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8차 九州

남국유랑기 - 3일 나가사키1 (우라카미 천주당浦上天主堂)

同黎 2020. 6. 2. 23:13



새벽 5시 반

미사를 위해 성당으로 간다.

깜깜


안내문이 있으나 찍지 못했다.


미사 참례

나가사키 대교구의 주교좌성당인 우라카미 교회는 7천 명의 신자가 등록된 일본 최대의 성당이다.

7천 명이라고 하면 일본 최대 성당 치고는 적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가고시마 교구 신자가

8천여 명, 오이타 교구가 6천 명이 안 된다. 왠만한 작은 교구만한 셈.

그런데 미사는 뜻밖이었다. 내가 찾은 날은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축일. 평일미사는 아침 6시에

한 차례, 토요일 미사 2차례, 주일 미사가 4차례이다. 이렇게 큰 성당은 신부님도 여럿일테고, 바로

옆에 교구청도 있어서 교구 사제도 많을 텐데 미사가 1차례 밖에 없다니. 그리고 1시간 이상을

예상하고 미사에 갔으나 40분이 안 되었다.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기도문도 몇 개 건너뛴 거

같고 무엇보다 강론이나 광고도 일체 없었다. 한국에 비해 일본의 기독교 자체가 워낙 작고,

천주교도 작다고 들었으나 나가사키에서 천주교는 워낙 유서가 깊기에 생각치 못했다.


다시 숙소로 돌아간다.


우리가 묵은 가톨릭 센터


막 해가 뜬다.

정리도 하고, 밥도 먹고 다시 찾기로 한다.


밥 먹고 나온 시간


성당이 눈 앞에 보인다.


우리가 묵은 가톨릭센터

심지어 내가 택시에서 핸드폰을 잃어버렸는데, 기사 아저씨가 센터까지 가져다 줬다.


언덕 위에 있는 성당


석축 옆에 구멍이 있는데


여기는 폭격 당시 무너진 종탑이 있는 자리다.


견학하는 분들에게 부탁말씀


우라카미 천주당(浦上天主堂), 지금은 우라카미 교회(浦上教会)로 더 불린다. 신자 발견 이후

프티 쟝 신부 등 프랑스 신부들은 몰래 우라카미의 신자들을 만나서 교회를 복원한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 성 요셉, 성녀 클라라, 성 프란지스코 하비에르의 4개 비밀 교회를 만들어 신자들과

미사를 올리고 고해와 영성체를 행한다. 2년 후 우라카미에서 사망자가 나오는데 신자들은 불교식

장례를 거부하고 단가제도에 의해 맺어져있던 사찰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단절하게 된다. 이에

놀란 메이지 정부는 이들 3400명을 전국 각지로 유배보내는데 이게 바로 우라카미 4차 박해이다.

서구 열강의 개입으로 6년 후 금교령이 깨지고 유배한 이들이 돌아오며 우라카미 교회 재건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돌아온 약 3천 명 중 1900명이 신앙을 지키고 1100명은 배교했으나 이후

원복하였다. 그런데 되돌아온 이들의 절반 정도는 집이 사라진 상태였고 천주교 공동체와

주민의 생활이 이후 한 가지로 움직이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의 성당 자리는 대대로 우라카미의 촌장을 해온 무사 타카무라가의 저택이었다. 촌장이라곤

하지만 작은 영주로 때가 되면 후미에를 시키고 키리시탄을 감시하던 역할을 했던 이들로 마을

언덕 위에 거대한 집을 짓고 있었다. 그러나 메이지유신 이후 신분제가 폐지되며 촌장직도

사라졌고 결국 경제적으로 몰락한 이들의 저택을 교회가 사면서 이를 고쳐 처음으로 우라카미의

천주당이 세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서양식 성당을 짓기 시작하여 20년이 흐른 1915년 당시 동양

최대의 성당을 짓게 된다. 이 성당은 길이 50미터, 폭 29미터에 이르는 붉은 벽돌건물이었고

밖은 천사상 84구, 사자상 33구, 성인상 14구가 장식하고 있었으며 각지의 키리시탄

민간 석공에게 부탁해서 약간 불상 느낌도 났다고 한다.


