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8차 九州

남국유랑기 - 5일 우사2 (우사신궁宇佐神宮)

同黎 2020. 7. 30. 22:33



진무천황과 우사씨의 선조인 우사츠히코노미코토를 기념하는 비석


일본서기에 따르면 진무천황의 동정 당시 이곳에서 우사츠히코노미코토가 물길을 안내했고

그 공으로 우사의 국조가 되어 세습했다고 한다. 실제로는 우사씨와 우사츠히코토미코토는

별 관계가 없고 헤이안시대 이후 우사씨가 우사신궁을 장악한 이후 일본서기의 신화에

자신들의 족보를 가져다 댄 것으로 추정 중이다.


이제 우사신궁으로 건너간다.


우사신궁 부지를 흐르는 요리모가와


다리가 있다


건너가면


또 도리이가 보인다


도리이가 계속 많다


우사신궁(宇佐神宮, 우좌신궁, 우사진구)은 일본의 무신인 하치만신 3좌를 모시고 있는

전국 하치만신사의 총본산에 해당하는 중요한 신사이다. 교토의 이와시미즈하치만구와

함께 하치만신앙의 주요 신사이며 이와시미즈도 우사신궁에서 권청해간 신사이다.

일본 고대사의 중요한 정치적 판단에도 여러가지로 관련이 된 신사이기도 하다.


우사신궁 주신은 하치만신(오진천황)·히메가미·신공황후의 3좌이다. 전승에 따르면 하코자키궁에

하치만신의 신탁이 내려져 하코자키궁을 원궁, 우사신궁을 본궁으로 하는 구조가 결정되었다고

한다. 이후 킨메이천황 당시 우사신궁의 연못에 신이 내려와 나는 하치만신으로 오진천황이다라는

신탁이 내려 하치만신과 오진천황이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살펴보면 대궁사인 우사씨의 주신이

하치만신이고 의식을 맡았던 도래계 씨족인 카라시마씨의 주신은 히메가미로 지금도 우사신궁의

가운데에는 히메가미가 진좌해 있는데, 본래 카라시마씨의 신인 히메가미를 주신으로 모시다가

우사씨가 강해지면서 하치만신이 덧붙여지고 이후 정치적으로 일본 조정과 접근함에 따라

하치만신이 오진천황과 동일시되고 신공황후가 합쳐져 하치만 3신의 모습을 띈 것으로 보인다.


나라시대 이후 우사신궁은 일본사의 전면에 떠오른다. 먼저 도다이지를 건설하는 쇼무천황의 뜻에

따라 하치만신도 나서겠다는 신탁으로 신불습합을 시작시켰다. 이후 코켄천황이 승려 도쿄에게

제위를 넘기기 위해 우사신궁의 신탁을 받아오라고 파견한 와케노 키요마루에게 제위는 천황의

자손에게만 전달 가능하다는 신탁을 내려 이후 황실보호의 신사로 존경을 받게 된다. 이 사건

이후 본래의 대궁사 집안이 오카미씨가 밀려나고 우사씨가 대궁사를 차지하게 되어

지금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후 헤이안시대에는 신궁사인 미로쿠지와 함께 규슈 최대의 장원을 운영하였고 신직 가문들은

관가와 무사로 활동하였다. 겐페이 쟁난기에는 우사신궁에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딸이 시집오기도

하였으며 타이라씨의 지지세력이 되었다. 그 결과 전쟁 당시 사찰이 전소하여 신체가 손상되기도

하였다. 가마쿠라시대에는 원구 토벌에 압장서고 남북조시대에는 남조의 카네요시친왕의 편에

섰다. 이후 전국시대에는 오우치씨의 비호 아래서 오토모씨와 대결했으나 결국 오토모 소린에게

전소당해 궁사들이 쫓겨났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규슈 정벌 당시에 재건이 이루어진다.

이후 에도시대에는 여러 번이 복잡하게 얽힌 땅이 되었다가 소규모나마 신사령이 유지되었다.

메이지유신 당시 우사신궁의 신궁가는 2가문이 남작에 봉해질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점했다.


타케우치노 스쿠네를 모신 경내사


오후 7시에 신사를 닫는다.


거대한 우사신궁 보물관


여긴 4시면 닫는다


국보 공작문경

가마쿠라시대 초기의 것으로 신궁사였던 미로쿠지에서 사용했던 것


조선종

중요문화재

904년이라는 명문이 있는 종으로 통일신라 후기의 종이다.

일본에 있는 조선종 중 2번째로 오래된 것


백초입검

중요문화재

남북조시대 고다이고천황의 아들로 정서대장군에 임명된 카네요시친왕이 바친 것


후젠노쿠니 우사궁회도

중요문화재


이제 보물전을 나와 신사로 간다.


끝도 안 보이네


사무소


멀리 보이는 도리이


에마당


지금은 연못가에서 휴가소 역할을 하고 있다.


에마당으로 들어가면


하치만신이 내려왔다는 마름모꼴 연못 뒤로 노무대가 보인다.


경내 안내도

신궁사가 철거되는 바람에 경내는 비교적 비어있다.


산 안쪽의 하궁, 상궁만 남아있다.


테미즈야


연못 앞의 금족지


신불습합이 최초로 이루어진 곳이라는 안내문


승려와 신관


이제 사전으로 가본다


본전으로 가는 넓은 길


한쪽의 토구신사


오진천황의 아들 우지노와키이라츠코를 모셨다.


