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 조선과 유학
석사 4 박세연
17세기 조선은 어떤 사회이며, 17세기의 조선 유학은 어떤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17세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큰 전쟁을 거치고 사회의 여러 분야에서 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되던 시기이다. 동시에 명의 멸망과 청의 등장이라는 동아시아적 대사건 속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대응해야 하는지 고민해야했다. 때문에 17세기 지식인들의 사상, 그리고 그 근간을 이루고 있는 유학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후기 사상계의 성격과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17세기 사상계와 유학에 대한 연구는 상대적으로 다른 시기에 비하여 소흘한 것이 사실이다. 16세기 사상사가 退溪와 栗谷, 南冥과 花潭 등을 통해 “조선성리학”이 성립된 것으로 주목받았으며, 18세기 사상사가 實學의 등장과 발전이라는 의미에서 주목받았던 것에 비하여, 17세기의 사상사는 아직 연구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여 그 특징을 정리하지 못하였다.
이병도의 경우 대체적으로 17세기의 사상계는 퇴계와 율곡학파의 간극이 더욱 깊어지고 이것이 정치사적으로는 黨爭으로 표면화되며, 유학자들도 퇴계와 율곡의 의견을 계승·보완하는 가운데 절충의 자세를 취하는 자들도 있다고 보고 있다.1) 이는 결국 17세기를 사상계의 큰 변화가 없던 시기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이후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보이는데, 주자학으로의 탈피만을 강조하여 일반적으로 주자학에 대한 반기를 들었다고 평가되는 尹鑴(1617~1680)나 朴世堂(1629~1703)을 제외한 지식인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평가를 내리지 않는 경우도 보인다. 2)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17세기가 조선후기 지식인의 고민들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시기인 만큼3) 17세기 사상계에 대한 연구가 없을 수 없었다. 그중에서도 주목되는 것은 兩亂 이후 조선을 國家再造 논의를 통한 봉건적 지배질서 재건 시기로 보고 이 시기 지식인들을 變通更張 논의를 “地主制로의 길”과 “自營小農으로의 길”로 나누어본 김준석의 연구이다.4) 이때의 國家再造論은 內實을 기하여 자립의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으로 명나라에 대한 피동적 受惠의 논리인 再造藩邦에서는 벗어난 논리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17세기의 사상 흐름은 斥和論에서 시작된 소극적·보수적 국가재조론과 主和論에서 시작된 적극적·진보적 국가재조론이 양립하는 것이며, 이는 곧 정통주자학적 경향과 반주자학적 경향으로 분화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5) 전자에 해당하는 학자로는 宋時烈(1607~1689을 후자에 해당하는 학자로는 許穆(1595~1682)과 柳馨遠(1622~1673) 등을 들고 있다.6)
김준석은 17세기 유학자들을 變通更張論에 기반하여 나누고 있다는 점에서 이후 17세기에 대한 연구는 물론 18세기 실학에 대한 연구에도 선행적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우선 再造라는 용어를 검토하는데 있어서 임진왜란 이전의 재조론과 이후의 재조론을 하나의 맥락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은 임진왜란 이후의 인식 변화에 주목하지 못하게 할 우려가 있다. 특히 ‘再造之恩’ 관념이 임진왜란기에 지배층의 위기의식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지적되는 가운데7) 김준석의 再造관념은 재검토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척화론과 주화론, 재조번방론과 국가재조론이 모두 華夷論에 바탕하고 있음에도 주화론이 탈주자학적 흐름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해서도 김준석은 설명하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지두환이 지적하고 있듯이 개혁과 보수를 나누는 기준이 여러 왕권과 신권 등 다소 애매하다는 점8)과 이를 넘어 과연 진보와 보수라는 이분법이 적당한 것인지도 의문이라고 하겠다.9)
