을 두고 그 발동인 정의 소산으로 나타난 것이다. 시의 악한 부분은 성이 외물과 인욕에 가려 정이 악하게 나타난 것이다. 공자는 시경에 성의 순정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두 극단을 정리하여 산삭하였다고 주자는 생각하였다.
그러나 서계는 性을 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성과 정을 구분하였는데, 성은 道心으로 인의예지와 같은 것이고 정은 人心으로 희로애락과 같은 것이므로 인심은 도심에서 나올 수 없으며 두 가지는 다른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정은 성과 다른 것이며 마음에 실체적 근거를 지닌다. 그리고 시는 바로 정에서 나온 것이다. 서계는 정의 근거를 보다 확실하게 인정하고 그 자치도 적극적으로 평가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의 성에의 윤리적 종속성은 인정하는 모순적 면모도 보여준다.
다음으로 서계는 시의 國風은 천자가 제후를 순수하며 시를 모아 바치게 하여 채록한 것이라는 주자의 견해에 의문을 제기하고 ,소남과 주남의 대상에 대한 주자의 설을 사변적 고찰을 통해 비판하였다. 실증주의적 방법보다 무리한 해석을 자제한 체 문제 내면의 합리성을 검토하는 사변적 방법은 사상사의 전환 국면에서 흔히 나타나는 예가 아닌가 하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론에서도 나타난다. 박세당은 주자설에 대한 상대화와 비판적 접근을 꾀하고 있지만 주자 이후 반주자적 시경론이 한당유학의 관점으로 기울어진데 비하여 여기에 대해서는 회의적 태도를 보인다. 무엇보다는 세계는 작품의 내부적 합리성을 존중해 해석상의 비약을 자제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시경 해석의 큰 테두리를 벗어나지는 못했으나 시전에 대한 이의제기와 독자적 재검토는 중요한 역사적 전환의 의미를 지닌다.
2) 서계 사상의 양명학적 성격
그렇다면 서계 사상과 양명학은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는가? 서계가 성즉리의 테제에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그가 어떤 영향을 받아서 자신의 사상을 키웠는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서계의 사상에는 노장의 영향도 보이지만 기본적으로 유학적 입작을 버리지 않았고, 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는 점에서 비록 이단으로 낙인찍혔지만 당시 조선에 소개되었던 양명학과의 연관성을 고려해볼 수 있다.
양명학은 일찍이 이황에게 논척된 이후 이단시 되었으나 최명길의 가학을 통해 전승되었다. 서계는 40세에 冬至使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왔으며, 최명길의 후손인 최석정과 친밀하였으므로 양명학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최명길의 학문에 대한 서계의 긍정적 평가 역시 그의 개방적 태도와 함께 양명학을 접했을 가능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다만 일정한 인정 속에서도 그것을 완전히 자신의 학문으로 수용하지는 않은 듯하다.
서계와 양명학의 유상성은 격물에 대한 해석에서 드러난다. 그는 格을 則이나 正으로 읽을 것을 제안하였다. 그러면서 주자와 같이 事와 物을 같은 것으로 해석하는 데에도 반대한다. 즉 대학의 팔조목 중에 天下·國·身·心·意·物을 物로, 平·治·修·正·誠·致·格을 事로 분리하였다. 그리고 물은 격물의 대상으로 사는 치지의 대상으로 이해하였다. 격물은 객관적 사물의 법칙을 이해하고, 치지는 사에 나아가 정당함을 구해 의심 없는 상태에 이르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는 격물을 사물의 이치를 궁리하여 극처에 이르지 않은 것이 없게 하도록 하는 것으로, 치지를 나의 지식을 다하여 아는 바가 다하지 않음이 없게 하고자 하는 것으로 보는 주자와는 다른 견해이다. 서계의 설명은 마음의 본체에서 理를 추구하는 것을 지행합일의 내용으로 삼는 양명학과 유사성을 지닌다.
양명학에서는 주자의 격물설을 비판하며 격을 正으로, 치지를 맹장의 良知로 보고 物을 事意로 보았다. 즉 격물은 내심의 악에 관한 사의를 바로잡는 것이다. 양명은 주자의 격물설은 심과 리를 둘로 나누어 보게 하여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균열시키는 것으로 지적하였다. 주자의 이러한 이원적 파악은 주관과 객관의 괴리를 커지게하여 활연관통의 경지에 결코 오를게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서계의 사상이 이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서계의 正은 바로잡는 것이 아니라 물칙의 올바른 것, 객관적인 사물인식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행위이다. 오히려 물칙을 찾는 것은 주자의 학설과 유사성을 보인다. 그러나 서계는 사물의 리를 찾고 잇지 않다. 즉 각각의 개체성을 강조하지만 보편적 원칙을 강조하지는 않는 것이다. 이는 하학에 치중해야 한다는 서계의 공부론과 일치한다.