천황이 내린 폐백이 대기하는 불소


입구가 두 갈래로 갈라져 있는데


큰 것이 산 위에 있는 상궁의 입구이다.


힘을 자랑하는 역석


무게도 있다


우리는 먼저 하궁을 지나 상궁으로 올라가기로 한다.


하궁. 본사 격인 상궁은 산 위에 있는 탓에 분신을 하여 권청해 세웠다고 한다. 사가천황 때

세웠다고 한다. 그런데 단순한 분사가 아니라 상궁의 식사를 책임지는 역할을 하며 농업의 신으로

섬겨진다는 것으로 보아 이세신궁의 내궁과 외궁처럼 성격이 다른 두 신사가 합쳐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상사의 3신과 하사의 3신을 합쳐 육권현으로 모시기도 한다.


하사로 들어가는 길


하사 대문

시대는 오래지 않았는지 문화재 지정은 안 되어있다.


고창

오이타현지정문화재

제기 등을 보관하는 창고

에도시대?


안내판


하궁으로 간다


하궁의 회랑


오 최근 건물 같구만


회랑과 중문


뒤편에 하궁 본전이 있다.


유배소


대나무도 있다

신목 같은데


과거 우사신궁에서 태워서 점을 치던 대나무라고


하궁 측면


뒤편 본전은 작다

가운데 이어전


히메가미


일어전


하치만신


삼어전


신공황후


이제 뒤편으로 가서 다시 계단을 오른다.


위에 있는 와카미야신사


아래에 있는 카메야마신사

신사가 위치한 카메야마의 산신을 모신 곳


계속 올라간다


와카미야신사


오진천황의 아들들을 모셨다.

현지정문화재


우리가 올라온 길


이제 드디어 마지막 도리이가 보인다.


상승


거대한 우사도리이

현지정문화재

우시 전통의 도리이라고


서대문

모모야마시대

현지정문화재


히데요시의 규슈정벌 당시 세운 문이라고 한다.


칙사문 형식이다


화려한 조각이 모모야마 양식을 보여준다.


본전으로 바로 올라오는 계단길 안내문


저 산 위에는 와케노 키요마루의 무덤이 있다고 한다.


산 꼭대기에 있는 오오신사

하치만신이 도다이지 건축을 위해 나라로 떠날 때 상궁을 떠나 진좌한 곳이라고


국보 본전 표지판


안으로 들어간다


상궁 회랑

나무가 있는 곳은 하치만신의 여덟 아들을 모신 야코신사


여기가 정문은 아니다.


신정


천황의 폐백을 알리는 표지판이 빼곡하다.


정면으로 가는 길


안내문


드디어 정면이 나온다.


야코신사의 신목


회랑 사이에서 자라고 있다.


정면으로 간다


남중누문

현지정문화재

이게 정문


남중누문 뒤로 국보 본전 3동이 있다.


일어전

하치만신을 모신 곳


우사신궁 본전 3동은 국보이다.

에도시대 말기에 세워졌지만 권현조로 바뀌기 전 하치만조로 지어진 옛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키고 있어 고대 건축을 보여주는 건물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다만 국보 건조물이 주는 감동은 별로 없다.


중간은 이어전

히메가미가 있는 곳


중문을 지키는 즈이진


즈이신이라고도 하며 귀족의 행차를 지키는 무사를 신으로 삼은 것


3개의 본전 좌우로는 스미요시신사와 카스가신사를 두어 본전을 지키게 한다.


카스가신사


스미요시신사


삼어전


신공황후를 모신 곳


옆에서 본 어전 모습


이어전 앞 폐전이 보인다.


거대한 신목


남중누문


이 문은 이와시미즈랑 비슷하군


표주박 모양의 에마


오모토신사 요배소


산속에 있는 신사로 히메가미가 지상에 최초로 내려온 곳이라고 한다.

3개의 거대한 바위가 있는데 히메가미가 속한 무나카타 삼여신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우사신궁의 원래 첫 자리라고 생각되는 곳이다.


저 산 속에 있단다


멀리 보이는 산


신사의 사진


가운데 거대한 계단은 현재 출입 금지


계단 아래


남중누문 정면


크다


서대문


이제 다시 밖으로 나간다.


와카미야를 지나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불소를 지나


밖으로


야사카신사가 보인다


여기저기 네임드신들이 하치만신을 모시고 있다.


한쪽에 숲이 된 곳이 신궁사인 미로쿠지의 터


지금은 이렇게 폐허만 남았다.


절터를 지나 나가다 보면


다리가 나온다


한쪽엔 미륵사터라는 비석이 보인다.


비석


전경


마지막 목표인 쿠레하시(오교)


신사의 서쪽 참도의 길 위에 놓여있는데 칙사만 다니는 복도가 달린 다리이다. 현재 다리는

에도시대 초기에 호소카와 타다토시가 수축한 것이며 쇼와시대에 수리되었고 현지정문화재이다.

중국의 오나라, 즉 강남지방 사람이 와서 가마쿠라시대에 건설한 것이라고 알려져있다.


옆으로 돌아간다


쿠레하시 전경


독특한 다리이다


강의 풍경


다리를 건너서 택시를 부르고


잠시 사진을 찍는 중


과거 대도리이의 흔적도 남아있다.


현재는 이렇게


주춧돌만 남았다


철조 도리이인데 전쟁 당시 공출되었다고 한다.


에도시대의 것인데 아깝다


유서비


다시 우사역으로 돌아왔다.


다시 만난 역명판


이렇게 5일째 오이타현 답사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