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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국보 기행 - 6. 와카야마현 네고로지(根来寺)의 대탑(다보탑)

同黎 2019. 6. 8. 03:11

이번에는 와카야마현으로 가려고 합니다. 키이반도라는 남쪽에 거대하게 튀어나온 땅덩어리의 서쪽 절반을 차지하는 곳입니다. 하나의 현이지만 크기가 워낙 커서 북쪽의 현청소재지인 와카야마시에서 남쪽 끝까지 150km나 되고 산이 많아서 교통편도 매우 불편합니다. 그러나 와카야마에는 고야산, 쿠마노삼산 등 오래된 종교성지가 많으며 그만큼 유적도 많습니다. 또 에도시대에는 와카야마현 전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9남 가문에게 주어졌으며 쇼군가의 종손이 끊기면 대를 이을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높은 키슈번에 속하게 됩니다. 덕분에 막부와 키슈번의 막대한 후원으로 많은 사원과 신사와 수원을 받아 복구되었습니다. 특히 고야산은 수 많은 불교미술의 보고로 많은 화재에도 불구하고 불화와 불상들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후 나라현의 요시노와 와카야마현의 고야산, 쿠마노의 3지역을 잇는 순례길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습니다.


*네고로지의 상징인 대탑


그 가운데 와카야마현 앞의 위성도시인 이와데현에는 네고로지(根来寺)라는 사찰이 있습니다. 현재 신의진언종 총본산인 이 절은 매우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면 일본불교사에서 한 획을 그은 사찰이지만 현재는 총본산이라는 寺格에는 조금 부족한 크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전국시대의 혼란이 정리되는 가운데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사찰과 신사 세력이 정리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네고로지는 12세기 헤이안시대 후기에 고야산에 주석하던 진언종 승려 가쿠반(覚鑁)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가쿠반은 고야산에서 진언종의 학문적·계율적 개혁을 강하게 추진하던 학승입니다. 가쿠반은 규슈 출신으로 어릴 때 출가하여 일찍부터 천재 학승으로 유명했습니다. 특히 30대에 당시 상황이면서 사실상 권력을 좌지우지하던 토바천황의 병을 기도로 치유한 것을 계기로 천황가와 귀족의 대대적인 후원을 받아 진언종 내의 주도적 위치를 차지해 40세가 안되어 진언종의 최고직인 高野山 座主에 올라 진언종에 대한 대대적 개혁에 들어갑니다. 먼저 승병들이 생기면서 종단 내에 제대로된 계율이 지켜지기 않고 좌도밀교인 탄트라 수법이 의식에 혼합되어 성적으로 문란한 의식들이 생겨난 것을 바로잡고, 당시 번지고 있던 아미타신앙을 밀교식으로 재해석해 냅니다. 그리고 고야산에 대전법원(大伝法院)이라는 일종의 학문 기구를 만들어 학문적 역량을 강화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각번의 강력한 시도는 기존 승려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됩니다. 특히 아미타신앙과 밀교를 결합하는 교의 등은 일종의 이단으로 간주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일군의 승려들이 가쿠반이 머물던 처소를 습격하는 불태우고 가쿠반은 좌주를 사임하고 제자들과 함께 고야산을 하산합니다. 이후 토바천황에게 받았던 영지에 새로 사찰을 세우면서 밀교의 근본이 왔는는 이름의 네고로지(根来寺)라는 사찰을 세우고 가장 중요한 두 개의 건물, 즉 밀교의 중심을 상징하는 대탑과 학문을 상징하는 대전법원을 복원합니다. 그리고 이 가쿠반을 따라는 무리는 신의진언종, 반대하는 무리는 고의진언종이라고 각자 칭하게 되면서 진언종의 분립이 정착됩니다.


*에도시대 발기 촬영된 승병


이처럼 불교 개혁을 내세우면 세워진 네고로지지만 세월이 흐르며 역시 다른 사찰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영지와 병력을 지닌 승병집단으로 변모합니다. 15세기 후반 네고로지의 주변에 있던 승방(말사)450(혹은 2700)곳 사령은 72만석, 승병 1만명 이상의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고 합니다. 72만석이라는 규모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직할령으로 가지고 있던 토지보다 넓은 면적입니다. 사실 이러한 거대한 승병집단은 헤이안시대 후기부터 만들어져 전국에 수 십 곳이 산재해 있었습니다. 지금 유명한 신사와 사찰은 거의 다 승병집단이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예컨대 전 일본 총리를 지냈던 아소 다로는 구마모토 지역의 아소신사의 신관 집안 출신이고, 아소신사도 거대한 승병집단이었습니다.

