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을해정식자료 1

同黎 2014. 7. 30. 00:57
비변사등록 숙종 21년 7월 24일 

또 아뢰기를
"신양(申懹)이 강원감사로 있을 때에 궁가(宮家)의 절수(折受)에 대하여 사계(査啓)하였으나 그때에는 제도의 순무사로 하여금 이 폐단을 상세히 살피고 오라고 하였기 때문에 순무사의 복명을 기다려서 회계하려고 하였는데 연이어 일이 있어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신이 제도의 감사와 순무사의 장계를 보니 난처한 사단이 많았습니다. 경상감사의 장계에는 백성들이 비록 문권(文券)이 있다고 말하나 믿을 수 없으니 차라리 절수의 연한을 정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시행하지 못할 바가 있으니 연한이 차기 전에는 아무리 분명히 주인이 있는 땅이라 하더라도 내줄 수 없고 연한이 지난 뒤에는 의당 절수할 땅이라 하더라도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이는 공사간에 양편(兩便)의 도리가 아닙니다. 전라도순무사는 감사가 이미 장계하였다 하고 계문(啓聞)하지 않았는 바 감사의 장계에는 소견은 말하지 않고 각 읍의 보고 문안만 옮겨 썼는데 문권이 있는 전답이 몇 결(結), 문권이 없는 전답이 몇 결이라는 식으로 보고하였으나 그 이른바 문권의 허실도 따져보지 않고 성책만 올려보낸 것입니다. 나라에서 백성의 원성을 염려하여 기왕 외방으로 하여금 사계하게 하였고 백성의 바램은 바야흐로 절실한데 만약 백문(白文)이라 해서 믿을 수 없다 하고 인정해 주지 않는다면 민정은 반드시 낙심할 것이고 만일 모두를 내주면 궁가에서 절수할 곳이 없을 것이니 이 점이 매우 난처합니다. 궁가에서 절수하는 일이 얼마나 미세한 일인데도 군신(群臣)이 매양 이 일로 진달한 것은 민폐와 연관이 있고 성덕에 누를 끼치게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성상께서도 원대한 사려를 가지시고 반드시 백성들로 하여금 호원하는 일이 없도록 힘쓰셔야 하기 때문에 이에 감히 소회를 다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신이 전후의 문서를 상고하여 보니 병인년 (숙종 12년 (1686)) 에 숙의방(淑儀房)에 전답 2백 결을 전례대로 떼어주라고 전교하셨고, 갑술년 (숙종 20년 (1694)) 에 양방(兩房)에 전답 2백 결을 전례대로 떼어주라고 명을 내리셨습니다. 이로 보면 2백 결을 절수하는 것이 규정인 것 같은데 신이 해조의 각 궁가에서 절수한 결수를 상고해 보니 명례(明禮)·어의(於義)·수진(壽進)·용동(龍洞)의 4궁가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밖에 여러 궁가에서 절수한 것이 혹은 7천여 결에 이르기도 하고 혹은 5천여 결, 혹은 4백여 결에 이르기도 하여 규정보다 초과한 것이 이처럼 많으니 어찌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사체로 말하면 상한인 2백 결 이상은 모두 혁파하여야 마땅하오나 그 중에는 오래 묵은 땅도 필시 섞여 있을 것이므로 실결수를 정확히 알 수 없고 한편 생각해 보면 일시에 삭감하면 궁가에서도 모양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 만일 2백 결 이외는 면세를 인정해 주지 않기로 하면 좋을 듯하나 소민(小民)의 경작자가 관세(官稅)를 내고 있는데다 또 궁세(宮稅)까지 내게 한다면 이는 첩역(疊役)이 되니 민원이 더 심하게 될 것입니다. 모든 사정을 잘 고려해야 되겠으나 연한을 정할 수도 없고 문권에 따를 수도 없으며 또 2백 결 이상은 혁파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면세를 인정해 주지 않을 수도 없어 난처한 사단이 이와 같이 많기에 감히 앙품하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궁가의 절수가 한도가 있으나 옛 궁가의 경우를 보면 매양 한도를 초과하여 여러 천 결에 이르고 있는데 대체로 묵은 곳이 많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지금 만일 2백 결로 확정한다면 궁가에서는 필시 모양을 이루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좌의정이 아뢰기를
"신도 형편이 이러한 줄을 알기 때문에 2백 결로 확정하자고 감히 청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문권을 믿을 수가 없다고 하니 그 지세만 받도록 하면 어떻겠는가."
