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일본 여행기 11차 東京

東京紀行 - 4일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1

同黎 2018. 4. 5. 23:35



4일째 아침. 드디어 야스쿠니로 간다.


너무 더워서 택시를 탔다.


밖으로 보이는 도쿄 풍경


쿠단시타 도착


드디어 야스쿠니신사의 참배로 입구에 섰다.


곧 창립 150주년을 맞이한다는 안내판


경내 안내도

일본어와 영어로만 되어 있다.


우익단체도 반우익단체도 많기 때문에 근처에는 특히 정치활동을 금지하는 안내판이 서 있다.


거대한 도리이


표석

메이지천황이 내린 표석이다.


야스쿠니신사(靖国神社, 정국신사)는 본래 교토에 있는 교토료젠고코쿠신사(교토호국신사)를 원조로 한다. 메이지유신과 무진전쟁을 거치면서 이 때 죽은 이들에 대한 신사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1862년 교토료젠신사가 먼저 생겼고 1868년에도 에도성 니시노마루 어전에서 초혼제가 열렸다. 이후 곳곳에 초혼사라는 이름의 신사가 생긴다. 이 때 생긴 초혼사들이 이후 도도부현별로 하나씩 생기는 호국신사들이다. 도쿄에도 1869년 도쿄초혼사이라는 이름으로 무진전쟁 전몰자를 모신 신사를 세우게 된다. 처음부터 도쿄초혼사는 다른 신사와 다르게 군에서 직접 관할하였으며 1879년 특별히 관폐대사로 승격되면서 지금의 야스쿠니신사(정국신사)라는 이름을 메이지천황이 하사했다. 관폐사들은 내무성이 총괄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나 야스쿠니만은 육군성과 해군성이 공동 관리했다. 특히 육군성이 주도했다고 한다. 이후 각종 전쟁이나 사건으로 죽은 이들이 합사되었는데 태평양전쟁 합사자만 213만명이 넘는다. 1939년에는 가톨릭 대학인 소치대학 학생들이 신사참배를 거부했으나 오히려 교황청은 일본의 신사참배는 국가에 대한 충성 맹세와 조상 숭배의 전통이라며 신사참배를 허용한다. 이후 전후에도 일본 가톨릭은 큰 오점을 남긴다.


이 대도리이는 1921년 세워졌으며 당시에 최고로 큰 도리이였으나 1943년 풍우에 의한 손상으로(혹은 공출일 수도 있다) 철거되었다. 현재의 도리이는 1974년 재건한 것으로 높이는 25미터에 이른다.


들어간다


전후 미군정은 야스쿠니신사, 메이지신궁, 노기신사를 철거하고 경견(개달리기)장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이후 철회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당시 소치대학 학장과 교황대사 등 일본 가톨릭 신부들을 동원해 맥아더를 설득하여 전사자를 위한 시설로서 야스쿠니를 유지시키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지목된 신부들은 소치대학 학장인 적도 없고, 군정기 일본제국에 교황대사도 없었기 때문에 이 설은 보통 부정된다.

통설은 맥아더가 국무부의 지령에 따라 (일본에 그나마 세력이 있는 기독교인) 가톨릭 신부들과 상의를 하였을 뿐이며 이들 신사를 없애는 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올 것 같다는 GHQ의 자체적인 판단이 있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2007년 일본 가톨릭주교단은 당시 교황령은 신사참배라는 일본 전통을 존중한 것이었지만 결국 전쟁에 대한 협조로 변질되었다며 자성의 메세지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후 전후 헌법에 정교분리가 명시되면서 야스쿠니신사 역시 독립된 종교 법인이 되었다. 이전에는 천황과 정부의 대규모 봉헌과 군의 지원으로 유지됐지만 이제는 아니게 되었다. 이후 전몰자유족회와 야스쿠니 숭경봉찬회의 후원을 통해 유지되었으나 현재는 회원이 줄어 구조조정까지 해서 직원을 내보냈다고 한다. 신사본청에는 소속되지 않은 단립신사인데 이유가 대단하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을 수호하는 신사이며 언젠가는 천황 혹은 국가에 되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감히 신사본청에 속할 수 없다는 것. 실제로는 신사본청이 야스쿠니숭경봉찬회의 회원이기도 하고 둘 사이에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어쨌든 운영상의 문제든 이념적 문제든 야스쿠니신사와 우익들은 야스쿠니신사를 국가 관리로 전환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교분리 때문에 불가능하다면 야스쿠니를 종교법인이 아니라 제사법인(우리로 치면 추모법인)이나 전몰자 위령기관으로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인의 참배 자체도 정교분리 위법 시비가 있는 마당에 국가관리화까지는 아마 힘들 것이다.