각지에 있던 승병세력은 전국시대 이후 무사들이 지방을 지배하면서 대부분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무사집단인 다이묘가 신사와 사찰의 집단을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만들고 회유되지 않는 곳들을 철저히 탄압합니다. 다케다 신겐 역시 관동지방의 대부분의 승병집단을 박살내고 자신의 부하로 삼습니다. 또한 중앙으로부터 강력한 탄압을 받았던 정토진종(일향종)은 아예 성을 쌓고 군대를 길러 스스로 다이묘가 되기도 합니다. 이들은 오사카성을 처음으로 축성하고 오다 노부나가와 10년간이나 싸워 결국 중재를 통해 포교의 자유를 얻고 해산하지만, 이들의 영향을 받은 민란이 전국에서 일어나 다이묘들의 골치를 썩이게 됩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이들의 민란으로 거의 죽음의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불교세력 토벌 방향

교토-나고야 방면이 오다 노부나가의 토벌로. 오사카-와카야마방향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토벌로


지방의 승병집단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지만 수도인 교토와 그 주변인 킨기지방의 승병들은 여전히 세력을 떨칩니다. 이들에 대한 평정은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순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교토에서 오미 지방(현재의 시가현)을 지나 오와리 지방(현재의 나고야 인근)에 이르는 통로를 확보하고 이를 막는 모든 승병집단을 단호하게 처리합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천태종의 총본산이자 승병집단의 대명사였던 엔랴쿠지(延暦寺)를 아예 불태워버린 것입니다. 승병은 해산시키더라도 사찰과 불상 등을 건드리지 않던 전에 비해 아예 전산을 불태워버린 이 토벌로 오다 노부나가는 제육천마왕이라는 악명을 얻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엔랴쿠지의 영향 아래 있던 오미지방의 천태종 사찰 대부분이 불타 사라집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반대로 키슈정벌이라는 진언종과 정토진종 잔당 토벌에 나섭니다. 오사카 남부에서 와카야마현에 이르는 이 토벌은 오사카를 중심에 둔 도요토미 세력의 안정적 지배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진언종의 총본산인 고야산은 항복을 해 살아남지만 네고로지는 끝까지 반항하고 결국 대탑을 제외한 전산이 불살라집니다. 특히 이들은 포르투갈, 스페인 등과 밀무역으로 당시 최첨단 무기인 총기를 손에 넣어 가장 위험한 세력으로 인식되어 아예 씨를 말리게 됩니다. 이어 히데요시는 신의진언종 세력을 자신에게 우호적인 세력으로 재편했는데 그것이 현재의 진언종 지산파와 풍산파입니다. 반면 신의진언종 종통은 힘을 잃고 간신히 재건해 주도권을 빼앗기고 지금에 이릅니다. 그러나 사찰 가운데 서 있는 전란을 피해 모습을 지키고 국보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네고로지 가는 길은 지금까지 언급한 다른 곳에 비하면 순조로운 편입니다. JR이와데역 혹은 사철 난카이선 타루이역으로 가면 아침에는 사찰 앞까지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습니다. 아침 출근시간에 한하여 버스가 있기 때문에 사전에 버스 시간을 잘 알아둬야 하고, 돌아오는 길에는 사찰 앞에서 버스가 서지 않아 15분 정도 이와데시립도서관으로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버스 시간 체크가 필수적입니다. 이곳은 택시도 없고, 또 역까지 가려면 너무 많은 비용을 내야 합니다.



네고로지에 들어서면 무엇보다도 사찰 한가운데 서 있는 거대한 다보탑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탑의 정식 명칭은 대비로자나법계체성탑(大毘廬遮那法界体性塔)으로 높이 40미터, 15미터의 일본 최대의 다보탑입니다. 이 탑을 특히 대탑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진언종 전통 상 존재했던 고야산의 근본대탑을 이곳에 재현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일본 진언종 개창조인 홍법대사 구카이(空海)가 고야산에 들어와 세상의 중심임을 선언하고 세웠다는 근본대탑은 전하는 바에 따르면 50미터 정도의 높이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야산의 탑은 수차례 소실되어 현재 탑은 1937년에 이곳의 탑을 바탕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많은 곳이 대탑이 세워졌으나 폐불훼석의 과정에서 사라졌습니다. 반면 네고로지의 대탑은 15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정벌 당시에도 살아남은 건물로 현존 유일의 대탑입니다.