인성과 물성은 구분되어야 하며, 일을 통하지 않는 계신공구의 미발 공부는 도덕적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서계의 주장 또한 양명학과 일치하는 부분이 있다. 양명 역시 주자가 미발과 이발의 함양·성찰 공부를 나누어 미발이발을 관통하는 하나의 공부법은 제시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양명은 미발이발 즉 동·정을 일관하는 수행의 조화를 강조하였다.
하학 공부에 대한 서계의 강조는 그의 시성론과 연결되어 있다. 그는 존양 공부를 통해 천리를 체인하는 성리학적 공부론을 비판하며 존양 공부는 아무것도 맹동하지 않은 미발시의 공부가 아니라 이발시의 공부임을 강조하였다.그에게 있어서 천리는 마음 속에 밝게 드러나 있어서 이에 따르는 順天理가 필요한 것이지, 存天理가 필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성은 하늘에게서 부여 받아 마음속에 밝은 바가 되어 리에 어긋남이 없다. 마음이 리보다 더 본질적인 것이 된 것이다. 천리가 마음 속에 있기 때문에 이를 따르거나 따르지 않음이 있을 뿐이지 있고 없고를 따질 수는 없는 것이다.
서계의 심성론은 양명학에서의 양지와 유사하다. 마음공부는 주어진 理法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밝은 심의 본체 즉 양지의 마음을 따르는 것이다. 이러한 공부는 이발미발을 관통하는 마음이 주체가 된다. 敬을 主一無敵으로 정의하는 것에 반대하고 다만 事와 관련되어서 삼사는 修道의 일종으로 파악하는 것 또한 양명학에서의 실천적 수도 중시와 비견된다.
이상의 내용은 모두 서계가 성즉리를 부정하고 성과 리를 다른 범주의 밟은 마음의 영명성으로 정의한 데에서 예견된다. 이러한 해석은 앞의 시경론에서도 살펴보았듯이 성과 정을 다른 범주로 해석하여 주자학의 체용론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써 정과 인욕을 자연적인 현상으로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식은 역시 양명학과 일치하는 것으로 서계가 주자학 공부론의 관념성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양명학을 선택적으로 수용하고 있음을 알게 해준다.
4. 서계 정치사상의 脫對明義理적 성격
이상에서 경학을 중심으로 한 서계 유학사상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1장에서도 언급했듯이 이것만으로 서계 사상의 성격을 단정지을 수는 없다. 현실에서 유학사상이 어떻게 발현되었는지 탐구하지 않고는 그 사상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본장에서는 서계의 정치사상에 주목하여 그가 시대의 지배-주류 이데올로기에 어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임진왜란 이후 대명의리가 급속히 강화되고 강조되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광해군이 폐위당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도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와 화친하려 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두 번의 호란을 겪으면서 조선은 어쩔 수 없이 새롭게 떠오르는 강제인 청에게 사대하게 되었고, 청이 입관하여 명을 완전히 멸망시키게 되면서 당시 지식인들은 극도의 혼란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들은 이적인 청에 항복했다는 충격과 청이 정통왕조인 명나라를 대체했다는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을 극복하고 설명해야 하는 과제에 부딪혔다. 이 상황에서 조선의 지배층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동아시아 중화질서의 붕괴란느 현실을 인정하지 않고 명나라의 부활을 고대하거나 새로운 중화를 세우는 길이며, 다른 하나는 일본과 같이 동아시아 중화질서의 붕괴를 인정하고 새로운 질서를 구축하는 길이었다.
조선은 전자를 택하였다. 17세기 조선은 명나라의 부활을 고대하였고, 청이 곧 멸망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영고탑회귀설로 구체화되었고, 오랑캐는 100년이 가지 못한다는 믿음 아래 기다려왔다. 또는 청을 직접 정벌한다는 북벌론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즉 중화회복의식의 발현이었다. 그러나 청이 마지막 희망이었던 삼번의 난을 진압하고 대만의 정씨 일가를 복속키셨으며 강희·옹정·건륭의 치세를 거치면서 더욱 단단해지면서 북벌은 좌절되었고 대신 중화계승의식이 형성되면서 정통론이 강화되었다. 박세당은 바로 중화회복의식이 중화계승의식으로 전화되는 그 길모퉁이에 있었다.
