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료한 103-230

안암동 노포(老鋪)1 - 남아있는 곳

同黎 2015. 3. 30. 00:02

안암동 노포(老鋪)1


안암동에 드나든지 벌써 10년이 넘었다. 대학와서 배운 것의 5할은 술이고, 4할은 데모질이고 1할은 결석이었다. 등록금을 내고도 서관에 가지 않은 날이 더 많았고 수업은 안가도 술자리만큼을 꼭꼭 챙겨가던 때가 있었다. 2학년 때던가 저녁 6시에 아직 해가 완전히 지지 않을 때 집에 가야한다는게 너무 낯설어서 기어이 선배들을 불러내 술을 먹었던게 어제 같은데 그동안 너무 많은 가게가 생기고 또 사라졌다. 세월이 흘러간다는 걸 너무 잘 알려주는 것이 식당와 술집이 생기고 망하는 것이다.


일본에 가면 곧곧에 있는 것이 대를 이어 하는 오래된 가게, 즉 노포(老鋪)이다. 언제가도 그 자리에 있는 가게들이 너무 부럽다. 누구 말처럼 음식은 맛이 아니라 누구와 먹었는가의 그 추억으로 남는 것인데 적어도 일본에서는 그 추억을 남길 수 있는 곳이 더 많기 때문이다. 안암동에서 많은 노포가 있었다. 100년이 넘는다는 일본의 노포에 비해 그 시간은 짧은 감이 있으나 저마다 4년 내외로 스처가는 대학가에서 그렇게 버티고 있었다는 것 만으로도 노포라는 이름을 주기에 아깝지 않다. 


애석하게도 추억이 담겨진 그 노포들 가운데 절반은 사라지고 절반은 남아 있다. 결코 깨끗하지도 않고 친절하지도 않지만 결국 막차 놓치고 첫차가 다닐때까지 수 많은 밤을 지샜던 곳들. 시끄러운 음악과 화려한 조명이 없어도 참살이길의 그 많은 술집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무뚝뚝한 음식들이 그립다. 이제는 그러기엔 몸도, 여유시간도 받쳐주지 않지만 저물어가는 내 20대의 절반이었던 그곳들에 다시 가고 싶다.


남아있는 곳


술 익는 마을

지하에 있는 그 크지도 않은 술집에 수 많은 결의와 추억들이 지나갔다. 무언가를 결의해야 할 때, 틀어진 동기들끼리 다시 만날 때, 누군가 군대간다는 걸 막을 때, 회의나 세미나 끝나고 뒤풀이에 술마는 단골 집이었다. 그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었다. 김영삼 정권 타도하자는 스티커가 아직도 남아있는 그 낡은 화장실도 더 이상 글씨를 쓸 수 없을 것 같은, 낙서로 가득한 벽도 다 그대로이다.

안쪽방 그 좁은 안쪽방에 10명이 넘는 인원이 경우 옹기종기 앉아서 치즈 계란말이 하나를 시켜놓고 술을 마셨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도 않아 술잔을 넘쳐버린 레몬소주는 몇 병이었나. 노동해방 그날까지 싸우겠다던 그날의 맹세는 이제는 죄책감으로만 남았지만 아저씨도 메뉴도 그대로 남아있다.


작품86

05학번이 태어날 때 만들어진 곳이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주인 아저씨가 호텔 주방장으로 고대에도 고급스러운 식문화를 전파하겠다며 경양식집을 만들었으나 결국 고대생에게 굴복해 술집이 되었다는 그 집. 과연 이게 진실인지는 모르지만 원래 경양식 집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86년부터 한번도 바뀌지 않은 것이 확실한 인테리어가 이를 증명한다. 계란이 스무개는 들어간 것 같은 초대형 계란말이와 얼큰한 닭도리탕이 단골 메뉴였다.

한동안 모든 군대 환송회가 이 곳에서 진행된 것이 있었다. 누가 군대간다면 스무명은 모여서 가장 긴 테이블을 점령하고 사회자가 사회를 보는 공식행사를 진행했던 그 때. 축 입대라고 계란말이에 케찹으로 글씨를 쓰고 주인공은 그걸 들고 사진을 찍었었다. 유난히 무뚝뚝한 사장님 때문에 어느 샌가 발길이 뜸해졌는데 얼마전에 가보니 똑같았다.


