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3일 (자금성 어화원, 신무문)

同黎 2015. 9. 12. 15:44



자금성에 감금된 지 5시간

이제 다들 나가고 싶어한다.


곤녕궁(坤寧宮) 뒤편


후삼궁의 출구인 곤녕문(坤寧門)이 보인다.

여기를 지나면 후원인 어화원(御花園)이 시작된다.


온갖 기암괴석과 기화요초를 모아 둔 어화원


나무 한 그루도 범상치 않다.


어화원은 자금성의 정식 화원이다. 전체 차지하는 부분은 자금성 총면적의 1.5%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지만 자금성 내에서 보기 드문 나무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인기가 많다.

자금성에서 유일한 녹지라는 이야기가 있지만 그 정도는 아니다. 어화원 외에도 건복궁, 자녕궁, 영수궁에 각각 화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재 기준에서 볼 수 있는 후원은 어화원과 따로 돈을 내야 들어갈 수 있는 영수궁의 건륭화원 뿐이기 때문에 일반 입장한 관람객이 볼 수 있는 후원은 어화원이 유일하다.

일반적으로 오문에서 입장한 이들은 모두 여기를 거쳐 신무문으로 나가게 되는데, 좁은 공간에

사람들이 몽땅 모이니 매우 혼잡하다. 화원이라곤 하지만 즐기기엔 너무 번잡한 곳이다.


어화원의 풍경

저쪽에는 관상대처럼 보이는 대도 보인다.


흠안전 앞에 있는 향로


멀리 보이는 작은 산

이렇게 어화원 곳곳에는 태호석 같은 괴석을 모아 쌓은 산이 보인다.


곤녕문을 통과해서 직진하면 곧 천일문(天一門)이라는 아름다운 돌문이 나온다.


흠안전(欽安殿)의 정문으로 자금성에게 보기 드문 돌문이라 그런지 정감이 간다.


천일문 앞의 사자상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있다.

조금 다른 모습이 보이는 것은 이 사자상이 도교의 수호호법이기 때문이다.


천일문을 들어서면 담으로 둘러쌓인 작은 공간이 나온다.

안에는 한백옥으로 둘러쌓인 여러 구조물들이 보이고


가운데에는 어화원의 중심 건물인 흠안전이 보인다.


흠안전은 도교 신앙의 공간이다.

흠안전 안에는 도교의 북방신이자 도교 신앙의 대상이 되는 별자리 28수 중

북방 7수를 이끄는 현천상제(玄天上帝) 혹은 진무대제(眞武大帝)를 모시고 있다.

본래 진무대제에 대한 신앙은 북방에서 악한 귀신이 침범한다는 중국 전통의 방위개념에 의한

일종의 보호신앙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도교 덕후였던 명 가정제에 의해 흠안전은

크게 중수되고 황실 도교신앙의 중심지가 된다. 청의 만주족은 남의 나라 종교 흡수의 끝판왕이어서

도교 역시 흡수해서 흠안전에서 계속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흠안전 내부

진무대제와 여러 신을 모시고 있다.


진무대제의 모습


그 밖의 여러 상의 모습

내부는 비공개이다. 안타깝다.


흠안전 앞의 향로

사각 방정이다.


흠안전 뒤로 가면 화원이 계속 펼쳐진다.


어화원의 가장 명물이라고 할 수 있는 퇴수산(堆秀山)


태호석 수백 개를 쌓아서 산을 만들었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웠다.


매년 단오, 추석(중추절), 중양절(음력 9월 9일)에는 황제가

황후, 비빈과 함께 여기에 올라 기도를 하고 복을 빌었다고 한다.

칠월 칠석에는 황후가 올라가 견우와 직녀에게 제사를 지냈다고도 한다.


여튼 그 비싼 태호석을 수백 개 쌓아서 산을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한 돈지랄이라고 할 수 있다.


어화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곳이라 사람들도 연신 사진을 찍는다.


하품하는 아저씨가 시선강탈 중


산 아래에는 서양식 분수도 하나 보인다.


퇴수산의 모습


돌 하나에 집 한 채 값이었다는데...


