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북경 답사 1차

북경여행기 - 2일 (북경 공묘)

同黎 2015. 8. 27. 17:11



옹화궁을 나와 길을 건너면 공묘와 국자감이 있는 길로 들어선다.


거리에 성현가라는 패방이 서 있다.


북경시 문물보호단위 국자감가라는 표석


우리로 치면 서울시 기념물 정도 될 것 같다.


나무가 무성한 국자감가


조금만 들어가면 북경 공묘 입구가 나온다.

입장료는 30위안. 국자감과 공통 관람이다.


선사문이라는 이 문은 공묘의 외삼문 역할을 한다.

좌우로 한, 만, 몽, 회, 장, 회홀의 6개 문자로 된 하마비가 있다는데 우리는 너무 지쳤는지 찾지 못했다.


공묘 안내판

북경의 공묘는 공자의 탄생지인 곡부의 공묘 다음으로 큰 공자의 사당이다. 본래 원나라 대도의

건설과 함께 세워졌다가 황폐화되고, 이후 명나라 영락제 때 북경으로 수도를 옮겼을 때 중수되었다.

청나라 시기 들어 다시 중수되었다가 건륭제 때 지금의 황유리 기와를 사용하면서 한껏 격이 높아졌다. 

중화민국 시기까지 공묘로써의 역할을 하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이후 수도박물관이 되었다.

그러나 수도박물관이 새로 건설되어 옮겨지면서 지금은 공묘로써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

불행히도 공묘와 국자감은 문화대혁명 시기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당시 구호 중 하나가 비공비림(非孔非林)인데, 여기서 임은 중국 혁명의 주역이지만 후에 쿠데타를 모의했다가 소련으로 망명 중 죽은 린뱌오(임표)이다. 그가 논어의 구절을 곧잘 사용했기 때문에 공자는 봉건 잔재의 대표 사상가로 공격받았고 공자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이 크게 훼손되었다. 지금이야 중국에서 공자 마케팅을 열심히 하지만 80년대까지만 해도 공자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경내 안내도


선사문을 들어서면 공자 동상과 대성문이 보인다.



다들 기념사진 


선사문을 들어서자마자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이 진사제명비이다.

명청시대 진사의 이름을 모두 적은 비석이다.


한국사에서의 진사는 생원과 함께 지방 향시를 통과한 비교적 낮은 지위의 관료예비군이지만

중국에서의 진사는 매우 다르다.

명청시대의 과거는 주부군현시를 통과한 생원→성 단위의 향시를 통과한 거인→수도에서 치뤄지는 회시를 통과한 공원→황제 앞에서 치뤄지는 전시를 통과한 진사로 이어지고 진사들이 바로 관직에 진출하여 관료가 되었다. 진사가 된다는 건 황제 앞에서 치뤄지는 시험을 통과했다는 것이다. 그 명예로운 이름들을 매 전시가 끝날 때마다 비석으로 세워 남겼던 것이다.


베트남의 후에에 갔을 때도 공묘 앞에 진사들의 명단이 적혀있던 것을 봤었는데

바로 이것을 모방했다는 것을 알았다.



안타깝게도 곳곳에 문혁 당시 썰렸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이것도 훼손이 꽤나 심하다.


진사제명비들은 이 정도까지


선사문-대성문-대성전으로 이어지는 길의 좌우에는 여러 개의 비정이 서 있다.


이러한 비정은 황제가 공묘를 찾아 참배하거나 공묘를 수리했을때마다 세운 것이다.

개중에는 옹정제와 건륭제가 정벌에 성공하고 새운 것도 있다고 한다.

비석의 형태가 꽤나 화려하다.


이것도 다른 비정


좌우에는 진사제명비가 가득 서 있다.


이제 다시 대성문으로 향한다.


대성문 앞에는 공자상이 서 있다.



대성문과 공자상 전경


대성문은 원래 원나라 때 세웠던 것으로 후에 청나라 때 보수한 것이라고 한다.

