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5차

기나 긴 일본답사기 - 31일 비젠1 (시즈타니학교閑谷学校1)

同黎 2019. 10. 26. 05:55



산요 본선 시간표


이거 봐라...

1시간에 2대 꼴 밖에 없다.

거의 버스..

산요 '본선'인데


열차 도착

노란 기차라니


한참을 달려간다

쾌속 신쾌속 같은 게 원래 없나

히메지 방면으로 가는 길


밖으로 보이는 요시이가와를 따라 구불구불 40분 정도를 달리면


요시나가역 도착


비젠시에 속하긴 하지만 시가지는 한참 아래 아코선과 신칸센이

지나는 해안으로 다니고 여기는 한참 안으로 들어와 있다.

딱 봐도 작은 역


시즈타니학교에 대중교통으로 가는 방법은 꽤나 어렵다.

산요본선으로 요시나가역으로 가거나, 아코선을 타고 비젠카타카미역 혹은 이리역으로 가면 버스가 있다.

홈페이지에서는 그냥 택시를 타는 걸 권하고 있기도 하던데 어쩼든 거리상 요시나가역에 가장 가깝다.

비젠 카타카미역은 절망적인 정도로 버스가 적고(하루 4대), 이리역은 1시간에 1대 꼴, 요시나가역은

비슷하지만 관람을 하기 좋은 9~10시 사이, 2시~4시 사이에는 좀 버스가 많아 요시나가역으로 간다.

여차하면 택시를 타야하기도 하고


비젠 시영버스

버스라기보다는... 봉고다.


버스 정류장


버스 대기 중 역 주변을 그냥 잠시 살펴본다.

노란색의 비젠 기와가 여기저기 보인다.



이발소

진짜 한가한 동네


버스는 10인승이다.

줄 잘못 서면 차도 못 탄다.


도착하자마자 버스 시간표 확보

나갈 때는 아무거나 잡아타면 되니까


입구에서 이 지역의 오래된 도기인 비젠야키를 파는 매점이 있다.


잠깐 구경하고


학교로 걸어간다


차가 꽤 많고 막힌다.


단풍 명소로도 유명하다고 한다.


시즈타니학교에 어서오세요


오 주차장이 꽉 찼다.


경내도

번주 이케다 미츠마사의 유골 일부를 모신 무덤을 놓치고 말았다.

버스 시간 때문에


특별사적 

일본 1700군데 사적 중에 52군데 밖에 없는 특별사적

시즈타니학교(閑谷学校, 한곡학교)는 일본에서 처음 생긴 번교이다. 즉 번에서 직접 세워 인재를 길러낸

학교로 조슈번의 명륜관, 미토번의 홍도관과 함께 일본 3대 번교로 손꼽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무사들만

들어갈 수 있던 학교에 서민도 함께 들어갈 수 있어 서민학교의 시초로도 불린다. 사실 시즈타니학교의

서민학교의 성격은 일본의 양명학자인 쿠마자와 반잔(熊沢蕃山)이 만든 화원회라는 학교를 이어받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는 교토 낭인 출신 아버지에게 태어났고 막부의 주자학에 반대했기 때문에 추천에

의해 오카야마번에 출사했으나 2차례 그만 두었고 번정개혁안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오카야마번을 탈번,

교토에서는 추방되어 떠돌다가 후루카와에서 죽었다. 다만 오카야마번주 이케다 미츠마사는 막부에

감시받는 그를 부담스러워해 내쫓았지만 명군으로 손꼽히는 인물로 그의 교육방침은 그대로 계승한다.


여러 인물들의 안내판

이케다 미츠마사는 이케다 종가의 당주이다. 히메지번의 3대 번주로 어머니가 막부의 가신인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의 딸로 막부와 친한 인물이었다. 5살 때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해 그의 귀여움을 받았다고

한다. 52만 석의 히메지번주가 되었으나 10대였기 때문에 이나바 돗토리번 32만 5천석으로 감봉 전봉된다.

