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4일 (중국수도박물관2: 고도 북경의 역사 문화)

同黎 2015. 9. 13. 20:06



이제 2층으로 왔다.


고도 북경 역사문화편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연나라 수도에서 한나라 시대의 북평(北平)을 거쳐

금, 원, 명, 청의 수도인 베이징의 역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유물들


기원전 11세기의 유물들로 연나라에서 만든 청동기들이다.

이 때의 연나라는 아직 주나라의 봉건제에서 완전히 탈피하지는

않은 국가로 주나라 소공의 아들에게 내려진 봉지였다.

그러나 동이족을 막는 역할을 하고 조선 등과 교류하고 대립하면서

중원과는 조금씩 다른 문화를 유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 투구

이런 건 처음본다. 통으로 된 투구라니


여러 유적에서 발견된 갑골문과 봉니 등의 유물들


금문이 새겨진 정(鼎). 아직 서주시기의 유물이다.

이런 유물 덕분에 당대의 사실을 잘 알 수 있다.

이런 점을 보면 문헌사료를 보충할 수 있는 고고유물(특히 글자가 있는)이 많은 중국이 부럽다.

일본은 아예 고대사 문헌사료가 많고


춘추시대 본격적인 연의 통치를 보여주는 패널. 덕분에 북경에는 연경(燕京)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음 근데 연나라 영역이 좀 이상하다... 만주는 그렇다 치고 조선?

중국 쪽 역사지도에도 요서에 한정되어 있는데.. 아마 세력권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연나라 당시의 청동기


연나라 후기의 토기. 색칠을 하였고 형태는 청동기를 닮았다.


이제 한당제국으로 들어간다.

한나라 묘에서 발견된 옻칠한 관 조각과 출토품들


한나라 때의 무덤 장식 기둥

서역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다. 국제제국으로서의 한을 강조하는 유물들이다.


무덤 안의 병풍 같은 것을 받쳤던 기둥 받침


무덤 장식


당나라 당시의 유물들

백옥으로 만든 묘지도 있는데 주인이 누구인지는 모르겠다.


고분벽화

중국은 벽화를 과감하게 떼어서 보관한다. 왠만하면 전체 보관을 했음 좋겠다.


당나라 때의 묘지


당시 이곳에 설치되었던 유주의 장관이었다고 한다. 유주자사겠지.

발해에 사진으로 다녀와 발해기라는 책을 서술했다고 한다.


역시 당대에 만들어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들


이제 요나라의 시기이다.

송과 만리장성 이남의 연운 16주를 두고 싸웠던 요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요나라는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며 남경이라고 명명하였다.


금나라 해릉양왕의 천도

해릉양왕은 금나라의 4대 황제였지만 워낙 주색을 밝히고 막장이어서 쫓겨난 인물이다.

어쨌든 1125년 금은 요를 멸망시키고 이곳으로 수도를 옮겨 중도(中都)라고 하였다.


안쪽의 전시장으로 가면


무려 금 태조 완안아골타의 석관

해릉양왕이 천도할 때 금태조와 태종의 무덤을 이전해왔다.


황후의 관

내부 유물이야 다 도굴당했겠지만 여튼 금태조의 관이 이렇게 떡하니 있다니 놀랍다.




태조릉 내부의 벽화

해릉양왕은 상당히 여진족의 한화를 강조했기 때문에 내부의 벽화들 역시 송나라 풍의 영향이 잘 보인다.


금나라 중도의 상상도


금나라 때의 묘지


금대의 유물들

금으로 만든 접시와 잔


칠성검이라고 한다.


이제 원대이다.

쿠빌라이 칸은 중도를 밀어버리고 원의 대도(大都)를 세운다.

당시의 유적이 많진 않지만 아직도 남아있다고 한다.


목판 불경


무덤에서 발견된 작은 비석 모양의 묘지


원나라 때의 불상들

이 때의 불교는 대부분 티벳불교이다. 하지만 청대 겔룩파와 달리 이 때는 까규파가 주도적이었다고 한다.