조성을은 조선사회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를 기준으로 당대의 지식인들을 분류하고 있는데, 개혁론이 기준이 된다는 점에서는 김준석과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이가 개혁적 혹은 보수적 성격을 띄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김준석과 매우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다. 예컨대 김준석이 붕당을 기준으로 그 개혁·보수적 성격을 가르고 있는데 비하여 조성을은 기호남인과 소론, 노론 북학파에서 각각 실학의 흐름이 있다고 파악하며 主氣 혹은 主理의 한 가지 경향이 실학의 연원이 되었기 보다는 다양한 내용이 결합되며 학파별, 당색별 실학이 형성되었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鄭逑(1543~1620)와 허목을 가장 보수적인 그룹으로, 金長生(1548~1631)10)과 송시열은 소극적 제도개혁론자로11), 柳馨遠(1622~1673)과 윤휴, 趙翼(1579~1655)과 박세당을 가장 개혁적 그룹으로 파악하였다. 12)
안재순은 17세기 성리학이 심화되면서 주자학 독주시대가 시작되는 가운데 주자학에 대한 비판과 도전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13) 퇴계와 율곡의 학설에 대한 趙聖期(1638~1689), 林泳(1649~1696) 등 절충론자들이 등장하고, 이기에 대한 논쟁을 거쳐 人性論에 대한 의논이 시작되어 湖洛論辯 人物性同異論의 단서가 마련되었다. 한편으로는 특히 윤휴와 박세당에 의하여 주자학에 대한 비판과 도전이 이어졌는데, 특히 이들은 陽明學의 영향을 깊게 받은 것으로 생각된며 18세기 실학의 사상적 배경이 되고 있다. 즉 여러 가지 면에서 17세기 유학과 18세기 유학의 연결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조성을과 안재순의 연구는 17세기 유학자들의 성향을 세밀히 분석하고 그것이 전후 시기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 학파나 당쟁을 막론하고 현실에 대한 고민과 그에 대한 해결책에 따라 여러 경향으로 나누어진다는 점, 그리고 그것이 이후 시기로 연결된다는 점에서 두 연구는 김준석의 연구가 해결하지 못했던 것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탈주자학을 반드시 진보의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주자의 권위에 도전한다고 해서 유학이 근본적으로 복고적 성격을 지닌다는 점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사상의 근거를 주자학에 두고 있다고 해도 변통과 개혁의 아이디어를 거기서 찾을 수 있으면 개혁적일 수 있고, 양명학자라고 하더라도 古制만 강조하고 현실을 고수하면 보수적일 수 있는 것이다. 윤휴가 탈주자학적 성격을 지니고 있음에도 복수설치를 주장하며 북벌론을 주장했던 자라는 데에서 이러한 점은 잘 드러난다.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았을 때, 분명한 것은 17세기 유학의 흐름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조선사회를 어떻게 변통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요컨대 17세기는 사상사적으로 변통론의 시대라고 볼 수 있다. 지식인들에게 광범위하게 국가 재건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주어지고 지식인들은 나름대로 이에 대한 답변을 준비하던 시대인 것이다. 그리고 당대인들이 經世論과 經學, 禮學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기에 시대의 질문에 대한 답변은 다양한 부분에서 도출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에게 보이는 정통 주자학과는 다른 경향들은 이러한 폭넓은 고민의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경세론과 분리되어 생각되기 쉬운 예학, 경학 등 다른 부분도 유학이라는 큰 범주 안에서 종합적으로 고찰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17세기가 변통론의 시기라고 하여 그것을 보수와 진보의 시각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자칫 시대를 당시대인의 시각이 아니라 현재의 잣대로 바라보고 섣부른 가치판단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까지 살펴본 논의는 대부분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더 크게 주목한 경향이 있으며, 그들의 “탈주자학적 성격”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과연 그중에 주자학에서 벗어난 이가 있었는지, 그리고 그것이 17세기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대동법의 시행 과정에서 대표적인 개혁론자이자 주화론자들과 친화성을 지니고 있는 金堉(1580~1658)이 大變通의 근거를 古制에서 찾고 있고, 대동법이 반주자학적 성격을 지녔다는 주장이 부정되고 있는 가운데,14) 과연 탈주자학적이라는 용어를 어느 경우에 얼마만큼의 범위로 써야 하는지 엄밀한 고찰이 요구된다.