돗토리번은 모리씨의 영향력이 강했던 지역 상황상 장악력이 약해 고생 좀 했다는 듯. 그러나 3대 쇼군

이에미츠의 눈에 띄어 능력을 인정받아 혼다 타다토키의 딸과 결혼하는데 비록 장인은 10만석 다이묘지만

장모가 무려 히데타다의 딸 센히메다. 그의 이름 중 한 글자도 이에미츠에게 받은 것이다. 이후 오카야마번

주였던 삼촌이 죽자 이데미츠는 오카야마번 31만 5천 석으로 이봉하였다. 돗토리 32만 석보다 오카야마

31만 석이 훨씬 가치있는 것임은 분명. 많은 지번을 거느리고 서국 쇼군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성장한다.

오카야마번 입봉 이후 이케다 미츠마사는 막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모신 도쇼구를 강력히 권청할 것을

요청해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최초의 도쇼구 지방 분사이다. 이후 쿠마자와 반잔을 초빙해 교육에 힘쓰고

그가 추방된 이후에는 시즈타니 학교를 부지까지 직접 살피면서 만들었다. 검소함을 강조했고 여러

가신을 알아보고 간척, 신전 개발, 치수, 산업 진흥 등을 추진해서 에도 초기 2대 미토번주 도쿠가와

미츠쿠니(미토 코몬), 아이즈번주 호시나 마사유키와 함께 삼대 명군으로 불린다.

종교적으로도 유교를 중시하고 신불습합을 싫어해서 신불분리 정책을 선택한 사람이기도 하다. 또 과격한

일련종 불수불시파를 탄압하였다. 이러한 성장에 막부가 긴장해 한때 미츠마사의 반란설로 떠돌았지만

쿠마자와 반잔을 추방하는 등 정치적 대응을 하면서도 그의 정책은 그대로 계승한다. 다만 그의 성격은

실제로는 명군이란 평가를 위해 번에 의해 과장되었다는 설도 있다. 또 3대 쇼군 이에미츠가 죽고 11세의

이에츠나가 쇼군이 되자 이 때를 노려 일으킨 반란인 케이안의 변란 당시 배후 조종자가 아니냐는 의심도

있다. 다만 교육과 경제를 중시한 그의 통치 풍토가 오카야마번의 번영에 도움이 된 건 맞는 것 같다.


쿠마자와 반잔. 이케다 미츠마사의 초빙으로 서민교육의 기반을 만든 인물이다.

교토에 있던 낭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나 오미지역에서 일본 양명학의 거두인 나카에 토쥬의 문하에서

공부한다. 이후 쿄코무씨의 추천으로 오카야마번에 등용되어 300석을 받고 처음 번교인 화전교장을

만들었다. 이후 3000석으로 가증되어 서민들을 위한 화원회라는 기관을 만들고 다시 번 전체에

수습소라는 132개의 학교를 세운다. 수습소의 운영비가 많이 들어 이케다 미츠마사와 다음 

번주가 되는 아들이 싸우기도 했다고. 결국 그걸 합쳐 만든 것이 시즈타니학교이다.

교육뿐만 아니라 치산, 치수 등 농업, 산업 정책도 충실히하였으나 주자학에 적대적이어서 막부의 유학자인

하야시 라잔 등의 공격을 받아 결국 탈번하여 은거한다. 2번의 탈번 후에 오카야마를 떠나 교토로 가서

사숙을 열어 양명학을 가르치지만 명성이 높아지자 막부에게 감시당해 교토 쇼시다이에 의해

추방되어 요시노, 효고 등을 떠돌다가 야마토 코리야마에서 집필활동을 하다 죽었다.

후일 막말기 요시다 쇼인 등으로부터 실학자로 높이 평가받았던 인물이다.