야스쿠니 신사를 상징하는 것 중 하나인 오무라 마스지로의 동상


조슈번 출신으로 일본 군사근대화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동상이 세워진 이유는 야스쿠니의 전신인 도쿄초혼사를 세운 주역이기 때문이다. 그가 훈련시킨 병사들이 무진전쟁 때 활약해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켰다.


이 동상은 1893년 세워진 일본 최초의 서양식 동상이며,

동상 좌대에 있는 현창문은 태정대신과 총리대신 대리까지 맡았던 산조 사네토미의 글이다.


크다


안내문


들어온 길

매우 길다


옆에 있는 석조 도리이

1932년에 세운 도리이이다.


동상을 지난다.


멀리 보이는 두 번째 도리이


여기서 길을 건넌다.


석등 크기 봐라


이 청동 도리이는 1887년 만든 도리이이다.

청동으로 된 도리이 중에서는 제일 크다고 한다.


거대한 석등 아래에는


청일전쟁 등 각종 전쟁사가 조각되어 있다.


반대쪽 석등


이것도 엄청 크다.

이 모습이 전전 오십전권 지폐 모델이 되기도 했다.


150주년 안내판

여기도 조명쇼는 하는구나


한쪽의 테미즈야


안내판

궁내청의 천황릉이나 황족묘 안내판과 똑같다.


신문


1934년 세워졌다고 한다.

야스쿠니 신사의 건축물은 모두 이세신궁을 본땄다.


들어간다


목조의 거대한 문


황금빛으로 천황의 국화문장이 박혀있다.


신문 안쪽


안쪽은 조용하다.

벚나무가 가득해 일본에서는 사쿠라 명소 정도로 여겨진다.


배전 앞에는 나무로 된 도리이가 서 있다.

이 도리이는 원래 대만의 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이후 다시 세우면서 일본산으로 바뀌었다.


청동등롱


중문 도리이 앞 하승표목


여기서는 누구나 자동차에서 내려야 한다.


도리이가 중문을 대신한다.


배전 

1901년 세워진 건물로 뒤편에 본전과 영새부봉안전이 있다.


일반인은 갈 수 없는 본전

1872년 지은 것이다.


본전 뒤에는 1972년 지은 영새부봉안전이 있다.

야스쿠니에는 위패나 유골을 안치하지 않는다. 대신 영새부라는 명단에 이름을 올리는데 이 영새부가 신체 역할을 한다. 영새부에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한 자나 군속인 자, 총독부 직원 등은 누구나 이름을 올릴 수 있기 때문에 지금도 합사는 계속되고 있다. 신체로 모시는 거울 앞에서 영새부에 이름을 적는 합사제를 지내면 합사가 완료된다. 한 번 영새부에 적은 이름은 삭제될 수 없으며 심지어 실수가 있거나, 당사자가 알고 보니 살아있어도 지울 수 없다. 어차피 죽으면 합사될 거잖아 하는... 

한국, 대만, 중국인 등 강제 징병자가 삭제를 요구하는 일이 많고, 심지어 기독교도인 일본인도 삭제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고


배전 정면에는 천황가의 휘장이 걸려있다.

