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8차 九州

남국유랑기 - 6일 시모노세키2 (아카마신궁赤間神宮·조선통신사상륙지朝鮮通信使上陸地)

同黎 2020. 8. 2. 23:39



이제 가라토 버스정류장에서


아카마신궁으로 간다


한 정거장이지만 1일 버스권이 있기 때문에

걷지 않는다


아카마신궁 앞에 도착


잠시 신사에 가기 전에


길 건너 바다부터 간다.


아미다지공원


바다가 보인다

이곳은 과거 아카마신궁의 신궁사였던 아미다지가 있던 곳으로

폐불훼석으로 사라진 후 공원이 되었다.


한쪽에 조선통신사를 기념하는 조선통신사 상륙엄류지지비(朝鮮通信使上陸淹留之地の碑)가 있다.

시모노세키는 과거 규슈에 상륙한 외래인들이 일본 혼슈 본토로 오기 위한 첫 관문이었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에서 오는 조선통신사는 총 12번, 그 중 쓰시마에서

돌아간 마지막을 제외하고 11번의 사신이 이곳을 밟았다.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한일의원연맹 회장 김종필


그 이름을 여기서 보다니


가운데 동판에 통신사 행렬도가 새겨져있다.


건립취지비


고문 명단에 익숙한 이름이 보인다.

아베 신조


건너편 규슈가 보이는 칸몬해협


칸몬대교도 보인다


번대편이 모지항


이곳은 조슈번과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미국 연합군이 전투를 벌인

시모노세키 전쟁의 현장이기도 하다. 조슈번의 느낌이 꿈틀거리는 동네


안내판이 서 있다


칸몬해협을 지키는 안토쿠천황과 단노우라전투를 배경으로 한 노가쿠에서 따와

안토쿠천황에게 닻을 바쳐 평안을 빈다고 한다.


안토쿠 천황에게 바쳐진 닻


바다의 모습


이제 신궁으로 간다.


입구의 도리이


아카마신궁(赤間神宮, 적간신궁, 아카마진구)는 단노우라전투 당시 죽은 안토쿠천황을 모시는

신사이다. 타이라씨와 미나모토씨의 싸움이 진행되는 가운데 미나모토씨의 승기가 확실해지고

타이라씨는 그들의 기반이 있던 수군과 규슈 세력을 동원하기 위해 안토쿠천황과 삼종신기를

가지고 이곳으로 피난한다. 이들을 미나모토노 요시츠네가 단노우라에서 기습하지만 처음엔

타이라군이 우세하다가 조수의 흐름이 바뀜에 따라 미나모토군이 반격에 성공하고 타이라씨는

멸망한다. 타이라씨의 동량인 타이라노 무네모리는 생포되고 많은 타이라씨가 물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때 안토쿠천황과 그 모친 켄레이몬인,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부인이자 천황의

외할머니인 토키코는 삼종신기를 가지고 바다에 투신하는데, 이 때 켄레이몬인 혼자

미나모토씨에 의해 구출된다.

이후 삼종신기는 회수되지만 (검에 대해서는 설이 너무 많다. 일단 아즈치신궁에 모셔진 검이

진품이며 궁중의 검은 권청하여 만든 신체라는 설이 공식적이다. 다만 궁중에서 모시던 검이

분실된 것이라는 설이 우세하다. 다시 찾았다는 설도 있다.) 불과 8살에 죽은 어린 천황을

불쌍해하는 여론이 많았다. 또 미나모토씨가 옹립한 고토바천황은 삼종신기 없이 즉위했기에

정통성 문제가 있었다. 이에 고토바천황은 안토쿠천황의 무덤이 있는 곳이 아미다지를 세우고

거기에 안토쿠천황을 모신 어영당을 세운 것이 아카마신궁의 시작이다.

이렇게 아카마신궁은 불교식으로 운영되었는데 폐불훼석 이후 아미다지는 폐사가 되고 어영당은

철거된 후 안토쿠천황사라는 신사로 개조한다. 이후 안토쿠천황이 완전히 정통 천황으로 인정된

후 아카마궁, 이후 아카마신궁으로 승격되었다. 그러나 1945년 시모노세키 공습으로 완전히

소실되고 지금의 건물들은 이후 재건한 것이다.


시모노세키 안내도


경내도


도리이의 현판


아카마신궁의 명물인 수천문


일명 용궁문이라고 하는데, 안토쿠천황이 투신할 때 할머니인 토키코가 바다 속 용궁으로 가자

라고 한 것에서 오랫동안 안토쿠천황을 수천황이라고 한 데에서 유래한 것이다.

