書/논문

대한제국기 한성의 도시건축

同黎 2012. 12. 30. 01:33

대한제국기 한성의 도시건축

 

흔히 건축은 시대를 담는 그릇이라고 표현된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건축은 그 양식(樣式)과 기능을 변화시키며 나타나기 때문에 우리는 시대의 변화를 건축에서 읽을 수 있다. 또한 건축물 각각의 형태를 넘어, 건축물을 배치하는 도시 구조는 근대 이후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는 도시에 반영된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시대를 읽을 수 있는 하나의 사료(史料)로써의 의미를 지닌다. 때문에 중세와 근대의 이행기라고 할 수 있는 대한제국시기, 대한제국의 (모든 면에서의) 중심지인 한성의 건축과 도시구조를 읽는 것은 동시에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의 한 단면을 읽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전봉희 선생의 근대도면자료와 대한제국기 한성부 도시, 건축의 변화는 규장각에 소장된 통감부 시기의 도면들을 소개하면서 대한제국기 도시, 전축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파악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다. 많은 부분을 도면의 성격과 출처, 그리고 기존 관아와 궁() 등이 차지했던 대형 필지의 용도 전환 등 직물적인 현상 설명에 할애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한 역사적 의미를 바로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나, 한가지 살펴볼만한 사항이 있다.

그것은 경운궁과 창덕궁 인근의 도시구조 변화이다. 창덕궁은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으로 어가가 옮겨지기 전까지 사실상 가장 오랫동안 조선의 법궁 역할을 해온 곳이다. 경운궁은 아관파천 이후 조선과 대한제국의 정궁 역할을 하면서 이 곳을 중심으로 고종의 서구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두 궁궐을 중심으로 한 주변 건축물 배치 구조의 변화는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변화된 도시구조의 모습을 대표한다. 창덕궁은 정문인 돈화문을 종점으로 긴 횡적 도로를 두고 좌우에 관청을 두어 긴 진입로를 따라 간 후에 비로써 궁궐에 다다르게 된다. 대한제국기 돈화문 앞 지역은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서는 경우가 매우 적고 주거 건축만 늘어나게 된다. 반면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 일대는 새롭게 뚫린 태평로가 지나가고 한성의 주요도로들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로 때오른다. 특히 바로 인근에 대한제국의 새로운 상징물인 원구단이 위치하고 주변에 각종 영사관, 교회, 학교 등 서구적 기관들이 들어서며 소위 광무개혁의 상징적인 건축물군이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이것만으로 고종의 근대화 노력을 설명할 수는 없다. 비록 건축과 도시 구조 변화로 기층 민중들에게 다가오는 경관이 서구식으로 변화하였다고 해서 그것이 근대화의 표징이 될 수 없다. 오히려 고종이 전제황제권을 얻어내기 위한 표상으로써 건축물들을 생산했다는 해석도 가능하며, 덕수궁 주변의 영사관들이나 외인(外人) 거주지의 존재는 역으로 제국의 자주성을 의심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아울러 상기 자료들이 상당수가 통감부에서 황실의 재산을 조사하고 정리하고자 만든 것임을 고려할 때 일제의 침탈과정을 살표볼수는 있으되, 이것으로 대한제국의 근대화 노력을 찾아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닌가 싶다.

전봉희 선생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진정한 근대적 의미의 건축이라면 시민사회의 요구에 따른 학교, 병원, 교회, 문화시설 등의 건설이 있어야할 것인데, 상기 자료에서는 오히려 조선왕실의 상징적인 건축들을 허물고 거기에 일제 침략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건축물들이 들어서고 있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는 토론자인 전우용 선생의 지적, 즉 양식(洋式), 혹은 절충식 건축만을 근대적 건축이라고 파악하는 것은 지양해야 할 것이라는 의견과 일맥상통한다. 건축의 배경과 기능을 충분히 고려한 후에야 우리는 대한제국기 한성 도시변화의 의미를 따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