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8차 九州

남국유랑기 - 4일 구마모토4 (구마모토성熊本城·가토신사加藤神社)

同黎 2020. 7. 26. 02:30



구마모토성은 혼마루부분은 비교적 충실히 남아있었는데,  2016년 구마모토 지진으로

거의 궤멸적인 타격을 입으면서 현재는 혼마루 외곽만 볼 수 있다.

생각보다 상태가 심각해서 공개가 되던 복원건물인 혼마루어전, 천수각 등 대다수의 건물이

비공개 처리되었고 성 밖의 호소카와 교부저 역시 비공개이다. 복원공사는 완성까지 20년을

바라보고 있는데 왜 이렇게 오래 걸리나 생각했지만 현지에 와보니 그럴 만하다. 앞으로

특별공개에 따라 혼마루 내부를 제한적으로 공개한다고 하고, 현재로써는 가토신사에서

바라보는 방면이 그나마 성의 모습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방법이다. 그나마 2021년에는

대천수 복원이 완료된다는 것이 위안거리


복원 중인 대천수와 소천수


구마모토성(熊本城, 웅본성)은 17세기 초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한 성으로 그 후에는 호소카와씨가

구마모토번의 거성으로 사용하였다. 일본의 특별사적으로 일본의 3대 성을 손꼽을 때 반드시

들어가는 대표적인 성이다. 히메지, 나고야, 오사카성이 여기에 비견되는데 지진으로 인해

실제 본 것은 절반도 안 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 성의 대단함을 알 수 있다.

현재 13동이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본래 이 자리는 무로마치시대 키쿠치씨의 방계 족속이 지은 치바성 등의 성이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쇠퇴하고 다시 키쿠치씨를 대리한 카노코기씨가 지은 구마모토성(隈本城)이

지어졌는데 이것이 현재 구마모토라는 지명의 근거가 되었다.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규슈를 정벌한 후 시마즈씨가 지배하던 이 지역에 삿사 나리마사가 들어갔으나

히고 호족들의 반발을 이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할복을 명받고

1591년 가토 기요마사가 19만 5천 석의 영지로 구마모토성에 입성한다.


가토 기요마사는 치바성과 구마모토성이 있는 구릉 일대에 새롭게 성곽을 쌓았고 지금의

이름으로 한자를 바꾸었다. 임진왜란 당시 울산왜성에서 조명연합군의 포위작전으로

죽을 뻔했던 가토 기요마사는 자신이 아는 모든 축성술을 동원하여 수많은 우물을 파고

포위시 비상식량이 될 만한 것들을 다다미 등에 도입하면서 전무후무한 성을 쌓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술의 대가인 것을 모두가 인정하는 것이었고

나고야성의 축성을 그가 담당한 것도 이래서였다. 그러나 도요토미가의 충신이었던

기요마사를 눈엣가시로 여긴 에도막부는 그의 사후 가토가를 단절시키고 호소카와가를

이곳에 전봉시킨다. 호소카와가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던 성을 증축하고 수많은 성곽을

지어 성을 더욱 강화시킨다. 이렇게 확장된 결과 야구라가 무려 62동에 이르렀다고 한다.

 

메이지유신 이후 구마모토번이 해체되었으나 성은 그 가치를 인정받아 살아남게 되었다. 다만

워낙 큰 성이었기 때문에 어전이 헐리고 군사시설이 들어서는 것은 어쩔 수 없어 서남전쟁 당시

이미 산노마루, 니노마루 등은 파괴되고 혼마루 부분만 남아있었다고 한다. 이후 서남전쟁 당시

사츠마군을 끌고 올라온 사이고 다카모리에 맞서 정부군은 구마모토성에 농성했다. 그 결과 대천수와 소천수, 혼마루어전과 많은 야구라가 소실되었고 정부군은 성을 방패삼아 승리하였다. 이 때

사이고 다카모리가 관군에게 진 것이 아니라 기요마사에게 졌다고 한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후 일부 파괴가 있었으나 우토야구라를 중심으로 건물 13동이 살아남았다. 구마모토 대공습도

있었으나 기적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후 성 안에 학교, 연구소 등이 들어섰지만 1960년대부터 천수각 등을 복원하고 니노마루까지 부지를 확보하여 복원을 계속하였다, 그리하여 2007년

