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료한 103-230

역사학에 대한 메모

同黎 2014. 2. 20. 08:31

1. 먼저 태어나서 입학했다는 이유로 가끔씩 자신의 뜻은 학문에 있음을 어필하는 친구들을 만나곤 한다. 공부를 직업으로 삼고 싶다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유쾌한 일이지만 동시에 걱정이 되기도 한다. 더군다나 그래서 어떤 시대를 전공하고 싶냐는 질문에 “~시대가 재밌는 것 같아서..” 라는 식의 답변이 돌아오면 더욱 더 한숨이 나오게 된다. 만약 그런 대답을 하는 친구가 학부 1~2학년 이라면 관계가 없지만 대학원 진학을 실질적으로 준비하는 3~4학년이라면 꽤나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흥미와 재미는 연구로 가기 위한 필요조건일수는 있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우리는 교양·상식으로서의 역사와 분과학문으로서의 역사학, 그리고 인간의 삶이 구성하는 보편적인 그 무엇으로서의 역사를 구분해야 한다. 적어도 분과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전공하는 전문가가 되기 위해서는 교양·상식으로서의 역사와 분과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하기 위해서 어떤 조건들이 다른것인지 구분해야 한다. 흥미와 재미로서의 역사는 과거 사실에 대한 나열과 재구성 그리고 거기서 얻어지는 적절한 감동과 교훈정도면 충분히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분과학문으로서의 역사학 전공자로 산다는 것은 재미나 흥미를 뛰어넘는 그 무언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고 싶은 것, 해야 하는 것, 할 수 있는 것. 이 세 가지를 이름 붙인다면 취미와 의무와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행복한 삶은 취미와 의무와 능력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겠지만 굳이 순서를 메겨야한다면 의무가 우선이고 능력이 두 번째고 마지막이 취미가 될 것이다. 이 우선순위를 냉정하게 인식하면서 그 세 가지가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 직업인으로서의 역사 연구자가 선택해야 할 길이 아닐까

역사학 전공자로 살려면 자신이 전공하는 주제가 울림을 가지는 중요한 것이어야 한다. 그 주제가 작은 것인지 큰 것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작은 주제라도 그것이 보여주는 역사의 단면은 엄청나게 큰 것일 수 있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로 수천년 전의 기후를 알 수 있듯이 하나의 단면이 보여주는 역사의 울림은 거대하다. 그 울림이 전공 시대와 전공 국가(혹은 지역)을 뛰어넘어 사람들에게 영감을 줄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분과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을 뛰어 넘어 인간의 삶이 구성해내는 거대한 흐름으로서의 즉 시대로서의 역사에 접근할 수 있다.


2. 역사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깔고 공부해야 한다. 그럴 때 학문은 ‘현재성’을 지니게 된다. 학문 특히 역사학의 현재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논쟁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렇다. 역사학의 현재성이라는 것은 사람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살아갈 구조와 그 구조가 다른 구조로 변하는 모습을 그려내는 것이다. 구조와 이행에 대한 끊임없는 사유가 곧 역사학의 본령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 나는 믿고 있다.

누군가가 ‘조선후기 승군’이라는 주제에 흥미를 가지고 그 자체에 빠져들어 끊임없이 사료를 파헤치고 실증에 성공하여 논문을 쓴다 해도 그것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을 왜 공부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어떤 문제의식과 현재성을 띄고 있을 수 있을까? 그러나 ‘조선후기 승군’이라는 주제에서 조선후기의 구조와 그 이행에 대한 단서를 읽어낼 수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작은 주제라도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물론 엄청난 능력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역사의 기저에 있는 구조와 그 구조의 이행에 대해서 파악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가 있다. 80년대까지의 많은 연구는 사회의 토대, 즉 경제에 관심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이해의 축적에 바탕하여 상부구조를 통해 구조에 접근하는 여러 방법으로 시도되었고, 그 시대를 살고 있는 개인의 심성에까지 접근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역사학의 현재성에 대한 고민은 방법론의 발전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다.