특이하게도 박세당은 중화회복의식이 중화계승의식으로 바뀌어가며 대명의리를 기반으로 한 정통론이 더욱 강화되는 과정에서 정반대의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는 송시열을 중심으로 강조되었던 大義를 虛文으로 비판하고 이를 물리치고 실효를 숭상해야 반드시 天心에 부합하도 民情에 마땅할 것이라고 상소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이경석의 신도비명에서 더 잘 드러난다. 이경석은 인조와 효종의 대신으로 삼전도비의 비문을 지은 사람이다. 그 역시 서인이었으나 송시열 등의 공격을 받았다. 이는 최명길도 마찬가지로 송시열은 화의론자들을 利를 위해 義를 버린 소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경석은 중국의 역적인 두손, 손적과 비교하여 공격하였다. 이에 박세당은 이경석의 신도비명에서 송시열을 올빼미에 이유하며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서경에서 말하길 老成人은 욕보일 수 없다 했으니, 老成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이와 같다. 노성을 욕보이는 자인즉 천하에서 상서롭지 못함이 이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감히 이와 같은 상서롭지 못한 일을 저지르는 자는 역시 반드시 상스럽지 못한 보복을 받는 것이니 이것이 하늘의 도리이다. 가히 두렵지 아니하랴.
반면 최명길 등 화의론자들을 적극적으로 비호하였다. 즉 오랑캐와 전쟁을 고집하다 결국을 멸망한 石晉의 예를 들면서 상황에 맞지 않은 의리가 결국 국가멸망을 가져온다는 점을 지적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최명길에 대해서는 ‘무너지는 사직을 보전하고 위태로운 생민을 편안하게 한 공로’가 있다며 칭송하고 있다.
서계는 송시열이 정몽주와 박상충을 명을 사대한 것을 주장한 것에 의거하여 尊王攘夷하였다고 포장하려는 데에도 반대하였다. 서계는 이들의 공이 前朝 고려에 충성한데 있는 것이지 대명의리를 지킨 것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점은 소론의 중진인 박세채와도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었다. 이렇듯 존양론적 역사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崇禎 연호 사용에 대한 부정적 입장, 淸使가 왔을 때 관리들이 私義를 내세워 등청을 거부한 것에 대한 부정적 입장의 이유인 것이다.
박세채와의 의견 차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존양론과 대명의리는 노론과 소론간의 차이가 아닌 조선사회를 지배했던 지배-주류 이데올로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세당은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 서계의 정치사상은 3장에서 살펴보았던 경학론과 연결되어 있다. 허문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는 실효의 정책을 중시하였고, 이는 곧 형이하의 하학공부를 중시하였던 그의 공부론과 직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계의 정치사상은 소론 내에서도 소수의 의견으로 시대에 환영받기 힘든 것이었다. 말년의 정치적 시련은 어쩌면 서계의 정치사상을 보았을 때 당연한 것이었을 것이다.
5. 맺음말
지금까지 서계 박세당 사상의 특징을 살펴보았다. 여러 가지를 살펴보았지만 이를 단순하게 요약하면 교조적이지 않은 경서 해석과 하학 공부의 강조, 그리고 이에 영향을 받은 실효 위주의 정치사상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현학적이고 형이상적인 것에 대한 의심과 부정적 인식, 그리고 대안 모습은 비록 불완전하지만 당대의 주류적 흐름을 거부하고 이탈한 것이다.
그렇다면 서계 사상은 필자가 서론에서 제시하였던 저항 이데올로기, 혹은 비주류-비공식 이데올로기적 성격을 지니고 있을까? 차근차근 살펴보면 서계가 주자의 교조화 단계를 지나고 있던 조선사회에서 주자의 설을 반박하고 원시유학을 지향하였다는 점, 그리고 이단인 양명학과 일정한 친화성을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을 비주류-비공식 이데올로기라 호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의 주류적 흐름을 명백히 반대하고 다른 대안을 모색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사상이 조선성리학 사회에서 불완전하나마 저항 이데올로기로 작동하고 있다는 점 역시 인정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그 단계는 매우 미약하고 정리되지 않은 점도 분명히 존재하다.
그러나 유학이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서계의 사상은 그 틀을 크게 벗어나지는 않고 있다. 역사적 시대구분을 통해 보았을 때 그의 사상은 콩종크튀르 안에서는 저항이데올로기라고 설정할 수도 있겠으나 장기 유교사회 안에서는 크게 벗어나는 의견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이 점이 ‘서계의 근대성’을 이야기하기 망설여지는 이유이다. 서계의 사상이 분명히 시대의 변화를 지향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변화의 방향이 하나의 장기지속을 끝내고 새로운 구조를 만들어가는데로 향하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가 살았던 시대적 한계 때문에 그의 사상적 지향을 실학과 연결시키는 연구도 있다. 그러나 이는 주류 이데올로기의 주변부에 생길 수밖에 없는 비주류 이데올로기를 구체적 저항 이데올로기로 파악한 오류가 아닐까 한다. 박세당과 순암, 다산과의 학문적 연결성은 사상의 공통점 외에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추구했던 개혁의 방향이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가 아니더라도 의미가 격하되는 것은 아니다. 그 시대의 모색 자체로도 충분히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박세당의 사상은 좀 더 주목되어야 할 필요성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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