史/조선

을해정식자료 2

同黎 2014. 7. 30. 00:58
숙종실록 21년 7월 28일 무자

호조 판서(戶曹判書) 이세화(李世華)가 상소하여 연사(年事)가 크게 흉년든 상황을 진달하여 말하기를,
“원컨대, 성상(聖上)께서는 부지런하시고 주심하사 자주 신료(臣僚)를 접하시어 그 듣고 본 것을 하순(下詢)하시고, 전주(田疇)의 경색(景色)과 여항(閭巷)의 질고(疾苦)를 모두 마음속에 간직하여 부화(浮華)를 물리치고 절약(節約)에 힘쓰시며, 무릇 민생(民生)을 증구(拯救)하고 국맥(國脈)을 부지(扶持)하는 도리를 다하지 않음이 없이 해야 합니다. 또 궁가(宮家)의 절수(折受)가 오늘날의 막대한 폐단이 되는데, 전번에 대신이 탑전(榻前)에 진달하여서, 허다한 처리하기 어려운 일들이 이미 한결같이 타당(妥當)한 방법으로 돌아갔으니, 신은 그윽이 기쁘고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새로운 궁가의 2백 결의 선택(選擇) 및 전토(田土)를 매득(買得)할 때에 두 건(件)의 곡절(曲折)이 있으니, 십실(十室)의 쇠잔한 고을은 땅이 좁고 백성이 적어서 모양을 이루지 못한 곳이니, 비록 절수에 합당한 땅이 있더라도 결코 획급(劃給)하지 말고 그대로 본현(本縣)에 속하게 하며, 그 큰 고을에 나아가 스스로 선택함을 허락하되 스스로 선택할 때에 또한 본관(本官)으로 하여금 안동(眼同)하여 답심(踏審)하고 명백하게 구획 처리하여서 일후(日後)에 모순된 폐단이 없게 하며, 그 나머지 땅은 규례(規例)에 의하여 조세(租稅)를 거두어 해조(該曹)에 상송(上送)하여 새 궁가의 부족에 보충(補充)하는 자료로 삼는 것이니, 이것이 그 첫째입니다. 그 둘째는 말세(末世)의 간사한 백성이 하지 못하는 짓이 없어서, 무릇 전토(田土)에 대하여 무리(無理)하게 송사를 일으켰다가 사리(事理)가 굽어 장차 패소(敗訴)하게 되면 문권(文券)을 거짓으로 만들어 궁가(宮家)에 방매(放賣)하여 원고(原告)에게 피해를 입히는 자가 전후(前後)에 그득합니다. 그런즉 먼저 이 사이의 간상(奸狀)을 분변(分辨)하여 본주(本主)를 밝게 알아서 매득(買得)한 연후에야 백성으로 더불어 쟁송(爭訟)하는 단서가 없어질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의논하여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 다만 옛 궁가 중에 ‘어의(於義)’한 궁가는 무진년(숙종 14)이전의 절수한 곳이 심히 적어 불가불 결수(結數)를 작정(酌定)해 주어야 하는데 혁파되었으니, 또한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라.”


戶曹判書李世華上疏, 陳年事大侵之狀曰:
願聖明憂勤惕慮, 頻接臣僚, 下詢其所聞見, 田疇景色, 閭巷疾苦, 無不領會於聖算中, 斥還浮華, 務存節省, 凡所以拯救民生, 扶持國脈之道, 靡所不用其極。 且宮家折受, 爲今日莫大之弊, 頃日大臣陳於榻前, 許多難處之事, 旣已歸一停當, 臣竊喜幸也。 新宮二百結擇執及田土買得之際, 有兩件曲折, 十室殘邑, 地狹民少, 不成形樣之處, 雖有可合折受之地, 切勿劃給, 仍屬本縣, 就其大邑, 許令自擇, 而自擇之際, 亦令本官, 眼同踏審, 明白區處, 俾無日後矛盾之弊, 以其餘地, 依例收稅, 上送該曹, 以爲添送新宮不足之資, 此其一也。 其二則末世奸民無所不爲, 凡干田土, 非理起訟, 理曲將屈, 則僞作文券, 放賣於宮家, 以爲侵困訟隻之計者, 前後滔滔。 先辨此間奸狀, 明知本主而買得然後, 可無與民爭詰之端。
上答曰: “可以議處事, 令廟堂稟處。 第舊宮中, 於義一宮, 戊辰以前折受之處甚尠, 不可不酌定結數而革罷, 亦令廟堂稟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