전근대시대를 공부하는 사람은 특히 역사학의 현재성을 지키고 있는가에 대해 주의해야 한다. 전근대시대는 사료가 풍기는 분위기와 연구자라면 거의 누구나 가지고 있을 ‘好古’의 취미가, 그리고 선학들로부터 이어져온 실증에 대한 압박과 고정관념이 역사학의 현재성을 방해하는 요소로 등장한다. 그러나 너무나 보편적인 이야기이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역사는 때로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반복되거나 재현된다. 이행은 계속된다. 그리고 우리가 딛고 살고 있는 현재의 구조를 알기 위해서는 그 이전단계의 구조를 알아야 한다. 그것이 맑스와 베버가, 브로델과 푸코와 월러스틴과 폴라니가, 김용섭과 강만길과 이영훈이 전근대시대를 전공했던 이유이다. 전근대사를 전공한다고 내가 발 딛고 서있는 현재에 무관심한 것은, 그리고 사회의 구조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3. 역사학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바탕하여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진지한 인문-사회과학 연구자들이 그렇듯이 (심지어 우경화된 학문일지라도) 현재의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학을 전공한다는 것은 전혀 즐겁지 않다. 누군가 나에게 공부가 재밌어서 하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이야기해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내 연구주제와 조금만 관련 있는 이야기가 어디선가 흘러나오면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돈이 생기면 본능적으로 위시리스트에 담겨 있던 책을 한권씩 사들인다. 학위논문이라도 쓰면 대학원생의 5개 기본질병이라는 탈모, 무좀, 치질, 척추측만증, 안구건조증에 자동으로 걸린다. 재밌지도 않다면서 왜 이러고 사는 것일까?

다른 연구자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에게 공부는 그냥 본능적인 것이다. 살려면 밥먹고 잠자고 똥싸고 술마시고 추우면 옷 입고 더우면 옷 벗듯이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이다. 정말 때려치고 싶고 그만두고 싶은 마음에 울컥 들고, 동창회 나가서 이미 연봉 수천만원씩 벌고 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어딘지 모르게 위축이 들기도 하지만, 새로 나온 책에 본능적으로 눈이 가고 새로운 자료가 나왔다고 하면 구하지 못해서 안달이 난다. 새로운 책들을 쇼핑카트에 집어넣고 탐욕스럽게 글을 읽어나간다. 술을 마시다가도 자연스럽게 공부이야기로 주제가 옮겨지고 선행 연구들을 이야기하면서 나는 왜 그렇게 똑똑하지 못할까 한숨을 쉬게 되는 게 연구자의 삶인 것 같다. 그래서 연구를 하면 다른 것들은 슬그머니 우선순위가 밀리게 되는 게 공부하는 삶이다.

그렇게 본능처럼 숨쉬듯이 사유하고 고민하면서 어떤 날은 대오각성한 듯이 새로운 아이디어를 실험해보려고 하고, 또 그러다가 에이포 열 몇장을 한번에 날려버리기도 한다. 기껏 완성한 글을 들고 세미나에 가서 두들겨 맞고, 다시 책상 앞에 와서 앉았을 때의 그 고통을 수 백번 되풀이하면서 사는게 연구자이다. 그래서 재미로는 공부를 할 수가 없다.


4. 문제의식에 바탕을 두고 공부하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하고 있는 공부의 방향성과 한계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나는 조선시대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를 공부하는 것이고, 한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며, 역사를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사회-세계사회의 구조와 관련된 인문학, 사회과학을 하는 것이다.

역사학만으로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어쩌면 역사학이라는 분과학문은 어느 시기인가 해체되어야 할 학문일 수도 있겠다. 역사학만으로는 어떤 진리효과를 낼 수 없다는 한계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다른 인접학문들의 방법론과 문제의식을 적극적으로 흡수할때만이 연구자로서의 올바른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 인정할 것을 인정하고 극복할 것을 극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