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3일 (경산공원2)

同黎 2015. 9. 13. 00:10



이제 마지막 꼭대기에 있는 만춘정(萬春亭)이 보인다.


정사각형의 만춘정이 기다리고 있다.


만춘정을 비롯한 경산오정은 건륭제 때 지어진 것이다.

명대에도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어쨌든 지금의 형태는 건륭제 때 완성된 것이다.

5정 중 4곳은 그대로이지만 서쪽 제2정인 집방정(輯芳亭)은

의화단의 난을 진압했던 연합군이 퇴각할 때 불을 질러 파괴하였다.


만춘정 내에는 5방불 중 가운데에 해당하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지금의 불상은 목조에 금박을 입힌 것인데 아주 큰 고초를 지낸 것이다.

뭐 본래의 것이 아니라고 봐도 무방한 듯하다.

일단 의화단의 난 때 팔이 잘리는 큰 파괴를 당했고 다시 문혁의 과정에서 한 번 더 부서졌다고 한다.

지금의 것은 1998년 복원한 것이다.


이번엔 못 간 서쪽 제1정인 부람정

불공성취불을 모시고 있다.


가는 길에 있는 비석

대충 가장 북경에서 경치가 좋은 곳이라는 뜻인 것 같다.


이제 경산의 절경이 펼쳐진다.

이 때가 해 떨어지기 전 6시 정도였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며 북경 사방의 경치를 바라볼 수 있었다.

정면에서 보이는 수황전


수황전 전경

오른쪽이 영덕전

멀리 북경성의 북문으로 최근 복원된 덕승문(德勝門)이 보인다.


북경 동쪽 영사전이 잘 보인다.


대망의 정면

앞의 기망루(綺望樓)와 경산문(景山門)을 지나 신무문과 자금성이 펼쳐지는 장관이 보인다.


누런 지붕이 연이어 이어지는 모습이 아주 장관이다.

경산까지 올라온 땀방울을 경치와 시원한 바람이 다 날려주었다.


동쪽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못 본 경산문과 남쪽 풍경

경산문 뒤에는 기망루가 있다.


이 기망루는 관학당(官學堂)의 일부로 쓰이던 건물이다.

건륭제 시기에 이르면 만주족은 한화(漢化)가 급속히 진행되어 만주어를 읽지 못하고,

활쏘기와 기마도 능하지 못하는 등 본래의 정체성을 많이 상실하였고, 한족에 비해

압도적으로 낮았던 과거의 경쟁률에도 불과하고 과거 급제를 하는 이들이 적었다.

이는 팔기가 국가의 근본이라는 인식 하에 무료로 은과 식량을 지급했던 청조의 정책 때문이기도 했다.

건륭제는 만주족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만주족의 정체성을 창조했다. 이전까지 팔기라는 틀 아래 느슨하게 구성되었던 만주족이라는(정확히 말하면 기인이라는) 틀을 강화하여 팔기를 구성하는 만주팔기, 몽고팔기, 한인팔기 중 한인팔기를 대거 정리하여 기적(旗籍)에서 제외하는 한편, 만주족의 전통을 정리하고 제사의식 같은 것을 정리, 창조하였다. 관학당의 설치 역시 만주족이 한족 관료들 사이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으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했다.


이제 만춘정 아래를 돌아가면서 북경시내를 돌아본다.

서쪽의 풍경


동쪽. 자금성 너머로 현대화된 북경시내가 펼쳐진다.


만춘정 난간에 기대서 본 자금성

정말 장엄한 풍경이다.




멀리 인민대회당과 국가대극원 같은 현대건물이 보이고

오른쪽에는 우화각 같은 건물도 보인다.




확대해 본 자금성 신무문 광장

관람시간이 끝나 한산하다.




이종욱이의 기념사진


서쪽 풍경


자금성 동북각루가 보인다.



다들 연신 풍경을 담기 바쁘다.


경산공원(징산공원)이야말로 북경 여행의 꽃이 아닌가 싶다.



멀리 북해공원의 백탑이 보인다.



북해공원

이 때까진 갈 생각이 없었는데 급 일정조정으로 다음 날 가게 되었다.



다시 보는 수황전 풍경



다들 감탄 중


아래쪽 정자가 보인다.

우리가 올라온 관묘정이다.


확대해본 수황전




정광조의 기념사진

이 사진을 찍고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


나도 기념사진


만춘정 살별문


만춘정에서 서쪽으로 내려오면 집방정(輯芳亭)이 있다.

유일하게 파괴되어 1939년 복원된 정자이다. 안에는 아미타불을 모시고 있다.


집방정 앞에는 팔각형 난간으로 둘러쌓인 나무가 하나 있다..

이때까지 우리는 숭정제가 목을 매 자살했다는 홰나무를 찾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이 나무가 그 나무인가 한참 추정했다.