이케다 미츠마사의 아들이자 4대 번주인 츠나마사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이었으나 오카야마번의 성장을 경계한 막부 덕분에 재정지출이 크게 늘어 학교 등을

가지고 아버지와 대립하기도 했고, 당대 평가에는 바보, 남색과 여색만 밝힘, 지나치게 문치주의자고

교토만 좋아함 등의 평가가 있다. 그러나 고라쿠엔을 경영하며 오카야마의 거리와 시장을 정비하고

행정면에서는 뛰어난 능력을 보인 것으로 시즈타니학교를 완성시키기도 했다.

아버지가 워낙 유명해 좀 덜 조명되는 사람


시즈타니 학교의 실질적 설계자인 츠다 나가타다. 이케다 미츠마사에 의해 20살에 등용되어 번정의 실력을

발휘하는 사람이다. 특히 치수에 능했으며 정전법에 의한 토지 분할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미츠마사는

1666년 그의 안내를 받아 이곳을 방문해 하교 부지를 결정하고 이후 많은 학교를 통합해 시즈타니학교를

세운다. 츠다 나가타다는 학교 근처에 저택을 세우고 학교 건립을 감독하여 학교를 완성시킨다.


에도시대 후기 시즈타니 학교 교수인 타케모토 쿤류

농업과 농민생활 개혁을 담은 권농책을 저술하여 농민학자로도 불린다.


막말의 양명학자 야마다 호코쿠

하급무사 출신이었으나 몰락해 백성이 되었으나 양명학을 공부하여 시즈타니학교에도 있었다.

막말기 재정개혁을 주장하며 빗추 마츠야마번의 가신이 되었으나 무진전쟁 당시 정부군에

선 마츠야마번을 오카야마번이 공격하고 그 원인이 된 호코쿠를 은거시킨다.

메이지시대 이후에는 시즈타니학교에서 한학을 가르키기도 했다.


오카야마번사 출신 메이지시대 교육자인 니시 키이치

자유민권운동에 참가하고 중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시즈타니학교의 부흥을 주도하기도 했는데, 메이지유신으로 번교인 시즈타니 학교는 패쇄되고 일부 숙소와

학방은 철거된다. 이 때 강당 등 주요시설도 철거 논의가 있엇지만 이케다가 후원으로 야마다 호코쿠 등이

초빙되어 한학 강의를 계속했다. 그럼에도 4년 후 시즈타니학교는 다시 휴교상태로 들어간다.

이 때 니시 키이치 등이 주도해 자금을 모아 학교를 재건하여 근대식 학교를 탈바꿈시킨다.

이후 근대적 교육제도가 편입되어 사립 시즈타니 중학교로 개명하였다. 사립 중학교가 되었으며 교사는

옛 건물이 아닌 철거하고 불탄 기숙사(숙방) 자리에 근대적 건물을 지어 사용했다. 전후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고 학제개편으로 현립 시즈타니중학교와 현립 시즈타니고등학교로 바뀌었다가 이후 다른

현립 고등학교와 통합되어 시즈타니 학교는 순수학 유적지이자 청소년 교육센터로 바뀌게 되었다.


근대 학교 출신자들이 쭉 있다.

소설가 마사무네 하쿠초

근대식 시즈타니학교에서 공부하였던 인물로 일본 근대 소설가로 명성을 떨쳤다.


오하라 재벌의 창립자인 오하라 마고사부로

오하라 미술관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동요작가이자 시인 미키 로후


학교 안내도

현재 강당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전체는 특별사적이다.

그리고 시즈타니학교라는 이름으로 4동이 중요문화재, 시즈타니학교 석병이 별도로 중요문화재, 시즈타니

학교 성묘라는 이름으로 제사시설 11동이 중요문화재, 이케다 미츠마사를 모신 시즈타니신사가 별도로

7동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총 24동의 건물과 시설이 담벼락, 계단 하나까지 모두 중요문화재이다.


