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합리적 정치운영 : 조선과 대한민국

同黎 2012. 7. 28. 00:47

합리적 정치운영 : 조선과 대한민국
흔히 근대를 이성의 시대라고 합니다. 합리성에 기초하여 전근대적인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개조하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적용되는 법제도, 정부조직, 경제구조 등을 만든 것이 바로 전근대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보면 근대는 합리성의 시대, 전극대는 비합리성의 시대라고 흔히 이해되어 왔습니다. 특히 자신이 살고 있는 현재의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삶으로 착각하기 쉬운 인간의 보수성 덕분에 "역사는 진보하고 있으며, 과거는 불행한 시대, 내가 살고 있는 현재는 꽤 괜찮은 시대"라고 흔히들 생각하는 것이 전근대=비합리, 근대=합리라는 공식을 사람들의 머리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게 합니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에 대한 의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왔습니다. 근대 비판의 시작을 열었던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감시와 처벌>에서 잘 보여주듯이 근대는 합리성을 가장해 "비정상적인 것"에 대한 감시와 처벌을 통해 인민에 대한 통제와 획일화를 강요해왔습니다. "비정상적인 것"에는 전근대적이라고 우리가 뭉뚱그려 부르는 모든 것이 들어가 있는데, 이를 통해 흔히 전근대 사회는 폭력과 야만이 난무하고 비합리적인 봉건군주(왕이든 황제든)에 의한 무원칙적인 통치가 이루어진 시기로 흔히들 생각됩니다. 이런 생각을 기반으로 우리는 "그래도 이 시대에 태어나길 잘 했어"라는 자기 만족와 위안을 통해 보수적으로 변해갑니다.

이번 시간에는 이런 생각을 잠시 뒤집어 봅시다. 다만 그 범위를 제 능력의 한계 때문에 "정치운영방식"으로만 한정하여 살펴보겠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운영은 행정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의회는 행정부를 감시합니다. 그리고 사법부는 법이 벌어진 사건에 대하여 법리적으로 판단함으로써 법적으로 잘못된 일들을 제자리에 돌려놓거나 피해자를 보호하는 역할을 합니다. 일견 매우 합리적이어 보이는 이 삼권분립은 그러나 실상은 이론과 다른 면이 더 많습니다.

