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동 노포(老鋪)2 - 사라진 곳
가인
언제나 3차는 가인이었다. 이층으로 올라가는 그 가파른 계단은 술먹고 구르면 군면제를 받을 수 있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렇게 기어올라가면 어두컴컴한 조명에 늘 김광석의 노래가 흘러나오던 가인이 있었다. 언제나 젊게 사시는 누님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항상 그랬듯이 누가 정하지도 않았지만 삼천에 화채를 시켰다. 좀 돈이 많은 날은 아무거나를 시키기도 하였다. 심지어 양주라도 얻은 날이면 그것을 그대로 들고가서 얼음이랑 안주만 시켜도 누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인은 새벽 2시가 넘어서 가야 제맛이었다. 2차 쯤 해서 모두 정신이 오락가락 할 때 지금 생각하면 물을 탄 것 같던 맥주를 들이키며 김광석의 노래를 흘엉거리다가 이등병의 편지라도 나오는 날이면 남자들은 모두 합창을 했다. 세미나 뒤풀이도, 군입대 환송회도, 선거 뒤풀이도, 데모 끝 뒤풀이도 항상 가인에서 했다. 하도 많이 가는 곳이라 언제나 누군가가 거기에 있었다. 때로는 운동 선배가 때로는 상대 선본의 요인(?)들이 버티고 있었지만 상관하지 않고 들어가던 곳이 가인이었다. 돈 없을 땐 스스럼 없이 외상을 요청할 수 있는 곳도 가인이었다.
가인 누님이 돈을 벌어 피지로 이민가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을때만 해도 가인이 사라진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가인이 정말 사라졌을 때 아 진짜 나의 시대는 끝났구나라는 것이 실감났다. 가인이 사라지고 한동안 새벽에 3차를 갈 곳이 없어 입맛을 다셨다. 제기시장에서 소주를 먹으면 입가심을 늘 가인에서 했는데 이젠 갈 곳이 사라졌다. 그동안 전집이 되었다가 다시 닭집이 되었더라. 술먹고 늘 긴장하며 다니던 계단만은 여전한데... 누님이 되돌아와 다시 가인을 차리기를 기대하기도 하지만 이제 가인에 죽치던 사람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가인에 대한 추억이 없는 12학번이 4학년이 되는 시점에 예전의 그 사람들이 만들던 가인의 분위기가 재현될 수 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학사호프
단연코 학사는 가인과 쌍벽을 이루는 호프집이었다. 위치도 바로 옆이었고 드나드는 사람들의 성향도 같았다. 뭔가를 그리워하는 나이든 사람들과 시대의 화려한 중심에선 어딘가 비켜나가 있는 듯한 고학번들이 언제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불쑥 들어갔다가 그 애매한 방이라 하지만 사실 누가 있는지 다 보이는 안쪽 방에 아는 사람이 있는 걸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여러번이었다.
가인이 90년대 초반의 분위기라면 학사는 80년대였다. 나중에 사장님이 바뀌고 깔끔하게 리모델링이 되기도 했지만 80년대 분위기를 여전했다. 아마 찾는 손님들의 연령층도 가인보다는 학사가 조금 더 높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메뉴랄 것도 별로 없었으나 주로 쥐포 튀김에 맥주였다. 1층에 위치하였고, 제기시장으로 오고가는 골목 초입에 있다는 지정학적 유리점 덕분에 많은 사람들이 학사 안으로 끌려들어와 예정에 없던 술자리를 하곤 했다. 참 그때는 약속도 없이 술을 잘도 먹었다.
가인이 사라지고 한동안 학사로의 발걸음이 이어졌으나 곧 학사마저 소리소문없이 사라지면서 제기골에서의 막걸리, 제기시장에서의 소주, 가인-학사에서의 맥주로 이어지던 코스는 막을 내렸다. 이 코스는 하룻밤을 든든하게 책임져주곤 했는데, 아마 학사마저 없어지면서 모르긴 몰라도 제기시장의 매출도 조금을 줄었을 것이다. 맛도 없고 맥주도 의심스럽지만 그래도 사람맛에 다니던 학사는 이제 빅마트에 점령당해 흔적도 남지 않았다.