사실이라면 몇 안 남은 원나라의 유적이라는 것인데 확실한지는 모르겠다.


대성문 현판


옹화궁의 현판이 4가지 문자로 되어있던 것에 비해 대성문의 현판은 모두 한자로만 되어 있다.

원래 한자만 써 있던 것인지 민국시대에 교체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대성전 안팎의 경우 민국시대에 꽤 교체되었다고 한다.

중화민국이 처음에는 멸만흥한의 기치 아래 일어났으니 만주어 현판을 지우는 것도 당연하겠지.


대성문 앞에는 공자가호비가 서 있다.

공자에게 시호를 더한 것을 기념한다는 뜻이다.


원나라때 비석으로 원 무종이 공자에게 대성지성문선왕이라는 시호를 바칠 때 세웠다는 것이다.

대성지성문선왕이라는 칭호는 이후 가장 대중적으로 쓰였고 조선 대성전의 공자 위패도 이것으로 써 있다.

그러나 명청시대에는 주로 선사, 대선사 등의 명칭이 더 많이 쓰였던 것 같다.


안내판


계단에는 신이 오르는 길인 답도가 조각되어 있다.


계단석도 모두 궁궐에서 쓰는 한백옥이다.


대성문 안에는 24개의 창과 10개의 북, 그리고 종과 큰 북이 걸려 있다.

어떤 의미인지 정확히는 잘 모르겠다. 주나라 예제를 따른 것이리라.


내려오는 길에도 답도가 있다.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모습이다.



역시 한백옥으로 조각된 난간석


대성문을 들어오니 좌우로 여러 비정이 보인다.


마침내 보이는 대성전

노란 기와가 보인다. 본래 정면 7칸, 측면 3칸의 건물이었는데 청말 광서제 때 문묘에 올리는 제사를

가장 큰 제사인 대사로 올리면서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크게 중수하였다.

조선의 경우 문묘제사가 끝까지 중사였는데 청의 경우 말기에 대사로 올린 이유는 무엇일까?


대성전 앞

역시 답도가 길게 이어진다.


대성전이라는 명칭은 앞서 보았던 대성지성문선왕의 앞글자를 딴 것이다.



대성전 모습

만세사표라는 현판이 1층에 걸려있다. 2층에는 대성전이라는 현판이 보인다.


한국의 경우 성균관과 문묘가 완전히 일체된 모습을 보인다.

즉 서울 성균관은 앞에 제사기능을 하는 대성전이 있고 뒤에 강학기능을 하는 명륜당이 있다.

그런데 중국은 공묘와 국자감이 나란히 병렬적으로 있어 차이를 보인다.



대성전의 답도


이제 계단을 올라갔다.



기념사진


만세사표라는 현판이 잘 보인다.


공자의 위패가 모셔진 대성전 내부의 정면

맨 위의 도흡대동이라는 현판은 원래 걸렸던 청나라 황제들의 현판을 걷어내고

당시 중화민국의 대총통이었던 여원홍이 쓴 것이라고 한다.



현판의 모습

좌우의 현판은 청나라 황제가 바친 것이다.


위패가 모셔진 감실

수놓은 장식들이 화려하다.


지성선사공자신위라고 적혀 있다.

위패를 드러내놓고 있는 것도 문제지만 위패에 쓴 글이 격식에 맞는 것인지도 의문이다.


우편 천정의 현판들


공자의 신위 좌우에는 공자와 더불어 5성이라고 불리는 안자, 증자, 자사자, 맹자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우편의 위패들


좌편의 위패들


좌편의 현판들


앞에는 공묘에 올리는 제사인 석전제에 쓰이는 악기들이 진열되어 있다.

사진은 슬과 편경


특경


원래 가운데 위쪽에 내리치는 방망이 같은 게 있어야 하는데 안 보인다.



편경


특경과 대고


5성의 위패 말고 또 다른 이들의 위패도 모셔져 있다.