무덤의 도용들


네스토리우스교(경교) 신도의 석관

십자가 모양이 이채롭다.


혼천의


원대 적수담(積水潭)


대도의 건설 후 원나라는 중국의 대운하를 대도까지 확장해 강남의 물자가 대도까지 올 수 있도록 했다.

우리가 북경오리를 먹었던 남신창이 그 장소이다.



당시의 적수담을 재현한 모형들


이제 명으로 넘어간다.

명 태조 주원장은 원래 원을 멸망시키고 남경에 수도를 정했지만 영락제는 2대 황제인 건문제를 죽이고

황위에 올라 수도를 북평, 즉 북경으로 옮겼다. 자신이 연왕으로 있으면서 북평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북원 등 유목세력의 침입이 여전히 중요한 문제였기 때문이다.

위 사진은 명대 고분에서 발굴된 유물들


개와 말 모양 도용

재밌게 생겼다.


명대 불교유적들

유교, 도교, 천주교, 티벳불교, 중국불교 등 다양한 종교가 들어왔음을 알려주고 있다.


명대 가사

무늬가 들어간 비단으로 만든 가사이다.


당시의 불상들


석당(石幢)이라고 하는 불경을 새긴 기둥이다.

불정존승다라니를 새겼다.

조선에도 흔치 않지만 주로 북한지역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명 정릉의 출토품들

명정릉은 신종 만력제의 무덤으로 명 13릉 중 유일하게 발굴된 무덤이다.

영락제의 장릉 등은 아직도 미발굴상태이다.

정릉 발굴은 중국 고고학을 크게 발전시켰지만 문혁 과정에서 안타깝게 수습이 미흡했던 발굴이기도 했다.

만력제의 시신을 문혁 과정에서 불태워졌지만 나머지 유물은 다행히 잘 보존되었다.


정통제 때 내려진 황제의 칙유


옥으로 만든 옥대. 이것을 비단으로 만든 허리띠에 부착하였다.


내부라고 적힌 명대 청화백자

내부가 정확히 어떠한 기관인지는 모르겠다.


영락대전

영락제 때 완성된 중국 최대의 백과사전이다.

본래 11095책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의화단 운동 등에 의해 산일되어 800책 미만만 남아있다.

한국의 장서각에도 한 책이 남아있다.


명십삼릉에서 발전된 익선관

위의 것은 금실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마 진품은 아니고 복제품인 것 같다.


명대 어보


정릉에서 출토된 금제 노리개


장기말


명대 북경성의 모습을 복원한 곳


당시 포에 넣고 쏘았던 석제 포탄

명에서 개발한 불랑기, 홍이포 등에 넣었던 것이라고 한다.


북경성 모형


황후의 의복

금룡이 수놓아져 있고, 장수를 기원하는 백 명의 동자가 수놓아져 있다.


평정대만도책과 평정금천도책

강희제와 건륭제 당시 있었던 대만과 금천(지금의 티베트 지역) 등의 정벌을 그려넣은 책이다.

건륭제는 자신의 무공을 십전(十全)이라고 하여 10번을 싸워 이겼다고 했는데, 사실 진 경우도 많다.

 


당시의 대포와


갑옷


청의 황제가 5대 달라이라마에게 하사한 금책과 금보



옹정제 당시 만든 대장경판

청장판이라고 부르는 대장경으로 티벳 등의 불경도 포함한 것이다.



18세기 달라이라마에게 하사한 오불관

검은 비단에 금과 보석으로 장식하였다.


불상과 염주


황제가 평소에 입던 푸른 비단으로 만든 평상복


청대 과거시험 답안지(시권)

붉은 글씨로 성적이 매겨져있다.

시권 종이를 제각기 마련하는 조선과는 달리 청은 규격이 정해져 있었나보다.