뭐 결과적으로는 아니었다.



집방루에서 바라본 고궁


우리의 마지막 목표인 숭정제 자살 터를 찾고 있었다.

이 나무가 그럴싸하여 애들이 이 나무 사진을 찍었으나


이것은 소년궁이었던 수황궁을 찾은 주은래(저우언라이)총리의 기념식수였다.

중국인들의 주은래에 대한 존경의 정도를 알 수 있다.


집방정 인근의 비석

경산이라는 글자가 새겨져있다.


뭘까

이 20세기 유적은


다시 보는 수황전 일대


매우 기분이 좋아진 나는 경산 비석 근처의 나무 아래서 자유를 만끽한다.





왜 이렇게 사진을 많이 찍은 거지



여튼 좋다



나를 놔두고 애들은 필사적으로 숭정제가 자살한 나무를 찾고 있었으나 이상한 나무만 찍어왔다.


이제 슬슬 해가 지고 도시에 불이 켜진다.


자금성 저 뒤로 천안문 광장과 전문대가에도 불이 들어오고 있다.


이제 환하다

자금성에도 조명을 쏴주면 좋을텐데


동쪽의 시가지



어두워질수록 천안문광장 쪽은 환해진다.




북경 야경은 역시 경산공원이 최고인 듯하다.


완전히 어두워진 자금성



이제 야경도 다 보았고 우리는 부지런히 숭정제의 자살지를 찾는다.

우리는 당연히 숭정제가 산 위에서 죽었을 것으로 생각해봤는데 숭정제는 완전 아래에서 자살했다.

만춘정 위에서 올라오던 한 중국인 커플에게 나무 사진을 보여주며 이걸 아냐고 물어봤다. 한참 들여다보던 그들은 밍 다이너스티의 임페러가 슈사이드 한 곳이냐고 물어봤고 그렇다고 하자 남자가 따라오란다. 하이힐을 신은 여자가 뭐라뭐라 불평한 것 같은데 알고 보니 과연 불평할 만했다.

완전 산 아래로 내려가야 했기 때문에

아주 친절한 중국인 덕분에 숭정제 자살지를 찾을 수 있었다.


몇 번이나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드디어 그가 자살한 곳에 도착


밤에 찍어 완전 음산하게 나왔다.


바로 옆에는 숭정제의 죽음을 애도하는 비석들이 있다.


청에서 올린 숭정제의 묘호는 사종(思宗)이다.

망한 나라 황제에게 왠 묘호까지라고 생각할 수 있겠으나 명목상 청은 이자성의 난을 진압한 것이지

절대 명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다. 즉 청은 이자성의 난으로 북경이 함락되자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의 항복과 그의 요청으로 이자성군을 쫓아내고 명을 이어가는 왕조를 개창한 것이다.

때문에 숭정제에 대한 대접도 공식적으로는 지극하다.


밝을 때 찍은 홰나무 사진

사실 이 홰나무는 믄혁 이후에 다시 심은 것이다. 숭정제가 목매어 죽은 홰나무는 청의 입관 이후

황제의 죽음을 말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쇠사슬이 채워졌다. 그러나 의화단의 난 이후

그 쇠사슬은 풀렸는데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홍위병들에 의해 봉건잔재라고 베어졌다.

이후 원래 나무의 후계목을 현재 자리에 다시 심은 것이다.


역시 낮에 찍은 숭정제 순국처

북경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숭정제는 조회를 소집했으나 신하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다. 망국을 직감한 숭정제는 환관 왕승은만 데리고 경산에 올라 불타는 자금성을 확인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용포에 '짐이 등극한 지 17년, 역적이 경성을 핍박하니 짐의 보잘 것 없음과 박덕함을 하늘조차 꾸짖는구나. 선조들이 이룩한 나라를 내가 부덕하여 이런 지경으로 이끌었으니 죽어 지하에서 조상을 뵐 면목이 없으니 짐의 의관을 벗겨 얼굴을 가려라, 명의 백성들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명에 대한 그대들의 분노는 나의 시체에만 풀어주길 바란다'는 유서를 남기고 목을 메 자결한다. 왕승은 역시 그 뒤의 나무에 목을 매 자결했다고 한다. 이자성은 숭정제와 그의 황후를 합장하여 묻어주었다. 청에서는 사종이라는 묘호와 장열민황제(莊烈愍皇帝)라는 시호를 올렸고, 남명(南明)에서는 의종(毅宗)이라는 묘호를 올렸는데 조선에서는 의종이라는 묘호를 주로 사용했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다시 동문으로 나왔다.


길을 건너 택시를 타고 숙소로 돌아갔다. 이렇게 3일차 북경여행이 끝났다. 아주 긴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