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문묘 종사와 당쟁

同黎 2012. 7. 27. 01:38


성균관 대성전 (보물 141호)

오늘은 보물로 지정된 서울 문묘(대성전, 명륜당, 동무, 서무, 삼문. 이외 건축물과 대지는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 대성전에 모셔진 인물들을 통해 조선시대의 당쟁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지난 시간에 약속드렸던 고려와 티벳의 관계는 아직 자료를 더 봐야 할 것 같아서 다음 시간으로 부득이 미루어야 할 것 같습니다. 조선 후기 정치사를 관통하는 붕당, 당쟁이라는 것이 문묘 종사를 통해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오늘 이렇게 준비했습니다. 우리 사조에도 성균관이 존재하기에 성균관과 문묘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건축적으로 비천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균관 건축물들은 임진왜란때 모두 불타고, 선조 35년 (1602년) 중건된 것입니다. 비천당만은 한국전쟁때 소실되고 그 이후에 복원된 건물입니다. 대성전과 명륜당을 제외하고 그닦 큰 건축적 가치는 없지만 조선 중기의 목조건축물이 드문 상황에서 그 가치와 역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보물 141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문묘의 중심 건축물인 대성전에 주향(主享)된 인물은 잘 아시다시피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 공자입니다. 그 후손들은 청 말기 까지 연성공으로 대대로 책봉되어 곡부에 있는 공부(孔府)라는 저택에서 살다가 중국혁명 이후 대만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좌우에는 중요한 학맥인 증자, 안자, 자사, 맹자가 각각 국공(國公)으로 추존되었습니다. 이 4위를 합쳐 사성(四聖)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으로 공문 10철 (孔門十哲)의 위패가 모셔져 있습니다. 공 자의 가장 뛰어난 제자 10명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송조6현 (宋朝六賢)인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주자)가 모셔져 있습니다. 이들은 송나라 때 성리학을 완성시킨 대단히 중요한 인문들로 평가받아 따로 대성전에 모셔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유가의 도통을 요-순-우-탕-주문왕-주무왕-주공-공자-안자-증자-자사-맹자-주돈이-정이, 정호-장재-주자로 보고있습니다. 때문에 여기까지 모셔진 분들은 굉장히 중요한 분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문묘에는 대성전에 동국 18현, 즉 조선땅에서 난 분들 가운데 학문이 뛰어나신 18분을 모시고 있습니다. 원래 대성전에는 동국 18현의 위패가 없었습니다. 이분들의 위패는 지금은 비어있는 동무와 서무에 중국역대제현 94위와 함께 있었습니다. 일제시기 성균관이 경학원이 되는 수모를 겪고, 해방이후 심산 김창숙 선생님께서 다시 성균관을 일으켜세우면서 중국제현의 위패를 이렇게 많이 모실 필요가 없음을 천명하고 94위의 위패는 땅에 묻히고 동국 18현의 위패를 높여 대성전으로 들어갔습니다. 시대의 변화를 의미하지요.

잠시 중국역대제현에 대하여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중국역대제현은 사성과 공문10철에 들지 못하는 공자의 제자들을 포함합니다. 공자의 주요 제자는 72현이라고도 한고 77현이라고 해서 기록마다 차이가 있는데 사기 중니제자열전에 77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어, 조선에서 모시던 역대제현은 여기에 기초한 것으로 보입니다. 거기에 사기에 없는 분들도 몇분이 더 계십니다. 그리고 이후 한, 당, 송, 원에 이르는 몇 명의 유학자가 더 있습니다. 예를 들면 사마천의 스승인 동중서, 자치통감을 지은 사마광, 당송8대가의 하나인 한유 등이 있습니다. 역대제현은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몇번의 변화가 있었는데요. 선조실록에는 사신이 명나라 문묘에 다녀와서 그곳의 변화를 보고하는 내용이 있는데 우리가 삼국지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왕숙, 두례, 마융, 가규 등의 진(晉)나라 유학자들과 구양수 등이 문묘에서 출향되었다는 내용과 더불어 중국에서는 호거인, 왕양명을 모셨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하지만 조선에서는 사문난적이었던 왕양명은 조선 문묘에서는 배향되지 않았지요. 정조대왕 때에는 정주대왕이 직접 제갈무후(제갈양)의 문무 종사를 종용했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다시 본론인 동국 18현으로 돌아와보겠습니다. 위 표를 보시면 동국 18현은 설총, 최치원, 안유(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순서는 나이에 따른 것이고, 종사된 순서는 아닙니다. 보시면 알 수 있겠지만 이황 이후에는 동인 계열의 문묘 배향을 이루어지지 않고, 전부 서인, 박세체를 제외하면 전부 노론 계열임일 알 수 있습니다. 문묘 종사가 당쟁을 그대로 보여준다고 한 까닭을 알 수 있죠.