풍년집
풍년집은 정말 오래된 집이었다. 한국전쟁 이후 생겼다고도 하고 강만길 선생님도 학생증을 맡기고 술을 마셨다고도 했다. 사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무척 오래된 집이라는 건 분명했다. 집 자체가 풍기는 분위기가 증명했다. 고모집, 나그네파전, 이모집 등등으로 이루어진 고대 앞 파전 골목의 중심 같은 곳이었다.수시에 합격하고 처음 선배들을 만나던 날 선배들이 데려간 집이 풍년집이었다. 새터를 다녀오고 그 뒤풀이를 한 곳도 풍년집이었다. 심지어 2차는 가인이었다. 처음에는 도대체 왜 이런데 오는가 했지만 파전을 먹으면 그런 의문은 이내 사라졌다.
풍년집 최고의 메뉴는 파전이었다. 파전을 주문하면 전 부치는 연기가 천정을 가득 매웠다. 그 기름먹은 두꺼운 파전은 나그네파전의 것보다 해물은 적었지만 그래도 일품이었다. 파에 오징어가 들어가고 고기 간 적을 넣어서 네사람이 파전 한판이면 충분했다. 비가 오면 파전에 막걸리가 간절했고, 파전이 다 되면 고추튀김으로 이어졌다. 고갈비도 참 맛있었다. 점심시간에 밥대신 막걸리를 마시면서 수업을 째고 막걸리에 취해 꽈실에 드러누어 있던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더운 여름날 에어컨도 없고 파리가 유독 많던 그집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자주 다녔는지 모르겠다. 행사가 있는 날이면 풍년집 문 밖에는 담패 피는 사람들 때문에 연기가 자욱하고 수채구멍에는 따로 파전 부치는 애들이 참 많았었다.
정말 10년 간 집처럼 다녔던 풍년집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한 사장님이 가게를 젊은 사람에게 판 이후로 가지 않게 되었다. 지저분한 가게가 깨끗해지고 에어컨도 들어왔지만 파전 맛은 완전히 변했다. 그 밀가루 덩어리를 만원이나 주고 먹으려는 사람은 사라졌고 자연히 가게를 찾는 이들도 줄었다. 사실 풍년집이라 찾아 가는 곳이었지 입지도 좋은 곳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풍년집은 사라지고 그 자리엔 맥주집이 들어서 있었다. 그 때의 충격은 참...
혹자는 풍년집이야 말고 90년대까지의 고대앞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마 이제 다시는 풍년집 같은 분위기의 술집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진정 추억의 장소로만 남았다.
안암꼬치
안암꼬치에 가는 날은 집에 들어가지 않기를 결의한 날이었다. 예전부터 노는데 필요한 것은 단 하나, 단호한 결의뿐이라고 하였다. 안암꼬치는 딱 그러기에 좋은 곳이었다. 술을 무한정 먹고 싶지만 돈이 없는 날에는 안주값 걱정 없는 안암꼬치를 가곤 했다. 간판에 써 있던 "선배들이 추천한 바로 그 집"이라는 문구를 항상 보면서 어느 선배놈이 추천했냐는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다.
안암꼬치는 술에 집중하기 최적은 장소였다. 벽은 정말 자취방 같은 깔끔한 흰색 벽지도 도배되어 있었다. 거기에 일렬로 앉아서 테이블 당 구이 하나만 시키면 그날 주문은 끝이었다. 가장 인기있던 메뉴는 삼치와 고등어 구이였다. 여기에 안암꼬치 특유의 달콤한 와사비 간장을 찍어 먹으면 소주가 술술 들어갔다. 안암꼬치가 소주 먹기 취적의 술집이었던 이유는 무한정 오뎅국이 리필되었기 때문이었다. 생선이 이미 떨어졌어도 오뎅국물은 무한이었고 처음에는 자신있게 국물 리필을 외치다가 점차 험악해지는 아줌마의 표정을 보면 나중에는 직접 그릇을 들고 아줌마에게 리필을 구걸하기도 했다.
술이 많이 들어갔기에 사고도 많이 나는 곳이 안암꼬치였다. 그러던 곳이 어느 날 갑자기 공사에 들어갔을 때 다들 설마설마 했다. 그리고 무슨 곱창집으로 바뀌었을 때 정말 황당했다. 아니 장사도 잘되는 곳이 왜... 뭐 아마 사장님이 하루를 멀다하고 이어지는 시비에 피곤하긴 했을 거다. 곱창집의 장사는 예전만 못하다. 역시 술집은 위치만으로도 메뉴만으로도 장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기억으로 장사를 하고 그 기억이 사라졌을 때 그걸 다시 쌓는 데는 오래 세월이 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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