하였다. 좌의정이 아뢰기를
"2백 결 이상은 면세를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좋을 듯하나 백성이 첩역을 하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하기를 청하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2백 결의 한도 이외는 모두 혁파한다면 궁가에서는 모양을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옛말에 이르기를 '공부(公賦)로 상사(賞賜)하면 매우 족하다.' 하였고, 또 『대학(大學)』에도 '임금이 인(仁)을 좋아하면 부고(府庫)의 재물이 잘못 쓰여짐이 없다.' 하였습니다. 만일 나라에서 쌀·베·은화를 참작하여 지급하고 당해 궁가로 하여금 장토(庄土)를 직접 장만하여 모양을 이루게 하면 공사간에 양편할 것 같으나 오늘은 책임있는 신하들이 많이 입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로 청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다른 대신과 여러 신하들 소견은 어떠한가?"
하였다. 우의정 신익상이 아뢰기를
"문권도 믿을 수 없고 연한도 정할 수 없으니 한정한 2백 결 이외에는 모조리 혁파하고 나라에서 은화를 적당히 지급하여 부족분을 보충하게 하며 한편 지급한 2백 결은 반드시 실결(實結)로 채워 주고 이 밖에는 절대로 절수하지 못하게 하면 매우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좌의정은 아뢰기를
"2백 결의 한정 이외는 유사로 하여금 밑천을 알맞게 지급하게 하여 당해 궁가로 하여금 장토를 직접 장만하게 하되 장토를 장만하기 전에는 연한을 정하여 공부(公賦)로 하사하면 공사간에 두루 편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2백 결은 실결로 떼어줄 것인가?"
하니, 형조판서 민진장(閔鎭長)이 아뢰기를
"자기 소원대로 좋은 곳을 가리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이르기를
"좌상의 말이 좋기는 하나 백성들의 문권이 있는 곳은 어떻게 할것인가."
하니, 좌의정이 아뢰기를
"만일 신의 말을 이행하신다면 문권의 있고 없고를 논할 것이 없습니다. 수진(壽進)·명례(明禮)·어의(於義)·용동(龍洞) 4궁은 사체가 다른 궁가와는 달라 일찍이 따로 판부(判付)가 계셨습니다. 이 4궁과 명선(明善)·명혜(明惠) 양 공주방은 무진년으로 한정하였으니 무진년 이전에 절수한 곳은 그대로 두고 무진년 이후에 절수한 곳은 모두 혁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신익상도 아뢰기를
"4궁과 명선·명혜 양 공주방에서 절수한 곳을 당초에 대신의 진달로 인하여 무진년으로 한정하게 된 것이나 그때의 군신들은 모두 흠앙하였는데 그 후에 다시 성명(成命)을 바꿔 내리셨으니 어찌 성덕에 흠이 되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임금께서 기왕 민정을 진념하셔 이렇듯 전고에 없는 일이 있게 되었는만큼 모름지기 대단한 변통이 있어야만 민정에 부응하게 될터이니 무진년에 결정한대로 그 후에 절수한 것은 모두 혁파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6궁의 무진년 이전에 절수한 곳은 그대로 두고 무진년 이후에 절수한 곳은 혁파하며, 이 뒤로는 영영 절수하지 못하도록 분부하고 이 밖에 3궁도 대신이 진달한대로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좌의정이 아뢰기를
"각 궁가에 분부하여 소원대로 정하게 하되 호조판서의 출사를 기다려 다시 품정하여 밑천을 지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하사(下賜)하는 것은 절수 속에 들지 않았는가?"
하였다. 좌의정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밑천을 주는 일은 추후 결정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좌의정이 아뢰기를
"이제 이렇게 결정하였으니 각 도의 장계에는 회계할 일이 없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그렇다고 하였다.