성균과 명륜당 (보물 141호)

그러면 이제부터 동국 18현의 문묘 종사과정을 살펴보며 조선시대의 당쟁을 간략하게 집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설총, 최치원, 안유의 3분은 고려시대에 이미 문묘 배향이 된 분들입니다. 조선시대 오면서 설총, 최치원에 대해서는 이황과 이이가 문묘 배향을 이해할 수 없다 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근거가 불분명하고 최치원의 경우 불교와 친했다는 이유죠. 어쨋든 이분들은 계속 문묘에 남아있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도 피한체 설총은 경주 서악서원에 최치원은 정읍 무성서원에 주향되어 있습니다. 안유(향) 선생은 해동 성리학의 시조와 같은 분으로 소수서원에 제향되어 있습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은 조선 중종대왕때 문묘에 배향되게 됩니다. 정몽주의 문묘 종사는 성리학의 도통(道通)을 조선을 개국한 혁명파 사대부에게 둘 것이냐, 아니면 개혁파 사대부에게 둘 것이냐의 논쟁을 종결짓는 것이었습니다. 정몽주의 문묘 종사는 학문적 성숙함을 더 했던 소위 사림파가 학문적 도통을 쟁취했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이후의 문묘 종사는 조선 전기의 많은 유학자들(이를 테면 정도전, 권근, 변계량)을 건너 뛴체, 소위 동국 5현이라고 하는 김굉필, 정여창, 이언적, 조광조, 이황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죠. 물론 아시다시피 이후에도 몇차례의 사화를 겪으면서 사림파는 시련을 겪게 되지만 적어도 이미 사림파의 학문적인 성숙도는 인정받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결국 선조 연간을 거치면서 사림파는 완전히 조정에 포진하게 되고, 자신들의 학문적 근간인 선배들을 문묘에 종사 시킴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것으로 완성시켰습니다. 즉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이어지는 학통을 국가적, 공식적인 정통으로 인정받기 위함이었습니다. 1570년 (선조 3년) 부터 성균과 유생들을 비롯하여, 이황, 기대승 등 많은 이들이 4현(아직 생존해 있던 이황을 제외)의 문묘 종사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이황 사후에는 이황을 포함한 5현의 문묘종사를 끈질기게 요구하게 됩니다. 이에 대하여 선조대왕은 이언적의 출처가 불분명하다며 종사를 거부합니다. 이언적의 경우 정통 사림의 스승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해서 깨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사림에게 중요했던 이유는 그가 태극논쟁에서 자칫 성리학이 불교와 섞일 수 있는 부분을 바로잡았고, 그러한 학문이 이황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입니다. 사림 5현에 대한 문묘 종사 요구는 40년이나 계속되었고, 결국 1610년 (혜종(광해군) 2년) 이루어집니다.

시대를 건너 뛰어 숙종 연간으로 가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이 시기는 예송논쟁으로 인하여 서인과 남인 간의 치열한 당쟁이 이루어지던 시기입니다. 갑인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였다가 숙종 7년 경신환국으로 다시 서인이 집권하자, 서인에서는 바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의 문묘 종사를 들고나오게 됩니다. 사실 사림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5현이 대부분 영남 출신이었고, 서인의 기호 즉 경기도와 충청도 출신이 많았기 때문에 기호학파의 거두라고 할 수 있는 두 분을 문묘에 종사함으로써 역시 학문적 정통성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물론 율곡학파와 우계학파의 성격을 조금 달라서 율곡학파는 이이-김장생-김집-송시열,송준길로 이어지는 학통을, 우계학파는 성수침-성혼-윤휴-윤선거-윤증 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지니게 되는데 이는 나중에 각각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됩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서인의 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죠. 아여튼 율곡과 성혼의 문묘종사에 대하여 처음 문묘 종사가 이루어진 것은 인조1년(1623년) 이지만 남인의 격렬한 반대와 서인의 비대화를 우려한 인조, 효종, 현종의 신중론으로 58년을 허비합니다. 그러나 결국 숙종대왕 때 환국으로 서인들은 일생의 숙원을 이루게됩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율곡과 우계의 위패는 기구한 운명에 처하게 되는데요, 이는 숙종의 당파간 견제책 때문이었습니다. 숙종대왕은 드라마 장희빈에서의 우유부단한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매우 노회한 정치가였다고 보여집니다. 특히 이 시기 잦은 환국은 결국 어느 당이 집권할 것이냐를 국왕이 조절했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습니다. 숙종 15년 기사환국이 단행되면서 서인들이 일거에 물러나고 조정은 남인의 세상이 됩니다. 이 때 노론의 거두였던 송시열이 사사되고, 서인들에 의해서 이루어진 문묘 종사도 무효화되면서 율곡과 우계의 위패가 문묘에서 출향되 땅에 묻히는 치욕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불과 5년 후 숙종 20년 다시 갑술환국이 단행되어 서인이 집권하면서 두 위패는 문묘에 다시 종사됩니다. 참으로 당쟁이 문묘에 미친 영향이 이렇게 큰 경우는 다시 없을 것입니다.