꼴두기 집

언제가도 학생보다 교수가 더 많은 꼴두기 집이다. 이런 집에 있는지 조차 모르는 학부생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우신향병원으로 가는 골목길 한켠에 제대로된 간판도 없었던 집이다. 주인 아주머니가 아침마다 꼴두기와 쭈꾸미를 사와 손질하고 그 국물로 칼국수를 삶았다. 지금은 주인 아주머니가 바뀌어 맛이 예전만 못하다는 평이 많지만 그대로 한 겨울 온돌방에서 먹던 칼국수와 데침, 그리고 막걸리의 맛을 잊지는 못한다.

대학원에 들어가서 학부때도 안하던 사발식을 처음 한 곳이 꼴두기 집 안쪽방이다. 이 안쪽방은 왠만큼 일찍 들어오지 않으면 차지할 수 없었다. 명예교수라도 늦게오면 한여름에 땀 뻘뻘 흘리며 불편한 홀 의자에서 막걸리를 마셔야 하는 곳이 꼴두기집이다. 지금은 가격이 많이 올랐지만 비가 오는 날이면 전부치는 그 매캐한 연기 속에서도 다들 막걸리를 마시는 곳이 꼴두기 집이다.


대성집

제기동 골목 중에서도 가장 많이 갔던 곳. 돈이 많으면 감자탕을, 돈이 없으면 오돌뼈에 닭갈비를 섞거나 마늘 듬뿍 넣은 똥집을 구워 먹던 곳. 주문한 음식이 익기 전에 시원한 동치미 국수가 나와 한사발을 에피타이저로 먹고 브루스타의 불이 꺼지고 술이 불콰해지면 팥빙수 한그릇이 나오던 곳. 10시 반에는 가야지 하고 앉았다고 오고 가는 이야기에 어쩔 수 없이 벽에 걸린 시계를 힐끔거리다 결국 막차를 놓치고 2차를 가게 되던 곳이 대성집이었다.

한때는 뒤풀이만 하면 대성집에 가서 학생회 공약이 대성집 안가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 다음해 들어온 새내기들이 너무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다니기도 했다. 한번 들어가면 들깨 냄새에 온몸에 배어서 술먹은 티를 팍팍 내게 하였다. 술 먹다가 할 얘기 있는 친구랑 나와서 골목 앞에 앉아 있다가 진성슈퍼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서 먹다가 뒤이어 나온 친구들에게 빼앗기던 곳. 학기초면 온동네 꽈장들이 다 모이던 곳이 제기동 골목이었다.


제기집

대성집이 대규모 인원을 거느리고 가던 곳이라면 제기집은 몇명끼리 가던 곳이었다. 이집에 가면 무조건 시키는 치킨. 숨겨진 메뉴라고 단골인 척 시켜먹다가도 정작 치킨이라는 명패가 달려있는 것을 보고 놀라던 집. 그렇게 많이 다녔는데 왜 몰랐을까 항상 불가사의였다. 유일하게 안암에서 시장 통닭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대성집이나 형제집의 대군단을 피해 제기집으로 피신하면 치킨 한마리에 병맥주를 궤짝으로 마시곤 했다. 그럼 순식간에 술값이 10만원이 넘었는데... 지금도 종종 세미나 끝나고 제기집에 들려서 시장통닭에 개똥철학을 얘기하곤 한다.


만두방

개운사 사거리에서 고대병원 올라가는 초입에 만두방이 있다. 입학때부터 언제나 라면 한그릇은 이천원, 만두 한접시도 이천원이었던 것 같다. 오백원쯤 더 쌌던가?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무뚝뚝한 사장님과 사모님이 언제나 만두를 빚으며 앉아 있다. 유난히 돈이 없던 학부시절 이천원짜리 라면 국물로 해장하고 만두 한접시에 배를 채우곤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만두방은 똑같다. 

카드도 안되고, 물도 지가 떠먹어야 하지만 만두방은 여전히 고마운 곳이다. 한때 3500원이면 한끼가 해결되던 때가 있었지만 지금은 7~8천원은 가볍게 든다. 수 많은 백반집들이 다 사라지고 커피집만 무성한 이때 그나마 만두방이 있어서 호주머니의 부담을 그나마 덜 수 있다.


설성

고대에 입학하기 전 설성은 번개처럼 배달하는 곳으로 먼저 전파를 탔다. 그후 그 배달 아저씨가 죄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었으나 고대생에게 설성은 그냥 설성이었다. 유일하게 살아 남은 24시간 영업집. 학관 한근연 동방에서 앉아있다가 배고프고 국물이 당기면 황궁 짬뽕에 빼갈을 시키곤 했다. 언제나 주문하면 바로 달려오는 그 배달시간에 놀라서 문 밖에서 전화 내용을 듣고 있는게 아닌가 의심하기도 하고, 또 음식을 기다리며 오토바이 소리, 문 열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오는 사람에게 괜히 핀잔을 주기도 했다.