본래 5성의 위패 앞에는 공문십철이라고 불리는 10명의 제자들이 모셔져 있다.

조선의 대성전에는 특별히 송조6현이라 하여 성리학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6명의 위패를 더한다.

근데 좌우를 살펴 봐도 위패가 10개가 넘는다. 공문십철 외 몇 명이 더 모셔진 것 같다.


위패 앞의 양과 코끼리

정확히 뭔지는 모르겠으나, 조선의 경우 상준과 양준이라고 하여 양과 코끼리 모양의 그릇(도자기나 놋쇠로 만든)에 술을 담아 석전제 때 바친다. 아마 비슷한 역할이 아닐지...


여러 개의 위패 중 주자의 위패도 보인다.


공자의 제자들도 보이고...

모셔진 위패의 기준이 궁금하다.

또 대성전 좌우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77제자를 비롯해

중국 역대 성현들을 모셨다고 조선왕조실록에 써 있는데... 보이지 않는다.

 

대성전을 지나 뒤편으로 향한다.

공자 동상이 있는 마당이 나온다.


대성전의 뒷면이 보이고

 

이 마당에는 공자의 제자 그림들이 걸려있다.

사기의 중니제자열전에는 77명의 제자가 적혀있다.

나중에 실증을 통해 일부가 이름이 중복되어 있다는 사실도 밝혀졌고 또 사기에 적힌 제자라도 공자를 배신한 이들은 제외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여기서는 일단 사기의 77명을 기준으로 그려놓은 듯하다.


다른 그림들



공자상


마당을 지나 문을 지나면 숭성사와 함께 제례악을 제현하는 공간이 나온다.

숭성사는 공자의 선조를 제사지내는 건물로 건륭제 때 추가된 것이다.

조선에도 간혹 향교에 대성전 5성의 아버지를 모시는 계성사라는 건물이 있는데 비슷한 용도로 보인다.



숭성사 좌우의 건물들

정확히 원래의 용도는 모르겠고 현재는 악공들의 대기나 연습장소로 쓰이는 듯하다.

공연 시간이 정해져 있는데 그냥 지났다.


관람석


이제 다시 대성전을 돌아 나오면


건륭석경을 전시하는 곳이 보인다.


뜻이 보이지 않는다.


건륭석경은 유교의 경전인 십삼경(시경, 서경, 주역, 예기, 의례, 주례, 춘추좌씨전, 춘추곡량전, 춘추공양전, 논어, 맹자, 효경, 이아)을 새긴 것이다. 이렇게 경전을 돌에 새기는 전통은 한나라 때부터 시작된 것이데, 뭐든지 뽐내기 좋아했고 사고전서를 만들며 도통의 후계자를 자부했던 건륭제가 이런 미친 짓도 했다.

 

거의 백 미터 넘는 길이로 비석들이 전시되어 있다.


셀카


건륭제가 직접 쓴 대학

대학은 주자가 예기의 일부분을 때어내고 거기서 임의로

일부 내용을 자기가 추가해서(격물치지장) 4서의 일부로 만든 것이다.

13경에는 끼지 않으나 중요한 텍스트이기 때문에 특별히 황제가 직접 쓴 듯하다.


쭉 걸어가며 구경하는 듯



황제의 친필

공은 하도낙서에 있다는 뜻

하도낙서는 주역의 원류쯤 되는 이야기이다.


사진 찍는 중


도장도 새겨놓았다.


중간에는 공자 제자들의 상도 있다.

이것은 자로의 상


공자보다 나이도 많고 성질이 급했다는 자로

그가 죽고나서 공자는 젓갈을 먹지 않았다고 하다.


공자의 수제자인 안연의 상


십상경에도 문혁의 상처가 남아있다.




중간중간 다른 비석도 보인다.


쇠로 껴 맞춘 비석도 일부 보인다.

영광과 상처가 공존하는 모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