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거리

11월 26일 부산 교사대회 김진숙 지도위원 연대사

同黎 2013. 3. 8. 01:56

11월 26일 부산 교사대회 김진숙 지도위원 연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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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아무것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아직은 키가 큰 사람만 봐도 숨이 턱 막힙니다.
아직은 밥을 먹는 일도,보일러 스위치를 누르는 일도,
양말을 신는 일도 참 많이 죄스럽습니다.
무엇보다도 준엽이 혜민이 준하 경민이 영욱이 그만한 또래의 아이들을 보는 일이 가장 고통스럽습니다.
편견으로 가득 찬 세상에 먹잇감으로 던져진 아이들.
제 아버지의 관을 덮은 국화꽃잎을 떼어 누나에게 갖다주며 웃던 일곱 살 준하.

아빠가 너무 보고 싶어 온 몸이 아프도록 울었다던 열 일곱살 경민이.
네이스엔 그 아이들의 아버지의 부재가 자살로 입력되겠지요.
다섯 아이를 한꺼번에 쪼르르 상주로 만들었던 자본에 대한 얘기 따위는 없을겁니다.
일 안하고도 한꺼번에 수십억씩 챙겨가는 자본이,한달 만원 짜리를
노동귀족이라 부르던 세상에서,아빠가 왜 크레인엘 올라야 했는지,아빠가 사주마고 약속했던 휠리스를 왜 다른 사람들이 사주는지,그들의 눈이 왜 한결같이 붉은 강물로 출렁거렸는지,네이스는 설명해주지 않겠지요.


신 용길 동지의 목숨이 참교육의 깃발로 나부낀 지 15년.
그 깃발이 그토록 저를 설레게 했던 건, 참교육이란 담탱이 꼰대들과 같은 계급으로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을거란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더 이상 스스로의 계급이 부끄럽지 않을거란 감격 때문이었습니다.


제 나이 열여덟.
실밥을 따는 쪽가위에 허구헌날 씹히는 일보다,불량을 냈다고 반장한테 귀싸대기를 예사로 맞는 일보다 더 힘들었던 건 제가 공순이가 됐다는 사실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옷을,내가 만든 신발을 세상 사람들이 입고 신고 다니는 게자랑스러워 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사실이 들통날까 봐 퇴근할 땐 눈썹에 머리카락에 하얗게 앉은 먼지와 실밥을 테이프로 쩍쩍 떼어내고야 세상에 섞일 수 있었습니다.
실크 원단을 찝어먹고 나면 조장은 늘 같은 소릴 했었습니다.
'니 한달 월급으로도 이 옷을 못 산다'고.
내 손으로 그런 옷을 하루에도 수천장을 생산하는데 한달을 일하고도 그 옷 한 장을 못 산다는 그 말을 참 이해하기가 힘들었던 시절. 아니 이해하려는 불순한 생각을 품어서는 안되던 시절.
소등시간이 지난 깜깜한 방을 기어나와 기숙사 옥상 여기저기서 가로등 불빛아래 고향에 편지를 쓰던 아이들.
어머니 아버지 걱정 마세요.저는 사장님의 보살핌으로 잘 지내고
있답니다.내후년 쯤에는 야간 고등학교에 진학을 해서 꼭 자랑스러운 딸이 되겠습니다.
발신자도 수신자도 다르건만 군사우편처럼 내용이 비슷하던 편지들.
태자.희야라는 이름 대신 단추구멍으로 오바로꾸로 불리던 아이들.
톨루엔이나 신나를 물처럼 첨벙거리고 살면서 생리를 안 한다고 좋아라 하던 열 일곱 열 여덟살 짜리 아이들.
남들은 너무 귀엽다는 애기들 신발을 보면서도 그 작은 신발을 박아 돌릴 때 손가락에 박히던 미싱바늘의 섬뜩함이 먼저 떠오르던 아이들.