황제의 용포


청대 북경의 모습을 재현한 모형



청나라 궁정 진보들



고금도서집성과 사고전서

이 두 가지 책은 청 시기 국가에 의해 지식이 정리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강희제의 고금도서집성과 건륭제의 사고전서를 통해 청 황제들은 자신들이 유교의 도통을

이어받았음을 자처하였다. 그러면서 동시에 중국 전체의 텍스트를 검열하였고,

특히 한족 지식인들에 의해 작성된 중화주의적 텍스트를 대거 제거하였다.

강희·옹정·건륭의 3대 치세에는 동시에 수많은 문자옥(文字獄)이 있었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제 근대이다.


이것은 북양군벌정부 당시의 북경

청을 멸망했지만 쑨원(손문)이 건설하려 했던 중화민국은 위안스카이(원세개) 등의 북양군벌에 의해 지배되었고 결국 이상적 중화민국은 북양정부로 바뀐다. 이후 1928년 장개석(장제스)가 남경 국민정부를 세울 때까지 북양정부는 계속되었고, 북양정부의 친일·매판적 태도에 반대하였던 지식인들의 투쟁도 계속되었다.


북양정부에 대항했던 지식인들

맨 오른쪽이 지금도 존경받는 사회주의의 대문호 루쉰(노신)이다.

그 옆에 중국공산당의 창립자인 리다자오(이대교), 천두슈(진독수), 후스(호적) 등의 모습도 보인다.


5·4운동 영상관


벽에는 5.4운동의 지도자들의 사진이 붙어 있어 마음을 숙연해지게 된다.

1919년의 5.4운동은 원세개(위안스카이)와 돤치루이(단기서)로 이어지는

친일·매판적 중화민국 북양정부에 대한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들의 반대로 폭발한 운동이다.

손문(쑨원)은 신해혁명을 통해 청 제국을 무너트리지만 군사적, 현실적 문제로 인해 대총통을

원세개에게 넘기는 현실적 타협안을 선택한다. 그러나 원세개와 그 뒤를 이은 단기서 등의 군벌정부는

일본에 의치하거나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준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선전포고하며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전국이 된 일본은 산동반도에 있던 독일의 조차지 권리를

계승하고 남만주와 내몽고에 있어서의 일본의 권익 우선, 일본인 정치고문 등을 요구하는 이른바

21개조를 강요했고, 북양정부는 일본의 차관 등을 이유로 이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1차 세계대전의 수습을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연합국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하려 하고 북양정부도

이를 수용하려 하자 북경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지식인, 학생 등 3천 명이 천안문 광장에

모여 이에 항의한 것이 5.4운동이다. 혹 3.1운동이 5.4운동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도 있으나 5.4운동은

이미 북경대를 중심으로 번졌던 맑스주의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튼 2개월 동안 루쉰(노신), 진덕수, 이대교, 후스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5.4운동으로 친일 관료들이 습격당하고 운동이 지방으로 번지며 노동자 파업도 잇따르자 돤치루이 정권은 결국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을 거부하고 친일관료 몇 명을 파면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후 5.4운동의 주도자들을 중심으로 중국공산당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때문에 중국사에서는 이를 기점으로 근대사와 현대사를 나누곤 한다.


이어 국민정부와 항일전쟁(중일전쟁)기의 북경모습

오른쪽에 팔로군의 견장도 보인다.


당시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의 군기 중 하나

모범지부로 표창받은 지부의 깃발이다.


해방전쟁, 즉 국공내전기의 북경


중국공산당 인민해방군이 북경을 점령하고 내린 포고령

아직 중화민국의 연호를 쓰고 있는 것이 이채롭다.

인민해방군 원수까지 지낸 예젠잉(엽검영) 명의의 포고문이다.


당시의 인민일보와 지폐


인민해방군의 북경 진격 당시의 사진들


전시장의 마지막은 천안문에서 있었던 개국대전의 영상을 상영하는 곳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를 선언하는 모택동



당시 모택동이 사용했던 마이크를 배경으로 환호하는 군사들의 모습이 영상으로 나온다.



선포하는 모택동


당시 사용했던 예포. 국가박물관과 동일하다.

이를 끝으로 북경의 역사는 마무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