*일본에서 건립연도가 명확한 가장 오래된 다보탑인 국보 이시야마데라(石山寺) 다보탑. 12세기 후반


일본에는 다보탑이 매우 많습니다. 국보로 지정된 것만 6동이고, 그 외 중요문화재난 수십동이 지정되어 있습니다. 다보탑을 홍법대사 구카이가 당에서 유학하고 돌아오는 길에 중국의 양식을 그대로 들여와서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구카이가 남긴 기록이나 그림이 워낙 많아 이것은 거의 확실시 됩니다. 이 시기가 9세기 전반으로 불국사 건립되는 100년이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이후 많은 화재로 인해 현재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다보탑은 11세기의 것이며 연대가 명확한 것은 12세기의 것입니다. 차이는 좀 나지만 진언종과 천태종의 입당 유학승들이 거의 똑같이 들여온 양식이기 때문에 본래의 것과 차이는 없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실내 배치용 금동보탑. 헤이안시대 후기, 나라 사이다이지(西大寺) 소장 국보

*목조보탑. 도쿄 이카가미혼몬지(池上本門寺). 중요문화재


전형적인 다보탑은 2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정방형, 2층은 원형을 띠고 있습니다. 이것은 당시 전래된 사리탑 혹은 보탑의 모습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이 되는데, 원기둥 모양의 탑신에 둥근 공포를 배치한 사각 지붕을 배치한 것이 아예 2층으로 나누어지는 식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차이로 多寶塔寶塔이라는 용어를 분리하여 일본에서는 사용하고 있습니다. 불국사 다보탑은 미세한 부분에서는 차이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2(?) 원형을 구성하는 기둥이 불국사의 경우 8개이지만 일본은 12개로 규격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국사 조영이 751년이며 고야산 대탑 조영이 819년이니 70년 정도의 차이를 생각하면 사실 그 뿌리는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불국사 다보탑 역시 2층으로 보는 것이 사실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대탑 내부의 원형 내진

*대탑 내부의 불상 배치


네고로지 대탑은 무려 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일본이 탑 내부 공개에 짠 것을 생각하면 참 좋은 기회입니다. 내부에는 원형으로 만든 내진이 있으면 내진 안에는 태장계 대일여래가 본존으로 모셔져 있고 그 주변을 사대여래와 사대보살이 협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구성은 본당(대전법당)에 모셔진 금강계 대일여래와 한 쌍을 이루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원형은 내진은 12개의 기둥으로 둘러쌓여 있어 다보탑이 대형화되면서 그 상징체계들을 건축적으로 보다 명징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여러모로 규모의 미학에 압도되면서도 네고로지의 최전성기에 세워진 건축으로 소홀한 점이 없이 세밀한 건물입니다.


*본당 대전법당


*대전법당 내부의 삼존상


본당인 대전법당은 19세기에 재건되었으나 과거의 전통을 그대로 살렸으며 2층의 대형 볼전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특히 내부에는 금강계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하여 금강살타(金剛薩埵)와 존승불정(尊勝仏頂)을 삼존으로 하는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잇습니다. 모두 14세기의 불상으로 높이 3.5미터의 대작입니다. 금강살타는 대일여래의 법을 받은 보살로 이후 밀교에서 대일여래이 모습을 드러낸 원초불의 하나로 모셔지는 부처입니다. 존승불정은 대일여래의 육계에서 나타나는 불법의 화신으로 불법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삼존의 구성을 가쿠반이 독자적으로 해석해 만든 것으로 생각되면 그가 생각했던 밀교의 가장 근본적인 가르침을 형상화한 것입니다. 불상 모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이 밖에 대탑과 함께 살아남은 대사당과 에도시대에 재건되어 중요한 의식들이 치워졌던 행자당, 성천당, 광명진언전, 별도의 언덕에 팔각원당형으로 지어진 부동당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또한 본당에서 무려 900미터 떨어져 있는, 네고로지 골짜기의 입구에 서 있는 대문은 과거 네고로지의 사역을 알려주는데 역시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최근 발굴된 대규모 발굴조사로 과거 엄청난 규모의 사세가 거짓이 아님임이 드러났습니다.


*8세기부터 유명한 명소인 와카노우라의 사주


네고로지를 방문한다면 와카야마 시내와 묶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오전은 네고로지를 방문하고 오후에는 명승지로 유명한 와카노우라(和歌浦)의 사주 주변에 있는 신사와 사찰들 및 600여기의 전방후원분, 원형분, 방형분이 포진해 있는 이와세센즈카고분군(岩橋千塚古墳群)도 볼만합니다. 와카야마성에는 임진왜란 때 끌려갔다가 번의 신하로 정착한 조선인 유학자의 흔적을 찾을 수도 있고, 바로 근처의 현립박물관도 매우 충실하고 볼만하며, 와카야마현의 사찰 및 신사와 연계한 특별전도 자주 열리고 있습니다. 특히 이곳은 불교미술 관련 도록의 숨은 강자라고 봐도 될 정도로 다양한 도록을 판매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