어전을 비롯한 대부분의 성이 복원되었다. 그러나 2016년 구마모토지진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길이 242미터의 중요문화재 장병 중 100여 미터가 도괴되었으며, 중요문화재 히가시주하치야구라는 완전 도괴되었다. 그 밖에 성벽의 30%가 봉괴되었다니 20년이 걸리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구마모토성 지도

어마어마하다


지진 전의 모습

소천수 우토야쿠라 대천수


중요문화재 장병


중요문화재 십사간야구라


중요문화재 히가시쥬하치야구라

전체 도괴


성벽 위에 있는 혼마루어전


복원 어전 내부


무너진 성벽과 담


야구라

복원한 것


지붕이 휘어 있다



천수각의 복원이라는 안내판


이제 쭉 들어가본다


이누이야구라


니시데마루를 지키던 야구라


석단


무너져내렸다


해자가 비어 있는 모습


무너진 석단이 아슬아슬하다.

거의 다시 세워야 하는 거 아닌가


성벽이 대부분 무너졌다.


복원을 위해 해체된 석단


뒷면


복원을 기다리는 석단


많다


언제 다 하냐


석단의 복원 모습


보존 상황


석단

가토 기요마사가 울산성을 쌓으면서 습득한 기술로 쌓은 것이라고 한다.


혼마루 전경


위태로워 보이는 야구라


안쪽으로 들어가자


서남전쟁 당시 농성장교 가족들의 피난처 터


이곳에서 이루어진 서남전쟁의 흔적


사실 남쪽에 건물이 훨씬 많은데


통제가 되어 볼 수 있는 곳은 서북쪽 밖에 없다.


이누이야구라

복원 건물이다


하 심각하군


지진이 난 지 좀 되서 풀까지 자랐다.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


키타오테몬 석단 공사


와장창이구만


허허


지진으로 배부름이 제대로 일어난 석단


아예 우레탄을 쏴서 고정해놓았다.


이런 건 처음 보네


가토신사(加藤神社, 가등신사)에 도착

가토 기요마사를 신으로 모신 곳으로 배신으로 그를 따라 순사한 가신 오키 카네요시와

조선인 김관(金官)을 배신으로 하고 있다. 김관에 대한 설명은 찾을 수 없는데 신사가

메이지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아 그가 데려온 포로 중 하나를 골라서 만든 것이 아닌가 한다.


중요문화재인 우토야구라


대천수, 소천수와 함께 천수군을 이루고 있는 5층 야구라로 전설에 따르면 가토 기요마사가

자신의 정적 고니시 유키나가를 죽인 후 그의 성인 우토성에서 옮겨왔다는 설이 있다. 그러나

최근 조사로는 본래 3층 야구라였다가 증축을 통해 4층으로 올렸다고 하며 현재에는 이 곳에

과거 고니시의 가신이었던 자가 관리를 하여 우토야구라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야구라라고는 하지만 에도시대 이전 축성된 야구라 중에는 4번째로 높은 높이로

다른 성의 천수에 못지 않다. 사실상 제3의 천수 역할을 했을 것이다.


우토야구라 전경


석축 부분이 좀 뒤틀려있다.


보수공사가 필요할 듯

그래도 무너지지 않은 게 어디냐


가토 신사 내부로 더 들어간다.


이곳 석단도 위태


소천수와 대천수


공사중인 모습이 보인다.


아예 다 뜯어내고 고치는 중인 듯


천수각 안내문


우토야구라



혼마루 석단도 많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양호하다.


세월이 흘렀지만 튼튼하구만



무너진 부분


내부는 2021년에나 볼 수 있단다.


우토야구라는 멀쩡


가토 기요마사를 NHK 드라마 주인공으로 해달라는 서명운동

세상에


천황즉위기념 음악회

해도동정이라면 진무천황의 동정인가보다.


뒤편으로 뭐가 보인다.


가토 기요마사의 이름이 보인다.


임진왜란 당시 그의 기를 세워놨다는 돌


정말?


흠 모르겠다


신사 건축 기념비


임진왜란 때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츠쿠바이

조선엔 이런 거 없는데


역시 조선에서 가져왔다는 다리

흠?


이제 밖으로 나간다.


석단 위 거대한 길


이제 내려간다


언덕이 있어 한쪽은 거의 지면과 성벽이 나란하지만 한쪽은 계속 내려가야 한다.


보수 중인 석단


여기저기 공사 중


해체하고 남은 석축


꽤 많다


아직도 남은 상처


이제 마지막 답사지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