이후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고, 조선의 대체적으로 노론의 집권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물론 당쟁의 폐해를 걱정하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탕평론이 나오고, 영정조 시기의 강력한 왕권 정치 시도가 있었으나 결국 탕평론 아래에서도 대부분의 관직은 노론의 우세 아래 소론과 극소의 남인이 참가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문묘 종사도 비슷한 흐름을 보입니다. 숙종 32년에 기호학파의 거두인 김장생이 문묘에 배향되고 영조 32년 송시열과 송준길이 배향됩니다. 물론 송시열은 소론과 남인의 원수이기 때문에 소론과 남인의 강력한 반발이 있었습니다. 고종 20년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과 역시 서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이끌어 서인의 체면을 살려주게된 조헌을 문묘 종사하게 됩니다.(물론 조헌이 이것 만으로 문묘종사 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 다소 특이한 2가지의 문묘 종사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하서 김인후와 남계 박세채입니다. 먼저 박세채의 문묘 종사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박세채는 잘 아시다시피 소론의 영수입니다. 하지만 조금 복잡한 사연이 있는데요. 박세채는 황극탕평론을 주장한 사람으로 말하자면 탕평론의 시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박세채가 소론으로 가게 된 이유는 그가 송시열과 윤증의 회니시비에 중재자로 나섰기 때문입니다. 당시 송시열과 윤증의 갈등이 깊어진 상황에서 숙종대왕은 외척 세력을 누르기 위해 3대 산림이었던 송시열과 윤증, 박세채의 출사를 명합니다. 이 과정에서 윤증이 상경 도중 과천에서 송시열과 함께 출사 할 수 없다고 버티게 되고, 박세채는 처음에는 송시열의 입장에 서서 그 둘을 화해시키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과천으로 윤증을 설득하러 간 박세채는 윤증에게 설득되었고, 윤증과 입장을 같이하게 됩니다.