1958년 신궁을 재건하며 건립한 것으로 회랑과 함께 등록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안내문

이홍장 길도 있군


올라간다


궁궐 형태의 회랑


수천문


수천문이라는 현판


유래 안내문


아카마신궁 부흥사적비


내려다 본 모습


멀리 보이는 규슈

모지


등록유형문화재 명판


수천문을 지나면


배전이 나온다


사무소


중국 대련에서 만든 사자


대련에서 만든 사자는 이곳에 있는 대련신사 때문이다. 일본 대련에 있던 신사의 신체를

이곳에 옮겨 모셨는데 대련신사에 소속되어 있던 일본인들이 돈을 모아 바쳤다고


거참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한쪽에 있는 포탄으로 만든 위령비


안에서 본 수천문


이제 올라가자


궁궐형식으로 된 배전


한쪽엔 삼종신기 중 팔척경이 이곳에 있었던 기념비가 있다.


배전의 현판에 대한 안내문


명필로 유명한 아리스가와노미야 타카히토친왕의 글씨를 모아 썼다고


이게 뭐라고


배전 안에 무전이 있고 그 뒤로 본전이 있다.


이 안쪽 공간은 못 들어간다.


저 멀리 보이는 본전


배전 옆의 하치만구


본래 아미다지의 진수사


일본의 서문을 지키는 신사라고 한다.


옆길로 가는 길

칸몬대교 안내문


대련신사를 보러 간다.


본전으로 가는 계단을 지난다.


신식 건물 앞 칙사전이라는 안내문

쇼와천황이 보낸 칙사


한쪽에 계단이 있다.


계단을 오르면


여기가 대련신사 입구이다

신덕무편이라는 현판


저 안쪽이 칙사전으로 쓰던 건물인 듯


안으로 들어간다


배가 나온다


이 지역에서 전통적인 방식으로 고기 낚는 배라고


저 위로 신사가 보이고


한쪽은 대련기념자료관인데 닫혀있다.


대련신사


본래 일본 관동군이 대련에 설치했던 신사인데 소련군 진주로 폐사되었다.

당시 신관이 소련군에게 전통 춤과 노래 등을 보여주며 환심을 사고

신보와 신체를 보관했다가 가져와서 이곳에 모셨다고


저 뒤로 보이는 본전


본래 개인 주택에 메이지천황 존영 보관용으로 만든 건물을 이축했다고 한다.


유서패


섭말사들


대련신사 사전


대동숙 14열사비


대동숙은 우익정치단체로 패전 당시 요요기 연병장에서

천황에게 사죄하고 14명이 자결한 것을 기념하는 비석이다.

아카마신궁은 시모노세키 제일의 관광지 중 하난데 이렇게 어두운 면은 교묘히 숨겨놨다.


다시 돌아가는 길


헤이케즈카와 귀 없는 호이치당 안내문


수천공양탑


안토쿠천황에게 바치는 탑이다.


보물관도 있다

지키는 사람은 없고 100엔을 알아서 내야 한다.


헤이케모노가타리도


비파


헤이케모노가타리 이야기가 있다.


안토쿠천황상


아키히토 상황, 미치코 상황후 어영


태도

타이라노 노리모리가 사용했다고 전한다.



헤이케모노가타리

중요문화재


현존 사본 중 가장 오래된 사본이다.

다만 공습 당시 테두리가 화재로 일부 소실되었다.


안내문


헤이케모노가타리


피리

타이라노 아츠요리가 사용한 것의 모사품


안내문


갑주

국보 모형


당대를 이해하기 위해 전시한다고


단노우라 전투


배를 타고 대피하는 타이라씨


부채를 걸고 도발하는 타이라씨


활 쏘는 요시츠네


격돌하는 모습


안토쿠천황과 토키코


켄레이몬인


이제 헤이케즈카로 가는 길


호이치가 있다


귀 없는 호이치로 유명한 곳

전설에 따르면 호이치는 비파를 타며 헤이케모노가타리를 읊는 것이 명수였다고 하는데, 어느 날

어디서 온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이 그를 궁궐같은 곳으로 데려가 노래를 하게 했다고 한다. 이에

주지스님이 호이치의 전신에 불경을 썼는데 이에 귀신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호이치가

안 보인다고 당황하다가 불경이 안 써진 그의 한쪽 귀만 잘라 돌아갔다고 한다.

아마 안토쿠천황의 용궁으로 갔던 것이라고 추정하는 이야기


호이치당


코바야시 야쿠모의 괴담에 실리면서 더 유명해졌다.


귀가 안 보이는군


호이치당 앞에는


단노우라 전투 당시 죽은 헤이케들의 무덤이 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동생, 아들, 손자 등


14명의 무덤이 합사되어 있다.


타이라노 노리모리도 보이는군


토키코


이제 일청강화기념관으로 가는 길


안토쿠천황릉이 있다


문이 닫혀 내부는 보지 못한다.


간신히 도리이만 보이는 수준


바로 통해있는 길

이 길을 이홍장의 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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