날 좋은날이면 점심시간에 서관 앞 잔디밭에 모여앉아 고대신문을 깔고 설성의 어린이 세트를 시켜 먹고 빼갈과 소주를 더해서 결국 수업을 빼먹는 것은 흔한 풍경이었다. 4교시가 끝난 줄도 모르다가 지나가는 교수님을 피해 나무 뒤로 숨기도 했고, 술을 먹고 뻣어버려 대자로 누워 자다가 저녁에나 일어나기도 했다. 그때 서관 앞 잔디는 짜장면과 빼갈을 먹고 자란다고도 했다.

전날 정대후문에 붙일 대자보를 준비하며 (지금은 아주 낯선 광경일) 포스터 칼라와 붓으로 대자보 뚜껑을 쓰고 B5에 글을 인쇄해 전지에 붙이고, 홍보관에서 밤새고 나오던 새벽녘, 유일하게 불켜져 있던 교문 밖 바로 옆 설성에서 소주로 추위를 이기곤 했다. 그리고 계단 올라가는길 있는 화장실은 수 많은 주정뱅이들의 방광을 지켜준 고마운 곳이기도 하다. 맛이 없어졌다고 욕도 먹고, 양이 적다고 고개를 흔들기도 하지만 그래도 설성의 전화번호는 고대생이라면 거의 다 외우고 있던 때가 있었다. 짜장면 값은 천원 넘게 올랐지만 한그릇도 군말없이 배달해주는 설성이 있어서 고마운 것도 사실이다.


남이네 칼국수

적어도 이곳을 한국사대동반에 알리고 퍼트린건 나였다. 워낙 칼국수나 수제비를 좋아하는 나는 좀 식상해진 코끼리 분식의 칼국수를 피해가다가 우연히 골목 안쪽의 남이네 칼국수 간판을 발견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가격은 칼국수, 수제비 3500원. 지금도 현금결제시 4500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칼국수를 시켰을 때 먼저 나오는 보리밥에 놀랐고, 칼국수 양에 놀랐다. 부족한 호주머니 사정에 이내 남이네는 한국사반 애들의 단골집이 되었고, 특히 새내기들에게 밥을 사주어야 하는 3월, 그 중에서도 3월 말이 되면 곧잘 찾는 곳이 되었다.

칼국수나 수제비를 시켰을 때 나오는 된장 보리밥이 맛있어 따로 메뉴로 개발해보시라 해도 끄떡 없는 사장님은 곱빼기 주문에도 단호하시다. 먹어보고 양 적으면 말해라 어련히 많이 준다는 말을 들으면 500원 쯤 더 받으셔도 될텐데 라는 생각이 항상 든다. 우리집 음식이 제일이라는 자부심으로 큰 가격변동도 없이 안암동을 지키시는 사장님을 보면 그래도 아직 예전 분위기가 고대에 남아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어머니 대성집

안암로터리에서 용두동 방향으로 꽤나 들어간 곳에 어머니 대성집이 있다. 차라리 대광고에서 더 가까울 것이다. 항상 밤 아홉시에 불을 켜고 다음날 점심 장사까지만 하는 곳이 어머니 대성집이다. 왠만큼 미식가가 아니고서는 이곳을 알기 쉽지 않고, 왠만큼 이쁨 받는 후배가 아니면 선배가 여길 데려가지 않는다. 주로 새벽에 해장하러 가는 곳이기 때문에 술 안먹고 도망가는 후배들은 어머니 대성집이 있는지조차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니와 가격이 솔찬히 비싸기 때문에 선배가 왠만큼 취하지 않는 이상은 사주지 않기 때문이다.

우거지와 선지를 넣고 다 된 다음에 고기를 얻어 내오는 이집의 해장국은 깔끔하고 시원한 맛이 일품이다. 해장국을 먹다보면 소주 한병을 까기 마련이고 소주를 까다 보면 육회를 시키기 마련이다. 등골 같은 특수부위는 너무 비싸 학생에게는 언감생심인 메뉴이고, 육회만은 그래도 먹을만하다. 한우를 잘게 썰어 간단한 양념만 하고 파도 없이 오로지 배 위에만 깔어 한접시 내오는 육회는 처음에는 그 적은 양에 놀라고 다음에는 그 맛에 놀란다. 아마 소고기 맛을 가장 잘 살리는 육회는 이집이 제일인 듯 하다. 겨울날 새벽에 해장하러 가서 소주 한 병 더하고 다시 추운 새벽 공기에 몸을 떨며 돌아오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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