又所啓, 申懹, 爲江原監司時, 以宮家折受事査啓, 其時令諸道巡撫使, 詳察此弊以來, 故欲待巡撫使復命後回啓, 而連有事故, 未果矣, 臣取見諸道監司及巡撫使狀啓, 則多有難處之端, 慶尙監司狀啓則以爲民人輩, 雖稱有文券, 而有不可取信, 無寧定其折受之年限云, 而此亦有不可行者, 年限未滿之前則雖是分明有主之地, 不得出給, 年限旣過之後則雖是當折受之地, 亦不得仍存, 此非於公於私兩便之道, 全羅道巡撫使則以監司, 已有狀啓, 不爲啓間, 監司狀啓則不陳所見, 只謄各邑報狀, 而曰, 有文券田畓幾結, 無文券田畓幾結, 其所謂文券, 亦不辨其虛實而, 成冊上送, 朝家爲軫民冤, 旣令外方査啓, 民間顒望方切, 而若以白文不可信, 不許聽施, 則民情, 必皆落莫, 若盡爲出給, 則宮家無折受之處, 此甚難處矣, 宮家折受, 何等微事, 而群下每以此仰達者, 蓋以關係民弊, 貽累聖德, 不得不爾也, 聖上, 亦宜務存長慮, 必使下民, 無呼冤之弊, 故玆敢畢陳所懷, 臣取見前後文書, 則丙寅年淑儀房田畓二百結, 依例劃給事傳敎, 甲戌年兩房田畓各二百結, 依前例劃給事, 命下, 以此觀之, 則二百結折受, 似是定式, 而臣取考該曹諸宮家折受結數, 則明禮·於義·壽進·龍洞四宮則姑舍勿論, 此外諸宮折受者, 或至七千餘結, 或至五千餘結, 或至四百餘結, 其過於定式, 若是之多, 則豈非未安者乎, 以事體言之, 則定限二百結外, 盡爲革罷爲宜, 而其中陳久之地, 亦必參錯, 不能的知其實結之數, 且念一朝減削, 則宮家, 亦無以成樣, 今若於二百結外, 勿許免稅, 則似好, 而小民耕作者旣納官稅, 又納宮稅, 則是爲置役, 民怨, 必將滋甚, 凡事情, 在所顧慮, 旣不可定其年限, 又不可從其文券, 又不可二百結外盡罷, 又不可不許免稅, 難處之端, 如此, 故敢此仰稟矣, 上曰, 宮家折受有定限, 而以舊宮家觀之, 則每過其限, 或至累千結, 槪陳荒處多, 故如此矣, 今若劃定二百結, 則宮家必無以成樣矣, 左議政曰, 臣亦知事勢如此, 故不敢以劃定二百結爲請矣, 上曰, 文券, 亦不可取倍, 只令收其地稅則如何左議政曰, 二百結外, 勿許免稅, 則似好, 而民將疊役, 故不敢以此爲請, 今若於二百結定限之外, 盡爲革罷, 則宮家, 將無以成樣, 古語曰, 以公賦稅賞賜之, 則甚足, 傳曰, 未有府庫財非其財者也, 若自朝家量給米布·銀貨, 使該宮, 自備庄土, 使得以成樣, 則公私兩便, 而今日有司諸臣, 多不入侍, 故不敢直請矣, 上曰, 他大臣及諸臣所見何如, 右議政申曰, 文券, 旣不可信, 年限, 亦不可定, 今若定限二百結外, 一倂革罷, 朝家, 量給銀貨, 補其不足, 且其所給二百結, 則必以實結充給, 此外切勿許折受, 則事甚便當矣, 左議政曰, 二百結定限之外, 令有司量給價物, 使該宮, 自備庄土, 未備之前, 限年賜以公賦稅, 則公私俱便矣, 上曰, 二百結則以實結劃給乎, 刑曹判書閔鎭長曰, 擇其好處, 使之自望好矣, 上曰, 左相所達似好, 而民人等有文券處, 則何以處之耶, 左議政曰, 若行臣言, 則文卷有無, 在所不論也, 壽進·明禮·於義·龍洞四宮則事體異於他宮, 曾有別判付矣, 此四宮及明善·明惠兩房則以戊辰年爲限, 戊辰以前折受處則仍存, 戊辰以後折受處則盡爲革罷, 何如, 右議政申曰, 四宮及明善·明惠兩房折受處, 初因大臣陳白, 以戊辰爲限定式, 其時群下, 莫不欽仰, 則厥後政有成命, 豈不爲有損於聖德乎, 自上旣軫民隱, 有此無前之擧, 必須大段變通而後, 方副民情, 一依戊辰定奪, 其後折受, 盡爲革罷, 乃可也, 上曰, 六宮戊辰以前折受處則仍存, 戊辰以後折受處則革罷, 此後永勿折受事分付, 此外三宮, 亦依大臣所達, 施行可也, 左議政曰, 分付各宮, 使之依願自望, 待戶判出仕, 更爲稟定, 量給價物, 何如, 上曰, 賜與則不入於折受之中耶, 左議政曰, 然矣, 上曰, 給價事, 追後定奪, 可也, 左議政曰, 今旣以此定奪, 則各道狀啓, 亦無回啓之事矣, 上曰, 然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