안내판


시즈타니 중학교, 고등학교 학생들이 세운 기념비


창학 300주년 기념비

이것도 수십 년 전에 세운 건데


미산 선생 추모비

미산은 니시 키이치의 호이다.


연못 건너 보이는 강당


대단한 건물이다


국보


이제 들어간다


석교를 건넌다


반지

반은 성균관 반촌 할 때 반이다.


석교도 부속지정 문화재


잉어가 뛰어논다


이리가와의 물을 끌어다 만든 연못


교문인 학명문

학이 우는 문


중요문화재

뒤로 성묘가 보인다.


시즈타니학교라는 현판


교문 안내판

기와에 대한 안내문

사용된 기와는 이 지역의 특수한 도기인 비젠야키의 방법을 활용해

만든 것으로 지금도 대부분 300년이 넘은 초창기의 것을 사용 중이다.

학교를 위해 새롭게 개발한 기법


성묘는 공자를 모신 사당

올라가는 길 좌우로 황련목이 심어져 있다.


독특한 석담


돌을 일일히 다듬어 만든 것

별도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735미터나 된다


출입문으로 들어간다


논어 오미쿠지라니...


이케다 미츠마사가 논어를 좋아했다고 한다.


황련목

공자목이라고도 하며 공자의 제자 자공이 공자 묘소에 심었다고 하며 현재 곡부의 공림에도 있다고


강당과 교문


이케다 미츠마사를 모신 시즈타니신사


본래 동어당 혹은 방열사라로 불렸으나 현재는 신사라고 변경


전체가 중요문화재


배전


뒤로 폐전과 본전이 있다.


안내문


뒤편 본전에는 미츠마사의 좌상이 모셔져 있다고 한다.


통로 역할을 하는 폐전과 뒤의 본전


공자를 모신 대성전 바로 옆에 놓았다.


본전에서 본 모습


뒷산은 방화를 위해 석축을 쌓았다.


담은 특유의 기와가 있고 산 위로 돌담이 보인다.


옆으로 보이는 성묘


기와


이케다가의 문장인 나비가 새겨져 있다.


외문


신고


역시 중요문화재


뒷산


신사에서 내려왔다


왼쪽은 성묘의 문인 교문(학명문), 오른쪽 멀리는 강당의 정문인 공문


시즈타니신사에서 본 모습


교문


이제 성묘로 간다.


낮은 언덕 위에 있고 황련목이 웅장하다.


그 앞에서 본 교문


강당

거대한 건물


교문


올라가자


계단도 중요문화재

부속 지정이 아니다.


들어가는 길


역시 전체가 중요문화재

작은 외문이 보인다.


성묘 안내판


들어가자


주옥

제사 음식을 살피는 곳


뒤편은 문고


본전인 대성전


가운데는 비워놓고 배전과 대성전 사이에 두 개의 통로가 있는데


동계와 서계라고 한다.


대성전

지금도 석전제를 지낸다.


내부


공자상을 모신 감실

역시 중요문화재


모셔진 공자상

구리에 도금한 것으로 창건 당시 기탁받은 것이라고 한다.

교토의 명공이 만들었다고


미쳐 사진을 못 찍었는데 옆에는 석전제 때 희생을 살피는 번생석이 있다.

중요문화재


시즈타니신사의 모습


나란히 앉아 있다.


대성전 측면


다시 내려왔다


다시 강당으로 간다.


거대한 건물

최초의 번교 강당이 아니더라도 국보가 될 만한 건물

최초에는 초가였으나 수십 년 후 기와로 개축했다.

내부에는 창이 가득 뚫려 있고 마루는 빛을 반사하게 만들어서 가능한 환하게 만들었다.


강당에서 본 교문


성묘와 신사


번교 마루 안쪽은 선종식의 화두창이 있다.


중요문화재 소

번주가 학교에 올 때 지내는 건물이다.



강당의 정문인 공문

중요문화재


안내문


강당 내부

반짝반짝한 마루바닥

생각보다 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