스물한살. 한진중공업에 용접공으로 들어가서 아저씨들에게 제일 먼저 배운 일은 이태리 타올로도 지워지지 않던,손에 새까맣게 낀 기름때를 시멘트 바닥에 벅벅 문질러 지우던 일이었습니다.
'때는 그때 그때 지아야제 나뚜먼 펭생 가는기라'
논물이 밴 뒷꿈치를 우물가에서 그렇게 문질러대던 내 아버지가 했던 일.
새까만 손이 자랑스러운 건 3월 10일 근로자의 날 뿐이었고,364일은 그 손이 부끄러웠습니다. 일요일에도 어김이 없던 새벽 4시 45분. 자명종 소리 만큼이나 큰 소리로 엉엉 울고 싶을 만큼 힘들고 고되던 노동보다 더 견딜 수 없었던 건 오늘도 내일도 난 여기서 한발짝도 벗어나질 못할거라는 깊은 절망이었습니다.
금방까지도 옆에서 홀다를 땡겨주던 아저씨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뒤집힌 채 바다위에 동동 떠다니던,그 아저씨의 이름이 선명하던 화이바보다 더 소름이 끼쳤던 건 안전과에 불려가 목격자 진술서를 쓰는 일이었습니다.
철판끼리 부딪치는 소리에 돌아보니 하반신이 동강났던 아저씨.
그때까지 살아서 날 쳐다보던 아저씨의 눈빛보다 더 무서웠던 건 제가 그런 사실들에 분노하는 게 아니라 이런데서 일한다는 걸 부끄러워 한다는 거였습니다.
내가 일을 해야 그 큰배가 만들어지고,그 배가 만들어짐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부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스무살이 넘도록 전 누구에게도 들은 바가 없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합격한 제자보다 지하철을 생산하는 제자가 자랑스러웠던 적이 있으십니까?
변호사가 된 제자보다 이 공사장에서 함마를 휘두르는 제자에게 보람을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스스로 노동자계급이 아니고서야 노동자계급이 자랑스럽다고 가르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스스로 노동자임을 인정하지 못하고서야 노동자가 세상의 주인이라는 믿음이 신념이 될 순 없는 거 아닙니까?


지난 5월.솥발산 무덤들마저 초록으로 넘실거리던 날.
최 복남이라는 노동자의 무덤은 황토흙이 벌건 채 그의 두아들의 흙장난놀이터가 돼있었습니다.
평소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조차 없던 무능하고 가난한 애비는 죽어서야 그렇게 아이들과 놀아줄 시간이 생겼던 겝니다.
화물연대 노동자들의 투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선전전을 하다가 어떤 젊은이와 시비가 붙었습니다.
왜 유인물을 나눠줘서 차가 밀리게 하냐는 게 시비의 이유였습니다.
시비의 와중에 그 젊은이는 최 복남을 매단 채 질주를 했고,최 복남은 살기위해 평생을 버둥거리던 그 길바닥에서 즉사를 했습니다.
한 노동자의 절규에 귀 기울이기 보다,일곱살 여섯 살 연년생 아이들을 둔 가장의 생존보다 우선했던,사회혼란을 부추기는 세력에 대한 적대감.


작년 서울의 어느 병원에선 20년 넘게 일하던 식당에서 비정규직으로 내몰린 50대 아줌마들의 투쟁이 시작되고 그 투쟁을 막아선 건 용역들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한 아주머니가 기절을 하고 나중에 들은 사연은,자기에게 무수한 발길질과 주먹질을 해대던 용역의 얼굴을 어느 순간 올려다보니 자기 아들이더랍니다.
이십몇년 그 아들을 먹이고 입히고 가르치며 새벽부터 버둥거렸을 홀어미의 눈물과 노동이,사회불만 세력이 필수공익사업장을 장악하려는 음모가 되는 세상에서 노동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같은 건 없었습니다.


아이들의 밥이 되고 옷이 되고 가방이 되고 휴대폰이 되고, 그리고 아이들이 장차 살아가게 될 계급에 대한 희망과 예의를 앞서가며 따르게 하는 일.참교육은 그런거라고 전 믿습니다.
애초에 고무신을 신은 적이 없었던 노무현씨에게 고무신을 거꾸로 신었다고 자꾸 뭐라할 게 아니라,온종일 고무장화를 벗을 틈이 없는 급식조리보조원 노동자들과 연대하는 일. 전 그게 참교육이라고 믿습니다. 어제 뉴스를 보니 한나라당 의원들이 총사퇴를 하고 곧 노무현을
탄핵한답니다.

오늘부터 우리 세상입니다.
영웅이 나타나 세상을 바꿔줄거라고 믿는다면,김대중에서 노무현으로 이어졌던 오류는 김근태로 추미애로 또다시 반복될뿐입니다.
우리가 정치의 교육의 세상의 주인이 됩시다!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농민 장애 여성 그들과 하나가 됩시다!
전교조 참교육의 자랑스런 깃발아래 하나되어 기필코 노동해방으로 총진군 합시다!!


전교조 부산지부 동지들.
준엽이.. 혜민이... 준하.... 경민이..... 영욱이.......그
아이들을.........잘 부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