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거리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 하종강

同黎 2013. 3. 14. 13:41

대구 근처 농공단지에 있는 공장에 노동조합이 생겼다고 연락이 와서 내려갔다. 버스터미널로 나를 마중나온 사람이 쩔쩔매는 얼굴로 말한다.


"마땅한 교육 장소를 못 구했는데... 이거 죄송해서 어떻게 하지요."


"그게 뭐 나한테 죄송할 일인가요?"


그를 따라서 한참 걸었더니 논밭 사이로 한참 가다가 어느 커다란 비닐하우스로 들어간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구멍이 숭숭 뚫린 비닐하우스를 하나 빌린 것이다. 먼지가 자욱한 비닐하우스 속에서 짚단을 깔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는 노동자들은 대부분 40대의 아줌마들이었다. 쇠를 다루는 일을 한다는데 "어떤 일을 하세요?" 물었더니 한 아주머니가 "아주 시커먼 일이에요."라고 답했다.


"소장님 오셨으니까, 우리 노래 한 곡 부르고 강의 듣겠습니다."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아, 나는 20년만에 그런 노래를 다시 들었다. 필기도구를 꺼내 재빨리 가사를 받아 적기 시작했다.


때로는 돈을 벌려고 철야작업도 했었지

얇아져가는 월급봉투를 보며

타는 가슴 소주로 달랬지

임금인상 누가 말했나

노동자의 피보다 진하다고

선진조국 누가 말했나

노동자의 기쁨이라고

세월이 흘러 어느날 

우리 다함께 모였지

이제 더 이상 참지 말자고 

노동조합 힘차게 세웠지


때 절은 작업복을 입은 아줌마 노동자들이 먼지 자욱한 비닐하우스에 짚단을 깔고 앉아 손뼉을 치며 목이 터져라 열심히 노래 부르는 모습... 나는 눈시울이 뜨거웠다.


'아, 이 사람들에게 와서 노동가요 하나 가르칠 사람이 없었구나. 이렇게 외롭게 떨어진 곳에서... 노동조합을 만들고 임단투를 준비하는구나...'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20년전으로 돌아간 사람들처럼 그 노동자들은 유행가에 가사를 바꿔 붙인 '노가바'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강의 첫머리에서 나는 말했다.


"노동조합원들은 서로를 '동지'라고 부릅니다. 전국의 모든 노동조합 사람들이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서로 '동지'라고 부릅니다. 저도 처음 만나는 여러분들을 이제부터 감히 '동지'라고 부르겠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이렇게 말하려고 했다.


"동지 여러분, 여러분들을 절대로 이곳에 이렇게... 내버려두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려고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내 앞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 위로 20년 전에 내가 처음 만나기 시작했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목이 잠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78년에 내가 사는 곳 가까이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노동조합 활동을 탄압하는 회사에 항의하기 위해 여성 노동자들은 본관 앞 콩크리트 바닥 위에서 단식농성을 시작했다. 요즘처럼 스티로폴을 깔고 천막을 치고 하는 농성이 아니라, 그냥 콩크리트 바닥 위에서 담요 한 장도 없이 쌩으로 누워 버티는, 그야말로 '자살 텍'이었다. 따가운 삼복더위의 햇살 아래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지칠대로 지쳤을 때, 무술경관 부대가 들이닥쳤다. (그때까지만 해도 살벌한 백골단이 없던 시대였다.) 여자들은 구석으로 몰렸다. 구석에 아비규환처럼 엉켜있던 여성 노동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소리쳤다.


"우리 모두 옷을 벗읍시다. 그렇게 하면 저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우리 몸에 손을 대지는 못할 거에요."


아, 여성 노동자들이 옷을 벗기 시작했다. 벌거숭이가 된 400여명의 여성 노동자들은 벗어버린 하늘색 작업복들을 흔들며 눈물 범벅이 된 얼굴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동일방직 나체시위 사건... 세계 노동운동사에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있었던 일이다. 


우여곡절 끝에 노동조합 지부장을 선출하기 위한 대의원 선거가 다시 시작되었다. 야간 근무조의 일이 끝나는 새벽 6시부터 투표가 시작되었는데, 야간 근무를 마친 여성 노동자들은 작업복도 미처 갈아입지 않은 채 투표소가 설치된 노동조합 사무실로 새벽길을 내달렸다. 투표를 하기 위해 달리기를 하는 노동자들... '우리가 몇 초라도 늦으면 일이 잘못될지도 몰라...' 상황이 그만큼 긴박했다.


줄지어 투표가 시작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투표소가 설치된 노동조합 사무실에 회사의 사주를 받은 남자들이 난입했다. "여자가 노동조합의 대표로 선출되는 꼴은 못 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손에는 기숙사 화장실에서 똥을 가득 퍼담은 양동이와 프라스틱 바가지들이 들려 있었다. 바가지로 똥을 퍼 사무실에 뿌려대면서 들이닥친 남자들은 여성 노동자들의 옷 속에 똥을 들이붓고 입안에 쑤셔넣기도 했다.


그때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만들었던 유인물의 제목을 나는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한다.


"우리는 똥을 먹고 살 수는 없습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 '노동문제'라는 단어를 선명하게 접한 첫번째 기억이다. 우리가 사는 바로 옆에서 내 나이 또래의 여성 노동자들이 그런 일을 당했다는데, 생각이 제대로 박힌 대학생이라면 가 봐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런 천인공노할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원인은 무엇이고 잘못한 놈들은 도대체 누구인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학교에 돌아와 부모님이 보내주신 대학이라고 그저 뭐가 뭔지도 모르면서 들락거리는 친구들에게 "세상에 이런 일이 있었다더라"고 알리는 일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축제기간에 '동일방직 노동자 돕기 찻집'이라도 해야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야 사람 사는 꼴이지... 노동문제가 내 생활의 중심에 놓이게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


노동가요라고는 단 한 곡도 없었던 그 시대에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들이 하늘색 작업복을 벗어 흔들며 불렀던 노래가 바로 그런 노래였다. 자신들이 좋아하는 유행가에 가사를 바꿔 붙인 '노가바'를 목이 터져라 불렀던 것이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당시의 동일방직 여성 노동자 두 명에게 전화를 해 보았다. 그들은 모두 나와 동갑이거나 한 두 살 차이이다. 그때 우리가 열심히 불렀던 '노가바'의 가사 몇 곡을 완벽하게 복원해보고 싶었다. 그런데 한 명은 '생협' 활동을 하느라고 연락이 안 되었고, 다른 한 명은 치과에 치료 받으러 갔다고 그이의 예쁜 아이가 답했다. 참고로, 그 예쁜 딸아이는 우리 아들과 이미 소시적에 정혼한 사이다.)


며칠 전, 한국시그네틱스 노동조합에 교육을 하러 갔다가 강의 시작 전에 최신 노동가요 '내일의 노래'를 열심히 부르고 '힙합'이라는 춤을 닮은 율동을 신나게 추는 젊은 여성 노동자들을 보며, 마음 속으로 말했다.


'당신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노동가요라는 것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노동자들이 아직도 이 땅에 있습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