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3일 (경산공원1)

同黎 2015. 9. 12. 22:28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경산공원이다.

정문이자 남문인 경산문에서는 택시가 설 수 없어 우리는 동문에서 내린다.


동문인 산좌리문(山左里門)

입장료는 2위안이다. 관람시간은 9시까지로 북경에서 저녁시간에 넣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답사코스이다.


경내 안내도

사실 경산공원(景山公園, 징산공원)은 흔히 알고 있는 경산오정뿐만 아니라 수황전, 영사전, 관덕전 등

일련의 제사 및 후원, 궁궐을 포함한 넓은 영역이지만 지금은 경산오정 부분만 공개되고 있다.

원래 경산지역은 수, 당대부터 행궁이 있던 자리였다. 특히 이 자리는 수양제가 고구려 원정군을 보낼 때 본영이 있던 자리라고 한다. 이후로도 요, 금대에 경산공원과 북해공원 일대는 궁성과 후원이 있던 자리였다.

그러던 이곳에 산이 생긴 것은 원대였다. 지금의 자리에는 원 세조 쿠빌라이 칸이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를 세웠고, 그 옆에는 북해, 중해, 남해 등 여러 인공호수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 인공호수를 만들고 파낸 산을 청산(靑山) 혹은 진산(鎭山)이라고 했다고 한다.

지금의 경산공원이 조성된 것은 명 영락제 때이다. 영락제는 자금성을 조성하고 그 해자를 판 흙을

더하여 지금의 높이 108미터의 산을 만들었다. 이 때는 이 곳을 만세산(萬歲山)이라고 불렀다.

지금의 경산오정(景山五亭)도 대략 이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가

이자성의 난 당시 여기서 불타는 도성을 바라보다 자결하고 순치제는 이 산의 이름을 경산으로 바꾸었다.

이후 경산은 딱딱한 자금성을 싫어했던 많은 황제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의화단의 난 당시

독일, 러시아,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일본 등 8개국 연합국에 큰 공격을 받아 많은 문물을 잃었고,

이후에는 중화민국 초대 총통 원세개(위안스카이)가 맘대로 칭제를 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은 신무문과 경산이 도로로 나뉘어져 있지만 원래는 신무문을 지나 해자를 건너면 바로 경산이었단다.


공원 내부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다.


곳곳에 괴석이 있는 산 위로 경산의 꼭대기에 있는 만춘정(萬春亭)이 보인다.


저기까지 올라가기 전에


산을 오르기 전에 먼저 수황문과 구봉패루 쪽으로 간다.



어화원처럼 여기도 관리되는 나무와 괴석들이 가득하다.


영사전(永思殿) 입구

비공개 지역인 영사전은 황제와 황후의 거처이다. 이 자리가 바로 금과 원의 궁궐 자리라고 한다.

뒤편에는 진무대제를 제사지내는 호국충의묘(護國忠義廟)가 있다고 한다.

어화원 흠안전에서 모시는 도교의 신과 같은 양반이다.

바로 옆에는 관덕전(觀德殿)이 있는데 여기는 명청대 황제가 활쏘기를 구경했던 곳이다.

순치제가 자신의 애첩인 효헌단경황후가 죽자 여기에 관을 안치하고 황후로 추봉했다고 하며,

순치제 사후에도 여기를 빈전으로 삼았던 곳이다.


이제 수황문(壽皇門)과 구봉패루(九奉牌樓)가 보인다.


여기가 역대 황실의 선조를 모시던 수황전(壽皇殿)의 정문이다.


수황문 앞에는 동, 서, 남 3방향으로 패방이 서 있다.


패방이 3개의 문으로 되어 있고 패방이 3개 있어 구봉패루라고 한다.


패방의 글씨는 건륭제의 친필이라고 한다.

패방 자체는 건륭제 때의 것인데 60년대에 대수리를 거친 것이고 2007년에도 큰 수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새 것 같다.


동쪽의 패방



정면의 수황문


이 뒤로 수황전이 있다.

수황전은 역대 황제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지내는 곳이다. 조선의 선원전과 비슷하다.

그러나 여기에 모셔져 있는 보물 중 상당수는 1900년 의화단의 난 당시 털려 파리 기메박물관 등에 있다.

이 수황전 진보(珍寶)는 중국에서 신경써서 환수하려고 시도하는 대표적인 유물 중 하나이다.

1950년에 남은 수장품과 어진은 모두 고궁박물원으로 옮겨졌고 제사유적이 다 그렇듯이 85년까지

북경시 소년궁(少年宮)으로 능욕당하다가 소년궁은 이전하고 지금은 이렇게 비공개 구역으로 남아있다.

현재까지 복원공사 중으로 2014년 2단계 복원이 끝났다고 하는데 어서 공개되었으면 좋겠다.

 

앞은 여러 화분이 막고 있는데... 한때 북경시 산하 과학기술원의 원예국이 여기 있었기 때문이라고...

수황문에는 등소평이 쓴 소년궁 현판이 걸려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이전되었다.


동쪽 패방


역시 건륭제의 친필이라고



패방의 받침돌


금채로 화려하게 장식된 구봉패루의 상부


바닥에는 이런 돌이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패방의 옛 받침돌이라고 한다.


보수하면서 상처난 기둥을 치우고 그 받침돌도 교체하면서 이렇게 따로 보관한 것이다.


한 쌍은 아니고 여러 쌍이 있다.


이제 경산을 오를 차례다.

여기는 북쪽. 경산 정문의 정 반대쪽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꼭대기의 만춘정으로 바로 갈 수 있지만 상당히 가파르다.

그래서 좀 돌아가기로 한다.


돌아가는 길인 샛길이 나온다.

괴석으로 장식된 이 계단은 만춘정 아래의 관묘정으로 바로 통하는 길이다.


역시 가파르다.

다리가 아픈 나는 더 돌아가는 길로 가기로 하고 젊은 것들은 이 길로 올라간다.



꽤 험하네


이들이 계단을 오를 동안


나는 동쪽의 비교적 평탄한 길을 따라 올라간다.


곧 동쪽 제1정인 주상정(周賞亭)이 나온다.

반대편에는 똑같은 모양의 부람정(富覽亭)이 있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원형-팔각형-정방형으로 정자의 모습이 변한다.

사실 이 5개의 정자는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불을 상징한다.

주상정에는 보생불이 부람정에는 불공성취불이 모셔져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5개 정자의 불상은 의화단의 난 당시 모두 8개국 연합군에 약탈당했다.


이제 주상정을 돌아나가면


동쪽 제2정인 관묘정(觀妙亭)으로 가는 계단이 나온다.


계단을 오르면


팔각형의 관묘정이 나온다.

안에는 아촉불이 있었다고 한다.


관묘정에서 바라본 풍경

수황전과 영사전이 보인다.



수황전의 모습


수황전 정전의 모습이 어슴프레 보인다.


수황전 뒤쪽으로 보이는 풍경들


무슨 건물인가


종루와 고루 같기도 하고 현대건축물 같기도 하고 잘 모르겠다.



반대편 자금성의 모습도 조금씩 보인다.



관묘정 모습


좀 더 정방형에 가까운 팔각형이다.


경산오정의 현판은 중화민국 시기 당시 모두 만한문 병기에서 한문으로 교체되었다고 한다.

관묘정 현판


관묘정에서도 자금성의 모습이 슬슬 보인다.


이것만으로도 감탄이 나온다.

만춘정에서 보는 광경은 얼마나 멋질까 기대가 된다.



신무문의 모습


열지어 있는 자금성




경산에 오르지 않았으면 틀림없이 후회했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 꼭대기인 만춘정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