영조는 영조 40년 몇년간의 유생들의 상소를 이유로 문순공 박세채의 문묘 종사를 명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노론의 거센 반대가 있었습니다. 문묘 종사가 끝난 이후에도 박세채의 출향을 요청하는 상소는 정조대왕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영조대왕은 박세채의 문묘 종사를 알리는 반교에 참여하지 않은 신하들을 파직하는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끝난 박세채의 문묘종사를 성사시켰습니다. 영조가 박세채를 끝내 문묘에 배향한 이유는 우선은 그가 탕평론의 원조였기 때문에 문묘 종사를 통해 영조 자신의 정치적 명분을 강화시키기 위해서였고, 한편으로는 소론 인물을 문묘에 배향해 노론 이외의 당색을 지닌 자들을 등용할 수 있는 탕평정치의 장을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서 김인후는 딱히 당색을 따질 수 없으며 굳이 당색을 따지자면 후손들은 서인에 가깝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호남에서는 제일로 치는 큰 유현이었지만 호남은 기호나 영남보다도 정치에서 소외된 지역이었기 때문에 딱히 정치적으로 주목을 받는 학맥의 시조는 아니었습니다. 김인후는 중종대왕 기에 벼슬을 했는데 인종대왕에 대한 사모가 깊이 인종대왕이 붕어한 이후에는 시골에 박혀 학문에만 힘을 썼다고 합니다. 그를 제향한 사원이 필암서원입니다. 김인후는 정조 20년 문묘에 배향이 되는데 이렇게 생존 시기와 배향 시기에 큰 차이가 있는 이유는 김인후의 문묘 종사가 정조의 정치적 함의를 가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정조대왕은 강력한 왕권에 기반한 탕평정치를 펴고 있었습니다. 화성 경영, 신해통공, 규장각과 장용영 설치, 초계문신제 등을 바탕으로 노론 대신들의 항복을 받아낸 정조대왕의 자신감은 더욱 커졌고, 이는 군주도통론으로 즉 산림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국왕이 학문적 정통성까지 가지고 있다는 발상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조대왕은 문묘 배향을 적극적으로 지휘하여 노론의 조헌, 김집 종사론을 철회시키고 김인후의 종사를 이끌어냅니다. 김인후의 문묘 종사는 소외되어있던 호남학파를 끌어 안는 효과를 가져오면서 군주도통론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정조의 군주도통론을 알려주는 사례는 또 하나가 있습니다. 공자의 제자중에 유약(有若)이라는 분이 있습니다. 흔히 유자라고도 부르는데, 공자의 주요 제자 중 하나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기에는 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나와 있는데, 유약은 생전 공자의 모습과 대단히 닮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항상 제자들은 그를 윗자리에 올렸는데, 하루는 한 제자가 유약에게 공자에게 했던 것과 같은 질문은 하자 그가 대답하지 못했고, 때문에 그를 물러나게 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유약은 대성전에 배향되지 못하고 동,서무에 위패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조는 유약을 학문적으로 재평가하고, 그를 10철과 같은 위치에 올려 대성전에 모실 것을 명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 인지 이루어지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문묘 종사를 두고, 남인 계열인 유성룡과 김성일의 제자들의 다툼이 있기도 했습니다. 본래 이황의 제자인 둘은 생전에도 경쟁하던 사이였습니다. 학봉 김성일은 유성룡보다 연배가 위이고, 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서애 유성룡은 연배는 아래지만, 벼슬이 영의정까지 이르렀습니다. 남인들이 이황을 모시기 위해 호계서원을 지을때 김성일과 유성룡을 함께 모시기로 했는데, 둘 중 누구를 윗자리인 왼쪽에 모시냐는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연배와 의리는 김성일이 앞서고, 벼슬은 유성룡이 앞서는데 세력은 유성룡의 제자들이 강하지만, 재지사림에서는 김성일은 더 높게 쳤습니다. (지금도 안동의 분위기는 학봉을 더 처주는 분위기입니다. )  결국 결론을 내지 못하고 유성룡의 제자들은 병산서원을 따로 건립하는데, 이것이 병호시비라고 불리는 다툼입니다.

이후 순조 때 남인들이 남인의 4대 학자인 학봉 김성일과 서애 유성룡, 한강 정구와 여헌 장현광에 대한 문묘종사소를 올리기로 하는데, 이때 김성일과 유성룡 중 누구를 앞에 쓰느냐로 다시 다툼이 벌어집니다. 이 다툼때문에 소가 늦어지고, 결국 학봉-서애 순으로 결정이 났음에도 서애 제자들이 따로 소를 올리는 일이 벌어지자 화가 난 정구와 장현광 제자들은 결국 따로 소를 올리게 되고... 결국 4명 모두 문묘 종사가 불허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처럼 문묘 종사는 단순히 선현에게 제사지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여러 붕당의 명분과 이해관계가 걸린 문제였습니다. 붕당정치를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갈리고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것이 비상식적인 것이 아니라 나름의 논리와 지금은 없는 학문적 깊이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과 더불과 당시 조선 민중들과 일정하게 괴리된 세상이었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붕당정치는 예학과 보학을 발전을 가져왔고 이것은 민중들에게는 어려운 복잡하고 번거로운 절차의 증가와 재산분배, 신분상승에 있어서의 불평등의 심화를 가져왔습니다. 저는 과거 조선의 가장 큰 문제는 성리학만의 고집, 그리고 유학이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보수성을 답습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사조에 계신 많은 분들이 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잘 알고 계시기에 긴 설명은 이만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번 회는 다소 문화재 자체와는 거리가 있는 글이었습니다. 조선 후기라는 시대가 워낙 사료가 많고 그만큼 현실성있는 역사적 해석이 다양한 만큼 좀 딱딱한 글이 나왔던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약속드린대로 고려와 티벳의 관계를 문화재로 알아보는 글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