정작 현 천황과 황태자는 매우 싫어한다.


합사인 이들은 다음 사건으로 숨진 이들이다.

유신지사(유신 이전 죽은 요시다 쇼인, 사카모토 료마, 타카스기 신사쿠, 나카오카 신타로, 타케치 한페이타, 하시모토 사나이, 오무라 마스지로 등 포함), 메이지유신 및 무진전쟁(보신전쟁, 창의대, 신센구미 등 막부측 미포함), 서남전쟁(세이난전쟁, 사이고 다카모리 등 유신에 참여했으나 사츠마에서 반란 일으킨 자들 불포함), 대만침략(대만출병), 운요호사건(강화도사건 2명), 임오군란, 갑신정변(경성사변), 러일전쟁, 의화단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청산리전투(11명), 제남사건(5.3운동 중 제남에서 벌어진 일본군과 중국국민군의 충돌), 우서사건(일본군에 의한 대만 원주민 학살), 나가무라 대위사건(일본군이 동북군벌이 조선인을 박해한다는 이유로 장학량군과 충돌한 사건), 9.18사건(만주사변), 중일전쟁(지나사변), 태평양전쟁(213만 3915명),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명단만 봐도 대부분 침략으로 인한 전사자다. 거기에 1978년 제6대 궁사로 취임한 마츠다이라 나가요시가 A급 전범 14명을 전격 합사하면서 더욱 고약해졌다. B, C급 전범 중에서도 나쁜 놈이 있고 억울한 이가 있지만 A급 전범은 말 그대로 2차 대전의 주범들이다. 유골조차 바다에 뿌려버린 이놈들이 합사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마츠다이라 나가요시는 에도막부가의 후손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2남인 유키 히데야스의 후손들이 번주로 있는 후쿠이번의 후손이다. 삼촌은 초대 야스쿠니회의 회장이자 오와리 도쿠가와가의 당주이기도 하다. 

  

합사 대상자는 다음과 같다.

유신지사의 경우 아무리 유명한 이도 한번이라도 역적이 된 경우 불가하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대표적인 경우. 군인의 경우 전사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도고 헤이하치로 같은 유명인사도 전몰자가 아니라서 합사되지 않는다. 철저히 천황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공무 중에 병사하거나 부상이 악화되어 죽은 자와 전후 소련, 중국 등에 억류되어 미귀환한 자나 실종자는 합사대상자다. 그리고 어이없게도 극동군사재판에 의해 사형된 자는 ABC급 전범 모두 합사 대상자이다. 즉 전쟁책임을 진 자도 쇼와순난자라고 하며 전사한 자로 친다...

군인이 아닌 사람 중에는 다음 이들이 들어간다.

만주개척단원, 만주개척청년의용대원, 오키나와전투 당시 희생당한 일반인, 남양과 만주개발요원, 해상어업감시원, 국가총동원법에 의해 징집당한(협력이라고 되어 있다) 학도병, 징용공, 여자정신대원, 보국대원, 일본적십자사간호원 중 전사자, 선박운영회의 승무원 중 죽은 자. 국민의용대원 중 죽은 자, 방공업무 중 죽은 수방단(즉 각종 공습으로 죽은 자), 아와마루사건(소련에 억류된 민간인을 일본으로 귀환시키다가 미 해군에 의해 공격당해 침몰한 사건) 희생자, 오키나와 전투 당시 피난가다 죽은 어린이들, 관동국, 조선총독부, 대만총독부, 카라후토청, 남양청 직원

국민총동원법의 희생자들이 눈에 띈다. 이들이 전범이랑 같이 있다니...


본전으로 통하는 문


참집전


거대하다


한쪽에는 노무대가 있다.


조용한 노무대


신에게 바치는 노를 행하는 곳


이제 드디어 우익의 성지, 야스쿠니의 박물관인 유슈칸으로 간다.