한국의 대통령 중심제입니다. 행정부 각부의 수장인 장차관과 국정을 통괄하는 총리는 대통령의 의지에 의하여 임명됩니다. 따라서 행정부에서 국정을 논의하는 국무회의는 그 참여인원이 매우 중요한 인물들임에도 불구하고 국정을 논의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명하복적인 구조는 행정부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흔히 "공무원은 영혼이 없다"라고 하는 말이 의미하듯이 정책결정은 상부에서 하부로 하달되며 이 과정에서 논의와 조정은 불가능합니다. 이런 방식은 사법부 통제에도 적용되는데, 우선 사법부의 일원이어야 하는 검찰이 행정부서인 법무부의 하위청으로 들어가 법무부의 통제를 받음으로써 사법권의 상당부분은 제한을 받게 됩니다. 대법원장과 대법관, 헌법재판관 다수를 집권세력이 임명한다는 점에서도 사법부의 독립성은 애초에 "제도적으로" 보장받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의회는 제 역할을 하고 있을까요? 대의민주주의제도 중 가장 하급한 방식인 다수결이 관철되는 현재 의회에서는 집권여당과 의회 다수당이 일치할 경우 어떠한 반대 정책도 사실상 국정에 반영되지 않습니다. 야당이 의회 다수당이 되어도 일정한 국정 마비가 오긴 하지만 집권세력의 의지를  완전히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거의 없다고 봐야 합니다. 때문에 현대 대한민국의 정치는 일정한 "제도" 보다는 그때 그때 정당과 개인의 "정치력"에 더 의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정치운영은 어떠할까요? 왕조 국가인 조선에서 가장 큰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개인이자 제도는 바로 왕입니다. 국정 제반 사항에 대한 최종 결정, 인사, 재정 등은 모두 왕의 의지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결정이 왕 개인의 의지 만으로 관철되지는 않습니다. 왕 밑에는 정2품 이상으로 의정부, 비변사, 육조 등 주요 기관의 전현직 고위인사인 대신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밑으로는 전문가 집단이라고 할 수 있는 육조의 참판, 참의 등의 당상관들, 그리고 실무자 집단인 좌랑과 정랑, 그리고 속아문의 정, 부정 등 당하관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언론과 감찰기관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삼사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잘 알려져 있듯이 대신은 왕과 많은 부분 의견을 같이 하는 동시에 국정 운영에 있어서 왕에게 가장 많은 영향력을 주는 세력입니다. 또한 대신들은 많은 속아문들에 대한 도제조, 제조 등의 관직을 겸하는데 본래 단순 인사평가만을 위한 제도였던 제조제도는 대신들의 하위 관사에 대한 영향력을 증가 시키면서 대신들의 영향력을 더욱 증가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이들과 가장 적극적으로 대립하던 세력은 대간세력인데, 삼사 관원들은 종6품에서 종2품으로 모두 대신에 해당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나이나 관력으로 보아도 비교적 젊은 이들이 해당합니다. 이들은 개인적으로 혹은 같은 관서 안의 관원들이 연합하여, 혹은 삼사나 양사가 합사하여 간언활동을 하면서 왕과 대신을 견제하는 한편 서경을 통해 인사권을 제한하였습니다. 이들의 언론활동은 때론 대단히 과격하였고, 언론활동을 통해 파직되어도 관력에 흠이 되지 않았으며 파직 후에도 오래지 않아 복직되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심지어 왕이 대간들을 파직할 때 대신들이 나와 말리는 일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젊고 낮은 품계를 지닌 대간들이 활발한 언론 활동을 펼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이들이 공론을 대표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즉 늙고 노회하며 실무에 밝은 대신들과 젊은 경험이 부족하지만 원칙적이며 "여론"에 밝은 대간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정치운영상에 있어서 지나칙 원칙주의도, 실리주의도 방지하고자 한 것입니다. 이 밖에도 경연, 서연, 윤대 등의 제도는 평소라면 왕을 직접 만날 수 없는 관원들이 왕과 직접 대면하고, 대신과 논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면서 조선의 공론정치를 더욱 강화시키고자 한 제도입니다. 특히 정책 결정과정에서 현감이상의 지방관이나 품계가 높지 않은 관원들의 상소, 차자 등이 허용되었던 점은 조선 정치운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조선의 엘리트 관원은 어떠한 경로를 통해 올라가는지 살펴봅시다. 문과 급제자는 4관(홍문관, 성균관, 승문원, 교서관)의 권지를 거쳐 육조나 속아문의 관원을 거치기도 하고 찰방을 지내기도 합니다. 이후 능력을 인정받은 이들은 흔히 청요직이라고 불리는 이조의 전랑, 삼사의 하위 관직에 가게 됩니다. 가장 고준담론을 요구받는 이러한 자리와 몇 차례의 지방관 경험을 쌓은 이들은 당상관이 되면 삼사의 장관이 되거나 승정원의 승지가 됩니다. 특히 승지들은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기 때문에 품계는 비록 당상관의 제일 하위이지만 중요한 자리이며, 동시에 각종 계목, 계본, 상소를 관리하기 때문에 실무를 익히기 좋은 자리이기도 합니다. 또한 조선 후기로 갈 수록 언론의 역할을 함께 담당하게 됩니다. 승정원의 언론 기능은 대부분의 승지들이 삼사출신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승지 출신자들은 육조의 참의, 참판을 거치면서 각 부서의 실무들을 익히게 되며, 판서가 되었을 때에는 나름의 전문가가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 정승들은 판서를 거친 자들이 됩니다.

이처럼 한 사람의 정승은 삼사에서의 언론 경험, 지방관으로써의 경험, 실무 경험을 두루 갖춘 후에 국정 전반을 조율하는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대신과 대간들의 갈등이 있더라도 이 것이 극단적인 정치 갈등으로 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대한민국의 정치운영에는 이런 갈등과 조정의 역할을 하는 "제도"가 있을까요? 제 생각에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내부고발자는 왕따를 당하는 것이 현실이죠. 그렇다고 제가 조선의 정치운영이 완벽했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붕당과 환국, 세도정치와 공신정치, 외척정치 등 조선도 수 많은 정치 갈등이 있었습니다. 또한 공론이라고 해도 그것은 양반계급의 공론일 뿐 평민이하 계층과 여성 등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책 결정과정에서 다른 목소리가 나오고 이 것이 실제로 반영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설계되어 있는가 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과연 "근대"와 "전근대" 어느 시대가 더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