퇴수산을 지나면 어화원에서 은근히 인기가 좋은 정자 만춘정(萬春亭)이 보인다.


아래는 아(亞)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2층은 원형으로 되어 있다.


반대편에는 똑같이 생긴 천추정(千秋亭)이라는 정자도 있다.

청대 정자 건축 중에서도 수작에 꼽히는 아름다운 정자이다.


이제 슬슬 자금성을 나설 때이다.

흠안전 뒤쪽으로 나선다. 반대편에는 신무문으로 입장하는 사람들의 경로가 보인다.


어화원의 출구인 순정문(順貞門)


벽에 유리기와를 올린 문이다.

여기를 나서면


드디어 자금성의 북쪽 끝인 신무문(神武門)이 나온다.


본래 영락제 때 현무문이었던 신무문은 강희제의 재위 이후 신무문으로 바뀌었다.

강희제의 이름이 현엽이었기 때문에 玄자를 피휘하여 신무문으로 바꾼 것이다.

이후 신무문에서 정시에 종을 치면 그것이 신무문 북쪽의

종루와 고루로 전달되었고 북경성 안에 시간을 알려주었다.


황후가 선잠제를 나갈 때 이 문을 이용하였고 후궁들이나 궁녀들이 궁이 입궁할 때도 이 문을 이용하였다.

마지막 황제인 부의(푸이)가 결국 1924년 공화주의자 풍옥상의 요구에 의해

청국 소조정을 끝내고 자금성에서 퇴거할 때 이 문을 통해 출궁하였다.


신무문을 나서면 황실정원인 경산이 보인다.


본래 경산공원에 바로 갈 예정이었으나 너무 배고프고 힘이 들어 저녁을 먼저 먹고 올라가기로 한다.


고작 100미터짜리 저 경산이 이 때는 왜 이리 높아 보이는지


멀리 경산 만춘정이 보인다.


어화원의 엄청난 소음 - 집약된 관광객의 떠드는 소리 - 에서 해방되어

빨리 조용한 곳으로 나가고 싶었는데 신무문광장도 만만치 않게 소란스럽다.

경찰까지 확성기를 이용해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다.


여튼 다시 신무문을 처다본다.

신무문은 고궁박물원의 정문이기도 하다. 좀 특이한데 여튼 1949년 이후

자금성이 고궁박물원이 되면서 궁의 정문은 오문, 박물원의 정문은 신무문으로 바뀌었다.

지금도 버스를 탈 때나 택시를 탈 때 고궁(구궁)으로 가자고 하면 여기로 온다.


고궁박물원이라는 현판은 현대 중국의 위대한 사회주의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곽말약(郭沫若, 궈모뤄)이 쓴 것이다.

위대한 사회주의자 학자이지만 문화대혁명 때 공격을 받자

스스로의 책을 분서한 것으로 기회주의자라 평가받기도 하는 곽말약.

여러가지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이다. 글씨가 명필인 것은 맞는 것 같다.


신무문 방향 매표소


신무문 풍경


신무문 앞에는 통자하(筒子河)라는 해자가 흐르고 있다.


통자하 앞 다리에 기대서 쉬는 사람들


오롯이 담은 신무문 풍경


신무문이라는 현판 아래에 고궁박물원이라는 현판이 이채롭다.


이제 슬슬 고궁을 떠날 때이다.


통자하의 모습


사진에 담지 못하였는데 통자하를 둘러쌓은 궁성의 네 모서리에는

영락제 때 처음 지은 모습을 지키고 있는 4개의 3층 각루가 있다.

궁성을 수비하는 역할을 하던 건물이다.

 

이렇게 다섯 시간에 걸친 자금성-고궁박물원 관람이 끝났다.

나름 자세히 본다고 했지만 아직도 못본 곳이 많다. 서육궁의 일부와 동육궁의 대부분, 그리고 내각의

중심지였던 문화전과 무영전, 복원이 거의 마무리되었다는 건복궁과 그때그때 열고 닫는 각종 전각들까지

한 절반만 제대로 본 것 같다. 다음 번엔 더욱 자세한 자금성 답사를 기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