우리는 유학을 단일한 사상이라고 하기보다는 당대 지식인들의 거대한 생각의 틀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안에서는 다양한 아이디어와 주장에 나올 수 있다. 성리학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성리학은 17세기 조선인들에게 극복 혹은 순응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근본적 아이디어를 제공해주는 거대한 생각의 테두리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 틀이 단단한가 혹은 유연한가는 시대에 따라 다를 것이다. 그리고 17세기는 단순히 16세기의 연장, 혹은 18세기의 예비가 아니라 국가의 재건이라는 중대한 문제를 앞두고 많은 지식인들이 성리학 혹은 유학이라는 생각의 테두리 안에서 다양한 부분에 천착하여 다종다기한 주장과 대안을 만들었던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현재의 진보-보수 프레임이 아니라 당대의 프레임에서 생각할 때 17세기를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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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李丙燾, 1987,『韓國儒學史』, 亞細亞文化史.
2) 한형조는 조선 유학의 지형도를 그리는 데 있어 김장생, 송시열, 허목 등 17세기의 저명한 학자들을 모두 제외하였으며, 윤휴, 박세당만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이는 전자의 학자들이 이이와 율곡의 변주에 불과하다는 시각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형조, 2008,『왜 조선유학인가?』, 문학동네 참조.
3) 붕당정치, 예학의 발전, 수취체계에 대한 개혁 논의 등 조선후기를 관통하는 문제들이 17세기를 중요한 기점으로 하여 나타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4) 金駿錫, 2003,『朝鮮後期 政治思想史 硏究 : 國家再造論의 擡頭와 展開』, 지식산업사.
5) 金駿錫, 1998,「兩亂期의 國家再造 문제」『韓國史硏究』101.
6) 金駿錫, 2003, 앞의 책.
7) 한명기, 1999,「임진왜란 시기 ‘재조지은’의 형성과 그 의미」『동양학』29.
8) 지두환, 2003,「서평: 조선후기 국가재조론의 대두와 전개」『서평문화』51.
9) 그러나 지두환이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기준 중 하나로 제시한 노비제 개혀의 찬반 여부는 김준석의 의도를 생각해볼 때 기준이 될 수 없음은 분명하다. 김준석은 ‘생산수단으로서의 토지’에 주목하여 생산수단 즉 토지에 대한 개혁 찬반 여부를 진보와 보수를 가르는 기준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이다. 신분제의 해체 역시 봉건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이행 하는 중요한 기준 중 하나가 될 수 있겠으나, 노비제 해체는 봉건사회의 해체에 반드시 부합되는 것은 아니다. 김준석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노비제가 해체되더라도 농노적 성격의 전호가 존재하는 한, 봉건사회의 근본적 생산관계는 변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10) 조성을은 김장생의 경세론을 설명하면서 김장생이 광해군 때 각 아문에 나누어 주었던 결정 권학을 회수하여 대신이 총괄하고 군주가 결정하게 하자고 주장하여 광해군 때에 비하여 왕권을 강화하자는 논의를 폈으며 이는 송시열과 다르다고 설명하고 있다. (趙誠乙, 2008,「17세기 조선의 경학과 경세학」『儒敎文化硏究』11, 68~69쪽) 그러나 이는 명백히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조성을은 제시된 사료의 光廟를 광해군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光廟는 실상 世祖를 가리키는 말로 세조대부터 시작된 육조직계제를 폐지하고 모든 국사를 대신을 통하게 하자고 하는 冢宰制를 회복하자는 것으로 왕권과는 관계 없는 내용이며 송시열과 같은 견해를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11) 물론 김장생과 송시열을 같은 성격으로 묶은 것은 아니다. 예학적 측면에서 김장생은 왕실의 예와 사대부의 예를 다른 것으로 보았으나 송시열은 같은 것으로 보았으며, 경세론적 측면에서 김장생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으로 송시열은 상대적으로 개혁적으로 보았다.
12) 趙誠乙, 2008, 앞의 논문.
13) 安在淳, 2008,「17세기 한국의 유학사상 - 朱子學의 深化와 그에 대한 批判」『儒敎文化硏究』11.
14) 이정철, 2010,『대동법』, 역사비평사, 350~3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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