心/거리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

同黎 2013. 6. 29. 00:25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들」


1

지금까지 모든 유물론(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을 포함하여)의 주요한 결함은 대상, 현실, 감성이 오직 객체의 혹은 관조의 형식 아래에서만 파악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감성적 인간 활동으로서, 실천으로서 파악되지 않고, 주체적으로 파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능동적 측면은 유물론에 대립해서 관념론에 의하여―물론 관념론은 현실적 감상적 행위 자체를 알지 못한다―추상적으로 발전된다. 포이에르바하는 감성적인 객체들―사유객체들과 현실적으로 구별되는 객체들―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활동 자체를 대상적 활동으로서 파악하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는 『기독교의 빈질』에서 이론적 태도만을 진정으로 인간적인 태도라고 간주하며 반면에 실천은 오직 그 더러운 유태인적 현상 형태 속에서만 파악되고 고정된다. 그러므로 그는 ‘혁명적’, ‘실천적˙비판적’ 활동의 의미를 개념적으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The chief defect of all previous materialism (including Feuerbach's) is that the object, reality, what we apprehend through our senses, is understood only in the form of object or contemplation; but not as sensuous human activity, as practice; not subjectively. Hence in opposition to materialism the active side was developed abstractly by idealism, which of course does not know real sensuous activity as such. Feuerbach wants sensuous objects, really distinguished from the objects of thought: but he does not understand human activity itself as objective activity. Hence, in The Essence of Christianity, he sees only the theoretical attitude as the true human attitude, while practice is understood and established only in its dirty Jewish manifestation. He therefore does not comprehend the significance of "revolutionary" of "practical-critical" activity.


2

대상적 진리가 인간의 사유에 들어오는가 않는가의 문제는―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실천 속에서 인간은 진리를, 즉 현실성과 힘, 자신의 사유의 차안성을 증명해야 한다. 사유―실천으로부터 고립된―의 현실성이나 비현실성에 관한 논쟁은 순전히 스콜라주의적 문제이다.

The question whether human thought can attain to objective truth is not a theoretical but a practical question. Man must prove the truth, i.e. the reality and power, the thissideness of his thinking in practice. The dispute over the reality or non-reality of thinking which is isolated from practice is a purely scholastic question.


3

환경의 변화와 교육에 관한 유물론적 교의는 환경이 인간들에 의해 변화되며 교육자 자신도 교육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있다. 그러므로 그 유물론적 교의는 필연적으로 사회를 두 부분―그중의 하나는 사회를 초월해 있다―으로 탐구하지 않을 수 없다.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의 변화 혹은 자기 변화와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고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

The materialistic doctrine concerning the changing of [men's] circumstances and education forgets that circumstances are changed by men and that the educator himself must be educated. This doctrine therefore has to divide society into two parts, one of which is superior to society.

The coincidence of the changing of circumstances and of human activity or self-change can be comprehended and rationally understood only as revolutionary practice.


4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자기 소외라는 사실, 종교적인 세계 및 세속적인 세계로의 세계의 이원화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그의 작업은 종교적 세계를 그것의 세속적 기초로 해소한 데에 그 요체가 있다. 그러나 세속적 기초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위로 올로가 구름 속에 하나의 자립적인 영역으로 스스로를 고정시킨다는 사실은 이러한 세속적 기초의 자기 분열과 자기 모순으로부터만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세속적 기초 자체가 자기 자신 안에서, 자신의 모순 속에서 이해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실천적으로 혁명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예를 들면 세속적 가족이 신성 가족의 비밀로서 폭로된 이후에 이제 전자 자체가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파괴되어야 한다.

Feuerbach takes his departure from the fact of religious self-estrangement, from the duplication of the world into a religious and a secular one. His work consists in resolving the religious world into its secular basis. But the fact that the secular basis raises itself above itself and establishes for itself an independent realm in the clouds can be explained only through the cleavage and self-contradictoriness of this secular basis. The latter must therefore be understood, both in itself and in its contradiction. as revolutionized in practice. Therefore after the earthly family, e.g., is discovered to be the secret of the heavenly family, one must proceed to destroy the former both in theory and in practice.


5

추상적 사유에 만족하지 않는 포이에르바하는 직관[혹은 관조]을 추구한다; 그러나 그는 감성을 실천적, 인간적˙감성적 활동으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Fueurbach, not satisfied with abstract thought, wants contemplation: but he does not understand sensuousness as practical, human-sensuous activity.


6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본질을 인간의 본질로 용해시킨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각각의 개체 속에 내재하는 추상물이 아니다. 인간의 본질은 그 현실에 있어서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 ensemble 이다.

이러한 현실적 본질의 비판 속으로 파고들지 않는 포이에르바하는 따라서:

1.역사적 과정을 도외시하고 종교적 심성을 그 자체로서 고정시키고 하나의 추상적―고립된―인간 개체를 전제하지 않을 수 없다.

2. 따라서 그 본질은 ‘유 類’로서만, 내적이고 침묵하는, 많은 개체들을 오직 자연적으로 묶고 있는 일반성으로서만 이해할 수 있다.

Feuerbach resolves the essence of religion into the essence of man. But the essence of man is not abstraction inherent in each separate individual. In its reality it is the ensemble (aggregate) of social relations.

Feuerbach, who does not enter more deeply into the criticism of this real essence, is therefore forced:

1. To abstract from the process of history and to establish the religious temperament as something self-contained. and to postulate an abstract―isolated ―human individual.

2. The essence of man can therefore be understood only as "species," the inward, dumb generality which naturally unites the many individuals.


7

따라서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적 심성’ 자체가 하나의 사회적 산물임을, 그리고 그가 분석하고 있는 추상적 개체가 하나의 특정한 사회 형태에 속함을 알지 못한다.

Feuerbach therefore does not see that the "religious temperament" itself is a social product and that the abstract individual whom he analyses belongs to a particular form of society.


8

모든 사회적 생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이다. 이론을 신비주의로 이끌고 가는 모든 신비들은 인간의 실천에서 그리고 이 실천의 개념적 파악에서 그 합리적인 해결을 얻는다.

All social life is essentially practical. All the mysteries which lead theory into mysticism find their rational solution in human practice and in the comprehension of this practice.


9

관조[직관]하는 유물론, 즉 감성을 실천적 활동으로 개념 파악하지 않는 유물론이 도달하는 저점은 각각의 개체들 및 시민 사회의 관조[혹은 직관]이다.

The highest point attained by contemplative materialism, i.e. by that materialism which does not comprehend sensuousness as practical activity, is the contemplation of separate individuals and of civil society.


10

낡은 유물론의 입지점은 시민 사회이며, 새로운 유물론의 입지점은 인간적 사회 혹은 사회적 인류이다.

The standpoint of the old type of materialism is civil society, the standpoint of the new materialism is human society or social humanity.


11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Philosophers have only interpreted the world in various ways: the point is to change it.

1845년 봄 씌어진 수고에 의거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