雜/무료한 103-230

번뇌를 피하지 않기

同黎 2013. 11. 28. 12:32

번뇌를 피하지 않기


때는 1995년 3월 20일. 월요일. 기분 좋게 맑게 갠 이른 봄날 아침이었다. 바람이 아직 차가워서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모두가 외투 차림이었다. 바로 전날은 일요일, 그다음 날은 공휴일 - 즉, 징검다리 휴일 사이에 낀 평일이었다. 어쩌면 당신은 '오늘 하루는 쉬고 싶었는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당신은 휴가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당신은 평상시와 같은 시간에 눈을 뜨고, 세수를 하고, 아침을 먹고, 옷을 챙겨입고 역으로 향한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혼잡한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사로 향한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아침이었다. 인생 가운데 구별할 수 없는 단 하루였을 뿐이다.


가발을 쓰고 가짜 수염을 붙인 다섯 명의 젊은 남자들이 갈개로 뾰족하게 갈아둔 우산 꼬챙이로 기묘한 액체가 든 그 비닐봉지를 찌르기 전까지는.


                                                                                                                                      - 무라카미 하루키, <언더그라운드> 中


1995년 3월 연휴 사이에 낀 월요일 아침 도쿄 지하철에서 12명이 죽었다. 교주 아사하라 쇼코의 명령을 받은 옴진리교 신자들은 지하철 안에서 사린가스가 든 비닐동지를 날카롭게 간 우산 끝으로 터트려 12명을 죽이고 5천여명을 중독시켰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후에 이 날의 피해자들과 (어쩌면 또 다른 피해자일 수도 있는) 가해자들을 인터뷰하고 이들을 이야기를 모아 책으로 냈다. 그것이 바로 <언더그라운드>와 <언더그라운드2: 약속된 장소에서>이다. <언더그라운드>를 읽는 과정은 괴로웠다. 피해자들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 집을 나섰다. 연휴 사이에 낀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지만 출근한 사람도 있고, 평소보다 조금 일찍, 혹은 조금 늦게 길은 나선 사람도 있었다. 자신의 직업윤리에 충실하다가 죽은 역무원도 있었다. 그런 갑작스럽고 허무한 죽음의 기록을 읽는 것은 정말 괴로운 과정이었다.


그에 비해 <언더그라운드2: 약속된 장소에서> 읽기는 좀 더 새로웠다. 도쿄 지하철 사린가스 테러사건 이후 옴진리교는 해체되었고 교주와 주요 간부는 거의 구속되었고 그 중 13명은 사형 판결을 받았다. 그러나 옴진리교는 여전히 일본에 살아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가해자'들은 일부는 아직도 교주를 신격화 하며 지하에서 신앙을 이어가고, 일부는 교주는 부정하지만 교의는 문제가 없다는 생각하고, 일부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있다. <언더그라운드>의 후속작인 <언더그라운드2: 약속된 장소에서>은 옴진리교는 왜 나타났으며 테러 사건은 왜 일어났고, 또 왜 그들은 아직도 남아 있는지 그 복잡한 사정을 파헤치기 위한 작업이었다.


<언더그라운드2>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한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들은 이 세상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는게 너무 괴롭다.' 이 것이 그/녀들을 삶을 사로잡고 있던 상념이었다.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이들은 옴진리교를 만나게 된다. 겉으로 요가를 중심으로 한 평범한 수행단체를 표방했던 옴진리교는 먼저 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세상에서 격리되었다고 느껴지는 공동체와 (물리적) 장소를 제공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완전히 번뇌와 고통을 없애주고 완전한 행복을 줄 것을 약속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세속과 분리되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거기에는 비밀스러운 지혜를 특별히 전해준다는 일종의 선민의식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말도 안되게 비싼 입회비와 각각의 단계에서 내야 지불해야 하는 돈도 결국 이 선민의식을 더욱 강화시키는 도구로 작동했을 뿐이다. 


옴진리교는 놀랍도록 세속에 부정적이다. 세속의로부터의 분리주의와 자신만이 진정한 지혜를 안다는 선민의식이 합쳐지면서 놀라운 결과를 탄생시켰다. 설령 사람을 죽여도 죽임을 당한 자는 고통스러운 세속에서 벗어나 더 좋은 후생을 살게 된다. 그러므로 사람을 죽인 나도 죄가 없으며 오히려 저 사람을 단한계 위로 올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이런 논리의 성립은 경악스러운 테러사건을 실제로 실행되도록 만들었다. 사린가스를 살포한 5명의 실행범들은 죄책감과 공포를 느끼면서도 이를 수행의 한 과정으로 받아들였다. 


사건이 일어난지 10년 가까지 되었지만 아직도 옴진리교는 살아남아 있다. 많은 과거의 신도들이 교주는 비난하면서도 그 교의는 그대로 지키려고 한다. 아직도 옴진리교의 교의가 세속의 번뇌로부터 자신을 구해주고 진정한 행복과 깨달음으로 인도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스스로의 문제를 정면으로 직시하지 못하고 뭔가 다른 길이 있을것이라도 도피하는 것의 연속일 뿐이다. 문제를 해결하려기 보다는 보이지 않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유토피아를 상정하고 현실을 외면한 체 허상을 쫓는 것이 옴진리교를 지금까지 있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물론 왜 이들이 현실을 외면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국가와 사회는 할 말이 없다. 문제를 직시하기엔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일본뿐만 아니라 한국에도 옴진리교가 다시 나타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두 사회는 최근 너무나 닮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에게 주어진 문제를 직시하 수 있다면 이 것을 해결하기 위한 다른 길을 찾을 수도 있다. 번뇌를 외면한 체 나만의 선민의식에 빠져 환상의 길로 가는가? 아니면 번뇌를 직시하고 다른 이들과의 공동점을 찾아 집단적 해결의 길로 가는가? 이 두 가지 길의 시작점을 동일하지만 그 끝은 너무나 다르다.


김수영은 <긍지의 날>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리하여 / 피로도 내가 만드는 것 / 긍지도 내가 만드는 것 / 그러할 때면은 나의 몸은 항상 / 한치를 더 자라는 꽃이 아니더냐" 결국 모든 피로와 긍지는 내가 만들어내는 것이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상황에 처해있으면서도 그것을 피하지 말자. 내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라도 그것을 외면해도, 직시해도 결과는 똑같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자신에 삶에 느끼는 긍지는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번뇌는 이기는 최고의 지혜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기대지 않고 번뇌를 직시할 수 있는 지혜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