옛 성당


측면


그러나 1945년 8월 9일 원폭이 떨어지며 폭심지에서 100미터 떨어져있었던 성당은 전파된다.

낙진폭풍으로 건물이 붕괴된 뒤 화염에 휩싸였으며 정면과 측면 일부 외벽을 남기고 사라졌다.

내부에서 고해를 하던 신부 2명을 포함한 수십 명이 즉사했으며 피폭자도 상당했다고 한다.

이후 성당의 잔해는 히로시마의 원폭돔처럼 보존하자는 의견이 많았으나 위치 자체가

천주교로써는 박해의 장소에 성전을 지은 것으로 의미가 깊어 대신 측벽 일부는 폭심지

공원에 이전하고 나머지는 철거하였다. 미국의 불편한 심경 표현도 성당 철거의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성상과 천사상은 대부분 보존되거나 각지에 전시물로 나누어졌다.

현재의 성당은 1959년 이전의 성당을 모방하여 재건한 것으로 이후 1962년 나가사키 대교구의

주교좌가 오우라천주당에서 우라카미천주당으로 이전하였다. 다만 현재 성당의 외벽은

별다른 장식이 없는 간소한 것으로 이건 모습과의 차이는 보인다.


파괴된 성당


위령미사를 지내는 모습


석단

과거 타카무라가의 저택 터에서부터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안내문


계단을 오르는 길


중간에 종루가 보존되어 있다.


옆으로 가는 길


종루의 잔해


본래 성당 정면의 왼쪽에 달려 있던 종루가 낙진으로 떨어져 날아온 것이다.

안에 있던 대종은 기적적으로 원형을 지켜 새로 지은 종탑 위에 올라갔다고 한다.

본래 아래로 강이 흘렀으나 보존을 위해 강을 돌렸다고 한다.


흔적이 요것만 남았다.


새로 지은 종탑이 보인다.


나가사키 교구청


평화공원 방향


이게 차도 진입로


사무소

여기에도 키리시탄 자료관이 있다는데 워낙 일찍 나와서 보지는 못했다.


성당 정면


지금도 꽤 큰 편


한쪽에 보니


옛 성당의 흔적이 남아있다.


성인상들


사자도 보인다


성당 입구들을 장식하던 사자상


특이하다


성인상


누군지는 안 써있다.

뒤의 벽돌도 옛 성당의 흔적


여러 석재들


천사상인데 뭐 동서양의 혼합 같은 건가


석상들


머리가 사라진 성인상


이것도


이제 성당으로 가자


과거 정면에 달려 있다던 십자상과 성모상, 성 요한상이 있다.


측면


안내문


정면


안이 깜깜하다


피폭의 성모상

본래 중앙 제단에 있던 목조 성모상으로 제단과 함께

소실되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정리 중 머리 부분이 발견되었다.

마치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처럼 남아있어 피폭자들의 성모로 불린다.


안내문


성당 중간에는 4개의 성상이 있다.

성 요셉상과 성모상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상과 성녀 클라라상

우라카미 천주당의 전신인 4개의 비밀 교회를 의미한다.


오르간


주교좌


중앙 제단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양식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도래 400주년 기념비


벽감의 성모상

원래 성당의 앞면에 있던 성상 중 피해를 입지 않은 성상이다.

고통의 성모라고 불린다


신도발견 150주년 기념비


안내문


성 요한 바오로 2세 흉상

그의 방문을 기념한 것


성 요한상

역시 성모상과 마찬가지로 이전 성당의 성상 중 완전한 것이다.


신도들의 순교와 귀환 기념비


고문석

우라카미 4차 박해 당시 하기에 유배되었던 신자들이

이 위에 꿇어 앉혀져 배교를 강요받았던 돌이다.

여기서 고문을 받던 22세의 여인은 눈이 오는 겨울 18일동안

이 위에 있었으나 배교를 거부하고 이후 돌아와 수녀가 되었다.


안내문


성당 전경


유래 안내판


이제 내려간다


언덕 아래서 본 성당

일본 천주교가 조금 더 기운을 차렸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